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990화 (990/1,055)

0살부터 슈퍼스타 990화

그날 밤.

정체불명의 화재 사건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퍼스트 본부도 밤이 되자 한결 조용해졌다. 물론 남아 있는 요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분석하고 연구하고 있긴 했지만,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복도를 오가는 모습은 자주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아무도 모르게 침입한 자가 있었다.

팬텀이었다.

투명화한 팬텀은 어쩐지 익숙하다는 듯 복도를 걸었다.

그러고는 한 연구실로 들어가 본인은 모르지만 자주 신세를 지고 있는 연구원에게서 염력으로 보안카드를 슬쩍하고는 투명화한 채 주머니에 넣었다.

연구실을 나온 팬텀은 다시 복도를 걸어 안쪽으로 이동했다. 몇 개의 문을 통과하고 마침내 목적지인 어떤 문 앞에 도착한 팬텀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문을 통과했다. 그야말로 유령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곳은 정보실.

퍼스트 본부 내에서만 접속할 수 있는, 퍼스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료와 정보를 관리하는 곳.

그런 만큼 보안이 중요한 곳이라 이곳까지 오는 것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도 자격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무생물체를 통과하는 능력을 가진 팬텀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거기에 오는 길에 슬쩍한 연구원의 보안카드도 꺼내 정보 중에서도 기밀을 요구하는 정보들이 있는 파일에 접속했다.

[이레귤러스]

[매드해터][나이트 진]

모니터를 바라보는 팬텀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버서커는 원래 퍼스트 소속, 화이트 블러드는 어른인 데다가 뱀파이어, 그리고 본의 아니게 어떤 단체와 엮인 자신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아직 고등학생인 녀석과 평범해 보이는 녀석까지 퍼스트와 관련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신이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 여기까지 찾아왔다.

팬텀은 먼저 미성년자인 매드해터의 파일을 열어보았다. 아무래도 보육원 아이들이 있다 보니 마음에 걸렸다.

그러자 모니터에 매드해터에 대한 자료와 함께 [매드해터1]에 나왔던 전투 장면 일부분이 나타났다. 개조한 해트3가 날뛰는 모습이었다.

‘그렇군.’

팬텀은 납득했다.

불행히 엮이게 된 카드CARD라는 적에게 대비하기 위해 퍼스트에 협력하고 있는 매드해터의 상황을.

그렇다면 이레귤러스에 들어올 만도 했다. 바깥보다는 퍼스트가 안전할 것 같으니까 말이다.

어쩐지 괜히 신경 쓴 것 같아 팬텀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이트 진]

‘이 녀석도 뭔가 사정이 있으려나.’

팬텀이 나이트 진의 파일을 열어보았다.

나이트 진의 파일도 매드해터와 크게 다르지 않지 않은 듯했다. 쉐도우맨과 인연이 있다는 간단한 자료에 [쉐도우앤나이트] 때 싸우던 모습이 영상으로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아니, 평범하게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생활하는 윌리엄 리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있긴 했지만, 팬텀이나 매드해터처럼 어떤 적대적 단체와 엮인 상황이 아니었다.

퍼스트의 보호가 필요 없음에도 관련되어 버린, 평범하게 살고 있던 윌리엄 리.

팬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모니터에 떠 있는 환하게 웃고 있는 윌리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오후.

팬텀, 로건 테이트의 집.

로건 테이트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살던 그 집([팬텀1]과 같은 집이다.)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

어머니를 도와 함께 청소했던 나날들이 무색하지 않게 제법 깔끔하게 정리되는 거실에,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로건 테이트가 서 있었다.

퍼스트에서 준 통신기를 귀에 꽂은 로건 테이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현관문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리고 집 열쇠와 바이크 열쇠를 집어 들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실 한쪽 벽.

옷걸이에 걸려 있는 낡은 재킷 옆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이 있었다.

“다녀올게.”

씩- 웃은 팬텀이 현관문을 열었다.

* * *

시원하게 달리던 바이크가 멈춘 곳은 관객들도 아는 곳으로 윌리엄이 다니고 있는 대학이었다.

조금 구석진 자리에 바이크를 세운 로건 테이트가 헬멧을 벗고 대학교를 바라보았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저곳에만 햇살이 비치는 듯한 착각이 드는 듯했다.

어머니가 바라던 평범이 저런 걸까.

하지만 로건 테이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지금의 삶에 아주 만족했다. 적한테 쫓기고, 보육원을 관리해야 하고, 퍼스트한테 부려 먹히긴 하지만, 사람들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지 않았나.

“뭐,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자신이 좋으면 되는 일이었다.

만족스럽게 웃던 로건 테이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바이크에 몸을 기댔다.

윌리엄 리를 보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히 퍼스트가 가지고 있던 윌리엄 리의 이번 학기 시간표(이런 건 왜 있대?)가 틀리지는 않았나 보다.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며 밖으로 나오는 윌리엄 리가 보였다.

퍼스트 본부에서도 그랬지만, 굉장히 평범하게 느껴지는 그 모습을 로건 테이트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빠르게 윌리엄 리의 하루가 지나갔다. 그 뒤를 따라가는 로건 테이트의 모습도.

그 관찰은 윌리엄 리가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끝났다.

마당의 화단을 돌보고 있던 윌리엄 리의 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아들을 반겼다. 아들 또한 웃으며 부모님을 위해 사 온 디저트를 들어 보였다.

그건 로건 테이트가 바랐던 평범이었고,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소원이었다.

“……역시 안 되겠네.”

낮게 중얼거리는 로건 테이트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 * *

퍼스트 본부 내 훈련실.

퍼스트 마크가 새겨진 훈련복을 입은 이레귤러스가 거기에 있었다.

“1 대 2 대련을 하겠다. 능력은 사용하지 않고.”

“네.”

버서커를 앞에 두고 나이트 진과 팬텀이 섰다.

두 사람을 살피던 버서커가 먼저 나이트 진에게로 주먹을 뻗었다.

1 대 1 대련 때보다 빠른 속도에 나이트 진이 반사적으로 사용할 뻔한 그림자를 내리누르고 주먹을 피했다.

그래서 나이트 진은 같이 싸워야 할 팬텀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버서커가 눈썹을 까딱하자, 팬텀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리를 빠르게 휘둘렀다. 그건 버서커에게 닿는 방향이기도 했지만, 나이트 진이 있는 방향이기도 했다.

설마 팬텀의 공격이 자신에게 닿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나이트 진이 인식하기도 전에 제이가 그림자 벽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벽 바로 앞에서 팬텀의 다리가 멈췄다.

제이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나이트 진이 뒤를 보았고, 팬텀을 보게 되었다. 자신에게 닿을 뻔했던 다리도.

뭐, 왜, 뭐.

뻔뻔한 표정으로 나이트 진을 바라본 팬텀이 다리를 바닥으로 내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비킬 줄 알았지.”

……뭐?

나이트 진의 눈이 살짝 떨렸다.

송유정과 임예나도 ‘허어?’ 하고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앞서 장면들을 보면 팬텀의 마음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방법이 너무 괴팍하고 거칠었다.

‘팬텀 이러다 비호감만 쌓는 거 아니야?’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 이후 훈련도 내내 그런 식이었다.

제대로 협조할 때도 있었지만, 나이트 진이 집중하려고 할 때마다 훼방을 놓았다. 버서커가 한마디 하긴 했지만 팬텀은 어깨를 으쓱일 뿐 ‘뭐, 어쩌라고?’ 하는 태도였다.

자신이 공격당할 때마다 제이가 씩씩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나이트 진은 그저 토닥일 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게 히어로라는 게 조금 슬프지만.’

어쩌면 일반인인 자신이 못미더워서 이러는 건지도 모른다.

나이트 진은 같은 팀이 된 히어로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뉴욕 전체가 위험할지도 모르는 사건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서 나이트 진은 그저 조용히 참고 훈련을 이어나갔다.

* * *

윌리엄 리의 방.

반가운 두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창문을 여는 윌리엄의 모습이 보였다.

“가자. 제이.”

달빛만 비치는 밤.

윌리엄이 지붕 위에 서자, 들뜬 듯 움직이던 제이가 그림자를 키워 윌리엄을 감쌌다. 그러고는 바닥에 있는 그림자 안으로 녹아내리듯 스며들었다.

어느 그림자보다도 검은 그 그림자는 창문과 나무, 담벼락의 그림자를 통해 빠르게 다운타운 쪽으로 이동했다.

뉴욕이 노려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퍼스트에서 돌아온 첫날부터 계속되고 있는 밤 순찰이었다.

* * *

“그럼 다시 가 볼까?”

잠시 쉬고 있던 윌리엄이 일어났을 때.

콰앙!

폭발음과 함께 저쯤에서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제이!”

윌리엄의 부름에 제이가 빠르게 그림자를 부풀려 윌리엄의 몸을 모두 삼켰다. 그리고 빠르게 그림자를 타고 이동했다.

눈 깜짝할 사이 현장에 도착한 제이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윌리엄을 토해냈다.

-확인. 나이트 진.

통신기가 연결되자마자, 건너편에서 테일러 국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죠, 나이트 진? 지금은 좀…….

“지금 웨스트의 화재 현장에 있습니다. 지금 이 화재에서도 그 에너지가 나타났나요?”

제이에게 건물 내부를 탐색해 달라고 부탁한 윌리엄은 자신 또한 건물로 달려갔다.

-……거기 왜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맞습니다. 조금 전 에너지를 감지했습니다.

“하지만 폭발이었는데…….”

-이제부터 화재 대신 폭탄을 선택한 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희는 불씨와 건물 내부의 무언가가 접촉해서 우연히 폭발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제이가 돌아왔다. 건물 내부에 아직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소방차가 곧 올 테지만 구하기 힘든 곳에 있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사람들을 구하러 갈 생각인가요, 나이트 진?

“네.”

-그럼 팬텀과 함께 가세요. 마침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테일러 국장의 목소리에 ‘왜 둘 다 현장에 있는 건지……’ 하는 작은 한숨이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팬텀이라는 말에 놀란 윌리엄은 눈치채지 못했다.

막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한 윌리엄이 고개를 돌렸다. 마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바이크에서 내려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팬텀이었다.

팬텀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윌리엄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그것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팬텀도 같은 생각인 듯 별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전 아래쪽을 맡을게요.”

“위쪽은 내가 간다.”

동시에 말한 두 히어로가 잠시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사이는 안 좋은데 잘 맞는 두 히어로에 송유정과 임예나가 속으로 조금 웃고 말았다. 다행히 팬텀의 비호감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것 같았다.

헬멧을 다시 쓴 팬텀의 몸이 투명해지고 윌리엄도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피한 사람들 모르게 불이 난 건물 안으로 향했다.

구조가 시작되었다.

구조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킬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나이트 진을 덮쳤다. 그림자로 막고 있음에도 열기가 느껴졌다. 새까만 연기에 숨이 턱 막히고,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땀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팬텀도 고생하고 있었다.

“젠장!”

폭발한 집 바로 윗집부터 가장 위험해 상태의 요구조자들을 구해내 옥상으로 옮기고 있었는데, 구조자가 더 이상 다치지 않게 조심하다 보니 가끔가다 자신에게 닿는 불길이나 갑자기 튀는 불똥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입고 있던 옷도 어느새 탄 자국과 재로 가득했다.

하지만 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다.

다짐하지 않았나.

다른 사람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기로.

크게 숨을 쉬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팬텀은 다시 한번 유령이 되어 요구조자를 찾으러 나섰다.

금 같은 시간이 흐르고.

몇 번이고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없나 살펴본 새까만 그림자와 투명한 유령은 안심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로 막아내 제법 멀쩡해 보이는 나이트 진과 달리, 팬텀은 엉망진창인 모습이었다. 화상도 약간 입은 것 같았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

옷에 묻은 재를 툭툭 털다가 이내 몸을 돌려 바이크 쪽으로 걸어가는 팬텀을 보며 윌리엄이 한숨처럼 말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 * *

“자세히 조사해 봤지만 역시 폭탄은 아니었어요.”

이레귤러스가 회의실에 모였다.

“지금까지는 화재뿐이었지만, 퍼스트도 감지해 내지 못한 방법을 알고 있으면 폭탄 같은 걸 설치하기도 쉽겠죠.”

“사람 많은 쇼핑몰이나 빌딩 같은 곳이면 더 피해가 클 거고요.”

화이트 블러드의 말에 나이트 진이 덧붙였다.

“감지 프로그램 제작은 어느 정도로 진행된 거야?”

팬텀의 물음에 매드해터가 초췌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지금까지는 사고 후 남아 있는 특이 에너지만 감지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사고가 일어난 직후 에너지도 감지할 수 있게 됐어요.”

연구가 이 정도로 진행된 것도 매드해터가 ‘특이 에너지’ 연구에 합류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감지하는 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문제가 좀 있거든요.”

“무슨 문제?”

“아무래도 화재가 일어나기 전이랑 후의 에너지가 다른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지?”

버서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매드해터가 그래프 하나를 보여주었다.

사고 직전에는 잠잠하던 그래프는 불길이 나타나기 시작한 후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걸 특이 에너지, B라고 하죠. 저랑 연구원들이 만든 건 B 감지 장치예요. B만 죽어라 팠죠. 그런데 사고 전에는 전혀 잡히질 않았어요.”

“그렇다는 말은, 화재를 일으키는 에너지는 따로 있다는 건가요?”

화이트 블러드의 말에 매드해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걸 A라고 한다면, A가 화재를 일으키고 난 후 남는 흔적이 B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두 에너지가 전혀 다른 에너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수력 에너지로 만드는 전기 에너지처럼요.”

이해한 나이트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화재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감지하는 건 불가능한 거구나. 지금까지 만든 건, 예를 들면, 전기 에너지 감지 장치라는 거니까.”

“네. 이제부터는 수력 에너지, A를 찾아야 하는 거죠.”

“그럼 찾으면 되잖아?”

팬텀의 말에 매드해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뚝딱뚝딱 나오는 게 아니에요. 이제 막 A에너지의 존재를 알았으니까, 이제부터 찾아서 분석해야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사 구역이 전 세계에서 뉴욕으로 줄어들어서 좀 더 자세히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라면 정보가 부족해서…… 몇 번 더 사고가 일어나야 한다는 거예요.”

그 몇 번의 사고는 A에너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에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피해를 당할지 몰랐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쇼핑몰이나 빌딩에서 사고가 나면 큰일이었다.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금방 만들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매드해터의 부담감과 걱정을 읽어낸 화이트 블러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매드해터. 사람들을 지키는 건 저희가 할 테니까요. 매드해터는 자신의 일에만 집중해 주세요.”

“그러라고 팀이 있는 거니까.”

그 위로에 힘을 얻은 매드해터가 걱정을 내려놓은 듯 환하게 웃었다.

“알겠어요! 감지 장치는 저한테 맡겨두세요!”

라고 말했지만.

“하아.”

역시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두가 떠난 이레귤러스의 회의실.

한숨을 내쉰 매드해터가 ‘난 바보야. 멍청이야.’ 하고 노래를 부르며 체셔 캣과 반쯤 넋 놓고 특이 에너지를 분석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어? 안 갔어요, 윌리엄?”

나이트 진, 윌리엄 리였다.

번쩍 고개를 드는 매드해터에 나이트 진이 웃으며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걱정돼서.”

“걱정 마세요! 제가 빨리 분석할게요!”

“아니, 앨리스 너 말이야. 너무 부담감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매드해터가 힘이 빠진 듯 의자에 축 늘어졌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한테 이걸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 의문도 들고요.”

“할 수 있을 거야. 체셔 캣도 만들었잖아.”

그에 매드해터가 조금 웃으며 말했다.

“체셔 캣은 우연히 만들어진 거예요.”

-다시 만들라고 하면 못 만들걸.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매드해터에 나이트 진이 음, 하고 말했다.

“그래도 저 눈을 맞추는 모션 같은 건 앨리스 네가 만든 거 아니야?”

“……네?”

-……어?

놀라는 매드해터와 체셔 캣에 나이트 진이 회의실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가리켰다.

“체셔 캣은 저 카메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카메라가 아니라, 모니터를 볼 때 눈을 맞춘 것처럼 반응하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거든.”

매드해터와 체셔 캣의 눈이 더더욱 커졌다.

그 말대로.

휴대폰이나 노트북의 카메라와 화면에서도 시선의 어색함을 느끼는데.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밖을 보는 체셔 캣이 모니터 정면을 바라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는 모션을 취하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와, 와아! 맞아요. 이거 각도랑 위치 계산하는 거 엄청 어려웠는데!”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상기된 매드해터와 폴짝폴짝 뛰는 체셔 캣에 나이트 진이 웃고 말았다.

“이런 것도 할 수 있는데, 앨리스 너라면 잘할 거야.”

다른 히어로들의 위로가 안 먹힌 건 아니었지만 좀 막연했다고 하면, 나이트 진의 위로는 좀 더 살갗으로 다가왔다.

-그래! 나도 만들어낸 넌데, 못할 게 뭐가 있어!

“맞아! 체셔 캣 너도 유일무이한 인공지능인데! 우리 둘이라면 못할 게 없지!”

체셔 캣과 매드해터가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나이트 진이 하하 웃었다.

* * *

그런데 위로를 원수로 갚게 생겼다.

집으로 돌아온 앨리스 잭슨은 연구실(차고)로 들어왔고,

-매드해터! 퍼스트 보안 뚫었어!

“어디…… 설마 거기?!”

-그래!

퍼스트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정보들.

레드본과 같이 보안 프로그램을 만든 것인지 매드해터도 아직까지 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체셔 캣 혼자 뚫었단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나이트 진의 위로가 과하게 먹힌 것 같았다.

“잘했어!”

-지금 볼 거야? 볼 거지?

신나게 발을 둥당거리는 체셔 캣의 말에, 체셔 캣과 마찬가지로 과하게 들떠 있던 매드해터가 잠깐 멈칫했다.

이 비밀의 주인은 나이트 진.

자신의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 찾아와준 동료의 비밀을 파헤쳐내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일까.

‘당연히 안 괜찮지!’

“잠깐……!”

하지만 매드해터가 멈추라고 말하기도 전에 체셔 캣은 언제나 그래 왔듯 알아서 파일을 열어젖혔다.

궁금한 건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자.

체셔 캣을 만들 때 집어넣었던 설정이었다.

그 때문에 매드해터는 눈을 감을 틈도 없이, 퍼스트가 철저하게 숨겨왔던 문서를 보고야 말았다.

그걸 인지하고도 눈을 감을 시간이 있긴 했지만,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 몸이 저도 모르게 굳어버려 그럴 수도 없었다.

-와…… 미친…….

화면 속 체셔 캣의 털이 삐죽삐죽 섰다.

매드해터도 입을 쩍 벌렸다. 눈도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두 개의 사진이 보였다.

매드해터와 함께 이레귤러스 팀에 소속되어 있는 히어로와,

“나이트 진이…….”

한때 지구와 나트라 행성을 멸망시키려던 빌런의 사진이.

“진 나트라였다고?!”

히어로와 빌런.

둘은 누가 봐도 똑 닮아 있었다.

이걸 이렇게 밝힌다고?!

송유정과 임예나, 그리고 다른 관객들도 눈과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뭐, 언젠가 알려질 줄은 알았지만 이제 1편인데? 아직 사건도 해결 안 됐는데?’

나와도 영화가 끝날 때쯤이나 쿠키 영상으로 나올 줄 알았던 비밀이 뜬금없이 밝혀져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관객들이 놀라는 사이에도 영화는 계속되었다.

이레귤러스와 퍼스트는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말없이 밤 순찰을 하던 나이트 진과 팬텀과 더불어,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도 순찰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었다. 매드해터와 체셔 캣은 열심히 감지 장치를 만드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레귤러스의 대처와 달리,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스트 21번가 에너지 감지.

오늘 또 에너지가 감지됐다.

통신기로 전해지는 그 목소리에, 이스트 21번가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버서커가 에너지가 감지된 곳으로 이동했다.

어느 뒷골목.

화재는커녕 빛 한 점 없이 아주 조용했다.

-이번에도 아니에요?

“그래.”

매드해터의 물음에 버서커가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뒷골목을 둘러보았다.

“쥐새끼 한 마리도 없,”

찍-

회색 쥐가 빠르게 지나갔다.

버서커가 한숨처럼 말했다.

“쥐는 있군.”

벌써 다섯 번째.

에너지 반응은 있으나 화재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 게 아닐까요?

나이트 진이 입을 열었다.

“새로운 실험?”

-적들이 화재 사고를 일으킨 이유를 좌표를 찾기 위해서라고 추측하고 있잖아요.

전 세계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뉴욕으로.

범위를 좁혀 목적지의 좌표를 찾아내기 위해 화재와 뉴스를 이용한 것으로 퍼스트는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거죠.

-……적들이 원하는 좌표를 찾았다는 이야긴가요?

화이트 블러드의 말에 나이트 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저희도 적들의 목표가 뉴욕 맨해튼인 건 알아냈잖아요?”

물론 맨해튼도 넓어서 정확한 목적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새로운 실험이라……

버서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좌표를 알기 위해 전 세계에 불을 질렀던 적들이었다. 새로운 실험이 뭔진 모르겠지만 그것 또한 심상치 않을 것 같았다.

-그냥 숨기는 거 아니야?

팬텀이 삐뚜름하게 말했다.

-퍼스트의 개입도 알아챘을 거고, 이제 슬슬 목적지와 가까워졌으니까 정확한 장소를 숨기기 위해서 최대한 조용히 진행하는 거지. 현장 조사에도 아무것도 안 나왔다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말이죠…….

퍼스트 본부에 있던 매드해터가 볼을 긁적였다.

모니터에서 식빵을 굽고 있던 체셔 캣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말했다.

-왜 쟤가 말하면 그냥 나이트 진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것처럼 들릴까?

“그러니까 말이야.”

팬텀이나 다른 히어로들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차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곧 일이 일어난다는 것만은 확실하군요.

화이트 블러드의 말대로.

적의 정체도, 목적도 알지 못하지만 조만간 큰일이 터진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제이?”

나이트 진은 한숨을 삼키며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맨해튼을 바라보았다.

* * *

-이스트 132번가 에너지 감지.

-이스트 11번가 에너지 감지.

해가 질 무렵, 동시에 나타난 에너지 반응.

이스트 132번가에는 화이트 블러드가, 11번가에는 버서커가 향했다.

“역시 아무것도 없네요.”

푸드득- 날아가는 새 아래.

화이트 블러드가 평화로운 공원을 보며 말했다.

“여기도 없다.”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는 구석진 곳을 살펴보며 버서커가 말했다. 인기척에 벌레들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웨스트 45번가 에너지 감지.

“가자, 제이.”

그에 가까운 곳에 있던 나이트 진이 웨스트 45번가로 향했다.

어두운 골목.

나이트 진은 그림자가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왕!

“……개?”

금색 털을 가진 골든 리트리버였다.

그 소식에 이레귤러스가 웨스트 45번가에 모였다.

“진짜 개 맞아?”

-맞아요. 진짜 개.

팬텀의 물음에, 드론에 달린 카메라로 골든 리트리버를 한차례 스캔한 매드해터가 말했다.

-완전, 정말, 평범한 골든 리트리버예요. 아주 건강한 것 같아요!

“근데 왜 여기 있는 거야? 주인도 없이.”

-길을 잃은 것 같아요. 여기 글이 있어요. 이름은 버디고, 6개월 전에 잃어버렸다고 하네요.

그말에 나이트 진은 무릎을 굽혀 골든 리트리버와 눈을 마주치며 빙그레 웃었다.

“안녕, 버디?”

왕!

제이와 놀고 있던 골든 리트리버, 버디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나이트 진에게로 신나게 걸어가 앞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순하디순한 그 모습에 나이트 진이 웃으며 반질반질한 털을 만져주었다.

“이제 집에 가자. 데려다 줄게.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말을 알아들은 듯, 버디가 왕! 하고 짖었다.

잠시 후.

“으아아앙! 버디!”

엉엉 울며 달려오는 아이와 그 뒤를 쫓아오는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버디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형!”

하고 인사하는 아이의 모습에 윌리엄이 환하게 웃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

팬텀이 다른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쟨…… 저쪽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에 화이트 블러드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내 이어지는 팬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우리처럼 누군가한테 쫓기는 것도 아니고.”

다시 만난 가족과 함께 떠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던 윌리엄 리가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나이트 진의 과거를 모르는 화이트 블러드는 반쯤 동의한다는 듯 입을 다물었고, 비밀을 알아버린 매드해터는 어쩔 줄 몰라 했고, 이미 알고 있었던 버서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뉴욕의 어느 거리.

다 함께 돌아가는 길.

“다른 일을 찾아보는 건 어때?”

“……네?”

‘그래도 방법이 굉장히 잘못됐다는 건 팬텀에게 말해줬어야 했는데.’ 하고 화이트 블러드는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

“굳이 이 일을 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아?”

부드럽게 말해도 모자랄 판에 팬텀의 말에는 특유의 삐딱함과 못마땅함이 묻어 있었다.

윌리엄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게 무슨…….”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만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느라 바쁘지 않냐고.”

윌리엄은 팬텀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저런 사람도 있겠거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하고.

“쉐도우맨이 좋아서, 쉐도우맨을 존경해서,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거라면 지금 그만두는 게 좋다는 거야.”

같은 팀인 만큼 친하게 지내진 못하더라도 잘 지내고 싶었는데.

윌리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건 팬텀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지. 네가 실수를 하거나 제대로 못 싸우면 나한테도 피해가 올 거 아니야.”

그건 윌리엄도 걱정하던 부분이라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대답할 수 있었다.

“훈련은 잘 받고 있습니다. 방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윌리엄은 동료들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자신과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 ‘동료’에는 팬텀도 있었는데…….

“아, 훈련. 나랑 합도 제대로 못 맞추던 그거? 실전에서도 훈련 때처럼 되면 큰일 아니야? 아주 다 죽어 나가겠어.”

팬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삐딱한 팬텀의 말에 윌리엄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팬텀.”

걸음을 멈춘 윌리엄이 팬텀, 로건 테이트를 바라보았다.

로건 테이트.

알고 있는 건 그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브루클린의 빈민가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보육원을 유지하기 위해 퍼스트에서 일한다는 것.

성격은 많이 안 좋지만, 사람들의 구하고 돕는 것만큼은 진심인 남자.

로건 테이트도 걸음을 멈추고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윌리엄 리.

상냥한 부모님 아래에서 행복하게 자랐으며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고 좋은 친구들도 있으며, 성격마저도 바르고 올곧은 남자.

왜 굳이 이런 험한 일을 하는가 싶은, 그래서 더욱 히어로에 어울리는 이.

그래서 윌리엄 리는 로건 테이트와 동료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로건 테이트는 윌리엄 리가 평범하게 살았으면 했다.

“이레귤러스엔 네가 필요 없다는 거다.”

야!

송유정과 임예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의자가 작게 들썩이기까지 했지만, 다른 관객들도 같은 상황이라 문제가 되진 않았다.

‘비호감 최대치로 쌓인 것 같은데? 팀이라며? 멤버라며? 이레귤러스라서, 비정규군이라서 1편 만에 해체하는 거야? 서로 다른 길 가는 거야?’

물음표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진짜 저래도 괜찮은 건지 대본을 쓴 감독의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시나리오팀인가?

하여튼.

들끓는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며 관객들은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스크린 속.

어두운 방안에서 가라앉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듯한 윌리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윌리엄의 옆에 나타난 제이도.

진 나트라가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하고 관객들 모두 걱정했다.

화면이 바뀌고.

퍼스트 본부 내 훈련장.

“오늘 올까요?”

기초훈련을 하러 나온 앨리스 잭슨이 입구를 보며 말했다. 훈련장에는 버서커와 루크 메이너드(화이트 블러드), 팬텀도 있었다.

학교에 간 윌리엄 리만 없었다.

“말이 너무 심했어요, 팬텀.”

앨리스 잭슨의 말에 팬텀은 코웃음만 치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 히어로는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이트 진의 의지에 달렸다는 화이트 블러드와 나이트 진의 편인 매드해터.

“버서커는요?”

“난 지시대로 따를 뿐이다.”

“하긴. 이레귤러스는 퍼스트가 만든 팀이죠.”

그렇게 말한 루크 메이너드는 물을 마시고 있는 팬텀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더 나쁘게 굴었을 거다. 퍼스트에서 만든 팀이니 어지간한 이유로는 해체되지 않을 테니까.

‘등을 맡기며 함께 싸워야 하는 팀원끼리의 불화가 아마도 적당했겠지.’

그래서 윌리엄이 자신을 원망하고 싫어해도 괜찮았을 터였다.

팬텀은 무조건 윌리엄을 내보낼 생각이니까 말이다.

“근데…… 그것 말고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오랫동안 성당의 신부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던 루크 메이너드가 팬텀을 보며 턱을 매만졌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팬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앨리스 잭슨의 밝은 목소리도 들렸다.

“윌리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윌리엄이 온 것이었다.

“어서 와요!”

“잘 왔어요. 윌리엄.”

루크 메이너드도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 기쁘게 윌리엄을 맞이했다. 버서커도 말없이 고개를 까딱할 뿐이었지만 반기는 기색이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팬텀이 삐딱하게 말하자, 앨리스 잭슨이 사납게 팬텀을 노려보았다.

“훈련하는데 와야죠.”

하고 빙그레 웃는 윌리엄이 너무 착해서 자신이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은 왜 그렇게 착해요?”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윌리엄에게 앨리스 잭슨이 투덜댔다.

“응?”

“저 같으면 화냈을 텐데! 그리고 휴대폰이랑 컴퓨터를 싹 다 털어서, 피의 복수를!”

“그럼 안 돼, 앨리스.”

“그럼요. 저도 진짜로 할 생각은 없어요.”

앨리스 잭슨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것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까요. 내비게이션의 설정을 살짝 바꿔놓는다거나 휴대폰 전화가 다른 곳으로 연결되게 한다든가 팬텀이 주문한 음식을 싫어하는 맛으로 바꾼다거나…… 그만큼 짜증 나는 건 없을걸요.”

키득키득 웃는 앨리스 잭슨에 윌리엄도 웃음을 터뜨렸다.

곧 훈련이 시작되었다.

팬텀&나이트 진 VS 버서커였다.

“괜찮겠나, 윌리엄?”

“괜찮아요. 일정대로 해주세요.”

웃으며 말하는 윌리엄에 버서커는 고개를 끄덕였고, 팬텀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안 올 줄 알았는데.’

솔직히 말이 심했나, 하고 잠시 생각하긴 했는데.

이 정도로 개같이 굴었는데 온 걸 보면 아무래도 더 개같이 굴어야 할 것 같았다.

버서커를 마주 보며 팬텀이 왼쪽에, 윌리엄이 오른쪽에 섰다.

잠시 긴장감이 흐르고.

따로 신호도 없이 대련이 시작되었다.

대련은 평소와 같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윌리엄은 버서커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옆에서 공격해 오는 팬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옆으로 살짝 피해, 공격 궤도에서 벗어나는 윌리엄을 보며 팬텀이 눈썹을 까딱였다.

그동안의 훈련 때문에 이것도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앨리스 잭슨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또 팬텀이 윌리엄에게 뭔가를 하면 정말 피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일반인 눈에는 뭐가 뭔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어?!”

그래서 팬텀이 윌리엄의 오른쪽 볼을 향해 주먹을 뻗는 건 미처 보지 못했지만.

윌리엄이 그 주먹을 피하지도 않고 그림자로 막아내지도 않고, 온전히 손으로 붙잡는 건 볼 수 있었다.

윌리엄이…… 잡아?

그에 버서커와 루크 메이너드는 물론이고, 손목이 잡힌 팬텀까지도 놀랐다.

‘항상 막거나 피해버리는 게 다였던 녀석이었는데.’

그런데 생각을 더 이어나가기도 전에, 팬텀의 시야가 빙글 돌았다.

“악!”

팔과 어깨가 아파왔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크윽-”

배와 가슴에서 고통이 그대로 느껴져 팬텀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이거 많이 봤는데.”

앨리스 잭슨이 중얼거렸다.

경찰관이 범인을 잡을 때처럼, 윌리엄이 잡고 있던 팬텀의 오른팔을 등 뒤로 꺾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뜨린 것이었다.

보통 때라면 투명화를 사용해서 바닥을 통과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팬텀이었지만, 생물과 접촉하고 있을 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윌리엄은 팬텀의 오른팔을 단단하게 잡아당긴 채, 팬텀의 등을 체중으로 꾸욱- 누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안 쓰니까,”

환하게 웃는 윌리엄의 얼굴은 시원하다 못해 청량해 보였다.

“허튼수작 작작 부려, 팬텀.”

그 모습을 본 앨리스 잭슨이 감탄하며 소리 없이 짝짝짝! 박수를 쳤고 루크 메이너드는 작게 웃었다. 버서커도 크흠하고 웃음을 삼켰다.

윌리엄이 팬텀의 주먹을 잡았을 때부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던 송유정이 소리 나지 않게 짝짝짝! 손뼉을 쳤고 임예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했어! 윌리엄!

윌리엄의 표정은 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감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팬텀은,

“……하!”

하고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어내고는 눈알을 번뜩였다.

그런데 눈알을 번뜩이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눈은 없었지만.

더 개같이 굴기로 결심한 팬텀이 벌떡 일어나 윌리엄을 공격했고, 버서커와 윌리엄이 막을 틈도 없이 검은색 그림자가 쭈욱 늘어나 팬텀의 손목을 붙잡았다.

“?!”

그리고 그대로 날려 버렸다.

“……제이?”

윌리엄의 오랜 친구, 그림자 제이가 이제는 참지 않겠다는 듯 우뚝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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