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997화
묘한 적막이 흘렀다.
지금까지 나이트 진에게 했던 팬텀의 행동들이 저절로 떠올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 아이가 너야, 팬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나이트 진과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 팬텀을 보고 체셔 캣이 물었다. 놀라던 것도 잠시,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그에 팬텀은 이를 갈면서도 마른 세수를 하던 손을 아래로 내리고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어깨가 축 늘어지고 넋이 나간 얼굴을 보니 또 한 번 퇴마당한 유령 같았다.
음. 하고 나이트 진과 팬텀을 번갈아 보던 화이트 블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팬텀, 로건 테이트가 당시의 사고에서 구해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모르지만, 그렇게 나쁜 성정은 아니니 나이트 진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을 터였다.
‘지금 태도만 봐도 그렇고.’
스켈루스와의 전투 때도 분위기가 제법 괜찮았었다.
“서로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비켜 드리죠.”
누군가 함께 있는 것보다는 나이트 진과 팬텀 둘만 있는 것이 이야기를 나누기 편할 터였다.
테일러 국장도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이레귤러스가 한 팀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이런 대화의 자리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버서커도 그랬다.
-에이. 난 더 보고 싶은데……!
매드해터도 솔직히 체셔 캣과 같은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할 정도는 아니라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체셔 캣 케어 프로그램’(게임처럼 먹이를 주고 간식을 주고 놀아주는)으로 체셔 캣을 자신이 들고 있는 노트북으로 끌고 왔다. 조사할 것도 있었다.
멤버들이 나갈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던 팬텀은, 회의실에 정말로 자신과 나이트 진만 남자 초조해졌다. 나이트 진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있었다.
젠장. 젠장……!
온갖 거친 말들이 팬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과거의 자신에게 한 대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했을 것 같다고 생각한 팬텀은 제 성격이 문제이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방법을 조금 바꿔야겠다고 반성했다.
나이트 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말도 없이 빤히 바라보고 있어 팬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새삼 나이트 진이 대단해 보였다.
분명 사이가 안 좋았고 서로 싫어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고맙다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걸까.
팬텀도 히어로 형을 만난다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어렸을 때 일인 데다가 일주일간 행방불명되었던 상태라서, 경찰은 절벽을 올라갔다는 아이의 증언에 꿈일 거라고 말했지만, 남아 있는 피가 묻고 해진 재킷을 소중히 품에 안은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꿈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히어로 형이 엄마와 자신을 구해 절벽을 올랐었다.
얼굴이나 목소리는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히어로 형은 아주 힘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자신을 구해줬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난다면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형 같은 히어로가 되고 싶어서 노력했다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그건 조금 힘들었다고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때의 기억이 옅어질수록 하고 싶은 말은 쌓여갔다. 멋지게 재회해 당신이 구해준 아이가 많은 사람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근데 그게 나이트 진이었다니.’
스쳐 지나가는 과거에 팬텀의 머릿속이 다시 한번 아득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았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히어로가 됐네.”
팬텀이 번쩍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같은 팀도 됐고요.”
나이트 진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히어로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안심시켜 주던 그 얼굴.
나이트 진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팬텀을 바라보았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만났던 아이가 이렇게 자라다니. 그리고 정말로 히어로가 되어(성격은 좀 그랬지만) 사람들을 구하고, 쉐도우맨을 구했다니 신기했다.
또 묘한 기분이긴 했지만, 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나이트 진의 얼굴에 보였다.
하아.
어쩐지 기운이 쭉 빠졌다.
남아 있는 자존심과 민망함, 죄책감과 초조함이 전부 사라진 것 같았다.
잘못한 어린아이처럼 나이트 진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팬텀이 제대로 마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나이트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과는…… 네가 날 구해줬던 사람이라는 걸 알기 전부터 하고 싶었어. 난 네가 일반인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팬텀의 입으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이트 진은 말을 끊지 않았다.
“괜히 몸도 마음도 다치는 일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내 방법이 잘못됐다는 걸 알았고, 네 생각을 듣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네가 진심으로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팬텀은 정중히 사과했다.
“지금까지 미안했다. 네가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사과할게. 물론, 용서해달라는 건 아니야. 그저, 내가 잘못했다는 거다.”
“확실히 그건 팬텀이 잘못했어요.”
팬텀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우상이었던 이에게 듣는 질책은 많이 아팠지만, 그것 또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저도 가만히 참고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이어서 들려오는 가벼운 목소리에 팬텀이 고개를 들었다.
나이트 진이 작게 웃었다.
“제이도 많이 혼내줬고요. 그리고, 쉐도우맨을 구해줬잖아요.”
다시 생각해도 숨이 멎을 것 같은 그날.
그건 팬텀의 모든 잘못을 덮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나이트 진은 팬텀을 용서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깊이 묻어두었던 것만 풀고.
“이레귤러스에 제가 필요한 거죠?”
“……물론.”
‘이레귤러스엔 네가 필요 없다는 거다.’라고 내뱉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팬텀은 혀를 깨물었다.
“……같은 팀이 되어줘서 고맙다.”
“별말씀을!”
나이트 진이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나 팬텀이 스스로를 용서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때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사과를 끝낸 팬텀은 이번엔 오래 간직해 두었던 감사를 전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거야. 어머니도 항상 네게 고마워하셨어.”
팬텀의 진심 어린 감사에 나이트 진은 조금 민망하면서도 좋았다. 20년 전 일이라는 게 새삼 다가오기도 했다.
“저야말로 쉐도우맨을 구해줘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웠고 미안했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은 감사와 사과는,
“똑똑- 끝났나요?”
매드해터의 말에 끝을 맺었다.
후후후-
웃으며 매드해터와 화이트 블러드가 들어왔다. 버서커와 테일러 국장도 훈훈한 분위기에 옅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큼.
이런 상황이 처음인 팬텀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고, 나이트 진은 웃으며 밖에서 대화가 끝나길 기다려준 이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사과했어요, 팬텀?”
“했어.”
“팬텀이 백 번 잘못했어요.”
“맞아. 내가 잘못했어.”
으에.
매드해터와 체셔 캣이 순순한 팬텀의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적은 피해로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테일러 국장이 말했다.
“별말씀을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하고 말하는 히어로들에 테일러 국장의 미소가 짙어졌다.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이레귤러스.”
이레귤러스가 믿음직스럽게 웃었다.
* * *
천천히 어두워지는 스크린에도 송유정과 임예나는 입을 쩍 벌린 상태였다. 다른 관객들도 그랬다.
아니. 잠깐. 아니!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음악이 흐르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해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미친…… 미친……!”
안 차렸나 보다.
“으으……!”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송유정과 임예나는 참았다.
쿠키 영상까지 다 보고 나서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 끊김 없이, 실컷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아 참을 수가 없었지만, 견뎌냈다.
“쿠키!”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이름들이 올라오던 엔딩 크레딧이 멈추고 화면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눈에 익은 이레귤러스의 훈련실이 보였다.
탁! 타아악!
나이트 진과 팬텀이 1 대 1로 훈련하고,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 매드해터가 구경하고 있었다.
나이트 진과 팬텀이 1 대 1로 훈련하는 모습은 이전에도 나왔지만, 그때는 아주 살벌했다고 한다면 지금은 제법 진지하면서도 분위기가 좋았다. 저절로 흐뭇해졌다.
그때, 제이가 불쑥 나타나 언제나 그랬듯이 팬텀의 손목을 잡았다. 물론 장난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통하지 않았다.
팬텀이 손목이 잡히는 느낌이 들자마자 투명화를 사용해서 슥- 하고 그림자를 통과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헹. 이제는 못 하겠지?”
에너지가 제법 들기는 하지만 이제는 살아 있는 생물도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자를 생물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에 약이 오른 제이가 그림자를 길게 늘여 몸통박치기를 했다. 애정과 장난을 가득 담아서.
억!
방심하고 있던 팬텀이 옆구리를 강타하는 공격에 옆구리를 잡고 쓰러졌다. 제이가 의기양양하게 그런 팬텀의 위에 올랐다.
“이젠 손목 대신 계속 저러겠네요.”
“훈련도 되고 좋지.”
화이트 블러드와 버서커의 말에 매드해터와 나이트 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훈련이 끝나고.
매드해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파티해요!”
“파티?”
“못했잖아요. 이레귤러스 결성 축하 파티! 빌런도 빌런이지만, 저기 저 은인도 몰라본 배은망덕한 분 때문에요.”
팬텀이 끙- 앓았다.
“좋죠, 파티. 어디서 할까요?”
“퍼스트 본부는 안 되겠고.”
짧은 이야기 끝에 장소는 팬텀의 집으로 정해졌다.
화면이 바뀌고.
팬텀, 로건 테이트의 집.
평소도 제법 깔끔했지만 한 번 더 집을 치우고 있던 로건 테이트가 벽에 걸린 어머니 사진 옆에 있는 낡은 재킷을 바라보았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그 재킷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수선해 줘서 낡았지만 깨끗했다. 어릴 때는 종종 그걸 입고 히어로 흉내를 내기도 했다.
“음.”
재킷을 들어 방으로 향하려던 로건 테이트는 이내 머리칼을 헤집더니 다시 어머니의 사진 옆에 재킷을 조심히 걸어두었다.
띵동-
아주 드물게 울리는 초인종이 울리자, 로건 테이트가 현관문을 열었다.
각자 음식을 챙겨온 윌리엄 리, 앨리스 잭슨, 루크 메이너드, 워런 어빙이 거기에 있었다.
“와! 여기가 로건 집이에요?”
생각보다 엄청 깨끗하다고 말하며 구경하던 앨리스 잭슨이 어머니 사진 옆 재킷을 발견했다.
“어, 이거!”
-저거 윌리엄 옷이잖아?
앨리스 잭슨의 휴대폰 카메라로 함께 파티에 참여한 체셔 캣이 말했다. 모두 놀란 눈으로 로건 테이트와 낡은 재킷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걸 가지고 있었어요, 로건?”
윌리엄도 그랬다.
“……그래.”
민망함에 로건 테이트는 ‘역시 그냥 치워둘걸 그랬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내 나이트 진이든 누구든 그의 히어로임에는 변함없다고 생각하며 그저 뒤통수만 매만졌다.
“그랬군. 이런 걸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요.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엄청났는데 말이죠.”
“20년이나 지나긴 했지만, 주인이 나타났으니까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윌리엄?”
“음. 그럴까?”
“파티나 해.”
놀리는 멤버들에 얼른 부엌으로 향하는 로건 테이트.
그에 다들 다시 한 번 빵 터졌다. 어느새 TV로 몸을 옮긴 체셔 캣은 아주 뒹굴고 있었다.
잠시 후.
작고 아늑한 거실에 모여 웃고 떠들며 음식을 먹는 이레귤러스의 모습이 보였다.
“저 한국 음식 먹어보고 싶었는데! 체셔 캣은 츄르 먹어.”
-츄르! 츄르으!
“츄르도 먹을 수 있는 거냐. ……근데 진짜 가지고 갈 건 아니지, 재킷?”
“하하. 생각해 보고요. 이거 맛있네요, 워런. 퍼스트 본부 음식인 것 같은데 저 처음 먹어봐요.”
“주방장 특별 요리다. 근데 이건 무슨 요리지, 루크?”
“120년 전쯤에 자주 해먹던 음식이에요. 제법 맛있어요.”
오…….
하고 감탄한 히어로들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한 팀이었다.
---!
그와 동시에 나오기 시작하는 [이레귤러스]의 OST.
크흡!
꽉 막힌 해피엔딩(아직 1편이긴 하지만) 쿠키 영상에 송유정과 임예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초반의 난리는 어디 가고 정말로 한 팀이 된 이레귤러스의 모습에 감격의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