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041화
앞서 말했듯.
첫 생이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건 어떤 배우 하나를 보고 결정한 게 아니었다. 많은 작품을 보고 서서히 연기의 매력에 빠져든 거였다.
‘그런데 왜 내가…….’
한준서 배우의 계기가 된 걸까.
서준은 자신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 싶어 [첫 생의 책]을 떠올려보았다.
직접 책을 펼쳐서 확인하면 더 편하고 확실했지만, 지금 그건 집필대 위에서 [한준서의 책]으로 새롭게 쓰여지고 있어 볼 수 없었다.
“음…….”
서준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며들었다.
[첫 생의 책]을 떠올리다 보니, 이상한 점들이 생각난 것이었다.
‘이 세계’와 같은 세계인 만큼, [첫 생의 책]에는 서준이 아는 이름들도 가끔 나왔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런 거지, 그때는 이름만 비슷한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김종호도 김종■로, 에반 블록도 에ㅂ■ ■ㄱ처럼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드라마와 영화의 제목 또한 그랬다.
‘제대로 적혀 있었으면 알았겠지.’
같은 세계라는 걸 한 번에 알아차리지는 못해도 이상하다는 것은 알았을 거다.
어쩌면 첫 생이 있는 세계라는 것도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준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첫 생의 책]에는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서준.
이서준이라는 존재가 없었다.
이서준이 촬영한 영화도, 드라마도 없었다.
‘아, 쉐도우맨은 있었나?’
[ㅅ■■■]라는 단어를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하여튼.
서준이 한준서가 배우가 된 계가가 됐다면 지금 읽고 있는 [한준서의 책]처럼 [첫 생의 책]에도 서준의 이름이 보였어야 했는데, ‘이서준’이라는 이름은 본 적이 없었다.
‘제루엘과 같은 상황이라면 분명히 첫 생의 책에도 내가 있어야 하는데.’
천계와 마계의 전쟁을 멈추었던 천신과 마신.
둘 다 ‘그’였던 때.
[천신 제루엘]의 책에는 분명히 마신에 대한 것도 적혀 있었다. 읽지는 않았지만 [마신]의 책에도 분명 천신 제루엘에 대한 것이 적혀 있을 터였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었지만, 서로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서준도 [첫 생의 책]에 자신의 이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서준’과 ‘한준서’가 같이 살아가는 세계지 않나.
서준은 그저 ‘한준서’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무명배우였던 과거가 바뀌어 천만 배우가 되고, 이번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아니었다.
전제부터 틀린 것이었다.
“파르비타.”
“왜?”
서준은 자신의 부름에 유영하듯 날아오는 파르비타를 바라보며 물었다.
“첫 생의 세계에는 내가 없는 거야?”
그러면 이해가 간다.
자신의 팬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던 것도, 배우가 된 계기가 달랐던 것도, 자신의 이름이 없었던 것도, 자신과 관련된 작품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도.
‘이서준’ 자체가 없는 세계니까.
“맞아.”
파르비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 생의 세계는 ‘이서준’이 없는 세계야.”
내가 없는 세계.
확답을 들어도 어쩐지 믿기지가 않았다.
종호 삼촌이나 에반 같은 지인들이 있는데, 가족들이 있을 텐데, 자신만 없다니.
“그럼 여긴, 이 세계는 뭐야?”
서준은 한 이론을 떠올렸다.
“평행세계 같은 거야?”
평행세계.
하나였지만 어떤 선택에 의해 여럿으로 갈라져 미래가 달라진 세계들.
여기서는 ‘이서준’의 존재로 인해, ‘이서준’이 없는 세계와 ‘이서준’이 있는 세계로 갈라졌다고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어.”
파르비타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추측하고 있다고?”
“우리도 전부 아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제 세계라면 확실히 대답할 수 있겠지만, 여긴 전혀 다른 세계니까요.”
리치왕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살아 있을 때 모르는 게 없었던 리치왕으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저 서준 네가 한준서에게 영향을 끼쳤을 때, 네 존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보고 여기가 첫 생과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구나, 하고 생각한 거지.”
기록석의 말에 서준은 이해했다.
타임 패러독스.
시간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이론.
과거로 가 ‘내’가 일으킨 사고에 부모가 죽으면 ‘나’는 태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과거로 이동할 수 없으니, 부모는 다시 살아나는가? 그러면 ‘나’는 또 과거로 가나?
같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역설이었다.
서준의 상황도 같았다.
‘이서준’의 존재가 영향을 끼쳐 한준서는 성공한 배우가 되었다. 그럼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던 첫 생은 사라지는 건가? 무한환생이 시작되지 않으면 ‘이서준’은 태어나지 못하는 건가?
하지만 서준은 여기, 확실히 존재했다.
“그래서 평행세계가 아닐까 생각한 거지.”
무한환생을 시작하게 된 무명배우 ‘첫 생’의 세계와 이서준의 영향을 받은 천만 배우 ‘한준서’가 있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일 확률이 높았다.
“난 다른 의견인데!”
제루엘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가 첫 생과 같은 세계인 거지!”
“그럼 타임 패러독스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첫 생이 무한환생을 할 수 있냐 없냐잖아. 그래서 우리가, 서준이 존재할 수 있는 거니까.”
서준과 전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제루엘이 씨익 웃었다.
“나 같으면 성공해서도 죽을 때는 ‘아, 더 하고 싶은데!’ 하고 생각할 것 같거든!”
“확실히. 무武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제 나름대로 납득한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그치? 서준 너도 죽기 직전에 더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할 것 같지 않아?”
벌써 생각했다.
지금 죽어가고 있는 중이니까.
쓰게 웃은 서준이 동의했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배우로서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을 한 서준도 다시 살아나서, 어쩌면 다음 생에도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럼 한준서도 그럴 것 같지 않아? 다음 생에도 연기하고 싶다고. 그러면 그걸 들은 무한환생이 환생을 시작하겠지!”
그리고 ‘그’는 다시 몬스터로 태어나고 죽길 반복하다가 인간, ‘이서준’이 되는 거였다. 그리고 ‘한준서’를 만나겠지.
“……영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군요.”
“그럼 첫 생은 어떻게 되는 거야?”
“미밍?”
파르비타의 물음에 제루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어!”
“아마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신 곰곰이 생각하던 리치왕이 대답했다.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라진다고?”
“제루엘의 말대로 된다면 우리의 시작은 ‘첫 생’이 아니라 ‘한준서’가 되는 것이니까요.”
[천신 제루엘]과 [마신]의 책이 그랬듯.
[이서준의 책]과 [한준서의 책]이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줄 터였다.
그러면 [첫 생의 책]은?
“존재하지 않았던 게 되는 거네.”
“그렇습니다.”
없었던 과거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제루엘의 의견대로 될 때의 이야깁니다. 허점이 꽤 있죠.”
리치왕의 말에 팔짱을 끼고 있던 천마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평행세계인지 같은 세계인지가 중요한가? 어떤 세계든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천마의 말대로.
타임 패러독스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실하다면 평행세계인지 같은 세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서준’이 없는 세계가 있다는 건 확실히 신경 쓰였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 서준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바깥 상황을 걱정하고 ‘때’가 언제 올지 기다리고 제 나름대로 해결방법을 고심하는데, 서준은 이미 지쳐 있었다.
가볍게 숨을 내쉬는데 문득 떠오르는 상상이 있었다.
“무슨 생각해?”
파르비타가 서준에게 물었다.
“만약에 한준서 배우가 ‘첫 생’이 된다면 한준서 배우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리고 만나러 가지 않을까, 싶어서.”
‘한준서’가 ‘첫 생’이 된다면 서준은 [한준서의 책]을 읽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겠지.
연기가 멋지다는 걸 알려준 배우가 같은 세계에 있는데, 만나러 가지 않을 서준이 아니었다.
“그러면 위험하지.”
“위험하다고?”
파르비타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첫 생이랑 접촉하면 무한환생이 이동한다고 했잖아.”
“……어릴 땐데?”
“어릴 때든 어른일 때든 상관없어. 무조건 첫 생이랑 접촉하면 끝나는 거야.”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파르비타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가 도와주면 되는 거 아니야?”
“아무 때나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니야. 타이밍이 잘 맞아야 도와줄 수 있어. 그리고 어릴 때는 최상급 문도 못 열었을 거고.”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전생들은 전부 서준이 읽었던 최상급 능력이 담긴 삶들이었다.
“이것도 관련 있는 거야?”
“맞아. 나중에 설명해 줄게.”
“음…… 아직 멀었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파르비타가 서준에게 종이를 건넸다.
“자, 이거나 읽고 있어.”
“……그래. 알았어.”
파르비타가 내미는 [한준서의 책] 한 페이지에 서준이 입을 열려다 그냥 받아 들었다.
이미 ‘이서준’이 없는 세계에 대한 것도, 서준이 끼친 여파로 한준서가 유명해졌다는 것도 알게 됐는데 더 읽어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건가?’
기약 없는 기다림에 서준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미밍!”
아니, 어깨에 올라간 미밍 때문인가.
볼에 치대는 미밍에 서준이 이내 작게 웃고는 파르비타가 건네준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109】
『[제20회, 대학생 영화제, 팀 김수한 금상 수상!]
“오! 기사 떴다!”
“여기 나 진 첫 팬 이야기도 있음!”
오늘은 촬영을 도와주었던 한준서와 친구들을 위해 김수한이 저녁을 사는 날이었다. 물론 촬영 전에도, 중에도, 후에도 많이 샀다.
“많이 먹고 다음에도 도와주십쇼!”
손을 비비는 김수한에 한준서와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준서 너도 배우로 출연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연기 배우고 있는 중일 걸. 엑스트라로도 충분해.”
연기를 하기로 결정했지만, 좋지 않은 집안 사정상 연기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한준서는 배우가 되지 못할 미래를 생각하며 수능 성적대로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생활비와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학원도 가긴 했는데 비싸서 처음만 배우고, 이후로는 엑스트라 알바나 연극 알바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우고 있었다.
“준서가 조연 했어도 잘했을 거야!”
김수한도 많이 조언해 주고 있었고.
좋은 친구다.
대학교 2학년 한준서는 그렇게 연기를 배워나가고 있었다. (하략)』
서준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연기와 배우 이야기에 기분이 나아진 것이었다.
‘……나 너무 단순한 것 같은데.’
이래서 파르비타가 읽게 한 건가 싶기도 했다.
【P.200】
『한준서는 새로운 엑스트라 일을 맡게 되었다. 병원을 배경으로 한 좀비 영화이었는데, 좀비로 등장할 예정이었다.
“누가 왔나 봐.”
연기에는 딱히 관심 없지만 김수한(감독 지망생)과 한준서(배우 지망생)와 함께 지내다 보니 아르바이트도 이쪽으로만 하게 된 친구가 점점 시끄러워지는 복도를 보며 말했다.
“유명한 배우라도 왔나?”
“김종호 배우?”
“오늘 아역배우들 촬영이라고 하지 않았어?”
잠시 쉬러 나온, 좀비 분장을 마친 다른 엑스트라들도 떠들썩했다. 아역배우들은 지금 분장실에서 좀비로 분장 중일 텐데?
경악 섞인 환호성과 이상한 비명,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 끝.
한 사람이 등장했다.
이서준이었다.
운동복에 양궁 선수처럼 이것저것 걸친 이서준이 아우라를 뿜뿜 퍼뜨리며 나타나자, 다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하니 벌렸다.
한준서도, 친구도 같은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서준이 인사를 하고 함께 온 박재민 조감독(있는지도 몰랐다.)의 설명이 이어지자, 더 벌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한준서와 친구, 엑스트라들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박재민 조감독은 ‘비밀을 지키라’는 주의사항까지 빼놓지 않고 말한 뒤에 이서준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서준이를 여기서 보다니.
물론 연극 [봄] 때도 보긴 봤지만, 그때는 모자도 쓰고 있었고 무대라서 좀 멀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나 가까웠고 가리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준서야, 수한이한테 자랑하자. 이서준 봤다고.”
이서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한준서에게는 낄낄거리는 친구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잠깐만. 그럼…….’
나 서준이랑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거야?』
……그랬어?
약 10년 전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한준서의 경력까지는 알지 못했던 서준이 눈을 끔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