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039화
연기를 아주 사랑하고 진심으로 좋아했던 첫 생이었지만, 첫 생은 주연은커녕 조연조차도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엑스트라 자리만 전전했을 뿐.
다음 생엔 주인공을 해보고 싶어.
죽기 전, 그런 소원을 남길 정도였으니까.
연기를 사랑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엑스트라 역만 맡았어도 포기하지 않았던 첫 생의 의지 또한 서준에게 감명 깊게 다가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준서 배우라니?’
빈말로도 그를 무명배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운명]으로 천만 관객을 달성하고 [새벽]으로 시청률 1위를 하고 할리우드 영화 [민들레]에 출연하여 세계에도 얼굴을 알리지 않았나.
그 결과, 현재 한국의 30대 남자배우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이 한준서였다.
서준이 읽었던 첫 생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아, 그거.”
의문이 가득한 서준의 얼굴에 파르비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직접 읽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읽는다고?”
파르비타의 말에 눈을 깜빡이던 서준이 설마? 하고 집필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전생들이 종이 소용돌이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미밍!”
미밍은 서준의 어깨로 올라갔고.
“……읽어도 되는 거야?”
서준이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려 한 사람의 삶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당사자도 아닌데 이렇게 봐도 되는지 모르겠다.
‘물론 궁금하기는 한데.’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도 적혀 있을 것 아닌가.
생의 도서관의 책들이야 어차피 전생의 ‘그’이니 봐도 괜찮았지만……아니, 한준서도 ‘그’니까 상관없나? 하지만 한준서는 생의 도서관이 뭔지도, 삶의 책이 뭔지도 모를 텐데?
고민하는 서준에게 파르비타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보여줄 거야, 기록석이.”
전생들의 대표로 서준에게 설명하고 있었던 파르비타지만, 기록과 관련된 일만큼은 기록석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았다.
“음. 그럼 부탁할게.”
어떻게 무명배우였던 첫 생이 현재의 한준서가 되었는지 궁금했던 서준이 그렇게 대답하자, ‘맡겨둬.’ 하고 말한 기록석이 집필대 위 종이 소용돌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은,”
암석을 닮은 짙은 회색빛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이걸로 하자.”
그러자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종이 소용돌이 속 종이 하나가 반짝였다. 책과 가까이 있는 것이 아마도 다다음 차례에 삶의 책에 붙을 예정이었던 것 같았다.
목표물이 정해지자, 천마(켄타우로스)가 허리춤에 걸어놓은 무기 중 하나인 활을 꺼냈다.
……활?
서준이 눈을 크게 뜰 틈도 없이, 천마는 빠르게 화살을 올려 시위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목표물인 종이쪽으로 쏘아 보냈다.
이쑤시개처럼 작은 화살이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종이들 사이를 뚫고 목표물을 맞혔다.
“잡았다!”
화살의 힘 때문에 집필실 벽까지 날아가려던 종이를 대기하고 있던 제루엘이 날아가 낚아챘다. 그 과격한 모습을 바라보던 서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구멍 뚫린 것 같은데? 그리고 그거 가져올 수 있는 거였어? 이렇게 쉽게?”
화살에 작은 구멍이 났을 종이도 종이지만, 가장 중요한 집필대라서 방어막 같은 거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 손쉽게 가져오는 바람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 구멍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와.”
“약간의 분풀이랄까요.”
“미밍!”
그런 서준과 달리 전생들은 아주 태평했다.
“그리고 집필실에 들어오는 게 어려운 거지, 집필실 안은 보안이 전혀 안 돼 있거든.”
“그 누구도 집필실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파르비타와 천마의 말에 서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서준의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럼 그냥…… 첫 생의 책을 집필대에서 빼고 내 책을 올리면 되는 거 아니야?’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해결방법.
삶의 책의 집필이 멈추어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면 ‘이서준의 책’을 다시 집필하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러면 한준서의 책이, 한준서가 어떻게 될지 몰라, 서준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현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도 보고 싶었고 아직 나오지 않은 작품들도 촬영하고 싶었다. 아직 못 본 것도 많았고 먹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서준은 정말 살고 싶었다.
그리고,
한준서도 그럴 터였다.
그래서 서준은 기다리기로 했다.
전생들이라면 좋은 방법을 알려줄 터였다. 자신에게도, 한준서에게도 좋은 방법을.
그런 서준의 복잡한 심경을 읽었는지 파르비타가 입을 열었다.
“첫 생의 책은 저대로 놔두는 게 좋아. 서준 네가 지금 죽지 않고, 죽어가고 있는 건 저것 때문이니까.”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서준의 시선이 파르비타에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죽은 것과 죽어가는 것의 차이를 알아? 죽은 건 살릴 수 없고, 죽어가는 건 살릴 수 있어.”
파르비타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앞서 설명했듯 집필이 멈추면 곧바로 죽어. 1초의 오차도 없이. 따라서 네 삶의 책이 집필이 멈추었으니 너도 곧바로 죽었어야 했지. 하지만 넌 지금 ‘죽어가고’ 있어.”
파르비타의 시선이 집필대로 향했다.
“첫 생의 안에는 생의 도서관이 없거든. 또 집필실도 없지. 그래서 무한환생은 지금 서준 네 몸을 빌려 삶의 책을 쓰고 있는 거야. 그 때문에 넌 저 책이 완성될 때까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
반대로 말하자면, 첫 생의 책의 집필이 중단되거나 완성되면 서준은 더이상 살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서준은 고개를 들어 종이의 소용돌이를 바라보았다. 날아다니는 종이들은 서준에게 남은 시간과 같았다. 서준의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이 느릿하고 묵직해졌다.
“한준서 배우는?”
그런 상황에서도 남을 걱정하는 서준에 천마와 리치왕이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완전한 ‘남’은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첫 생은 어찌 됐든 괜찮아. 삶의 책이 완성되지 않는 이상 영향은 없거든.”
[한준서의 책]은 완성(현재까지 기록)하고 난 후에야 영향력을 발휘한다. [무한환생]이 이동할 수 있었고 한준서의 안에 집필실이 생기고 한준서의 삶이 실시간으로 책에 적힌다.
그전에는 집필이 중단돼도 한준서에게는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는 거였다.
온전히, 서준만 큰일 난 상황이었다.
“그건 다행이네.”
서준은 쓰게 웃으면서도 안도했다. 파르비타와 선의 도서관 출신 전생들이 작게 웃었다.
리치왕과 천마만이 ‘역시 이해 못 하겠는데.’하고 생각했다.
“파르비타, 아직 때가 되려면 멀었지?”
하지만 그런 서준이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조금 초조해져, 재촉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응. 아직 멀었어.”
들려오는 대답이 아주 단호하고도 믿음직해, 서준이 가볍게 웃었다.
그래, 기다리자. 때가 올 때까지.
기꺼이 도와주는 전생들도 있으니까.
“자, 여기.”
제루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건네주지 못했던 종이를 서준에게 건네주었다. 어느새 화살이 뚫었던 작은 구멍도 사라진 상태였다.
서준이 종이를 바라보았다.
깃털 펜이 가지런한 글씨로 적어 내려간 문장들이 보였다.
첫 생의, 한준서의 삶의 책.
서준은 조금 미안하면서도 궁금한 마음으로 페이지의 첫 글자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어?”
그리고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했다.
【P.68】
『“야. 진짜 이거 보게?”
“이게 제일 쌌다고. 남은 돈으로 피시방이나 가자.”
“진짜, 창피해서.”
친구 김수한의 말에 고등학교 1학년 한준서가 마른 세수를 했다. 여름방학 숙제로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숙제가 있었다. 학교에서 지원금을 줘서 적당한 가격대의 작품이라면 무료로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이제 고등학생인데 어린이 연극은 너무하지 않냐?”
“다른 건 다 매진이더라. 빨리 보고 맘 편히 놀아야지.”
맞는 말이기는 한데, 한준서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미 은하수 센터 앞까지 와서 다시 돌아가기도 그래서, 한준서와 김수한은 은하수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이 연극 맞아?”
“맞는데…….”
그런 것치고는 어른이 많았다. 단체로 온 듯한 손님도 있었고, 가족 손님도 많았다. 아이들 반 어른들 반. 눈을 끔뻑거리던 한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만 나오는 연극이라니까, 가족이랑 친구들이 보러 왔나 보다.”
“아, 그렇겠네.”
“뭐, 뻘쭘하게 우리 둘만 있는 것보다는 낫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한준서가 가져온 팸플릿을 보았다.
어린이 연극 [봄]
아역배우들만 나오는 연극이라니.
연기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다들 잘할 수 있을까 싶었다. 연극 도중에 대사만 잊지 않아도 다행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잠시 후.
한준서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과거를 반성해야 했다. 또 마음속으로 출연한 아역배우들에게 깊이 사과했다.
[시끄럽구나, 아이야.]
“……X발. 미쳤다…….”
무지막지한 압도감에 옆자리에 앉은 친구 김수한의 과격한 감상도 들리지 않았다.
저 거대하고 사실적인 청룡의 머리가 이 압도감의 주인공일까.
아니, 그것도 확실히 대단했지만 더 대단한 것이 있었다.
목소리.
스피커를 통해 귓속으로 들어오는, 아니, 온몸으로 느껴지는 청룡님의 목소리가 정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누구지?’
이 목소리 또한 아역배우의 목소리일 텐데, 누가 이렇게 대단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걸까? 어떤 아역배우일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목소리 연기가 아니라 다른 연기는 어떤 느낌일까?
하지만 곧 한준서의 생각도 순식간에 날아갔다.
[으하하하하!]
여의주를 되찾고 하늘을 날며 비를 내리는 청룡이, 청룡의 웃음소리가 한준서의 눈과 귀와 감각을 사로잡아, 한준서는 그저 허어- 하고 넋을 놓고 무대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략)』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잘못 읽었나 하고 다시 읽어봤지만, 내용은 변함없었다.
“한준서 배우가…… 어린이 연극 봄을 봤었다고?”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수한이 형 친구라고 했으니까.”
연극 [봄]을 8회차 모두 재미있게 봤던 김수한이니, 친구와 같이 본 적이 있을 법도 했다. 같은 학교 학생들도 많이 봤다고 했고.
‘한준서 배우가 이렇게 오래된 친구라는 건 가르쳐 주셨어야죠, 수한이 형…….’
무려 고등학생 때(어쩌면 그전부터)부터 34세인 지금까지 친구인 사이라니.
서준의 친구들도 다들 오랜 사이긴 하지만, 굉장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잠시 허허 웃던 서준이 신기한 눈으로 【P.68】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연극 무대에 있을 때, 첫 생이 관객석에 있었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준이 다 읽은【P.68】를 내려놓자, 기다리고 있던 미밍이 다음 종이를 전해주었다.
“이거 읽으면 되는 거야?”
“미밍!”
“고마워.”
【P.68】는 서준의 손에서 떨어지자마자 다시 종이 소용돌이 속으로 날아가 책 앞에 멈추었다. 이제 곧 책과 연결되겠지.
“야압!”
그 옆으로 새하얀 날개를 펄럭이는 제루엘이 창을 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리치왕이 스태프를 휘둘러 마법을 쓰는 것도. 천마가 또 한 번 화살을 날리고, 파르비타가 물방울을 총알처럼 날리는 것도.
물방울이면 종이가 젖고 글씨가 번지는 게 아닌가 싶지만, 말리지 않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았다.
그렇게 기록석의 지시 아래, 다른 전생들은 신나게 종이들을 사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작게 웃던 서준이 바닥에 앉았다.
“읽을 게 꽤 많을 것 같네.”
앉아서 편하게 읽어야지.
미밍이 미밍! 하고 울면서 서준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미밍을 두어 번 쓰다듬어준 서준이 다음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P.70】
『두 번째 공연 날.
한 무리의 학생들이 은하수 센터에 몰려들었다. 첫 번째 공연을 보러왔던 김수한과 한준서가 친구들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진짜 대단하다니까!”
“보다가 기절하는 줄!”
온갖 몸짓으로 대단함을 알리는 김수한과 한준서를 보며 나머지 세 친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략)
김수한이 티켓을 사며 직원과 이야기했다.
“첫 공연 보셨나 봐요.”
“네. 여의주까지 샀어요.”
“뭐? 여의주를 샀어? 네가 애냐?”
“흐흐흐. 너도 보고 나면 사게 될걸?”
뒤쪽에선 아이들이 여의주! 청룡님! 을 외치고 있고 먼저 연극을 본 김수한도 여의주를 샀다니, 세 명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무슨 연극이길래 이 난리야?”
“준서야, 설마 너도 샀어?”
“아니.”
“역시 이상한 건 김수한뿐이었어.”
“오늘 사려고. 저번엔 돈이 부족했었거든.”
김수한한테 빌려도 됐었지만, 또 보러 올 생각이라서 그냥 오늘 사기로 한 한준서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한준서 너마저!”
그에 친구들이 이마를 짚었고 김수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도 연극 보고 나면 사게 될걸?”
그 말대로.
연극 [봄]이 끝나자마자 한준서와 김수한을 타박하던 세 친구도 뭐에 홀린 듯 여의주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다들 청룡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듯했다.
“근데, 이거 봤어?”
“뭐?”
김수한이 팸플릿을 들어 보였다. 주인공 봄 역의 최소영부터 나무꾼, 사냥꾼 역의 배우 사진과 이름, 나이가 적혀 있었다. 그중 하나를 가리켰다. 청룡 그림과 그 밑에 쓰인,
[청룡 역, 나 진/8세]
“……?”
“헐?”
“그게? 8살 목소리라고?”
한준서의 입이 쩍 벌어졌다.
1회차의 위엄 넘치는 청룡과 2회차의 유쾌한 청룡이 겨우 8살 아역배우의 연기였다고?
다시 떠올려도 또렷하게 생각나는 그 목소리들. 온몸을 누르는, 그러나 무겁지 않은 압박감. 느껴본 적이 없는 기묘한 분위기까지.
“……천잰가?”
김수한의 말에 한준서도 동의했다.
“……요즘은 재능 있는 애들이 많구나.”
“근데 첫날 공연이랑 조금 다르더라.”
“첫날에는 조금 청룡이 할아버지 같던데, 이번에는 애 같았지.”
첫 공연을 본 한준서와 김수한의 대화를 들은 나머지 세 사람은 다음 공연을 보러 오기로 했다. 어떤 청룡님이 나올지 궁금했다. 물론 같은 청룡님이 나와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다른 애들도 부를까?”
“그럴까?”
“우리 표부터 미리 사두자.”
그렇게 방학 숙제를 위해 싸고 볼만한 연극을 찾던 주영고 학생들이 은하수 센터에 모여들었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