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046화
서준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한준서’를 만나면 ‘이서준’이 죽는다.
그런데 하필 태우 형이 과로로 쓰러진 바람에 가지 못했던 모임에 한준서 배우가 있었던 건,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겠지?’
일부러 그 타이밍에 태우 형을 과로로 쓰러지게 만드는 건 힘든 일이니까.
그때는 태우 형이 의욕이 넘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 다른 것들도 마음에 걸렸다.
“미밍!”
“아, 고마워.”
서준은 얼른 미밍이 건네준 종이를 받아 읽어 내려갔다.
【P.790】
『“준서 형! 여기 이번에 들어온 작품들이에요!”
매니저 권문해가 활짝 웃으며 대본 더미를 들고 한준서의 집으로 들어왔다.
SBC 드라마 [새벽]이 용두용미로 끝난 덕분에 주인공을 연기했던 한준서도 확실히 대중에게 얼굴을 알릴 수 있었다.
스타라고 불릴 정도로.
“음주운전 기사 떴을 때는 진짜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말이에요.”
“그러게. 승원이 형이 잘해주셨지.”
한준서가 웃으며 권문해에게 마실 것을 건네주고는 권문해가 가져온 대본들을 읽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팀에서 한 번 거른 건데, 여기 마음에 드는 게 없으시면 거른 것도 들고 와 볼게요, 형.”
“잘 골라주셨을 것 같아.”
지금까지 액터스 2팀에서 보내준 대본들 중 실망스러운 작품은 없었다. 장르의 폭도 넓었고 캐릭터 또한 이미지가 고정되지 않게 다양했다. 그리고 한준서가 들고가는 작품들도 신중하게 보고 의견을 말해주기도 했다.
‘좋은 곳이야.’
한준서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본을 살폈다. 권문해가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이건 MBS 드라마인데 제작비가 엄청 나대요. 작가랑 피디도 시청률이 보장된 분들이라서 엄청 기대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한준서는 눈으로 대본을 훑어보면서도 권문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본만 봐도 좋은 작품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작품과 관련된 사항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감독과 작가가 사이가 나빠서 드라마가 용두사미로 끝날 수도 있었고, 제작비가 부족해서 엎어질 수도 있을 테니까.
‘배우의 음주운전 같은 건 못 피하겠지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해 한준서가 쓰게 웃었다.
“다른 작품들도 재미있어요. 아, 이건 KBC 드라마인데요……”
권문해는 대본을 읽는 한준서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그러면서도 관련된 정보를 알 수 있게 틈틈이 설명해 주었다.
한준서는 몇 번이고 대본을 읽고 난 후 신중히 출연을 결정하는 타입이라, 지금은 좀 시끄러워도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한준서가 대본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 영화화하는 작품이에요. 원작은 소설인데. 형도 아시죠? 운명이요.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잖아요.”
모를 리가.
한준서가 반갑다는 웃으며 [운명]이라고 적힌 대본을 바라보았다.
“송문석 작가님 소설이잖아. 나도 엄청 재미있게 봤는데. 연극 배심원에도 출연했었고. 책도 있어.”
“아, 그랬죠! 잠깐 잊고 있었어요.”
‘으아아아, 내가 형 매니저인데……!’ 하고 자책하는 권문해에 한준서가 웃으며 말했다.
“뭐, 7년 전 일이니까. 단역이기도 했고.”
그런데 이렇게 다시 송문석 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되다니, 신기했다.
팔랑-
대본을 넘겨 출연하는 인물들에 대해 읽는 한준서에게 빠르게 진정한 권문해가 설명했다.
“형이 주인공을 해도 정말 좋을 것 같기는 한데, 듣기로는 이서준 배우한테도 대본이 갔다고 하더라고요.”
“확실히 소설을 읽을 때도 서준이가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어.”
좋은 작품을 보면 저도 모르게 영상화를 생각하고는 했다.
대중들이 그러하듯, 어떤 배우가 이 캐릭터에 어울릴까? 하고 가상 캐스팅도 한 번씩 해보고.
[운명]의 주인공은 이서준이 연기하면 정말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형이랑 이서준 배우가 같이 촬영하는 날이 오겠네요!”
“그거야 대본 읽어보고 결정해야지. ……그래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한준서 또한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운명]의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하략)』
[운명]
서준도 그 작품을 알고 있었다.
천만 영화라서 아는 것도 아니었고, 원작이 베스트셀러라서 아는 것도 아니었다.
서준도 그 작품에 출연할 뻔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히…….’
서준은 [뉴 이클립스]를 선택할 당시, 그 아래에 놓여 있던 [운명]을 기억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대본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도.
만약 [운명]을 먼저 읽었더라면, 분명히 [운명]에 출연했을 터였다.
‘그러면 한준서 배우랑 만났겠지.’
그리고 이번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서준의 생각이 깊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
[운명]의 대본은 [뉴 이클립스]의 아래에 있었으니까.
서준이 먼저 [뉴 이클립스]를 읽었으니까.
그 우연 덕분에 서준은 한준서와의 만남을 피할 수 있었다.
이번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걸 미래로 미룰 수 있었다.
‘또…… 우연.’
음, 하고 침음성을 내뱉은 서준은 미밍이 건네주는 페이지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P.807】
『“정말 감사합니다.”
무대 위 한준서가 벅찬 얼굴로 꾸벅 인사했다.
“‘새벽’은 저에게 정말 선물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좋은 감독님과 작가님을 만나게 해주었고, 훌륭한 배우분들을 만나게 해주었으며, 멋진 스태프들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맡은 주인공이 이 ‘새벽’의 주인공이라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하략)』
SBC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한준서의 모습과,
【P.816】
『“카메오?”
되묻는 이지석에, 한준서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 괜찮으시다면요.”
제발……!
어딘가에서 감독님과 원작자님, 그리고 배우들과 스태프들, 제작사 직원들이 응원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으음.”
“뭐 한 번 출연해도 괜찮지 않아? 작품도 괜찮고.”
함께 식사를 하던 김종호가 거들었다. 연극 [배심원]으로 원작자 송문석과 안면 있는 사이라 도운 것이었다.
“촬영 일정도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
잠시 생각하던 이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오라면 그렇게 바쁠 것 같지도 않고. 하지, 뭐.”
“감사합니다, 형!” (하략)』
엄청나게 바빠질 미래를 모르는 이지석이 카메오로 출연하겠다고 말하는 장면,
【P.837】
『(상략) 이서준 캐스팅 불발로 주인공 자리는 조연으로 섭외된 한준서가 맡게 되었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삼십 대 배우가 이십 대 역을 맡는 게 영 없는 일도 아니었고, 특히 메가폰을 잡은 감독이 한준서의 연기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떠십니까, 작가님.”
감독은 원작자 송문석까지 데려와서 한준서의 연기를 보여줄 정도로 한준서를, 한준서의 연기를 좋아했다.
“으음…….”
“한 배우 연기 잘하죠? 근데 분위기가 살짝, 아주 살짝 주인공이랑은 느낌이 달라서 말입니다.”
송문석이 대본 리딩을 하는 한준서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주인공에 대해서 자신만큼이나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한 한준서는 송문석의 마음에 쏙 드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조금만 수정하면 더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으음. 그렇긴 한데…….”
수정 ‘조금’이 정말 ‘조금’이 될까?
송문석의 머릿속에는 벌써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주인공 나이를요……?”
열심히 꼬드기던 감독까지도 놀랄 정도로.
“할까요, 말까요?”
“……으음.”
착착 진행되는 상황에 감독과 원작자는 고민했다.
주인공의 나이를 바꿔야 할 정도로, 한준서의 연기에 가치가 있을까.
감독의 요청으로 가끔 다 같이 모여 진행하게 된 대본리딩을 보며 감독과 원작자는 아주 깊이 고민했고.
그러다 결국.
“……합시다!”
주인공의 나이를 변경하기로 했다.
그렇게 수정된 대본을 받은 한준서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연기를 보고, 주인공의 나이까지 바꾸었다니. 배우에게 이만한 찬사도 없었다.
“정말……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대할게요. 한준서 배우. 한 배우라면 분명 잘 분석해 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송문석에 한준서가 믿음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 주인공의 나이가 수정되는 장면,
【P.948】
『“방금 찍은 사진 서준이랑 서준이 친구들한테 보여줘도 될까?”
하고 묻는 이지석에, 천만 달성 파티를 즐기고 있던 [운명]팀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이서준?!”
“이서준이라고요?!”
이서준의 친구, 박시영이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저 진짜 이서준 선배님 한번 뵙는 게 꿈이었어요, 선배님!”
“언제는 날 보는 게 꿈이었다며.”
“그건 이미 이뤘으니까요!”
한바탕 웃음소리가 퍼지고, 이지석이 이서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한준서도, 다른 배우들도 설레는 마음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서준입니다.
왁!
작은 휴대폰 화면으로 보이는 이서준의 모습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다. (하략)』
[운명]의 축하파티 때 장면까지 지나쳐,
【P.954】
『“준서 형 컨디션 괜찮아요?”
“응. 괜찮아.”
권문해가 운전하는 차에 오른 한준서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권문해가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준서를 바라보았다.
그에 한준서가 빙그레 웃었다.
“영화가 잘돼서 그런 건데 뭐. 나보다는 지석이 형이 고생이지.”
“그건 그래요. 카메오로 오셨는데.”
한준서와 권문해가 키득키득 웃었다.
올해 천만 관객을 기록한 [운명].
그 인기에 힘입어 [운명]에 출연한 배우들은 주연, 조연, 카메오할 것 없이 이곳저곳에 불려다니고 있었다.
특히, 주인공이었던 한준서가 바빴다.
방금도 예능 촬영을 하고 온 참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지 밤샘 촬영보다 더 힘든 것 같았다.
“옆에 보시면 제안 들어온 CF랑 예능 목록이 있을 거예요. 한번 살펴보고 알려주세요.”
“그래. 알았어.”
[운명]팀이 함께 출연하는 것, 한준서 혼자 출연하는 것.
의자에 등을 기대어 목록을 살펴보던 한준서가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거 재미있을 것 같던데. 섬섬생활.”
[섬섬생활]
출연진들이 섬에서 생활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들었는데, [운명] 팀이 출연해서 친한 사람들을 게스트로 부르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액터스에서 살짝 나왔었다.
어쩌면 이지석이나 박시영이 이서준을 부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그거 섭외 완료됐대요.”
“아, 그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서준과 같이 예능을 촬영해도 좋을 것 같다고 기대하던 한준서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권문해가 킬킬 웃었다.
“다른 예능들도 살펴봐요, 형. 이제 곧 이레귤러스가 개봉하니까 이서준 배우가 홍보한다고 출연할지도 모르잖아요.”
“이레귤러스는 홍보 안 해도 다 봐.”
묘하게 자랑스러워 보이는 한준서에 권문해가 ‘그건 그렇죠.’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싹, 한준서도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예능 목록을 살펴보았다.
‘어쩌면 문해의 말대로 이 안에 서준이가 나올 만한 예능이 있을지도 모르지.’
저도 모르게 조금 기대가 되었다. (하략)』
흥행한 영화 [운명] 덕분에 여러 예능에 출연하게 된 한준서의 모습까지, 도달했다.
서준은 손에 들린 페이지에 적힌 프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섬섬생활]
서준이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
그런데 거기서 또 한준서를 만날 뻔했다.
물론 서준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만약 이지석이나 박시영이 초대를 했다면 배우들과 지낸다는 말에, 섬에서의 생활이라는 말에 홀랑 넘어가 분명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서준이 먼저 [섬섬생활]을 하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것도 우연…….’
우연이 한 번이면 이해한다.
우연이 두 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연이 세 번이라면?
‘그건 더 이상 우연이 아니지.’
서준은 우연도 운명이 되게 하는 힘을 가진 능력을 알고 있었다.
[(선/제작)황금 인어 파르비타의 나침반]
서준이 고개를 들어 파르비타를 불렀다.
“파르비타.”
【P.954】를 끝으로 종이 사냥이 끝났는지, 집필대의 깃텔 펜이 써내려가는 문장을 읽고 있던 파르비타가 서준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응?”
“내가 지금까지 첫 생을 만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네 능력 덕분인 거야?”
“맞아.”
파르비타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안다호라는 인간 덕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