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048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새삼 깨닫게 된 안다호의 진심에 서준은 그저 [이서준의 책]에 적힌 ‘안다호’라는 이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형인데, 자신이 쓰러진 지금 어떤 마음일지.
서준은 다시 한번 빨리, 그리고 무사히 현실로 돌아가기로 다짐하며 아직 빛나고 있는 다음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P.1032】
『“재밌네.”
이걸로 하자!
이제 첫 대본으로 아직 남아 있는 대본들이 많았지만, 서준은 활짝 웃으며 다른 때와 변함없이 빠른 결정을 내렸다.
서준은 다시 페이지를 넘겨 대본의 맨 앞장을 살펴보았다. 미처 보지 못했던 정보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어떤 감독이고 어떤 작가인지, 그리고 제작사가 정해졌는지, 정해졌다면 어떤 제작사인지 궁금했다.
“오!”
그리고 반가운 이름들을 발견했다.
[감독: 김수한]
[제작사: 화 필름]
(중략)
“그거 할 것 같았어. 내가 봐도 재미있더라고. 안 이사님도 추천하셨고.”
“다호 형이요?”
“응. 그게 이틀 전에 들어온 대본인데 제일 먼저 검토하라고 하셨거든. 네 차기작은 이걸 하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밀린 대본들이 많은데도 김수한 감독의 대본부터 검토한 1팀이었다.
“뭐, 결정은 서준이 네가 하는 거니까 더 말씀은 안 하셨지만.”』
“수한이 형 작품도…….”
봐야 하는 대본이 많은데도 안다호가 추천한, 서준이 손이 닿기 쉽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작품.
이것 또한 [(선/제작)황금 인어 파르비타의 나침반]가 가리킨, 이서준이 즐겁게 오래오래 배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일 터였다.
“물론 이때는 한준서 배우를 만나야 했으니까, 이전과는 달랐던 거지?”
서준의 말에 파르비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책을 읽어봤으니 알겠지만, 서준 너는 언제고 한준서랑 마주칠 운명이었거든. 그게 같은 영혼을 지닌 탓인지 ‘무한환생’의 능력이 서로를 끌어당긴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근처까지도 왔었고.”
그에 서준은 김수한과 최소영, 김종호와 강태영, 이지석과 박시영, 그리고 화 필름 등을 떠올렸다.
사냥감을 몰아가는 것처럼 천천히 서준에게로 다가왔던 한준서.
‘물론 본인은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 좁은 연예계에서 지금까지 서준과 한준서가 만나지 않았던 것이 굉장한 일이었다.
‘다 능력과 다호 형 덕분이지.’
설마 내 죽음이 이렇게 가까웠고 갑작스러웠을 줄이야.
‘아직 안 죽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죽을 생각은 없었다.
삶의 의지로 눈을 번뜩이는, ‘죽어가고 있는’ 서준을 보며 파르비타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지금이어야만 했어. 너무 일찍 만났다면 무한환생의 힘이 강해서 이렇게 너와 우리가 만나지도 못하고 죽었을 거고, 너무 늦게 만났다면 생의 도서관의 힘이 강해서 무한환생이 완전히 사라졌을 테니까.”
[무한환생]은 완전히 사라지면 안 된다.
앞으로 환생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서준’의 삶을 책으로 써줄 만큼의 조그마한 능력은 남아 있어야 했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지.”
파르비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준은 빛나고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윗부분만 붙어있는 그 페이지는 서준이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들이 적혀있는, 첫 생 한준서와 만난 장면이 적혀 있는 [이서준의 책]의 마지막 페이지이기도 했다.
【P.1034】
『작게 웃은 서준이 은색의 나침반에 선기를 가득 불어넣으며 물었다.
“근데 다호 형, 다른 소속사 배우를 회사 이사실에서 만나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이번 약속장소는 특이하게도 코코아엔터 안다호 이사 사무실이었다.
서준의 물음에 안다호가 서준이 마실 오렌지주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조사하다 보니까 어떤 배우인지 궁금해서.” (하략)』
생각해 보니 약속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니고 다호 형의 사무실이었던 것도 나침반이 이끈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때라면 프라이빗룸이 있는 식당이나 카페, 직원들의 접근이 쉬운 회의실 같은 곳에서 만났을 텐데.’
만약 그런 공개된 장소나 낯선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서준이 쓰러졌다면 아마 난리가 났을 거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그러니 같은 회사 직원이라도 오기 힘든 코코아엔터 이사실이 가장 적격이었겠지.’
서준이 무사히 살아난다면 현실 상황도 중요하니까 말이다.
‘뭐, 일단 쓰러졌다는 것부터가 큰일이긴 하지만.’
서준이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빨리 돌아간다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생일 전날이라서 다행이다.’
생일날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얼른 돌아가서 놀랐을 다호 형과 태우 형, 엄마 아빠(분명히 다호 형이 바로 연락했을 거다.)을 안심시키고, 새싹들과 함께 20주년 생일을 맞이해야지.
‘그러고 보니, 얼마나 지났지?’
시간의 흐름은 현실과 생의 도서관이 같았다.
서준이 7시간을 자면 생의 도서관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도 7시간이라는 거였다.
얼마나 침대에 누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전생들과 만나고 집필실로 들어오고 이야기를 듣고 삶의 책을 읽었으니…….
“아직은…… 괜찮으려나.”
대충 현실 시간을 셈해보던 서준은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파르비타에게 물었다.
“파르비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조금 이따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거야.”
매번 아직 멀었다고 이야기하던 파르비타가 전해준 좋은 소식에 서준의 얼굴이 밝아졌다.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미밍!”
서준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던 미밍도 기뻐했다.
“이제 슬슬 한준서의 책이 현실을 따라잡기 시작했거든.”
……!
그 말에 화색이던 서준의 표정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조금전까지 파르비타는 깃털 펜이 언제쯤 ‘한준서의 과거’를 다 쓰고 ‘한준서의 현실’을 적기 시작할까,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삶의 책은 현실과 같이 쓰인다고 했었지?”
서준이 그사이 크기가 커진 종이 소용돌이와 집필대 위 [한준서의 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한준서 배우는 현실을 살고 있고.”
그렇다는 이야기는 저기에 서준이 쓰러진 후의 상황도 적힐 예정이라는 거였다. 아니, 지금 깃털 펜이 적고 있을지도 몰랐다.
“맞아. 읽어볼래?”
파르비타의 말에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집필대 쪽으로 향했다.
자신이 쓰러진 후의 상황이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와.’
엄마 아빠와 나눴던 마지막 인사.
‘……준아!’
하고 부르던 누군가의 목소리.
전자는 기억이 생생해서, 후자는 기억이 나질 않아서.
서준은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들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
“……시간은 괜찮아?”
“응. 괜찮아. 그 정도 시간은 있어.”
파르비타의 말에 서준은 안심하며 집필대의 깃털 펜이 있는 쪽에 섰다.
사각사각사각-
새하얀 깃털 펜이 빠르게, 그러나 단정한 글씨체로 마찬가지로 새하얀 종이에 글자와 단어와 문장과 단락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가 찍혔다.
깃털 펜이 옆으로 살짝 비키자 글자로 가득 찬 종이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집필대에 새로운 종이가 생겨났다. 깃털 펜은 익숙하게 종이 맨 위쪽으로 올라가 마지막 문장의 뒤를 이어 새로운 글자들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서준은 허공에 떠올라 종이 소용돌이에 합류하려던, 갓 완성된 종이를 잡았다.
그건 서준이 쓰러지던 순간이 적혀 있는 페이지였다.
【P.1034】
『-한준서! 도착했어?
휴대폰 건너 김수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어쩐지 자신보다 더 신나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나갈 준비를 하던 한준서가 웃고 말았다.
“이제 나가려던 참이야.”
-일찍 가서 코코아엔터 구경할 줄 알았더니? 여기가 날 탈락시킨 회사구나! 하고 이를 갈면서 살펴봐야지!
“아차, 그럴 걸 그랬다.”
장난기 가득한 김수한의 말에 한준서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다 내 덕분인 줄 알아! 내 작품 아니었으면 서준이랑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거 더 오래 걸렸을걸.
뻐기듯 말하는 김수한에 한준서가 그래, 그래 하고 맞장구쳐 줬다.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만나기 힘들었지.’
슈퍼스타라서 그런가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꼭 만나야지!’ 하는 생각으로 찾아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새롭게 작품을 들어갈 때마다 화 필름에 갈 때마다 배우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이서준이 올 것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 한껏 기대하던 한준서였다.
물론 이서준은 근래 들어 할리우드 작품만 촬영했고 대학 생활 때문에 화 필름에서 보지 못했고, 배우들 모임에는 일이 있어서 못 왔지만 말이다.
‘군대도 갔었지.’
그러니 만날 수 있을 리가.
한준서가 한숨을 내뱉듯 웃다가 눈을 빛냈다.
그래도 드디어 이서준을 만나러 간다.
그것도 같이 촬영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서준이랑 친해지고 싶으면 작품 이야기를 하면 돼. 이스케이프에 좀비로 나왔던 거 이야기하고 ‘민들레’ 이야기도 하고 연극 이야기도 하고…… 그러다 사적인 이야기도 하는 거지!
김수한이 조언이라면서 이것저것 이야기해 줬지만 새싹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다. 아니, 팬이 아니더라도 이서준에 대해 조금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이야기지 않을까.
그래도 한준서는 처음 아는 사실인 듯 귀를 기울였다. 김수한 덕분에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중략)
한준서는 가까워지는 10층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기가 코코아엔터…….”
어쩌면 한준서가 소속됐을지도 모르는 회사.
물론 지금 소속되어 있는 액터스도 좋은 회사지만,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다 보니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오는 것 같았다.
“우와! 여기가 이서준 배우님 회사!”
운전대를 잡은 매니저 권문해도 그랬다.
“건물부터 뭔가 아우라가 보이는 것 같지 않아요, 형?”
“그러게.”
한껏 들뜬 배우와 매니저를 지하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태우가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이서준 배우의 매니저 최태우입니다.”
이서준 배우의 매니저라니!
남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고, 천만 배우와 그의 매니저가 생각했다.
-!
인사를 하던 중 권문해의 휴대폰이 울렸다. 꽤 중요한 전화인 듯 권문해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먼저 올라가 계시면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최태우가 10층으로 오라고 이야기하고는 한준서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런데 10층이라면?”
10층 건물 맨 끝 아닌가.
보통 그런 곳은 사장님이나 높은 분들이 쓰시고는 했는데…….
“네. 안다호 이사님의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다호 이사님…… 사무실이요.”
첫 만남부터 최종 보스를 만나는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새싹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안다호 이사님’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이 되면서도 들떴다.
이서준을 어렸을 때부터 돌봐온 첫 매니저 아닌가.
“안다호 이사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어떤 분이신가요?”
“멋진 분이시죠. 작품 보는 눈도 좋으시고 이서준 배우와 다른 배우들 서포트도 빈틈없으십니다. 저도 많이 배우고 있는데,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어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최태우와 한준서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10층에 도착했다.
한준서는 다시금 바짝 긴장했다.
드디어.
이서준 배우를 만난다.
심장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숨도 가빠지는 것 같아 진정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똑똑-
앞장서서 걸어가던 최태우가 안다호 이사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온몸을 울리는 것 같았다.
문이 열렸다.
그곳에 화면으로 봐왔던, 언젠가 꼭 만나고 싶었던 남자가 서 있었다. 어릴 때의 얼굴이 남아 있으면서도 정말 잘 자란 얼굴이 보였다.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서준입니다. 회사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반가움에 한준서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래서 대답이 조금 늦게 나왔다.
“아, 아닙니다. 반갑습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그걸 깨닫지 못한 한준서는 얼른 이서준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배우 한준서입니다.”
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이서준을 만나면 꼭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싶었다.
마주 잡은 손은 단단하며 따뜻했다.
‘아니, 조금 차가운가?’
싶을 때,
비틀-
반듯하게 서 있던 이서준의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기울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듯 무릎이 굽혀졌고 마주 잡고 있던 손도 힘이 풀려 단단함이 사라졌다. 환하게 웃고 있던 얼굴도 힘없이 숙여져 보이지 않았다.
……어? 어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그 상황이,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한준서의 눈에 담겼다.
“! 서준아!”
안다호의 부름에도 이서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완전히 쓰러졌다. 앞에 있던 한준서가 반사적으로 손을 꽉 잡아 쓰러지는 이서준의 몸을 붙잡았다.
일말의 힘도 없이 축 늘어진 이서준의 몸에, 한준서는 저도 모르게 손을 조금 떨고 말았다.』
잠시 조용히 그 페이지를 내려다보던 서준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고는, 새롭게 완성된 페이지를 낚아채 읽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쓰러진 서준은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P.1035】
『안다호와 최태우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서준을 붙잡고 있는 한준서에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