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045화
【P.744】
『액터스의 연습실.
한준서가 대본을 보고 있었다.
[새벽]
수십 수백 번을 봤던 대본의 표지인데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아마도 자신이 처음 맡게 된 주인공 역이라서 그런 거겠지.
물론, 주연이든 조연이든 엑스트라든.
한준서는 어떤 역이든지 최선을 다했고 다하고 다할 생각이었지만.
역시 주인공을 연기하는 건 특별할 기분이 들었다.
한준서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얼마나 좋은지, 때때로 이렇게 자신이 주연배우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실실 웃고 만다. 그러면 함께 있던 매니저 권문해도 따라 웃고는 해서 서로 웃음을 터뜨릴 때도 있었다.
행복하다.
정말 행복했다.
“그러니까 더 잘해야 해.”
자신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준 피디님과 작가님을 위해서도, 멋진 연기 보여주는 배우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촬영을 도와주는 제작진을 위해서도.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을 맡은 자신이 잘해야 했다.
다행히 SBC 드라마 [새벽]은 첫 방영부터 시청률이 잘 나오고 있었다.
한준서의 가족도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었고, 드라마 잘 봤다고 연락하는 사람도 많았다. 촬영장 분위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앞으로의 시청률도 이 정도로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아주 많이 높아지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하며 말하던 김수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감독인 친구도 그렇고, 최소영도 그렇고, 김종호와 강태영 등등. 지인들은 처음 주연을 맡게 된 한준서를 위해 이것저것 조언해 주었다.
한준서는 그 조언들을 떠올리며 최선을 다하기 위해 오늘도 연습에 집중했다.
“형! 준서 형! 이거 봤어요!?”
그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매니저 권문해였다.
다른 때에는 연습에 방해가 될까 봐 노크도 하고 한준서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던 권문해였는데, 오늘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 과격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뭔데? 무슨 일 있어?”
“이거요! 방금 기사 떴는데요!!”
권문해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한준서가 대본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받아 화면을 보았다.
[배우 조승환, 음주운전으로 전치 5주!]
낯익은 이름에 한준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조승환.
드라마 [새벽]에 출연하고 있는 조연 배우.
어제도 함께 촬영했었다.
조금 안하무인인 배우라고는 생각했지만, 음주운전이라니.
“이게…… 진짜야?”
“네! 지금 기사 뜨고 난리 났어요! 그래서 팀장님이 피디님한테 연락하고 계세요! 어쩌면…… 이번 주 휴방할지도 몰라요…….”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권문해에게 걱정을 끼치긴 싫었지만, 이번 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행복했던 것이 조금 전인데, 지금은 속이 답답했다.
“괜찮으세요, 형?”
권문해가 한준서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매니저가 된 권문해가 처음 맡게 된 것이 배우 한준서였다. 그래서 한준서가 이번 역을 맡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고 있었다. 또 얼마나 [새벽]을 좋아했는지도.
“……괜찮아.”
답답함에 마른 세수를 하던 한준서가 손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 막막함으로 어두웠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가라앉았던 표정도 의지로 반듯해졌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했다.
조승환이 맡은 캐릭터는 주연급은 아니라지만, 조연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걸 이대로 없애기는 어려운 일이니, 차라리 조승환을 대신할 배우를 찾는 것이 최선일 터였다.
“문해야. 팀장님이 피디님이랑 통화 중이시라고 했지?”
“네!”
피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출연한 배우의 소속사에 대신할 배우를 문의하고 있는 중일 터였다. 앞으로의 촬영 일정도 고쳐야 하고.
‘그럼 소속사 배우들은 팀장님께 맡기고…….’
한준서가 휴대폰을 들어 전화번호 목록을 살폈다.
엑스트라 때부터 지금까지 만나 온 연극, 영화, 드라마 배우들이 거기에 가득했다. 어쩌면 여기에 딱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지도 몰랐다.
“어, 형. 나 준선데.”
그렇게 주연배우도, 피디도, 소속사도 열심히 대체 배우를 찾고 있을 때.
“으아아아! 준서 형!”
바깥상황을 보러 갔던 권문해가 환호성 같은 비명을 지르며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와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이번에는 권문해의 표정이 밝았다.
“배우 찾았대요!”
“그래?!”
한준서의 표정도 밝아졌다.
연락하는 배우들마다 스케줄이 있거나 어려울 것 같다며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성격은 그래도 조승환이 꽤 연기를 잘했기 때문이었다.
“누군데?”
“코코아엔터의 배승원 배우시래요!”
한준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P.745】
『“안녕하십니까. 배승원입니다.”
“아이고, 배승원 배우! 어서 오세요!”
기합이 잔뜩 들어간 배승원과 기꺼이 도움을 주러 오신 은인을 대하는 듯한 피디와 촬영진의 태도에 [새벽] 촬영장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이제 휴방은 안 하겠죠.”
“그러게.”
다들 배승원을 보는 눈빛이 아주 촉촉했다. 물론 연기도 안 보고 이렇게 낙담하기는 일렀지만.
“코코아엔터잖아요. 코코아엔터.”
배승원의 소속사가 너무 믿음직했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배승원 배우님.”
“아닙니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많이 도와주십시오.”
한준서도 배승원과 인사를 나눴다.
어려운 곳에 와준 것에 정말 고마우면서도 어떤 배우이길래 코코아엔터에 들어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반짝이는 한준서의 눈빛에 배승원은 눈을 데굴 굴렸다. 나, 뭐 잘못했나?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아! 지금은 촬영에 집중해야지!’
딴생각 할 여유는 없었다.
다음 주까지 휴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벽]은 곧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5화 내용 중 조승환이 나왔던 부분만 찍을 예정이라 촬영의 중심은 배승원이 되었다.
“배승원 배우님, 잘하시네요.”
“그러게. 정말 대단하시네.”
권문해의 말에 한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에 권문해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단하다고 할 정도예요?”
“잘 봐봐. 어쩐지 익숙하지 않아?”
익숙?
권문해가 다시 촬영을 하고 있는 배승원을 바라보았다. 나름 배우의 매니저라서 연기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한준서나 다른 배우들처럼 보는 눈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준서의 말을 듣고 보니, 익숙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네요. 어디서 본 것 같고……?”
“조승환 배우가 생각나지 않아? 꼭 저렇게 연기했었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처음 보는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라면 낯설어야 했는데, 배승원이 연기하는 모습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마 시청자들이 이질감을 느끼게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조승환 배우처럼 연기하는 걸 거야.”
“와…… 그게 되는 거예요?”
“연습하신 거겠지.”
한준서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배승원이 얼마나 멋진 배우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계속 저렇게 연기하지는 않을 거야. 배승원 배우가 생각해 온 캐릭터로 천천히 바꿔 나가겠지. 지금도 봐봐. 조금 달라진 게 보이지?”
전혀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즐거워 보이는 한준서의 모습에 권문해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오히려 그걸 알아보는 한준서가 굉장해 보였다.
촬영 중 쉬는 시간.
갑작스럽게 투입된 배승원을 위해 피디는 간간이 쉬는 시간을 가지며 기존의 배우들에게 배승원을 도와주길 부탁했다.
한준서와 배우들은 기꺼이 배승원을 도와주었다.
“근데 안 도와드려도 잘하시는데요. 지금처럼만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승원이 형. 저랑 합도 잘 맞는 것 같고요. 우리 처음 보는 거지 않아요?”
“맞아요. 오빠들 어디서 같이 연습했던 것 같아요.”
웃으며 말하는 한준서와 배우들에 배승원이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그게…… 서준이랑 연습했거든.”
오!
한준서와 배우들이 눈을 빛냈다. 코코아엔터 하면 역시 이서준 아니겠나.
“묘하게 준서가 하는 연기랑 서준이가 하는 연기가 비슷한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연습한 것처럼 편하게 촬영할 수 있었어.”
“서준 선배님 연기랑 준서 형 연기가요?”
모두 놀란 눈으로 배승원과 한준서를 번갈아 보았다.
“와! 그거 엄청난데요!”
“준서 오빠가 연기 엄청 잘하긴 하죠!”
“얘들아, 봐봐. 준서, 엄청 좋아하는데?”
“크흠. 제가 언제요.”
“입꼬리 올라가는 거 봐!”
으하하하!
도통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한준서에 배우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준서도 그냥 숨기는 걸 포기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내 연기가 서준이 연기랑 비슷하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승원이 눈을 깜빡였다.
연기 천재 이서준과 비슷하다면 좋아할 만도 하지만 저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었다.
“준서 형이 새싹이거든요. 완전 찐!”
“아하.”
단번에 납득하는 배승원에 다시 한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배승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과 연기가 똑같아서 편하게 촬영했다던.
“……첫 생이라서 그랬나?”
살아온 시간은 다르지만, 영혼은 같으니까.
서준은 묘한 기분으로 훌쩍 상승한 [새벽]의 시청률에 기뻐하는 한준서의 당시 모습을 읽어 내려갔다.
어쩐지 [한준서의 책]을 읽을수록 뭔가 갈작갈작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생각하며 서준은 미밍이 건네준 다음 페이지를 받아 들었다.
【P.786】
『“쉐앤나는 진짜 몇 번을 봐도 재미있는 것 같지 않냐?”
김수한의 말에 한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전에 개봉한 [쉐도우앤나이트]는 아직까지도 많은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근데 쉐도우맨이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왔지?”
“퍼스트가 구해준 거 아닐까?”
“생명 반응이 없다고 했었잖아.”
쉐도우맨이 살아 돌아온 건 기뻤지만,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긴 했다.
그렇게 [쉐앤나]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준서가 시계를 봤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졌다.
“나 이제 가 봐야겠다.”
“아, 배우들끼리 모인다는 게 오늘이야?”
“어. 지금 출발하면 될 것 같아.”
‘그래, 잘 가.’ 하고 시원스럽게 인사하는 김수한을 보며 웃던 한준서가 김수한의 집을 나섰다. 여기저기 트로피가 놓여 있는 걸 보면 가끔 친구지만 굉장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지!”
한준서가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중략)
고깃집 예약룸은 꽤 시끌벅적했다.
그다지 친화력이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연기계에서 활동한 김종호와 친한 배우들이라서 서로 아는 사이가 많았다.
“어서 와라.”
“오늘 연극 정말 멋졌어요! 선배님!”
이번 모임의 주최자로서 가장 먼저 도착해 있던 김종호가 배우들을 반겼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서 서로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준서 오빠! 여기!”
한 테이블에 자리 잡은 최소영이 손을 흔들었다. 김종호와 이지석에게 인사한 한준서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쪽은 처음 보는 거지? 내 친구 이다진!”
“안녕하세요. 이다진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준서입니다.”
이다진이 웃으며 말했다.
“말 편하게 하세요. 소영이랑 친하시다던데! 새벽이랑 민들레도 재미있게 봤어요!”
“저도, 아, 나도 봄 재미있게 봤어.”
한준서의 진심이 담긴 말에 이다진이 눈을 깜빡이다 동그랗게 떴다.
“봄? 봄…… 그 봄이요?! 와, 그거 이야기하는 사람은 오랜만이에요!”
어린이 연극 [봄]으로 시작한 대화는 편하게 이어졌다.
“무슨 이야길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어?”
그 테이블에 이지석과 김종호가 왔다.
“서준이 이야기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이다진의 말에 김종호가 웃다가 아쉽다는 듯 이야기했다.
“서준이도 불렀는데, 일이 생겨서 못 왔어.”
“아, 그래요?”
이다진이 이지석에게 속삭였다.
‘무슨 일인데요?’
‘태우 씨가 과로로 쓰러졌대.’
‘! 괜찮대요?’
이다진이 놀라는 사이, 김종호가 입을 열었다.
“준서 너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영 타이밍이 안 맞네. 서준이랑 준서 너랑 잘 맞을 것 같은데 말이야.”
최소영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서준이가 촬영 때문에 미국에 있는 날이 많아서 못 했어요. 재작년이랑 작년엔 군대에 있어서 못했고요.”
“그래. 갑자기 군대에 간다고 해서 깜짝 놀랐지.”
(하략)』
……어?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던 서준이 거기에서 멈추었다.
‘거기에 한준서 배우가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