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037화
“……첫 생?”
첫 생이라고?
서준은 예상치도 못한 삶의 책 주인의 정체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첫 생.
‘그’가 겪은 무한한 환생들 중 가장 첫 삶이며, ‘이서준’에게 배우라는 꿈을 갖게 해준 삶.
인외의 생물로만 태어났던 전생들과 달리, ‘이서준’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인간이었던 삶.
너무나도 오래된 기억이라 삶의 책조차도 낡아버렸던 삶.
가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아주 먼 옛날의 기억처럼 떠올렸던 그 첫 생이 지금 여기서 언급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서준이 놀란 눈으로 집필대 위의 책과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깃털 펜은 여전히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책 또한 한 장 한 장 신중히 페이지를 붙이고 있었다. 붙지 못한 종이들이 날아다녔다.
첫 생의 책.
그것이 주는 충격과 함께 너무나도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채워나가, 서준은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전생들 말로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상태라고 하니, 살기 위해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첫 생의 책은 왜 갑자기 나타난 거야?”
제루엘에게서 자신의 삶의 책을 받아든 서준이 묻자, 파르비타가 대답했다.
“서준 너와 첫 생이 접촉했으니까.”
“……내가 첫 생이랑 접촉했다고?”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그럴 리가.
서준이 생의 도서관에 오기 전 만난 사람은 안다호뿐이었다. 그리고 안다호와는 어릴 때부터 많은 접촉을 했으니 새삼스럽게 접촉했다고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난 다호 형이랑 이야기를…… 아, 기억이 끊겼다고 했지.”
서준은 혼란스러웠다.
멀쩡한 기억이 멀쩡하지 않다는 생각에 답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분명 다른 사람이 온 거야.’
서준이 기억을 못 할 뿐.
그리고 시기상, 사무실에 올 사람은 두 명밖에 없었다.
한 명은 최태우로, 그 또한 매니저로서 서준과 접촉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새삼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그럼 한 명이 남았다.
오늘 처음 만날 예정이었던 배우.
“……한준서 배우가, 내 첫 생이라고?”
서준의 중얼거림에 전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밍!”
“그래. 맞아.”
그 시원스러운 대답들과 달리 서준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배우 한준서.
그와 만난 기억이 없는 서준은 영상과 사진으로 봤던 한준서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서준’과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으나, 연기를 할 때마다 캐릭터를 온전히 담고 있던 그 얼굴을. 메이킹 필름이나 관찰 예능에서 봤던 연기에 진심이던 그 얼굴을.
‘그 사람이 내 첫 생이라니……’
새롭게 환생한 자신을 배우의 길로 이끌었던, 그 반짝이는 열정과 진심을 가졌던 첫 생이, 한준서 배우였다고?
그건 좀 묘한 기분이었다.
꿈에 그렸던, 상상만 하던 여행지를 실제로 가 본 느낌이랄까.
그럴 때면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상상과 다른 풍경에 실망하거나 상상보다 더 멋진 풍경에 기뻐하거나.
서준은 실망하지는 않았지만, 온전히 기뻐하지도 못했다.
그냥, 믿기지가 않았다.
“……근데 한 세계에 ‘내’가 둘이 있을 수도 있는 거야?”
‘이 세계’에 ‘이서준’이 살고 있는데 ‘첫 생’도 함께 있을 수 있는 건가?
‘나’와 ‘내’가 만나다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믿을 수가 없었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가능해.”
천신 제루엘이 대답했다.
“내 삶, 기억해?”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전생을 겪었던 ‘그’조차도 질릴 정도로 오래도록 전쟁을 지속해온 천계와 마계.
그곳의 천사였던 제루엘은 전쟁에 회의감을 느끼고 어떤 마족과 함께 전쟁을 끝내기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결국 천신이 되어, 쏟아지는 일거리에 그 마족을 두고두고 씹어댔었다.
“갑자기 그건 왜?”
천신 제루엘의 삶을 다시 떠올리던 서준이 물었다. 제루엘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 마족이 ‘나’였어.”
“……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서준이 눈을 크게 떴다. 오늘 몇 번이나 놀라는지 모르겠다.
“마족 주제에 그 좋아하는 전쟁을 멈추겠다고 할 때부터 좀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나’였더라고.”
제루엘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물론 ‘내’가 죽은 이후의, 미래의 나였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제루엘’과 ‘한참 후에 환생한 마족’이 한 세계에서 만난 것이었다.
서로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 녀석도 몰랐을 거야. 선의 도서관에 들어와서 내 삶의 책을 읽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는 이야기니까.”
제루엘의 이야기에 서준이 물었다.
“넌 어떻게 알고 있는데?”
제루엘 또한 악의 도서관에 들어가지 못한다. 게다가 먼저 죽기도 했고.
“네가 기절해 있는 사이에 알게 됐지.”
서준이 기절해 있는 사이, 전생들은 필요한 지식을 전해 받았다. 같은 세계에 ‘그’가 둘 이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또한 말이다.
“‘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쩌면 다른 생의 ‘저’와 스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신발에 들어간 돌멩이가 ‘나’였을 수도 있지.”
리치왕과 기록석의 말에 서준이 침음성을 흘렸다.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사실 슬라임인 ‘나’를 죽인 드래곤이 ‘나’였을 지도 모르지.’
서준은 다른 곳으로 흘러가려는 생각을 바로잡았다.
“근데 제루엘 때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서준이 첫 생과 접촉한 것처럼, 마족으로 환생한 ‘그’과 접촉했던 제루엘.
그러나 [천신 제루엘]의 책에서는 이렇게 죽어가고 있다거나 생의 도서관에서 전생들과 만났다거나 하는 일었다고는 적혀 있지 않았었다.
“그거야 이번에 만난 건 첫 생이니까.”
그렇게 대답한 파르비타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하나씩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응.”
[(악)천마의 만병지왕]이라든가 [(선) 기록석의 파편]이라든가.
전생이라면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능력.
“근데 정확히는 하나가 아니야.”
“하나가 아니라고?”
의아해하는 서준의 귀로 천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생.”
!
서준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떴다.
그래. 그게 있었다.
‘그’가 무한한 환생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능력.
그리고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첫 생의 능력.
“그건 저희의 능력이지만, 저희 것이 아니죠.”
리치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파르비타가 입을 열었다.
“맞아. 우리가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첫 생의 능력이지. 그리고 무한환생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가고 싶어 하고 있어.”
“주인에게로 돌아간다고?”
서준의 눈이 커졌다.
“그건 주인을 잃은 개와 같다. 주인을 찾아 끝없이 길을 헤매지.”
천마의 말에 기록석이 덧붙여 설명했다.
“무한환생은 첫 생이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환생을 하며 온갖 세계를 떠돌다가, 결국 이렇게 주인을 만나게 된 거야. 그러니 저렇게 눈에 뵈는 게 없을 만도 해.”
그 말에 서준의 시선이 집필대의 종이 소용돌이 쪽으로 향했다가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삶의 책 쪽으로 향했다.
“……근데 나도 ‘나’ 아니야?”
‘이서준’ 또한 첫 생과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나.
뭐, 환생을 좀, 아니, 굉장히 많이 하긴 했지만.
파르비타가 웃으며 말했다.
“순도가 다르지, 순도가. 우리가 0.01%면 저쪽은 100%잖아.”
“정확히 계산하면 0.01%도 많은 겁니다. 많은 시간과 경험이 섞여 있죠.”
뭐, 셀 수도 없는 전생들을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쓰게 웃은 서준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옮겨가면 되지 않아? 이렇게 내 목숨까지 위험해질 일인 거야?”
[무한환생] 능력이 사라지면 다시 환생할 일은 없겠지만.
현생이 더욱 소중한 서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서준의 물음에 파르비타가 설명했다.
“생의 도서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알지?”
“환생한 기억들이 너무 많이 쌓여서 정신이 붕괴되는 걸 막기 위해서 전생들이 만들었잖아.”
오래된 기억은 삶의 책으로 봉인하듯 하고 정신이 유지될 수 있을 만큼의 기억만 남기는 것이 생의 도서관의 목적이었다.
서준의 말에 파르비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저 앞으로의 환생에 쓸모없는 기억이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생의 도서관이 만들어졌지. 게다가 원래는 전생이 죽고 난 후에야 삶의 책이 만들어졌어. 삶의 책의 내용도 지금처럼 자세하지 않고 부실했지.”
파르비타가 말을 이었다.
“그때는 무한환생의 힘이 더 강했고 생의 도서관은 보조에 불과했거든.”
초창기에는 생의 도서관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었다. 그저 쌓여 있는 쓸모없는 기억들을 보관하는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삶의 책들이 쌓이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생의 도서관의 존재감이 커지기 시작한 거야. 힘이 강해진 거지.”
그러면서 삶의 책의 집필 방식 또한 바뀌었다.
죽음 후에 쓰였던 것이 결국 현재의 삶과 동시에 쓰이고 있는 지금처럼 변해버렸다.
“그러면서 별개의 존재였던 무한환생 능력과 생의 도서관이 하나로 섞이기 시작한 거야.”
“섞여?”
서준이 눈을 끔벅였다.
“그래. 환생을 시작하면 책 또한 시작되고 환생이 끝나면서 책 또한 끝나니까. 무한환생과 생의 도서관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된 거야. 둘을 처음처럼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환생하면 새로운 삶의 책의 집필이 시작되고, ‘그’가 죽으면 삶의 책의 집필도 끝난다.
반대로.
새로운 삶의 책의 집필이 시작되면 ‘그’가 환생하고, 삶의 책의 집필이 끝나면 ‘그’가 죽는다.
파르비타가 서준의 삶의 책을 펼쳤다.
“마치 집필이 멈추자마자 네가 죽어가고,”
서준은 맨 마지막 페이지가 윗부분만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작업하다 끊긴 것처럼.
“페이지가 책에 제대로 붙지 않아 기억이 끊긴 것처럼.”
【P.1034】
『서준이 푹신한 소파에 앉으며 웃었다.
“데려오긴 힘들지 않을까요? 종호 삼촌이랑 같은 회사잖아요.”
“살펴보기만 한다니까.”
어깨를 으쓱이는 안다호 이사에 서준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책과 연결된 페이지의 윗부분은 서준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었고,
『“안녕하세요, 배우 이서준입니다. 회사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 아닙니다. 반갑습니다.”
그에 남자도 왠지 모를 반가움과 벅참이 가득한 표정으로 얼른 손을 내밀어 서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배우 한준서입니다.”』
책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페이지의 아랫부분은 서준이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이었다.
『“……준아!”
다급하게 붙잡는 손길과 흐릿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부름을 마지막으로.
‘아…….’
서준의 눈앞은 새까맣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쓰러질 때의 상황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서준은 자신을 애타게 부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적힌 부분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바깥 상황이 어떨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쓰러진 상황이 적혀있는 부분을 읽으니 한층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P.1034】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서준을 보며 파르비타가 말했다.
“그래서 ‘이서준’의 삶을 유지하는 데는 무한환생과 생의 도서관, 둘 다 필요해. 무한환생이 첫 생에게로 돌아가 버린다면,”
“……내가 죽는 거네.”
집필이 멈추고 삶의 책이 끝나고 ‘이서준’의 삶도 끝난다.
“맞아.”
파르비타가 설명을 이었다.
“무한환생이 집필대에서 강제로 네 책을 빼고 첫 생의 책을 다시 쓰기 시작한 건, 첫 생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첫 생 또한 ‘나’라서 삶의 책에 영향을 받아서, 저 삶의 책이 다 쓰이면 첫 생의 몸으로 이동할 수 있거든.”
[무한환생]과 생의 도서관은 본능적으로 그걸 알았다. 그 결과 또한.
그래서 선택했다.
첫 생의 능력인 [무한환생]은 한준서에게 돌아가기로.
전생들이 만든 생의 도서관은 이서준에게 남아 있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