0살부터 슈퍼스타 1053화
【P.37】
『마을버스에 탄 한준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까마귀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가고 나뭇가지에도 새까만 까마귀들이 앉아 까악까악 울어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분 나쁠 법도 하지만 한준서에게는 그립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까마귀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을, 오계리.
지금은 중학교 2학년인 한준서가 외할아버지와 함께 10살까지 살았던 마을이었다.
덜컹-
하고 낡은 마을버스가 버스정류장에 멈추어 섰다.
“감사합니다.”
한준서는 버스 기사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가방을 들고 마을버스에서 내렸다.
[오계리]
하고 적힌 버스 표지판이 있는 오래된 버스정류장이 참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한준서는 깔끔하고 깨끗한 서울의 버스정류장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낡은 버스정류장과 외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이 농사짓는 논과 밭, 그리고 어렸을 때 뛰어놀았던 산을 바라보던 한준서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5월이라서 그런지 걷는 길을 따라 여러 들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주변을 꽃 화분으로 장식해 놓는 서울도 좋았지만, 한준서는 이런 들꽃이 더 친근하고 편안했다.
무거웠던 발걸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한준서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외할아버지의 밭으로 향했다.
집이 아니라 밭으로 간 건 이 시간이면 외할아버지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
“준서야? 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
갑작스럽게 나타난 손자에 최씨 영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반가운 듯 농사일로 조금 지쳤던 얼굴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한준서가 얼른 달려가 외할아버지를 껴안았다. 흙먼지가 한준서의 옷에도 잔뜩 묻어났다.
“옷 다 버려.”
“빨면 되지!”
하면서 히히 웃는 손자에 최씨 영감 또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준서를 꼭 껴안은 최씨 영감이 이내 포옹을 풀고 한준서를 바라보았다. 통통한 책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는 어쩌고?”
“그…… 방, 방학이야!”
중학교 교육과정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여름이 되려면 멀었다는 걸 최씨 영감도 알고 있었다.
최씨 영감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딸과 사위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한준서는 혼자서 온 모양이었다. 이제 중학생인 손자는 서울부터 여기까지 먼 거리를 홀로 온 것 같았다.
최씨 영감은 어렸던 한준서를 두고 떠났던 제 딸을 떠올렸다. 한준서가 10살이 될 때까지 연락 하나 없었던 사위도.
빚 때문이었던가 일 때문이었던가.
뭐라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기억나진 않았다. 진실이었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제 어미가 떠나는 걸 아는지 으앙으앙 울던 어린 손자의 얼굴만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최씨 영감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잘됐네. 푹 쉬다 가, 우리 준서. 할아버지가 맛있는 거 해줄게.”
“……응.”
그 따뜻한 말에 한준서는 울 것 같은 얼굴을 숙이며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커다란 고함과 날카로운 말들에 오들오들 떨던 자신의 모습이 마치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 마무리만 하고 갈 거니까, 집에 가 있어.”
“아니야! 나도 도와줄게!”
한준서가 오늘 아침 마구잡이로 옷을 집어넣었던 책가방을 땅바닥에 두고 일을 시작하려는 외할아버지 옆에 붙었다.
몇 년 전, 재결합한 엄마 아빠와 서울로 떠나기 전에도 한준서는 고사리손으로 외할아버지의 밭일을 도왔었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물론 도움은 전혀 안 됐지만.
그래도 중학생이 된 지금은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하면 되지?”
“그래. 그래.”
외할아버지의 낮은 웃음소리와 보드라운 흙,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까지.
정말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 느껴졌다.
일찍 밭일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길.
한준서는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노인들밖에 없는 오계리가 시끌벅적하다는 걸 깨달았다. 낯선 사람들도 보였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할아버지?”
“서울에서 영화 촬영하러 왔대.”
영화 촬영.
보통이라면 궁금할 법도 했지만, 한준서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중학교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걸 구경한 적도 있었고, 자신의 일이 가장 크고 중요한 사춘기 소년이었으니까.
그렇게 잠시 영화 촬영 온 사람들을 바라보던 한준서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건너뛴 점심 겸 간식을 먹고 집을 나왔다. 뒤로 외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른 척했다.
“최씨 손주 아녀?”
“준서야, 놀러 온 거야?”
“네. 안녕하세요.”
오계리 노인들에게 인사한 한준서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화 촬영하러 온 사람들을 바라보다 이내 산으로 향했다. 언제나 변함없는 산과 어렸던 자신이 여기저기 숨겨둔 나뭇가지나 돌멩이 같은 장난감들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산에서 놀다가 돌아오니, 외할아버지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준서가 얼른 씻고 가서 도왔다. 손주가 왔다고 이것저것 잔뜩 준비한 외할아버지의 모습에 한준서가 활짝 웃었다.
“잘 먹겠습니다!”
든든하게 밥을 먹고 난 후에는 외할아버지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다.
최씨 영감은 그 이야기 안에 제 딸과 사위의 이야기가 없는 것과 한준서의 친구들 이야기가 없는 것이 굉장히 신경 쓰였지만, 그저 웃으며 한준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오늘 하루 많이 피곤했던 한준서는 몰려오는 눈을 감았다.
외할아버지의 집 냄새, 익숙한 이불의 감촉, 따뜻한 외할아버지의 손까지. 마음 편하게 잠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찔끔.
눈물이 나온 것도 모르고 한준서는 잠에 빠져들었다.
최씨 영감은 그저 조용히 그런 손자를 토닥여주었다.
다음 날.
새로운 차량들이 오계리로 쏙쏙 들어왔다. 아마 새로운 스태프나 배우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걸 잠시 바라보던 한준서는 이내 외할아버지를 따라 밭으로 향했다.
잠깐 밭일을 하다가 이제 괜찮다며 놀러 가라는 외할아버지의 말에 데굴 눈을 굴린 한준서가 씩 웃고는 옷에 잔뜩 묻은 흙을 털었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오계리에 와서 좋으면서도 지금까지의 일과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어 한준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사춘기는 소년의 감정을 더욱 들쑥날쑥하게 만들었다.
그런 소년을 보며 오계리 노인들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산에서 실컷 놀다 온 한준서는 외할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이렇게 지내니 몸과 마음이 아주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또 하루가 지났다.
“준서야. 오늘은 일할 거 없으니까 밭에 안 와도 돼.”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외할아버지에 한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서낭당에 가야겠다.”
밥상을 치우고, 한준서는 서낭당으로 향했다.
어렸을 때는 알록달록한 천들이 달려있는 이 커다란 나무가 조금 무섭기도 했는데, 지금은 어쩐지 조금 마음이 편한 것 같기도 했다.
한준서는 어렸을 때 노인들이 하던 것을 떠올리며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재결합한 지 2주 만에 다시 싸우기 시작한 엄마 아빠나 자신을 괴롭히는 반 학생들에 대한 원망이나 저주 대신, 거대한 행복 대신, 작은 평범을 기도했다.
그러다 사춘기의 민망함이 불쑥 솟아났다.
“음.”
볼을 긁적인 한준서는 산에 오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곧 부모님이 오든 자신이 서울로 가든 오계리를 떠나야 할 텐데, 더 많이 마을과 산을 둘러보고 싶었다. 기억하고 싶었다.
산길을 따라 오르던 한준서는 길이 아닌 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어렸을 때는 못 갔지만 중2나 된 지금은 혼자라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한준서는 거침없이 풀숲으로 발을 내디뎠다. 마치 모험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들뜬 마음이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준서는 미처 발아래 구덩이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깊은 구덩이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다리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균형을 잃은 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엉덩이와 등과 팔로도 아픔이 느껴졌다. 뇌가 흔들린 듯 어지러웠다.
“으으…….”
흙투성이가 된 한준서가 아픔이 섞인 신음을 뱉어냈다. 전체적으로 안 아픈 곳이 없었는데, 특히 한쪽 다리가 동강이 난 것처럼 아파왔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 흐릿한 시야로 기형적으로 꺾인 다리가 보였다.
덜컥, 겁이 났다.
“하…… 할아버지…….”
실낱같은 한준서의 목소리가 제 유일한 보호자를 찾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살, 살려주세요……!”
온몸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참고 한준서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소리를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살려……!”
한준서는 계속 외쳤으나 아무도 오지 않는 풀숲에서 누가 나타날 리가 만무했다.
힘이 빠진다.
시야도 더욱 흐릿해졌다.
“제발…….”
제발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훌쩍훌쩍 울던 한준서는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건…….”
【P.37】를 읽은 서준이 눈을 크게 떴다.
서준은 까마귀가 많은 마을, 오계리를 알고 있었다.
알록달록 천이 달린 서낭당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구덩이에 빠진 중학생 소년도.
어렸을 적.
이지석과 처음 만났던 영화 [악령] 촬영 당시.
서준은 김희상과 함께 서낭당을 구경하고 산에 올랐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능력을 발휘해 멧돼지를 잡는 구덩이에 빠져 있던 중학생 소년을 발견했었다.
그리고 일찍 구조된 그 중학생 소년은 인터넷에 글을 올렸고 인터뷰도 했었다. 후유증도 없을 거라고 했다.
그걸 보며 뿌듯했었는데.
“그 형이…… 한준서 배우였다고?”
세상에.
김수한과 함께 어린이 연극 [봄]을 보러왔던 학생이었다는 것도, 영화 [이스케이프]에 좀비로 출연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건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
입을 벙긋거리던 서준이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복잡했다.
중학생 한준서를 구했던 건 후회하지 않지만, 그때 조금이라도 한준서와 접촉했었다가는 큰일이 났을 테니까.
‘그때 5살이었는데.’
하마터면 겨우 5년밖에 못 살 뻔했다.
십수 년이 흘러서야 알게 된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꽃길을 걸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땅속에 지뢰들이 파묻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서준이 불현듯 떠오른 사실에 몸을 멈칫했다.
[첫 생의 책]의 세계에는 ‘이서준’이 없었다.
‘한준서’를 서준이 구해주었다면,
‘첫 생’은 누가 그를 구해주었나.
“미밍!”
서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미밍이 건네준 다음 페이지를 받아 읽어 내려갔다.
【P.40】
『중학생 한준서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깁스를 한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바라보았다. 시끄러운 6인실이었지만 한준서가 있는 침대만은 유난히 조용했다.
한준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그러지 말걸.’
풀숲으로 가지 말걸.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한준서는 다시 눈을 떠 서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깁스한 오른쪽 다리를 바라보았다.
멧돼지 구덩이에 빠진 한준서를 발견한 것은 외할아버지였다.
늦게까지 보이지 않는 손주를 찾다가 혹시나 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렇게 발견한 한준서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체온도 많이 떨어져 있었고 다친 곳도 많았다. 차가워진 살갗에 거의 들리지 않는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꺾인 오른쪽 다리가 큰일이었다.
긴급수술에 들어갔다.
외할아버지가 서울에 연락했으나 수술이 끝나고 한준서가 정신을 차린 후에서야 온 건 다시 이혼한 제 딸뿐이었다.
그렇게 온 엄마도 외할아버지와 잠깐 싸우고는 떠났다.
“평생 다리를 전다고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잘 돌봤어야죠!”
그때 자는 척을 하고 있던 한준서는 제가 평생 다리를 절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안하다…… 준서야…….”
깁스한 준서의 오른 다리를 매만지며 외할아버지는 멧돼지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불쑥 원망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아니다.
그건 길이 아닌 곳으로 향했던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겨우 한 번 실수한 것 가지고 평생 다리를 전다는 건 너무 하지 않나.
‘그냥 평범하게 살길 바랐을 뿐인데.’
중학생 한준서는 외할아버지가 없을 때마다 소리 없이 엉엉 울었다.
그래도,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건 다시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것이었고, 또 회복 때문에 올해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1년 유급해야겠지만 말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