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992화
“오셨습니까!”
멍하니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레귤러스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퍼스트의 전투요원들과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연구원들이었다.
“닫힌 웜홀이 열리길래 적인 줄 알았습니다.”
빌런의 기지에 쳐들어간 이레귤러스가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고, 상황도 상황이었던 터였다.
“어떻게 된 건가요?”
화이트 블러드의 물음과 동시에,
콰앙!
비젯의 공격에 격추되어 떨어지는 거대박쥐를 보며 버서커가 외쳤다.
“일단 저것들부터 막아야겠군.”
그에 고개를 끄덕인 이레귤러스가 움직였다.
나이트 진은 그림자 이동을 통해, 팬텀은 투명화와 비행으로 빌딩 벽에 붙은 괴생물체들을 제거하며 내려갔다.
화이트 블러드는 하늘을 날아 화려한 마법을 날리고, 버서커는 비젯을 조종해 날아다니는 괴생물체들을 격추시켰다.
매드해터는 연구원들에게 빌런의 기지에서 가져온 정보들을 전달했고, 체셔 캣이 그런 이레귤러스를 도왔다.
-왔군요.
통신기로 테일러 국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사할 틈도 없이 설명부터 했다.
-여러분들이 웜홀을 통과하고 통신이 끊겼을 때, 네 개의 웜홀이 더 열렸습니다.
[조금 전]
이레귤러스가 웜홀에 들어간 후.
테일러 국장과 매드해터가 연락을 주고받던 중, 통신이 끊어졌다.
그에 대비하고 있던 연구원들과 테일러 국장이 움직일 틈도 없이, 에너지 감지 장치가 삐이-- 소리를 내며 울었다.
“네 곳에서 웜홀 에너지 감지! 장소는…… 센트럴 파크입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즉시 요원들을 투입해!”
테일러 국장이 외쳤다.
그와 동시에 분주해진 퍼스트 본부가 보이고, 비젯들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장면이 보였다. 센트럴파크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대피하는 모습도 비쳤다.
어수선한 가운데, 네 개의 웜홀이 차례차례로 열리기 시작했다.
세 개의 웜홀이 센트럴파크의 일정 구역을 둘러싸듯 열리고, 마지막 웜홀이 그 중앙, 센트럴파크 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바깥의 세 개의 웜홀에서는 괴생물체들이 쏟아져나오고,
-중앙에선 빌런들이 나타났습니다.
아직 옥상에 있던 매드해터가 해트8의 카메라를 통해 살펴보았다.
검붉은 구체의 아래, 미처 보지 못했던 기계가 있었다. 빌런으로 보이는, 무기를 든 이들도 있었다.
“웜홀 생성 장치 같은데, 이것저것 더 붙어 있는 것 같아요. 아마…… 다른 웜홀들도 제어하는 장치가 아닌가 싶어요.”
-네. 지금은 닫혔지만 웜홀이 열리고 저 기계가 나타났습니다.
-그럼 하늘에 있는, 저것도 빌런들이 웜홀을 통해 옮긴 건가요?
불길한 검붉은 구체.
지상에 도착해 괴생물체 하나를 베어 넘긴 나이트 진의 말에 다른 비젯에 타고 지시를 내리고 있던 테일러 국장의 표정이 흐려졌다.
-아뇨. 저건…… 센트럴파크에서 나타난 겁니다.
“센트럴파크에서?”
마찬가지로 지상에 도착한 팬텀이 염력으로 괴생물체를 후려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보스로 보이는 남자가 주문을 외우는가 싶더니, 땅속에서 나타나더군요.
테일러 국장의 말과 함께 화면이 바뀌고.
묵직한 음악과 함께.
마치 옛날이야기 속 마법사가 입을 듯한 로브를 입고 얼굴을 가릴 정도의 깊은 후드를 뒤집어쓴 빌런이 두 팔을 쫙 벌리고는 무어라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 --!”
그러자 검붉은 연기가 마치 글자처럼 허공에 나타나고, 글자들은 이내 센트럴파크의 땅에 박히며 검붉은 핏빛의 마법진이 그려냈다. 그리고 불길한 빛이 일렁이더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듯, 검붉은 구체가 천천히 땅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
낮고 소름 끼치는 빌런의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광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계속 외웠고, 제 모습을 드러낸 검붉은 구체는 천천히 하늘로 떠오르더니 결국 저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 압도적이고 불길한 모습에, 많은 일을 겪은 테일러 국장과 퍼스트 요원들마저도 질린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저 남자가 보스인 건가요?”
웜홀 제어 장치 옆.
하늘에 떠 있는 구체를 바라보며 남자가 여전히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아래, 검붉은 구체가 나타난 마법진이 점점 빛나는 것을 보니, 심상치 않은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맞습니다. 빌런들 모두 저자의 명령에 따르고 있습니다.
나이트 진의 말에 테일러 국장이 답했다. 그사이에도 괴생물체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저 구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건 제가 알 것 같습니다.”
달려드는 괴생물체를 향해 마법을 날린 화이트 블러드가 입을 열었다.
“깊고 오랜 죽음을 먹고, 새로운 신이 될지니.”
-그건?
“빌런의 기지에서 발견한 고문서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화이트 블러드의 시선이 검붉은 구체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하고 섬뜩했다.
“깊고 오랜 죽음이 바로 저것을 말하는 것이겠죠. 전부 해석하지는 못했지만, 저 힘을 흡수해서…… 신이 되겠다는 계획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하늘에 떠 있는 지금도 위압적인데, 제대로 활용할 인간에게 흡수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때 한 비젯에서 발사된 두 개의 미사일이 검붉은 구체와 빌런이 서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버서커였다.
콰아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고 모두 상태를 살폈다.
-제대로 통하진 않는군.
하지만 검붉은 구체는 조금 일그러지기만 했을 뿐, 이내 검붉은 연기들이 모여 원래 상태로 회복했다. 빌런에게로 향한 미사일도 검붉은 구체에서 나온 연기가 막아냈다.
화이트 블러드도 마법을 날려 검붉은 구체를 공격했다.
-!
역시 유의미한 타격은 아니었다.
“빌런 쪽을 공격해야겠는데.”
팬텀의 말에 이레귤러스가 동의했다.
검붉은 연기가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빈틈은 있을 터였다.
지상에 있던 나이트 진과 팬텀의 근처로 버서커가 탄 비젯이 지상에 착륙하고, 화이트 블러드도 땅에 발을 붙였다.
“웜홀 쪽은 제가 맡을게요.”
매드해터가 바닥에 발을 디디며 말했다.
빌런을 처치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괴생물체들이 얼마나 더 쏟아질지 모르는 웜홀을 막는 것도 중요했다.
“부탁할게.”
그렇게 이레귤러스가 한자리에 모이고.
빌런의 부하들이 무기를 겨눌 때.
“드디어!!”
광기가 가득한 빌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웜홀 제어기 옆.
어느새 깊게 쓰고 있던 후드가 뒤로 넘어가고 빌런의 얼굴이 드러났다. 깊은 상처들로 가득한 얼굴의 중년남자가 두 손을 번쩍 들고는 입을 쭉 찢으며 웃어댔다.
“드디어! 때가 되었도다!!”
---!
심장을 치는 묵직한 음악과 함께, 검붉은 구체의 아래에 있던 마법진이 완성되며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잠잠히 숨만 쉬던 검붉은 구체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두근두근 심장처럼 뛰는 모습 그대로 천천히 크기를 줄여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닥에 있는 마법진에 흡수되듯 아래로 내려왔다.
“이제 세상의 모든 존재가!”
남자가 환희로 가득 찬 표정으로 외쳤다. 주체할 수 없는 벅참에 목소리와 손이 덜덜 떨렸다.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표정이 굳어진 이레귤러스는 누가 신호를 보내지 않았음에도 일제히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퍼스트도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검붉은 연기가 그 모든 공격을 막아섰다.
모든 소리가 낮게 깔린 가운데, 남자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어리석도다! 안타깝도다!”
남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 광기에 휩싸인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한낱 미물인 너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이제 의식은 멈출 수 없다!”
나이트 진과 히어로들이 한껏 굳은 표정으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빌런의 말이 맞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 --! 공방을 주고받은 그 소리가 마치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그저 겸허히 무릎을 꿇고 세계를 지배할 이 월터 고든이 신이 되는 이 순간을!”
검붉은 구체가 마치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여섯 조각으로 갈라지며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 월터 고든이 흡사 신의 광휘를 온몸에 받아들이듯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음악이 마치 축복을 내리는 것처럼 들려오다, 완전히 멈추었다.
“이 세계의 새로운 법칙이 될 새로운 신의 탄생을 지켜보라!”
퍽!
하고, 무언가 짓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붉을 구체를 이루고 있던 여섯 개의 조각 중 하나가 촉수처럼 길어져 빌런을, 월터 고든을 내려친 것이었다.
?!
이레귤러스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검붉은 구체를 흡수해야 하는 월터 고든이, 오히려 공격당한 것이었다.
자작극인가? 무언가 속셈이 있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런 것 같지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 월터 고든의 부하들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생명 반응은?”
“……없어요. 전혀.”
버서커의 물음에 매드해터가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럴 것 같았다.
자동차보다 굵은 촉수가 그대로 내려찍은 상황이었다. 거짓이 아니라면 아마 뼈까지 가루가 됐겠지, 하고 생각하던 이레귤러스가 고개를 돌려 검붉은 구체였던 것을 바라보았다.
월터 고든을 그대로 짓눌러 버린 촉수는 다시 줄어들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온전한 구체가 된 그것은 여섯 개의 조각들을 활짝 펼치다 못해 뒤집어가며 천천히 땅 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쿠웅!
꽃잎 같은 여섯 개의 조각이 뒤집어져 마치 나무뿌리처럼 땅 위에 자리를 잡았다.
“저건……?”
그리고 여섯 개의 조각의 안쪽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인간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검붉은 색의 오래된 나무 같기도 했다.
상체는 인간, 하체는 나무뿌리인 온통 검붉은 색뿐인 존재였다.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에, 히어로도 빌런도 침묵에 잠겼다.
유일하게 저것을 정체를 알고 있는 월터 고든은 죽었다. 아니, 저것에게 살해당한 이상,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하긴 어려웠다.
말이 통하는 존재인가. 아닌가.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저것이 눈을 떴다.
검은자위에 흰색 눈동자가 보였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불길하던 분위기가 눈을 뜨자 한층 더 강해졌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나무뿌리 같은 촉수들을 땅에 박았다. 그리고 뻗었다.
크악!
그것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빌런의 복부로 검붉은 나무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에너지를 흡수당했다. 한 명이 아니었다. 여섯 개의 굵은 뿌리가 센트럴파크의 땅을 뒤엎고 얇은 뿌리들이 그물처럼 사방에 뻗어 나갔다.
“피하세요!”
퍼스트 요원들에게로 향하는 나무뿌리들을 베어내며 나이트 진이 외쳤다.
“젠장! 저건 도대체 뭐야!”
“다른 건 몰라도 적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팬텀과 화이트 블러드, 매서커와 버서커도 뻗어져 오는 나무뿌리를 막고 후려치고 불태웠다.
나무뿌리에 먹힌 것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캬아아악!!
센트럴파크를 둘러싼 세 개의 웜홀에서 쏟아져나와 날뛰던 괴생물체들의 몸통에도 나무뿌리들이 박혔다. 그리고 그대로 에너지를 흡수당했다. 비쩍 말라버린 괴생물체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대신 해치워주는 건 좋은데…….”
버서커가 중얼거렸다.
좋은 현상 같지는 않았다.
“저기 봐요!”
매드해터의 외침에 모두 나무인간 쪽을 바라보았다.
“미친……!”
조금이긴 하지만 분명 아까보다 커져 있었다.
지금도 커지고 있었다.
“저게 도대체 뭐냐고!”
-알아냈어!
팬텀의 외침에 뒤이어, 통신기로 체셔 캣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셔 캣은 매드해터의 지시로, 화이트 블러드가 해석한 짧은 문장을 토대로 비밀번호를 맞추듯 고문서의 글자들을 이리저리 조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지만 정보를 알아냈다.
-스켈루스!
이레귤러스가 ‘스켈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것을 바라보았다.
-고대의 악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