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991화
그런 제이의 모습에 송유정과 임예나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그동안 소중한 친구 윌리엄이 당하는 모습에 얼마나 열이 받았겠나.
오히려 지금까지 윌리엄이 참는 모습에 함께 참아왔던 제이가 대견해 보였다.
윌리엄의 앞에 우뚝 솟아 있는 제이는 윌리엄을 지키는 듯 서 있으면서도 어쩐지 화가 잔뜩 난 듯 씩씩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검은 그림자인데도 말이다.
‘CG팀 대단하다…….’
CG팀은 그저 [쉐도우맨]이나 [쉐앤나]를 찍을 때처럼 ‘보이는’(서준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그림자를 그대로 따라 CG를 만들어낸 것이지만 그걸 모르는 관객들은 그저 감탄만 할 뿐이었다.
“너 이 자식……!”
날려보내진 순간 반사적으로 투명화를 사용해 벽을 통과했던 팬텀이 이를 갈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제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제이도 지지 않고 (눈은 없지만) 날 선 눈으로 팬텀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랐던 나이트 진은 그런 제이의 모습에 이내 작게 웃고 말았고, 나머지 세 히어로들도 웃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날 이후로, 팬텀의 날 선 말과 행동에도 나이트 진은 지지 않고 반격했다.
그리고 제이도 팬텀이 방심했을 때 불쑥 나타나 팬텀의 손목을 잡고 벽으로 날려 버렸다.
이전의 경험으로 팬텀이 투명화해 대미지를 피한다는 것을 파악한 제이는 팬텀의 손목을 그대로 잡은 채로 날려 버려, 팬텀이 투명화하는 것을 방지했다. 그 때문에 팬텀은 벽에 부딪히는 타격을 그대로 받아야 했다.
“악!”
오늘도 날아가는 팬텀.
몇 번 봤던 이레귤러스가 덤덤히 행동하는 것과 달리, 그 모습을 처음 보는 테일러 국장은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익숙했다.
“……설마 파트너에게 배운 건가요, 나이트 진?”
테일러 국장의 말에 송유정과 임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속으로 아! 하고 감탄했다. 저렇게 불쑥 나타나 히어로를(그리고 빌런을) 날려 버리는 그림자가 하나 더 있었다.
‘파트너!’
파트너는 발목이었지만 말이다.
나이트 진과 쉐도우맨이 열심히 훈련하는 사이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리는 두 그림자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라, 송유정과 임예나는 작게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쉐도우맨에게서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나이트 진이 작게 웃으며 말하자, 제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잘 배웠지?’ 하고 자랑하는 것 같았다.
“……저런 건 안 배워도 되는데 말이죠.”
파트너와 제이.
사고뭉치가 하나 더 늘어날 것만 같다는 생각에 테일러 국장이 이마를 짚고 말았다.
* * *
그렇게 팬텀 VS 나이트진&제이의 공방이 이어지는 사이.
“드디어……!”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매드해터가 감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들려요? 저희 완성했어요!”
에너지 감지장치가 완성되었다.
앞으로 웜홀이 생성되기 전 파악할 수 있다는 소식에, 4분할 된 모니터에 나타난 이레귤러스 멤버들도 기뻐했다.
그때, 경고음과 함께 이레귤러스 네 히어로의 모습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맨해튼의 지도가 나타났다.
“어…… 좋은 소식하고 나쁜 소식이 있어요. 뭐부터 들을래요?”
-음. 좋은 소식?
나이트 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음이 통신기로 들리는 걸 보니, 나쁜 소식이 어떤 건지 대충 알아챈 모양이었다.
“좋은 소식은…… 에너지 감지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거예요.”
-나쁜 소식은요?
화이트 블러드의 말에 매드해터가 하하, 즐겁지 않은 웃음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에너지 반응이 네 군데에서 나타났어요.”
맨해튼 지도에 동시에 나타난 4개의 붉은 점에 매드해터가 해탈한 듯 웃었다. 이레귤러스의 반응도 비슷했다.
-일단 가서 살펴보죠.
-그래야겠군.
나이트 진과 버서커의 대답과 동시에, 모니터에는 다시 보고받은 장소로 이동하는 이레귤러스의 모습이 4분할 되어 나타났다.
가장 먼저 에너지 반응이 감지되고 있는 현장에 도착한 것은 팬텀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잠깐.”
바이크에서 내린 팬텀이 어둠으로 가려진 안쪽으로 걸어가다 멈칫했다. 어둠 속 두 개의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건 마치 눈동자 같았는데, 사람의 눈이라기엔 위치가 많이 낮았다. 팬텀의 허벅지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마치 개처럼.
“또 길 잃은 개야?”
뒷목을 매만지며 그날 나이트 진이 그랬던 것처럼 어설프게 무릎을 굽혀 우쭈쭈- 하고 개를 유인하려던 팬텀이,
!!
투명화를 사용해서 빠르게 옆으로 굴렀다.
“젠장! 저건 뭐야?!”
크르르릉-!
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개와 같은 점이라고는 네발이 달려 있는 것뿐.
“저게 뭐냐고!?”
네 개로 갈라진 주둥이 사이로 뚝뚝 독액을 떨어뜨리며 달려드는 그것에 팬텀이 몸을 피하며 외쳤다.
팬텀이 있는 곳만 그런 게 아니었다.
두 번째로 현장에 도착한 버서커는 새까만 가죽의 곰과 비슷한 괴물과 마주쳤고, 세 번째로 도착한 히어로는 화이트 블러드는 박쥐인지 익룡인지 모를 괴물과 마주쳤다.
-끼에에엑!
마이크로 들려오는 그 소리에, 퍼스트 본부도 공격당한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괴생물체들의 등장이었다.
“저것들을 분석하는 건 싸움이 끝난 후에 해도 충분해. 지금은 에너지 반응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도록!”
이레귤러스라면 큰 어려움 없이 저 생물체들을 잡아 올 터였다.
지금은 적들을 추적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할 때였다.
“매드해터, 지금 에너지…… 매드해터?”
매드해터가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희한한 생물을 보는 건 처음인 모양인지 얼굴에 경악이 가득했다.
“……국장님.”
“네?”
“굉장히, 아주, 몹시, 상당히, 매우, 무지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
“뭔데요?”
수식어가 굉장하다고 생각하면서 테일러 국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매드해터가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
관객들도 그랬다.
개봉 첫날 [이레귤러스]를 보러온 그들은 앞의 시리즈까지 모두 본 이들이었다.
몇 번이고 문제를 일으킨 ‘그것’을 못 알아볼 사람은 없었다.
‘저게 왜 여기서 나와?!’
모두 그저 눈과 입을 쩍 벌리고 스크린 속, ‘그것’과 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이트 진이 보였다.
다른 세 곳은 괴생물체와 싸우느라 이런저런 소리들이 들리는데 이곳만 조용했다.
체셔 캣이 나이트 진이 있는 화면을 확대하자, 남아 있던 소리까지 사라져 정말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상영관 내부도 그랬다.
모두 숨이 턱 막힌 듯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이트 진의 옆으로 그림자가 먹이를 삼킨 뱀의 그것처럼 둥그런 모양을 한 채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 추측건대, 다른 히어로들이 지금 싸우고 있는 괴생물체와 비슷한 것이 나이트 진의 그림자에 완벽하게 제압당하고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을 알아챌 여유도 없이, 관객들의 눈에는 그저 나이트 진과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만이 보였다.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고요 속.
“……맙소사.”
겨우 신음 같은 말을 토해낸 테일러 국장이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설마 저건……?”
“맞아요.”
매드해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웜홀, 이에요.”
매드해터의 확인사살에,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과 경악이 관객들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저게 왜 여기서 나오냐고!?!’
그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새까만 웜홀 앞에 나이트 진, 윌리엄 리가 서 있었다.
* * *
이레귤러스가 처리한 괴생물체들이 맨해튼의 거리에서 퍼스트 본부로 옮겨지고.
이레귤러스는 테일러 국장과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웜홀?”
버서커가 눈을 찌푸렸다.
그 또한 ‘웜홀’이 이레귤러스의 멤버 중 하나와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웜홀이라는 게, 그거 맞지? 순간이동 같은 거?”
그걸 모르는 팬텀이 물었다.
“정확히는 통로예요. 우주……의 두 공간을 잇는 통로요.”
저도 모르게 나이트 진에게 시선을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매드해터는 생각했다.
송유정과 임예나도 그랬다.
웜홀이 나올 때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매드해터가 나이트 진이 진 나트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것 때문이었던 걸까? 설마 이번 편에서 진 나트라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1편인데? 1편인데에!?
저절로 회의실에 앉아 있는 나이트 진의 얼굴에 시선이 갔다.
저 잘생기고 반듯한 히어로에게서 언제 ‘진 나트라’의 조각이 나타날까 싶었다.
관객들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지 밝아 보이지는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테일러 국장에게 버서커가 물었다.
“하지만 웜홀이라면 퍼스트 내부에도 정보가 많지 않습니까?”
“많죠. 그동안 퍼스트와 협력했거나, 대적했던 외계인들이 사용한 것들에 대한 모든 정보들이 저희의 데이터베이스에 있습니다.”
거기엔 나트라의 이상웜홀에 대한 정보도 있다는 걸 관객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에너지와 같은 에너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적들이 새롭게 만든 웜홀일 확률이 크다고 저희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주에서 지구로 오는 에너지는 모두 감시하고 있다고 설명한 테일러 국장은 이어 말했다.
“그래서 저희는 이 웜홀들이 지구 내에서 새롭게 만든 웜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들이 직접 연구해 만든 웜홀이라면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 테니, 화재사건을 일으켜 아예 처음부터 좌표에 대한 자료를 모아나갔던 거죠.”
추측이지만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좌표가 꼭 필요한가? 없으면 어떻게 돼?”
팬텀의 물음에,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관객들까지도)이 저도 모르게 나이트 진에게로 향할 뻔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음. 좌표는 지도나 목적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낄낄거리는 체셔 캣을 잠시 노려본 매드해터가 말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나라에서 지도도 없고 목적지도 알 수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전혀 모르는 곳으로 가겠네.”
“네. 어쩌면 지구를 벗어날지도 모르죠.”
팬텀이 턱을 긁적였다.
지구 밖이라. 외계인들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나이트 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저것도 위험한 거 아닌가요? 언제 어디서 생길지 모르잖아요. 누군가 휩쓸리기라도 하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나이트 진, 윌리엄 리라서 더욱 무겁게 들려왔다.
테일러 국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괜찮을 겁니다. 에너지 감지 프로그램을 만든 후로 계속 감시하고 있으니까요. 웜홀이 생겨나도 퍼스트가 가장 먼저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웜홀의 반대편은 지구일 확률이 높아요. 실험을 위해서는 가장 가까이서 관찰해야 하니까요. 분명 빌런의 기지겠죠.”
매드해터의 말에 팬텀은 독액을 뚝뚝 떨어뜨리던 괴생물체를 떠올렸다. 지구에 그런 생물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으니,
“그럼 아까 그것들도 전부 빌런들이 만들어냈다는 거야?”
“퍼스트의 데이터베이스에도 없는 생물들이라 지금 조사 중이지만, 아마도 그럴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테일러 국장의 말에 매드해터가 말했다.
“저번에 에너지가 감지됐는데도 아무것도 없었던 적이 있었죠?”
“아, 버디를 발견했을 때?”
나이트 진이 길을 잃고 헤매던 골든리트리버, 버디를 떠올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맞아요. 그때 다시 살펴보니까 아무것도 없었던 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무슨 이야기지?”
“당시 현장 근처에서 생명 반응이 보였어요. 쥐나 새, 벌레, 개 같은 거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화이트 블러드가 날아가던 새를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공원이라서 미처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버서커나 팬텀, 나이트 진도 그랬다.
“나이트 진의 말대로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던 거죠.”
“그럼 버디가…… 아까 그 괴생물체처럼 변한다는 거야?”
나이트 진의 표정이 굳었다.
이레귤러스의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은 웜홀에서 빠져나간 생물들이 지금 맨해튼에 있고, 괴물이 되어 사람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뇨. 그건 아니고요.”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매드해터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빌런들이 생명체가 웜홀을 통과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했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야지 지금처럼 괴생물체를 살아 있는 상태로 이동시킬 수 있으니까요.”
아.
그에 이레귤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살피던 테일러 국장이 입을 열었다.
“웜홀이라는 건, 언제 어디서든 생겨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그에 이레귤러스의 다섯 멤버가 모두 테일러 국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맨해튼의 하늘에서, 맨해튼의 지하에서 생겨날 수 있죠.”
테일러 국장은 말하면서도 정말 이게 맞는 방법인지 몇 번이고 고민했다.
나이트 진을 영입한 건 자신이지만, 첫 임무부터 이런 식의, 기억이 되살아날 만한 일과 관련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웜홀의 숫자도 지금은 네 개지만, 얼마나 더 늘어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신중한 얼굴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나이트 진을, 그리고 나이트 진을 옳은 길로 인도할 쉐도우맨을, 나이트 진과 함께해나갈 이레귤러스 동료들을 믿어보자.
‘……문제도 있긴 하지만.’
팬텀을 짧게 쳐다본 테일러 국장이 말을 이었다.
“버디 덕분에 웜홀을 통과해도 멀쩡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적들도…… 우리도 말이죠.”
그렇단 말은…….
이레귤러스는 테일러 국장이 무슨 말을 할지 알아차렸다.
“저들이 맨해튼을 공격하기 전에, 웜홀을 통과해 빌런의 기지를 공격할 계획입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테일러 국장이 이레귤러스를 향해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막아야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이레귤러스.”
그에 히어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삐--
하고 경보음이 울렸다.
곧이어 퍼스트 본부 모니터에 나타나는 맨해튼의 지도.
“여덟 군데입니다!”
웜홀 생성 에너지가 여덟 곳에서 감지되었다.
네 곳에서 곧바로 여덟 곳으로 늘어난 웜홀에 테일러 국장이 잠깐 침음성을 흘리고는 얼른 입을 열었다.
“적합 장소는?”
테일러 국장은 그 여덟 군데 중에서 웜홀을 고정할 장소를 찾았다.
센트럴 파크 옆, 한 빌딩 옥상이 선택되었다.
“저거구나.”
넓은 빌딩 옥상의 허공.
매드해터는 비젯의 모니터를 통해, 웜홀 생성 에너지가 마치 소용돌이처럼 모여드는 것을 보고 있었다. 물론 에너지일 뿐이라서 진짜 소용돌이처럼 바람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비젯이 착륙하고.
비젯에서 내린 연구원들이 자리를 잡는 사이, 허공에 작고 검은 점이 하나 생겨났다.
그리고 천천히 크기를 키워나갔다.
---.
작게 매드해터의 OST가 들려왔다.
“체셔.”
-알았어!
해트8에 타고 있던 매드해터가 체셔 캣을 불렀다. 퍼스트 비젯에서 여섯대의 공격형 드론이 체셔 캣의 조종 아래 나타났다.
이제 곧 빌런들이 만들어낸 실험체가 나타날 터였다.
“떼거지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말 하면 꼭 그렇게 되더라.
그건 그래.
매드해터가 작게 웃고는 성장이 멈춘 웜홀을 바라보았다.
-버티기만 해도 돼, 매드해터.
-금방 가겠습니다.
-훈련받은 대로만 하면 된다.
-힘들면 도망치든가.
“뭐래.”
마지막으로 들려온 팬텀의 말에 매드해터가 코웃음을 쳤다.
---!
경쾌한 전자음이 뒤섞인 매드해터의 OST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크르르-
새까만 웜홀에서 사자 크기만 한 네발 달린 무언가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정확히 자신의 앞에 있는 매드해터에게 이를 드러냈다.
“나도 이레귤러스거든!”
쾅!
달려드는 실험체를 피하고 그대로 가격한 해트8의 주먹에서 철판은 그냥 뚫어버릴 듯한 빔이 번쩍였다.
* * *
-뭐래. 나도 이레귤러스거든!
그리고 들려오는 쾅! 소리에, 학교 강의 중 나와 가장 가까운 현장으로 출동한 윌리엄이 웃고 말았다.
휙- 휙-
그에 그림자 제이가 눈앞에서 움직였다.
“알았어, 제이. 집중하라는 거지?”
바닥에서부터 그림자가 올라와, 평상복을 입고 있던 윌리엄을 감쌌다. 운동화부터 바지, 상의, 재킷까지. 새까맣게 물들어 기사의 정복 같은, 나이트 진의 복장이 되었다.
동시에,
두두둥!
나이트 진의 OST가 들려왔다.
곧이어.
매드해터가 있는 곳보다 한 박자 늦게 이곳의 웜홀에서도 괴생물체들이 튀어나왔다.
촤아악-!
제이가 그림자로 방패를 만들고, 나이트 진은 손에 든 그림자 검으로 괴생물체를 베어냈다. 총알도 제대로 뚫릴 것 같지 않은 가죽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때.
들려오던 OST가 느릿해졌다.
괴생물체들과 싸우면서도 사라지는 웜홀을 흘깃 보는 나이트 진은 생각에 잠깐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분명 웜홀이라는 건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새까만 게 꼭…….
“나이트 진.”
퍼스트 요원의 목소리에 나이트 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괴생물체들은 모두 쓰러뜨린 상태였다.
“뒤처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다음은 이곳으로 이동해 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이트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기 위해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새까만 그림자.
“아, 이건가?”
아하.
하고 나이트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그림자도 웜홀처럼 검은색이라서 비슷한 느낌이 들었나 보다.
어쩐지 속이 시원해졌다.
“가자. 제이.”
그림자가 마치 꽃봉오리처럼 나이트 진을 감쌌고, 이내 바닥의 그림자 안으로 녹아내렸다.
* * *
이후, 화이트 블러드와 팬텀, 버서커의 전투 장면과 함께 그들의 OST가 흘러나왔다. 짧긴 했지만 각 히어로들의 개성은 충분히 보였다.
그렇게 나타난 괴생물체들을 모두 처리한 이레귤러스는 매드해터가 있는 빌딩 옥상으로 모였다.
“이게 웜홀이라고?”
사진으로 봤지만 신기했다.
팬텀은 흥미로운 얼굴로 납작한 평면인 웜홀의 앞과 뒤를 살펴보았다. 뒤도 앞과 다를 것 없이 검은색 소용돌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거 뒤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냐?”
“해볼래요?”
“아니, 안 해도 될 것 같아.”
“죽진 않을 거예요.”
“안 한다니까!”
펄쩍 뛰는 팬텀에 모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연구원이 말했다.
“웜홀 안정화 끝났습니다.”
“반대편, 생명 반응 없습니다.”
살짝 풀어졌던 분위기가 다시금 굳어졌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었다.
이레귤러스가 웜홀 앞에 섰다.
“무사 귀환을 빕니다, 이레귤러스.”
염려와 진심이 담긴 테일러 국장의 말에 이레귤러스는 각자 웃어 보이며, 새까만 웜홀 안으로 발을 디뎠다.
관객들의 시선이 웜홀 속으로 들어가는 나이트 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적의 기지로 이동하는 것뿐인데도 긴장감이 흘렀다. 설마, 싶었다.
웜홀을 통과하는 느낌은 차가운 물을 통과하는 느낌과 비슷했다.
발끝부터 심장까지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나이트 진은, 이런 느낌을 언젠가 느낀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이렇게 너무나도 차갑고 춥고…… 외로웠는데.
‘……외로웠다고?’
생각을 더 이어나가기도 전에 나이트 진은 차가운 웜홀을 통과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주 짧게 든 생각이라 눈 깜짝할 사이에 잊혀져 버렸다. 아니, 생각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눈을 깜빡임과 동시에, 의문이 쌓여가던 나이트 진의 얼굴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것을 본 송유정과 임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트 진은 그저 행복한 기억만 가지고 있었으면 했다.
새로운 공간에 발을 디딘 이레귤러스는 곧바로 경계태세를 갖췄다.
생명 반응이 없었다고는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드넓은 공간에, 새까만 웜홀과 이레귤러스만이 있었다.
-매드해터. 들립니까?
“네. 잘 들려요.”
매드해터와 테일러 국장이 이곳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정보를 나누는 동안, 이레귤러스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동굴 같은 공간에는 괴생물체들이 있었던 흔적이 가득했다.
“아마 이곳에 괴생물체들을 몰아넣은 다음, 웜홀을 발생시켜 웜홀 안으로 밀어 넣은 것 같군.”
처음엔 네 마리, 두 번째엔 스물일곱 마리.
“어쩌면 다음 차례에는 여기가 괴생물체들로 가득 찼을지도 모르겠네요.”
나이트 진의 말대로였다.
이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괴생물체들이 맨해튼에 쏟아진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어서 출발하자고.”
팬텀이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 금속으로 된 출입구를 열려고 할 때, 맨해튼에 있는 퍼스트와의 통신이 끊겼다. 그래도 체셔 캣과 매드해터가 있어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지이잉- 하고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경계태세를 취하는 이레귤러스.
“뭐해? 안 가?”
언제 반대편으로 넘어가 문을 열었는지 모를 팬텀이 거기에 서 있었다.
* * *
빌런의 지하 기지.
이레귤러스는 빌런을 처치하고 웜홀 생성 장치를 수거 또는 파괴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럼 둘로 나눠서 움직이지.”
나이트 진과 팬텀, 매드해터가 중앙컴퓨터 쪽으로,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가 웜홀 생성장치 쪽으로 가기로 했다. 체셔 캣이 둘을 서포터할 예정이었다.
“저렇게 둘이 붙여놔도 될까요?”
“여기서까지 싸우진 않겠…….”
삐이이---
하고 경고음이 기지 내부를 울렸다.
“……아니겠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무기를 점검하는 버서커에, 하하 웃은 화이트 블러드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부하들과 괴생물체들을 향해 불꽃을 날렸다.
다행히도 나이트 진과 팬텀 탓은 아니었다.
아까 팬텀의 공격으로 쓰러졌던 두 명의 행방에 의문을 가진 이들이 침입자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나이트 진이 재빠르게 그림자로 방패를 만들어 막아냈고, 그 그림자방패 뒤쪽에서 투명화한 팬텀이 튀어 나가 부하들을 후려쳤다. 매드해터 또한 해트8의 열 감지 센서를 이용해 그림자방패 너머에 있는 적들에게로 빔을 쏘아댔다.
순식간이었다.
그사이.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는 통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목적지는 또 다른 웜홀 생성장치가 있는 곳이었다.
“이상하군.”
“뭐가 말이죠?”
“괴물들이 전혀 통제가 되고 있지 않아.”
버서커가 통로를 보았다.
자신과 화이트 블러드가 발을 내딛지도 않은 통로에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빌런의 부하들이 있었다.
조금 전 쓰러뜨린 괴생물체가 한 짓 같았다.
“보통이라면 따로 어디 가둬놨을 텐데,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도 이상하고.”
수상함을 느꼈지만 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는 체셔 캣의 지시대로 달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이레귤러스와 처음 도착했던 곳과 비슷한 동굴이었다. 맨 안쪽에 5m 정도 되는 웜홀 생성장치가 있고. 위쪽에는 안쪽을 관찰할 장소가 있었다.
다른 점은,
크르르르-
독액을 뚝뚝 떨어뜨리는 괴생물체들이 가득했다는 거였다.
“아마 다음엔 이것들을 보낼 생각이었던 모양이네요.”
“그렇군.”
버서커는 짧은 대답만 뱉은 채 곧바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상체를 살짝 숙였는데도, 어쩐지 몸이 더 커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적들을 쓰러뜨리며 복도를 달려왔을 때부터 버서커의 눈깔이 살짝 돌아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화이트 블러드가 쓰게 웃으며 허공으로 몸을 피했다.
몇 번 겪어보진 않았지만 지금 버서커의 옆에 있으면 본인까지 휩쓸릴 게 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서커가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는 동안, 화이트 블러드는 체셔 캣과 함께 움직였다.
-여기엔 뭐가 들어 있을까.
하고 꼬리를 살랑거리며 파일을 열던 체셔 캣이 앞발을 멈칫했다.
* * *
빌런 기지의 중앙실.
매드해터가 컴퓨터에 달라붙어 자료를 빼내는 사이, 팬텀과 나이트 진이 입구를 막았다.
“뭐 도와줄 건 없어?”
“혹시 이 글자 알아요, 나이트 진?”
그런 생각과 달리, 매드해터는 기다렸다는 듯 화면 하나를 띄웠다.
나이트 진은 대부분의 글자가 지워진, 고문서의 스캔본처럼 보이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팬텀도 옆으로 다가왔다.
“음. 난 처음 보는데.”
“나도. 이게 뭔데 그래?”
매드해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괴생물체를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는 자료인 것 같아요. 과학적 실험으로만 만든 실험체인 줄 알았는데, 마법이나 이능 같은 능력을 사용한 흔적이 있어요. 또 이걸로 뭔가를 하려고 한 것 같은데 그건 해석본이 없어요.”
“그게 아마도 빌런의 목적이겠지?”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마법이라면 화이트 블러드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네.”
팬텀의 말에 매드해터와 나이트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이트 진이 조금 꺼림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중요한 자료들을 이대로 놓아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
아니라고 하기엔.
팬텀 또한 찜찜하긴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도 너무 쉽게 들어왔고요.”
물론 괴생물체들이 강하긴 했지만, 각오했던 것보다는 쉬웠다.
“……보스로 보이는 놈도 없고.”
극적인 의견 일치였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것보다 놀라운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폭탄이 있어!!
체셔 캣의 외침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 * *
자폭장치로 모든 것을 묻어버리려고 한 빌런의 계획을 알아차린 이레귤러스는 웜홀로 대피하기로 했다.
촤아악!
괴생물체를 베어낸 나이트 진이 생각했다.
그냥 달려가기만 한다면 금세 도착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계속 덤벼든다면 시간이 촉박할 터였다.
“난 버서커 쪽에 가 볼게.”
“뭐?”
“네?”
팬텀과 매드해터가 나이트 진을 돌아보았다.
나이트 진은 반듯한 얼굴로 설명했다.
“두 사람은 더 먼 곳에 있으니까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거야. 또 괴생물체를 만났을 때 버서커가 이성을 잃어버리면 화이트 블러드 혼자 케어하긴 쉽지 않을 거고.”
“그건 그렇지만…….”
확실히 나이트 진이 버서커 쪽에 합류한다면 시간 안에 도착할 확률이 높았다.
대신 혼자 이동해야 하는 나이트 진의 부담이 컸다.
-8분!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럼 가 볼게. 매드해터를 부탁할게요, 팬텀.”
그렇게 말한 나이트 진은 말리 틈도 없이 검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납작해진 그림자가 통로를 검은 번개처럼 가로질렀다.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린 팬텀이 매드해터를 바라보며 고갯짓을 했다.
“가자.”
“네!”
팬텀과 매드해터가 통로를 내달렸다.
이레귤러스 멤버들이 도착하자마자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해둬야 했다.
* * *
쾅!
버서커가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괴생물체를 주먹으로 후려치고, 화이트 블러드는 시꺼먼 독액을 내뿜는 벌레들을 태워죽였다.
-6분 남았어!
기지가 폭발한다.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서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정신줄을 붙잡고 달려야 했다.
버서커가 이를 악물었다.
어디 숨어 있었는지 모를, 밀려들어 오는 괴물들을 쓰뜨트리는 것보다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더 힘들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옆에 있는 화이트 블러드까지 적으로 인식해 버릴 터였다.
“먼저 가는 게 좋겠어.”
“그럴 순 없습니다.”
“시간 안에 못 가면 그 애들까지 폭발에 말려들 거야.”
아슬아슬할 때까지 기다릴 녀석들이 떠올랐다.
“……팬텀이 데려갈 겁니다.”
하지만 팬텀이라면 화를 내면서 두 사람을 끌고 웜홀을 넘어가겠지.
물론 그렇다고 팬텀이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를 쉽게 버리는 건 아니었다. 팬텀 또한 분명 괴로워할 터였다.
-5분!
버서커가 픽- 웃었다.
“나이트 진이랑 싸우겠지.”
화이트 블러드도 쓰게 웃었다. 분명 그럴 거다.
기다리겠다는 나이트 진과 탈출해야 한다는 팬텀.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매드해터.
그리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아닌데, 그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둘보다는 하나가 나을 거다.”
둘을 잃는 것보다 하나를 잃는 게 나았다.
미간을 찌푸린 화이트 블러드가 막 입을 열려던 때.
버서커의 뒤쪽에서 검은색 그림자가 솟아나며 괴생물체를 베어냈다. 마침 그 괴생물체를 공격하려던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가 눈을 크게 떴다.
“저 왔어요!”
나이트 진의 밝은 목소리에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가 이마를 짚었다.
……그래.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훤히 보이는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의 표정에 송유정과 임예나가 작게 웃고 말았다. 나이트 진의 이런 모습이 참 좋았다.
* * *
“젠장! 왜 이렇게 안 와!”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한 팬텀이 초조한 듯 커다란 동굴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매드해터는 웜홀 생성 기계 앞에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양이! 지금 어디쯤에 있어?”
-나도 몰라. CCTV가 부서졌어!
카메라가 없으면 밖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체셔 캣이 외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가고 있습니다.
간간이 통신기로 들려오는 목소리들만이 그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쪽은 다 끝났어요! 다들 어디쯤에 있어요?”
-거의 다 도착했어!
통신기 건너편에서 나이트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콰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다. 분명 버서커가 괴생물체를 벽으로 집어 던지는 소리일 터였다.
“그런 것 같네.”
팬텀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웃음을 뱉어냈다.
-남은 시간은?
버서커의 목소리도 아까보다 안정적이었다.
-1분 31초 남았어.
남아있는 CCTV로 세 히어로의 모습이 보이자 체셔 캣이 소리쳤다.
-바로 앞이야!
곧 체셔 캣의 말대로 나이트 진과 버서커, 화이트 블러드가 동굴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멀쩡한 모습이었다. 문제가 되는 건 자폭장치였지, 괴생물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작동할게요!”
활짝 웃은 매드해터가 웜홀 생성장치를 작동했다.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웜홀 생성장치가 작동됐다.
“이런 기지가 어딘가 또 있겠죠?”
나이트 진이 말했다.
여기 오기 직전에 봤던 웜홀은 여덟 개.
하지만 이 기지에 있는 웜홀은 파괴한 것과 지금 눈앞에 있는 것, 총 2개뿐이었다.
아직 6개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겠지. 돌아가면 다시 계획을 세워야겠군.”
나이트 진의 말에 버서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도 얻었고 괴생물체들도 일부 처리했지만, 놓친 이들이 많을 터였다. 그중엔 분명 보스도 있겠지.
“이번엔 웜홀 말고 다른 이동수단을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이동하자마자 또 자폭할지도 모르잖아.”
“확실히 이번에 겪어봤으니까 다음엔 대비할 것 같아요.”
“여기가 폭발하면 지상에서도 뭔가 변화가 있겠지. 매드해터가 찾아낸 자료도 있을 거고. 그걸 바탕으로 추적하면 될 것 같은데…….”
웜홀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나이트 진과 버서커, 팬텀은 뒤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괴생물체들을 경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이트 블러드. 혹시 이 글자 알아요?”
“글자요?”
“여기 컴퓨터에 있던 글자인데, 마법과 관련된 글자 같아서요.”
-우린 못 알아냈어.
매드해터는 화이트 블러드에게 고문서를 보여주었다.
“이 글자는 잘 모르겠지만, 비슷한 건 알고 있어요. 음. 그걸 그대로 해석하면 조금 다르겠지만 의미는 통할지도 몰라요.”
영어단어 Music(음악)을 알면 스페인어 단어 Musica를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화이트 블러드가 머릿속으로 더듬더듬 고문서를 해석하는 사이, 웜홀 생성장치 중앙에 새까만 웜홀이 생겨났다.
“일단 탈출부터 하죠!”
매드해터와 체셔 캣, 나이트 진과 제이, 팬텀이 차례로 웜홀 안쪽으로 이동했다.
“으음…….”
다음 차례였던 화이트 블러드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멈칫했다. 표정 또한 평소답지 않게 굳어있었다. 버서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지?”
“아뇨. 제가 잘못 해석한 것 같아서요.”
급하게 해석한 거라 잘못한 것일 터였다. 글자를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화이트 블러드가 웜홀 안으로 이동하고, 마지막까지 주변을 경계하던 버서커가 마지막으로 웜홀을 통과했다.
이제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가서 고문서를 해독하고 빌런의 기지를 찾아가나, 하고 관객들이 추측할 때.
“뭐야, 왜 여기 서 있어?”
웜홀을 통과한 팬텀이 웜홀과 별로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 있는 매드해터와 나이트 진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요원들은 어디 있고?”
팬텀의 질문에도 나이트 진과 매드해터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고 서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보고 있는…….”
팬텀이 매드해터와 나이트 진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커다란 그림자가 팬텀의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비젯이다.
--!
그것도 한 대가 아니라 여러 대였다.
“……!”
콰아앙! 쾅!
그제서야 팬텀의 귀로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도 보였다.
“……이게 뭐야?”
팬텀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왔다. 그리고 아마도 맨해튼일, 센트럴 파크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빌딩과 건물들에서 연기들이 피어올랐다.
깨진 유리창들과 건물 벽이 보였고, 벽을 타고 올라가는 괴생물체들과 그 괴물들을 공격하는 퍼스트 비젯들이 보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날고 있던 괴생물체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지상도 상황은 마찬가지.
사람들은 벌써 다 도망갔는지, 아니면 다 어디엔가 숨은 것인지 독액을 떨어뜨리는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퍼스트 요원들이 보였다.
관객들도 상상도 하지 못한 풍경에 입을 쩍 벌렸다.
잠시 이레귤러스가 사라진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그런데 그보다 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불길하고 오싹하게 느껴졌다.
“……저건 또 뭐고!”
센트럴 파크 중앙.
하늘에 떠 있는 무언가였다.
핏빛 같은 붉은색과 죽음과 같은 검은색이 뒤섞여 있는 거대한 구체.
같은 색의 마법진 같은 것들로 둘러싸여 있는 그 구체는 마치 누군가의 심장처럼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주변을 떠도는 새까맣고 시뻘건 연기 같은 것을 흡수하고 뱉어내는 것이 꼭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오싹하다.
소름이 돋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손에 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금방이라도 손에 힘을 줘 심장을 터뜨려 버릴 것만 같다.
죽음.
원초적인 공포가 느껴졌다.
“……깊고 오랜 죽음을 먹고…….”
어느새 웜홀을 빠져나온 화이트 블러드가 경악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새로운 신이 될지니…….”
이레귤러스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거대한 검붉은 구체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