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021화
쌀쌀한 바람이 부는 11월.
축제 같았던 WTV 영화제와 영화제에서 아주 깊은 인상을 남긴 패션브랜드 아레시스의 이야기로 패션계가 떠들썩하고, 뜬금없는 시금치 대란과 함께 때늦은 담력시험이 나오려고 들썩일 때.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마치고 코코아엔터로 온 서준에게도 전혀 예상 못 한 제안이 도착해 있었다.
“봄이 애니메이션으로 나온다고요?”
서준의 개인 연습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편안한 의자에 서준과 최태우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래. 작년부터 스튜디오 꿈에서 어린이 연극 봄을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있었대.”
제안서를 본 서준이 놀란 듯 눈을 끔벅이자, 최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정말요? 기사로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애니메이션의 ㅇ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초기에 말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완성될 즈음 홍보하려고 했대. 청룡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하긴 그 ‘봄’이다.
나온 지 17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아이들과 부모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봄].
실패할 것 같지도 않고, 성공한다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리고 사람이 많으면 언제나 문제가 생기고는 했다.
“그럼 제작비는 어떻게 했대요?”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투자를 받는 이상 소문이 아예 안 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을 놓칠 코코아엔터도 아니었고, 1팀이 [봄]에 대한 걸 서준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을 리도 없었다.
‘그럼 아예 투자를 안 받았다는 소리인데…….’
서준의 물음에 최태우가 대답했다.
“ATR재단에서 전부 투자했대.”
“아하.”
‘ATR재단이라면 충분하지.’
어린이 연극 [봄]과 [MOEB-436]을 올렸던 극장, 은하수센터도 ATR재단의 것이었고, 서준이 졸업한 미리내예고도 ATR재단 소속이었다. 또 서준이 2년마다 한 번씩 건강검진을 하고 있는 병원도 ATR재단의 병원이었고.
확실히 돈도 많고 지원도 좋은 곳이라서 제작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지금 알려주는 걸 보면 거의 다 완성됐나 보네요?”
“그래. 아직 목소리도 넣어야 하고 편집도 해야 하지만 거의 다 끝나가고 있대. 개봉은 내년 2월에 할 예정이고.”
“겨울방학이네요.”
아이들이 보기에 딱 좋은 시기였다.
3월까지 이어지면 새로 사귄 친구들과도 보러 갈 수도 있고.
“먼저 읽어봐.”
“네.”
최태우는 잠시 서준이 제안서를 읽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제안서 내용을 요약하자면, 서준이 예상했던 대로 ‘청룡님’의 목소리에 관한 것이었다.
스토리는 연극 [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마지막 장면에서 청룡님이 등장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건 대본이야.”
서준은 최태우가 건네준 애니메이션 [봄] 대본도 읽었다.
“좋아요. 하고 싶어요.”
서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 시원스러운 대답에, 서준이 한다고 할 것 같으면서도 왠지 비슷한 내용이라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최태우가 이유를 물었다.
“연극이랑 비슷한데 하고 싶은 거야?”
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17년이나 지났잖아요. 책이나 영화도 몇 년 지나서 보면 다른 느낌이 드는데, 같은 작품을 연기하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해서요.”
드라마나 영화는 한 번 촬영하고 나면 리메이크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배우를 쓰는 경우는 아예 없다.
그나마 연극이나 뮤지컬이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올리고 같은 배우를 쓸 때도 있긴 하지만, 17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 진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터였다.
‘연극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장르가 바뀌긴 했지만.’
연극 [봄]에서도 목소리만 나왔다는 걸 생각해 보면 같은 연기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또 애니메이션 더빙은 처음 해보는 거니까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서준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다큐멘터리 [지금 우리는/바다에 있다]의 내레이션을 맡은 적이 있긴 했지만, 애니메이션 더빙은 처음이었다.
“그래, 알았어. 그럼 한다고 연락할게.”
최태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녹음은 언제 한대요, 태우 형?”
“1월에 한다고 하더라. 아마 제일 마지막에 할 것 같대. 스케줄이 있으면 더 미뤄줄 수도 있다고 하던데, 어때?”
“겨울방학이니까 언제든 괜찮을 것 같아요.”
“알았어.”
최태우가 휴대폰 메모장에 메모했다.
“성우 선생님 한 분 구해줄 수 있어요, 형?”
“선생님?”
의아해하는 최태우가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바라보자, 서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빙은 처음이잖아요. 모르는 분야는 배워야죠.”
애니메이션 더빙 또한 연기.
서준은 연기를 대충할 생각은 단 1%도 없었다.
그에 최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디오 꿈에 한번 물어보고 안 되면 다른 곳에 물어볼게. 아무래도 청룡님 역할이니까 그런 캐릭터를 연기해 본 성우가 좋겠지?”
“그럼 더 좋고요.”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최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 대본을 받은 서준이 이제 연습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연기가 아니라 더빙이라서 막막할 수도 있겠……지?’
생각을 이어나가던 최태우가 멈칫했다가 이내 웃고 말았다.
그래도 연습을 하지 않을 서준이 아니었다.
“끝나면 연락해, 서준아.”
“네. 그럴게요.”
최태우가 떠나고.
서준이 대본을 바라보았다.
“청룡님 더빙이라…….”
자신도 물론 기쁘지만.
이번에도 활약해 줄 [(선)블루드래곤 해츨링의 약한 피어]도 기뻐하고 있을 것 같았다.
* * *
스튜디오 꿈.
모든 직원이 [봄]의 완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팀장들은 조금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이틀 전 코코아엔터로 보낸 제안서의 답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대로 살펴보려면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뭐가요, 팀장님?”
“아니야! 아무것도!”
직원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서준 배우가 섭외된다면 기쁜 일이지만, 아니라면 사기만 꺾는 일일 테니까.
‘……혹시 흥행 못 할 것 같나? 재미가 없었나!?’
워낙 이서준이 작품 보는 눈이 좋다 보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더욱더 초조해졌다.
‘답장은 다음 주쯤에 오려나?’
하고 생각할 때, 단톡방에 메시지가 하나 떴다.
>이서준 배우 섭외 완료!
>모두 회의실로!
“으아아아!”
벌떡 일어나 환호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회의실로 달려가는 팀장에 직원들이 화들짝 놀라 눈을 끔벅였다.
“……무슨 일이시래?”
그게 한 달 후 본인들의 모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 *
금요일.
[섬섬생활] 10화가 방송되었다.
-여름 다 지나갔는데 납량특집.
=원래 이냉치냉인 거임ㅋㅋ
네 배우가 대나무숲 앞에 모였다.
담력시험 코스가 그림으로 나타났다.
대나무숲에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테이블과 도장이 있는데 거기서 도장을 찍고 같은 길로 되돌아오는 코스였다.
[섬섬생활 제작진 협찬.]
-협찬ㅋㅋㅋ
=제작진도 진심인ㅋㅋ
같은 길을 사용하니 갈 때 한 번, 올 때 한 번. 총 2번을 놀래킬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었다.
“어느 팀부터 할까요?”
서준의 물음에 민재원이 손을 들어 올렸다.
“우리가 준비하는 데 오래 걸려서 먼저 했으면 좋겠는데, 괜찮을까?”
“네. 괜찮아요.”
서준과 한지호가 시원하게 승낙했다.
-강자의 여유ㅋㅋ
-민재원이랑 백건하는 뭘 할까?
=뭐 깜짝 놀랄 만한 거 설치할 것 같다. 민재원 손재주 좋잖아.
=그러네!
그렇게 민재원과 백건하, 제작진 일부가 대나무숲으로 들어가고, 서준과 한지호는 가져온 텐트를 쳐서 대기실을 만들었다.
“으스스하네.”
“그러게. 밤에 여기 온 건 처음인데.”
-전혀 안 무서워 보이는데.
=22 아늑해보인다ㅋㅋ
“고구마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지금 가지고 올까?”
태평한 두 배우와 제작진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인터뷰도 잠시 진행했다.
그사이, 민재원과 백건하가 삽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엉? 삽질?
=ㅋㅋ뭐하냐고ㅋㅋ
제작진이 비춰주는 밝은 조명 아래 드러난 얼굴들이 아주 진지했다.
-왜 진지한 건데ㅋㅋㅋ
-아예 귀신의 집을 지을 것 같은 느낌ㅋㅋ
-민재원도 개웃기다니까ㅋㅋㅋ
“이 정도면 될까요, 형?”
“그래. 너무 깊게 파면 위험하니까. 조심해야지.”
-이 상황에서도 안전까지 챙기는ㅋㅋ
-담력시험 안 했으면 어떡할 뻔 했어ㅋㅋㅋ
민재원과 백건하가 뚝딱뚝딱 코스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바닥을 조금 파서 푹신한 나뭇잎들을 깔아두기도 하고, 단단한 나무를 깔아 시소처럼 덜컹거리는 길을 만들기도 했다.
또 길 양쪽에 서 있는 대나무에 투명한 실을 연결해서 실을 잘라내면 위에서 흰 천이나 솜인형 같은 것이 떨어지는 장치도 여럿 만들었다.
-뭘 잔뜩 가져오나 했더니ㅋㅋㅋ
=너무 진심인 거 아니냐고ㅋㅋ
-이대로 놔두면 계속 쓸 수 있을 것 같다ㅋㅋㅋ
-민재원 귀신의 집도 만들어봄?
=백건하가 아이디어 낸 게 아닐까?
마침 두 사람이 회의하는 영상이 흘러나왔다.
백건하가 아이디어를 내면 민재원이 어떻게 만들 건지 궁리하는 모습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함.
=그게 여기서 쓸 말이냐고ㅋㅋ
길을 따라 열심히 장치를 만드는 백건하와 민재원의 모습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다시, 서준과 한지호의 모습이 보였다.
카메라로 밤의 대나무숲과 죽묘도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제 출발해도 된다고 합니다.”
주예진 피디의 말에 서준과 한지호가 웃으며 대나무숲으로 향했다. 손전등과 도장을 찍을 종이, 카메라가 고정된 모자와 개인캠도 잊지 않았다.
“불빛이 그렇게 세지는 않네.”
두 배우는 약한 손전등의 불빛으로 길 이곳저곳을 비추며 움직였다.
부스럭부스럭.
조용한 가운데, 어제 태풍으로 떨어진 듯한 대나무 잎들이 밟히는 소리와 대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가 음산함을 더했다
-밤+대나무숲=무서움.
=22 그냥 가도 무서운데;;;
서준과 한지호는 주위를 살펴보며 걸었는데, 딱히 주춤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어 보였다.
-즐거워보이네ㅋㅋ
=귀신의 집 재밌지!
-난 한 번도 가본 적 업서ㅔㅐㄱㅂ!
!!!
화면 위쪽에서 뭔가 휙 떨어졌다. 조금 놀란 듯한 한지호의 움직임에 모자에 달려 있던 카메라도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뭔데?? 뭐야?!?
=아까 설치한 흰 천 같은데?
=알면서도 이렇게 놀라버림ㅠㅠㅠ
=효과음도 너무 잘 어울려ㅠㅠ
“와. 깜짝 놀랐네.”
뒤따라 걷던 카메라맨이 서준과 한지호를 찍었다. 둘 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이런 거까지 만들었을 줄이야.”
서준이 낚싯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흰 천을 보며 감탄했다.
“조심해야겠다.”
“그러게.”
-즐거워 보이는데요.
=웃고 있는데요.
-황금세대: 조심하자! (즐거움)
=이래서 친구구나ㅋㅋㅋ
그렇게 조심해서 걸어가는데 이번엔 발이 쑥 빠졌다. 갑작스럽게 흔들리는 카메라와 적절한 효과음에 시청자들이 화들짝 놀랐다.
“오. 놀이공원 온 것 같아.”
서준과 한지호는 재미있어했다.
-담력시험(feat.시청자)
=원래 이런 건 출연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가 재미있어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ㅋㅋㅋ
-설치하는 거 봤는데 나올 때마다 놀람ㅋ큐ㅠㅠ
=나도ㅋㅋㅋ
가끔 놀라는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끝까지 재미있어하며 테이블에 도착한 서준과 한지호는 종이에 도장을 찍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사이, 백건하와 민재원이 장치를 일부 수정해서 두 배우를 놀래키려고 노력했지만, 대신.
삐요오오-!!
비명을 지르는 닭인형이 밟히는 소리와,
-ㅅㅂ저거 뒤에! 저거 뭔데?! 손? 손이야??
-나만 보여?? 저 하얀 거!!
-무섭다고ㅠㅠ
시청자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왜 한 번도 안 놀라는 거예요, 서준이 형! 나 봤으면서! 눈도 마주쳤으면서! 지호 형도요!”
하얀 거, 소복을 입은 백건하가 서준과 한지호의 어깨를 붙잡고 가볍게 흔들면서 늘어졌다.
“음. 역시 놀래키는 건 힘드네.”
마치 잘린 것처럼 손과 발만 하얗게 칠하고 내밀고 있었던 민재원도 아쉬워했다.
-백건하랑 민재원이었구나……
=아니 알고 있었잖아?ㅋㅋ
=+)멀리 있어서 진짜인 줄 알았지ㅠㅠ
=22 서준이랑 한지호 배우는 못 본 것 같았단 말이야ㅠ
재미있어만 하는 두 배우 대신 시청자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 제작진이 배우들은 보지 못한 것처럼 우연히 찍힌 것처럼 연출한 덕분이었다.
-근데 서준인 눈도 마주쳤다는데ㅋㅋ하나도 안 놀람.
=서준이라면 ‘오, 건하네.’ 하고 연기 평가했을 것 같다ㅋㅋ
“아뇨, 재원이 형. 진짜 놀랐던 적도 몇 번 있어요. 비명 지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맞아요. 놀라기도 했고 재미도 있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한지호와 서준의 말에 민재원이 웃었다.
“재미있으면 안 된다니까요오…….”
백건하만 진심으로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