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038화
“생의 도서관은 ‘이서준’의 삶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어. 우리 전생들도 생의 도서관과 같은 생각이야.”
파르비타의 말에 서준은 자신을 돕기 위해 기꺼이 나타나 준 전생들을 바라보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정말 고마워.”
“미밍!”
“별말씀을!”
그에 작게 웃은 서준이 이내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어?”
자신이 쓰러진 장면까지 ‘읽은’ 상황에서 더 이상 설명만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의 도서관에서 깨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지만, 한시라도 빨리 해결 방법을 찾아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호 형도, 태우 형도 엄청 놀랐을 거고.’
한준서 배우 또한 미팅을 하러 왔다가 갑자기 쓰러진 자신을 보고 엄청 놀랐을 거다.
물론 쓰러진 원인이 바로 그 한준서라서 묘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한준서가 의도한 건 아니니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첫 생이기도 하고.’
서준에게 배우라는 꿈을 심어준 사람이 아닌가.
참 묘한 기분이라고 생각하며 서준은 파르비타의 답을 기다렸다.
그에 바닷물 튜브를 허리에 끼고 허공에 떠 있던 파르비타가 물고기 꼬리를 마치 시계추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답했다.
“아직 멀었어.”
“아직 멀었다고?”
서준이 눈을 끔벅이자 파르비타가 씩 웃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잖아? 이번 일도 그래. 타이밍이 아주 중요하지!”
지금까지 겪어온 뜻밖의 일들이, 시련과 기다림이 결국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길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선/제작)황금 인어 파르비타의 나침반]의 주인이 말했다.
서준의 짐작이긴 하지만, 이 능력은 영화 [화]의 표절을, 매니저 최태우의 영입이라는 예상도 못 한 방법으로 해결해 준 적이 있었다.
“지금의 기다림 또한 서준 네가 돌아가기 위해서 꼭 겪어야 하는 일이야. 그러니 어렵겠지만, 마음 편하게 있어.”
그러니 기다림이 곧 해결 방법이라는 파르비타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생들도 서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미밍도 ‘미밍!’ 하고 울었다.
믿음직스러운 그 모습들에 서준이 깊게 숨을 내쉬며 불안과 초조함을 내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그럴게.”
한결 나아진 서준의 표정에 전생들이 작게 미소 지었다.
“궁금한 건 없어? ‘때’가 되려면 아직 좀 남았거든.”
파르비타의 말에 서준이 음, 하고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앞서 했던 [무한환생]과 생의 도서관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무한환생과 생의 도서관은 자아를 가지고 있는 거야?”
“맞아. 나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 존재했으니까. 특히 환생이나 생의 도서관 자체가 생명과 자아와 관련되어 있는 힘이기도 하고.”
파르비타의 설명에 리치왕이 덧붙여 말했다.
“서준 당신이 선기와 마기를 함께 다룰 수 있는 것도 그 둘 덕분입니다.”
뜬금없이 나온 이야기에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기와 마기 말이야?”
“그래. 넌 모르겠지만, 원래 넌 선기만 다룰 수 있었거든. 근데 무한환생과 생의 도서관이 선기와 마기를 함께 쓸 수 있도록 도운 거야.”
“어째서?”
“네가 마기를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연기를 그만한다고 했으니까.”
파르비타가 웃으며 하는 이야기에, 서준은 아, 하고 그때를 떠올렸다.
[쉐도우맨2]를 찍을 당시.
악역이 되는 나이트 진을 연기하려다가 선기만으로는 도저히 표현이 되지 않아 답답했을 때. 몇 번이고 마기를 모으려다 실패했을 때.
어렸던 서준은 치기 어린 마음으로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기 안 해!’ 하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마기를 쓸 수 있게 됐지.’
정말 아무런 전조도, 계기도 없이 서준은 선기와 마기를 동시에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서준이 기억하는, 지금까지의 삶들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게 [무한환생]과 생의 도서관 덕분이었다니.
“……연기 때문인 거구나.”
서준의 말에 파르비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 생의 소원이 주인공을, 연기를 하는 거였으니까.”
그때는 첫 생 한준서가 없었을 때였으니, [무한환생]과 생의 도서관은 한 몸처럼 생각이 아주 잘 맞았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전생들을 거쳐, 겨우겨우 인간으로 태어난 ‘이서준’.
‘세계’의 환경도 첫 생 때와 비슷한 데다가 첫 생처럼 연기까지 한다는데 두 팔 걷고 돕지 않을 리가 없었다.
“첫 생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수많은 환생을 거듭한 무한환생이 아주 열심히 도왔지. 생의 도서관도 가끔 도와주었고.”
“그때는 무한환생이랑 생의 도서관의 의견이 잘 맞았어! 아! 네가 성인이 되기 전에 최상급 문을 열었던 것도 그 둘이 도운 거야!”
기록석과 제루엘의 말에 서준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최상급 문이 너무 빨리 열렸다고 생각했어.”
‘그’가 살았던 삶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삶들이 모인 최상급 도서관.
딱 봐도 굉장히 열기 어려운, 그 문이 성인이 되자마자 열려 ‘이게 왜 열려?’ 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다른 문들도 참 쉽게 열렸었지.’
서준은 자격이 되어, 열릴 때가 되어서 열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무한환생]과 생의 도서관이 도왔던 걸지도 몰랐다.
“정말 고맙긴 한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서준은 착잡한 눈으로 여전히 팔랑팔랑 종이의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는 집필대와 그 위에 놓인 첫 생의 책을 바라보았다. 그 어수선함이 드디어 주인을 만난 [무한환생]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서준의 머릿속으로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첫 생의 책.”
아기였던 서준이 읽었던,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낡아빠졌던 책.
“그걸 보여준 것도 무한환생인가?”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문이긴 했지만, 슬라임이나 작은 생물체로 태어난 적은 아주 많았던 ‘그’였다. 그런데 그 많은 전생들 중 한 번도 첫 생의 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읽지 않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맞아.”
파르비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으로 태어난 건 처음이니까. 네가 그 책을 읽을 수 있게, 그리고 첫 생처럼 연기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한 거지.”
“어쩌면 네 생각까지도 조작했을 수도 있다.”
천마의 차갑고도 묵직한 말에 집필실이 조용해졌다.
천마와 마찬가지로 악의 도서관 출신으로서, 세뇌와 협박 등에 일가견이 있는 리치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같은 세계에, 인간으로 태어났다지만 본인이 연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헛수고니까요.”
……조작?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자신의, 연기에 대한 마음이 전부 조작이라고? 세뇌 때문이었다고?
“그, 그럴 린 없어!”
제루엘이 얼른 반박했다.
“무한환생에게 그런 힘이 있었다면 몬스터로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게 만들어서 환생하게 했을걸! 인간으로 태어날 때까지!”
“미, 미밍! 미미밍!”
“생의 도서관도 두고 보지만은 않았을 거야. 전생의 개입은 용납해도 세뇌 같은 건 막았겠지.”
미밍도 파르비타도 반박했다. 기록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뿐이다.”
천마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딱히 서준에게 나쁜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악의 도서관 출신다운 생각이었다.
그에 속이 뒤집어진 선의 도서관 출신 전생들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무한환생]이 일부러 첫 생의 책을 보여줬다는 이야기에, 세뇌설까지.
연기를 사랑하며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서준에게 그 이야기들이 어떻게 들렸을지 걱정이 되었다.
자신의 생이 누군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되었다는 건 굉장히 슬프고 비참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무한환생]이 ‘이서준의 삶’을 첫 생에게로 이동하기 위한 다리로 사용하는 걸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미밍…….”
서준의 머리 위에서 내려온 미밍과 전생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서준이 딱히 슬프다거나 우울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음, 하고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너 괜찮은 거 맞지?”
“응. 괜찮아.”
파르비타의 물음에 서준이 씩 웃어 보였다.
“……전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미밍…….”
제루엘과 미밍의 걱정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잠깐 생각해 봤거든. 처음 연기를 하자고, 배우가 되자고 결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연기할 때의 일들을.”
연기의 ㅇ도 모르던 어린 시절 스왈린 애넘의 다큐멘터리를 보며 연기에 대해 배우고, 라이언 감독과 함께 처음 촬영을 하고, 영화관에서 개봉한 [쉐도우맨1] 속 자신을 보고, 새로운 영화를 촬영하고, 다른 배우들과 같이 연기하고, 관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감상을 읽고,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그 기억들과 함께, 그때 느낀 감정들도 떠올랐다.
하나하나 배워나갈 때의 즐거움, 촬영할 때의 기쁨, 출연한 영화를 볼 때의 벅참, 새로운 영화를 만나는 반가움, 다른 배우와 함께 연기하는 설렘,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본 후 느낀 감사, 무대 위에 올라 상을 받을 때의 환희까지.
“그런 황홀한 감정들을 직접 느낀 내가, 세뇌됐을 리가 없잖아.”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계기가 무한환생이 건네준 첫 생의 책이었을지는 몰라도,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과 연기를 계속하는 건 오로지 내 생각이고, 내 의지야.”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서준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다른 이들의 의견이 끼어들 틈 따위는 전혀 없지.”
가족이, 친구들이, 지인들이, 팬들이 사랑하는 반짝임이었다.
그런 서준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전생들이 이내 활짝 웃으며 서준의 주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래! 이래야 ‘나’지!”
“진짜 마음에 드는데!”
“미밍!”
“더 오래 서준의 이야기를 읽고 싶은데 말이죠.”
선의 도서관 출신들처럼 유쾌하게 날아다니지는 않았지만, 천마도 꽤 마음에 드는 듯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리치왕은 자신의 생을 떠올리며 흥미로워했다. 진짜든 가짜든 세뇌당했다고 들은 이들 중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굳었던 분위기가 풀리고.
서준이 파르비타에게 물었다.
“파르비타. 아직 멀었어?”
바깥 상황도 걱정되고, 연기 이야기를 하니 얼른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응. 아직 멀었어.”
기대와 다른 대답에 서준이 아쉬워했다.
언제쯤 ‘때’가 되는 걸까.
‘예정대로라면 한준서 배우랑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을 텐데…….’
천만영화 [운명]의 주인공과 이야기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데. 동 시간대 1위를 한 드라마 [새벽]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 그가 주연으로 섰던 연극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한준서 배우가 첫 생인 바람에……?
손바닥 위에 올라온 미밍을 마치 고양이처럼 쓰다듬으며 아쉬움을 곱씹던 서준이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미밍?”
멈춰진 손에 미밍이 고개를 들어 서준을 바라보았다. 뭔가 아주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왜 그래?”
“……한준서 배우가 첫 생이라고 했지?”
“그렇지.”
지금까지 쭉 이야기했던 거 아닌가?
다시 묻는 서준에 파르비타와 전생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준이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준서 배우는 천만 배우인데, 어떻게 첫 생일 수가 있어?”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바람에 미처 떠올리지 못했지만, 서준은 낡은 삶의 책에 적혀 있던 ‘첫 생’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첫 생은 무명배우였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