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035화
아늑하다.
푹신한 구름에 몸을 파묻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무엇 하나 거슬리는 것도 없이 편안하고 따뜻하며 고요했다.
살며시 떠오른 서준의 의식이 그 편안함에 다시금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려고 했다.
‘아. 잠깐만.’
이럴 때가 아닌데.
현재 상황을 떠올린 서준이 옅어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그에 느릿하던 숨소리와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움직이지 않던 몸의 이곳저곳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기 시작했다. 굳게 닫혀 있던 서준의 눈꺼풀 아래도 움직임이 보였다.
--!
흐릿하게 들려오는 어떤 소리가 서준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가슴팍에서 규칙적으로 느껴지는 조그마한 충격도 서준을 깨우는 데 한몫했다.
--ㅇ!
정신을 차릴수록 알아듣지 못할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약하게 느껴지던 가슴팍의 충격도 제법 강하게 느껴졌다. 아프진 않지만.
자신을 깨우는 것 같았다.
‘얼른 일어나야겠다.’
마침내.
완전히 정신을 차린 서준이 눈을 떴다.
끔벅거리는 시야로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미밍!”
그리고 상자도.
“……어?”
어른 주먹만 한 나무상자는 누가 봐도 예쁜 나무상자였다.
그런데 거기에 동그란 눈이 두 개 붙어있었다. 또 열린 뚜껑 안으로 작은 이빨과 혓바닥이 보였다.
“미밍!”
보물상자 형태의 몬스터, 미믹이었다.
???
서준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의 가슴팍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는 미믹을 바라보았다. 규칙적으로 느껴진 충격의 원인은 미믹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미믹은 서준도 잘 알고 있는 미믹인 것 같았다.
너무 놀라, 자신이 누워 있던 것도 몰랐던 서준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미밍이야?”
바로 아주 오래전의 전생인 자신.
어릴 적 분유 CF를 찍을 때 사용했던 능력 [(선)작은 미믹의 탐나는 포장(최상급)]의 어린 미믹.
“미밍!!”
서준이 깨어난 걸 보고 아주 기쁜 듯, 허공에서 두 배로 폴짝거리고 있던 미믹, 아니, 미밍이 맞다는 듯 허공을 날아다녔다. 날 수도 있나 보다.
“……꿈인가?”
전생의 자신이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다니.
꿈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근데 꿈은 아닌 것 같은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과 달리, 피부에 닿는 현실감은 진짜였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누워 있었던 것 같은 폭신한 침대도, 덮고 있었던 새하얀 이불도, 베고 있었던 베개도.
그리고 미밍의 등장에 당황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책꽂이들과 삶의 책들도 진짜였다.
“여긴 생의 도서관이잖아.”
눈을 끔벅이며 중얼거리는 서준에 미밍이 맞다는 듯 미밍! 하고 대답했다. 미밍은 어느새 서준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언제 여기 온 거지?”
서준이 으음, 하고 신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내려올 때.
“오! 일어났네.”
낯설지만 익숙한, 아주 오래전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밍! 미밍!”
“그래, 그래. 잘 깨웠어.”
하고 말하며 다가오는 목소리의 주인을 서준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파르비타?”
동그랗게 변한 검은 눈동자에 서준의 또 다른 전생, 파르비타가 유쾌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나.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지?”
서준이 안다호에게 선물한 나침반에 새겨진 능력, 최종목표를 위해 최선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 [(선/제작)황금 인어 파르비타의 나침반(최상급)]의 주인, 파르비타.
서준이 알아봐 준 것이 반가운 듯 활짝 웃고 있는 인어는 한 뼘쯤 되는 크기로 삶의 책에서 읽었던 대로 황금색 머리칼에 푸른빛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밍처럼 공중에 떠 있었는데 허리춤에 마치 물로 만든 튜브 같은 것을 끼고 있었다. 그 물빛 튜브 아래로 군청색의 인어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어, 그래. 안녕……?”
미밍에 파르비타까지.
둘이나 등장한 전생에 서준은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생의 도서관에 이런 기능이 있었나?’
기억을 탈탈 털어보아도 그런 기능은 없었던 것 같지만,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서준의 기억에만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아마 ‘현재의 몸’의 수준에 맞춰 열리던 도서관의 문들(상급, 최상급 문)처럼 어떤 특정 조건을 만족해 전생의 삶들이 이렇게 실체화하여 나타나게 된 게 아닐까.
뭐, 어찌 됐든 간에.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지만, 반가워. 전생의 나.”
웃으며 손을 내미는 서준에 파르비타도 아하하하! 웃으며 작은 손으로 서준의 손가락을 붙잡고 악수하듯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도 반가워.”
“미밍!!”
“미밍이도 반갑대.”
그에 서준이 오, 하고 감탄했다.
“미밍이랑 말이 통하는 거야?”
“아니. 감으로 때려 맞히는 거야.”
“미밍!?”
파르비타의 충격고백에 미밍이 화들짝 놀랐다. 마치 ‘그랬어요!?’ 하고 놀라는 듯했다.
그런 미밍의 모습에 서준과 파르비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잠깐 웃던 서준이 파르비타에게 물었다.
“너희가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는지 알고 있어?”
미밍만 있으면 어떻게 답을 듣나 싶었는데, 말이 통하는 파르비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파르비타가 답을 모른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땐 관련된 삶의 책을 찾아봐야겠지.’
아직 못 읽은 삶의 책들이 너무 많아서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알고 있어. 근데 설명은 좀 이따가 해줄게, 서준. 서준이라고 불러도 되지? ‘나’라고 부르면 헷갈리잖아. 너도 나고 나도 나인데.”
“그래, 편하게 불러. 나도 파르비타라고 부를게.”
“좋아. 먼저 소개할 얘들이 있어.”
파르비타가 웃으며 몸을 돌려, 마치 바닷속에서 헤엄치듯 허공을 헤엄쳤다.
“소개할 얘들?”
미밍을 머리에 얹은 서준이 그런 파르비타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긴 서준이 아기 때부터 드나들었던 생의 도서관이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바로 선의 도서관 입구.
그다지 멀지 않은 길 끝에 문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서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상급의 문이 열렸을 때 만들어진 책상과 의자, 그리고 최상급의 문이 열렸을 때 만들어진 침대가 보였다.
‘왜 저기서 깨어났지?’
보통 생의 도서관에 올 때는 도서관 밖인 복도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선의 도서관에 갈지, 악의 도서관에 갈지 선택하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부터 선의 도서관에서, 그것도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로 깨어났다.
‘……깨어난 것도 좀 이상해.’
서준은 언제나 생의 도서관에서 ‘눈을 떴다’.
몸은 잠들지만 정신은 멀쩡한 상태이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는 게 아니라 눈을 감았다 뜨는 정도의 느낌만 느끼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확실히 정신까지 잠이 든 상태였다.
물론 서준도 생의 도서관에 오지 않고 잠을 푹 잘 때도 있지만, 생의 도서관에 올 때는 항상 ‘도서관에 가자.’고 생각하고 방문했었다.
지금처럼 자던 중에, 도서관에 가겠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으으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서준은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어, 그냥 파르비타가 설명해 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밖은 괜찮겠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고, 다호 형이 알아서 해줄 터였다.
서준보다 앞서 간 파르비타가 굳게 닫혀있는 선의 도서관 문을 열었다.
한 뼘밖에 안 되는 몸으로 잘도 저 큰문을 여는구나, 생각한 서준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문의 무게가 느껴진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아기 때도 잘 열었고.
“자! 소개할게.”
생의 도서관의 복도로 나간 파르비타가 말했다.
파르비타의 옆에, 그러니까 허공에 네 명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네 존재가 한눈에 누구인지 알아본 서준이 작게 웃고 말았다.
파르비타가 ‘얘들’이라고 말할 때부터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진짜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이쪽은 제루엘. 누군지 알지?”
“반갑다! 이렇게 만나다니, 신기한걸!”
파르비타와 마찬가지로 한 뼘 크기의 제루엘이 자그마한 손을 내밀었다.
여덟 개의 순백의 날개와 새하얀 옷, 들고 있는 날카로운 창이 삶의 책 그대로였다.
“나도 반가워.”
서준이 손을 내밀어 그 작은 손과 악수했다.
정말로 반가운 게 [쉐도우앤나이트]로 WTV영화제에 후보에 올랐을 때, 서준과 에반 블록이 공동 수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던 것이 바로, 진심으로 바라면 이루어지게 만드는 [(선)천신 제루엘의 축복(최상급)]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기록석.”
“안녕. 네 이야기 정말 재미있더라.”
바위 같은 딱딱해 보이는 피부를 가진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했다.
이야기를 좋아하다 결국 신까지 된 존재답게 인사말도 ‘이야기’에 관한 것이었는데,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 이야기라고?’
생의 도서관에서 내 삶을 지켜봤다는 건가?
이렇게 실체화한 데다가, 본인이 살던 세계의 소문을 즐겁게 듣던 존재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네 능력이 많은 도움이 됐어.”
서준이 마음 편하게 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세계의 기록을 수정해 ‘배우 이서준’과 ‘군인 이서준’을 나누게 해줬던 [(선) 기록석의 파편(최상급)].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쪽은 천마야.”
“천마.”
딱봐도 무시무시한 기운이 흐르는 켄타우르스(역시 한 뼘 크기다.)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말의 몸통 쪽에 검과 활, 창과 도 등의 무기가 매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악)천마의 만병지왕(최상급)]
읽기는 했지만 마기 때문에 쓰지는 않았던 능력이었다.
“좀 길게 말하면 안 돼?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좀 더 이야기해도 좋잖아.”
“싫다.”
투닥대는 것 같지만 그렇게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파르비타는 선의 삶, 천마는 악의 삶인데도.
“사이가 그렇게 나쁘진 않나 봐?”
서준의 물음에 파르비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도 조금 전에 만났거든.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중요한 일?
서준이 고개를 갸웃할 때, 파르비타가 마지막 존재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은 리치왕.”
“반갑습니다. 당신이 바로 후세의 저로군요.”
두껍고 검은 로브를 입고 자신의 키보다 큰 마법 스태프를 든 해골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쪽도 천마 못지않게 어둡고 소름 끼치는 기운이 가득했다.
그래도 어쩐지 친근감이 드는 건 왤까.
깊게 쓴 모자 아래로 보이는 두 개의 녹빛 때문일까.
“혹시 이름이 에드문드신가요?”
“아닙니다.”
[(악) 부활한 리치왕의 라이프베슬(최상급)]의 삶의 책을 읽어서 리치왕의 본래 이름은 이미 알고 있던 서준이었지만, 어릴 때가 생각나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아. 자기소개는 다 끝났으니까 이제 설명해줄게, 서준.”
파르비타의 말에 작게 웃고 있던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근데 많이 중요한 이야기야, 파르비타?”
“음. 왜?”
파르비타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현실에서 누구랑 만나기로 약속했거든. 아마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됐을 거야.”
서준은 오늘 2시에 오기로 한 한준서 배우를 떠올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호 형이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든 것 같은데, 얼른 일어나야 해.”
서준의 말에 리치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거기서부터 끊긴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