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982화
한지호.
이서준의 오랜 친구로 이서준과 같은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이서준이 출연했던 영화 [이스케이프]에서는 ‘고주원의 친구’를, 연극 [MOEB-436]에서는 ‘진짜 아들 유진’을 연기했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아역 출신 배우.
“안녕하세요! 한지호입니다.”
그가 친구를 만나러 죽묘도에 왔다.
“반가워요, 민재원입니다.”
“안녕하세요! 백건하입니다! 우와! 황금세대! 황금세대 맞으시죠?”
백건하의 말에, 활짝 웃고 있던 한지호와 한지호의 캐리어를 대신 끌고 가려던 서준이 잠깐 삐끗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황금세대.
서준과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던 연기과 이들을 말하며, 그중에서도 서준의 친구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꽤 옛날부터 쓰인 단어였는데, 지금도 토크쇼나 예능에서 친구들을 소개할 때 종종 나오고는 했다.
그래도 그걸 여기서 이렇게 듣는 건 좀 웃겼다.
“예, 맞아요. 황금세대.”
한지호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서준 2사단이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하고 말하는 친구의 등을 서준이 웃으며 찰싹- 쳤다. 악! 하고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친근한 모습에 민재원이 하하 웃었고, 백건하는 ‘우와! 이서준 2사단!’ 하고 눈을 반짝였다.
“아,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래. 건하 너도 형이라고 불러. 드라마 재미있더라.”
“지호 형도 보셨어요?”
민재원도 한지호에게 편하게 부르라고 했다.
“재원이 형 영화도 재미있게 봤어요. 연기 진짜 잘하시던데요.”
“고마워. 나도 영화 봤어. 재미있더라.”
한지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준도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백건하만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걸 보셨어요? 독립영화라서 잠깐 영화관에 올라갔다가 내렸는데.”
한지호가 최근 출연한 영화 [그저 기다릴 뿐]은 [화]의 감독, 황지윤이 세운 영화제작사, 화 필름에서 만든 독립영화였다. 제작비 몇 배의 이익을 거두고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성공작이긴 했지만, 독립영화라서 알음알음 알려졌을 뿐이었다.
상업영화급으로, 아니, 그중에서도 어마어마하게 흥행한 독립영화 [화]가 굉장히 특별한 경우였다.
백건하가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그저 기다릴 뿐]을 보지 못했던 탓이었다.
“전 못 봤어요……! 죄송해요!”
물론 백건하는 처음 출연하는 드라마 [위시리스트]의 촬영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볼 여유가 없었다. 신인 배우에게는 배역을 연구하고 연기 연습을 하는 것만으로도 24시간이 모자랐다.
“아냐, 괜찮아. 못 볼 수도 있지.”
“그때 건하 넌 촬영 중이었을 테니까.”
한지호의 뒤를 이어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섬섬생활]을 촬영하면서 백건하에게서 [위시리스트] 촬영 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드라마 촬영 중이었어? 그럼 더 못 볼 만하지. 촬영 때는 바쁘니까.”
전전 작품이 드라마였던 한지호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플러스에 올라올 테니까, 그때 한번 봐줘. 취향에 맞으면 재미있을 거야.”
“네! 꼭 볼게요! 업로드 날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백건하에 한지호가 웃으며 말했다.
“건하랑 재원이 형 덕분에 영화 홍보도 하고 가네. 우진이 형 좋아하시겠다.”
그에 [화]의 촬영팀이었던, [그저 기다릴 뿐]의 박우진 감독을 떠올린 서준도 따라 웃었다.
* * *
“이건 뭐야, 피리?”
방에 짐을 풀고 집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한지호가 대나무로 만든 피리와 그 피리를 가로로 거치할 수 있게 만든 나무 거치대를 보았다. 보란 듯이 장식되어 있어 못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거 서준이 형이랑 재원이 형이 만든 거예요! 피리는 서준이 형이 진짜 대나무를 손질해서 만든 소금이고요, 거치대는 재원이 형이 평상 만들고 남은 목재로 만든 거예요! 완전 잘 만들었죠!”
마치 자신이 한 듯 백건하가 우쭐댔다.
우쭐댈 만도 한 게, 대나무 피리는 별 장식이 없는데도 고풍스러워 보였고, 거치대에는 작게 고양이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진짜 잘 만들었네!”
한지호가 감탄했다.
서준이야 옛날부터 못 하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악기를 만들었다는 건 좀 신기하긴 했다.), 민재원의 손재주가 좋다는 건 새로웠다.
민재원의 외모와 이미지를 보면 실내에서 책만 읽을 것 같은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평상이랑 천막이랑 아궁이랑 화덕도, 재원이 형이 만들었어요!”
오.
한지호가 놀란 표정을 짓자 백건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요리하던 서준과 민재원이 작게 웃었다.
“이거 연주도 할 수 있는 거야?”
한지호의 물음에 민재원과 백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도 엄청 좋아.”
“서준이 형이 오버 더 레인보우에 나온 곡들도 다 연주해 줬어요!”
그말에 한지호가 서준을 바라보았다.
“나도 들려줘.”
서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일 열심히 하면.”
전에 온 게스트들과 달리 친구는 편하게 부려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강명헌과 김경우도 이것저것 시켰지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요리담당으로서 절대 권력을 지닌 서준이 하하 웃었다.
“오늘 대나무 삼겹살 구이 해 먹을 거라서 일 열심히 해야 돼요, 형!”
“대나무 삼겹살?”
“대나무 통 안에 삼겹살 넣어서 불 위에 구워 먹는 거예요. 맛있겠죠?”
“그러게.”
서준의 요리 솜씨를 익히 아는 한지호도 입맛을 다셨다. 지금 서준이 만들고 있는 점심도 참 맛있을 터였다.
“잘 먹겠습니다!”
점심이 완성되었다.
평상 위, 요리가 가득 올라간 밥상 주위에 둘러앉은 네 배우가 식사를 시작했다.
“맛있다!”
“맛있어요, 서준이 형!”
한 입 먹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때문에 저녁에 먹을 대나무 삼겹살 구이가 더욱 기대됐다.
“삼겹살은 얼마나 일해야 돼?”
“많이 먹을 거야? 그럼 많이 일해야 해.”
서준의 말에 민재원이 덧붙였다.
“건하가 많이 먹으니까, 좀 많이 일해야 할 거야.”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백건하가 씩씩하게 말하는 모습에, 한지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일해야겠네.”
“얼마나 먹을 생각인 건데.”
서준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은 후에는 후식도 먹었다. 시원하고 달달한 복숭아 절임(서준이 만들었다.)을 먹던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먹으면 살찔 것 같은데.”
“괜찮아요, 형! 그만큼 일하면 빠져요!”
천진난만한 백건하의 말에 한지호는 조금 두려워졌다.
그렇게 네 배우가 후식을 먹고 이제 일하러 갈까? 하며 일어나려고 할 때쯤.
카메라 뒤쪽에 있던 주예진 피디가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손짓했다.
“무슨 일 있나요?”
민재원의 물음에 주예진 피디가 입을 열었다.
“지금 태풍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에 서준과 세 배우가 눈을 크게 떴다.
[섬섬생활]을 촬영하는 계절은 여름.
북서 태평양에서 생겨난 태풍이 하나둘 올라오는 시기였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몇 번 비가 내린 것 말고는 촬영 때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이번 촬영도 태풍이 일본 쪽으로 완전히 꺾인 것을 확인하고 진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경로가 살짝 바뀌어서 우리나라 쪽에도 영향을 끼칠 것 같다고 해요.”
“……큰일이네요.”
서준과 배우들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잠잠한 하늘은 태풍의 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촬영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백건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과 의논할 생각입니다. 이번 태풍이 강하지는 않지만, 오늘 저녁부터 내일 낮까지 죽묘도에 영향을 끼칠 예정이라고 하거든요.”
“그럼 오전에 배가 안 뜨겠네요.”
민재원의 말에 주예진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 상황을 봐야 하겠지만 오후에도 조금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다도 아직 거칠 테고 선착장이나 배들을 수습하느라 바쁘실 테니까요. 그래서 여기서 하루를 더 머물지, 아니면 지금 촬영을 끝내고 추가촬영을 할지 결정할 생각입니다.”
주예진 피디의 말에 배우들은 어느 쪽이 더 나을지 생각했다.
“전 죽묘도에서 하루 더 지내고 싶어요.”
먼저 서준이 입을 열었다.
“추가 촬영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끝내기엔 좀 아쉽잖아요. 또 날씨의 변화도 섬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고요.”
“그게 태풍이라는 게 문제지만.”
한지호가 키득키득 웃다가 말을 이었다.
“저도 모레까지 스케줄 없어서 괜찮아요. 게스트로 와서 한 것도 없이 점심만 먹고 갈 수는 없죠.”
백건하가 눈을 번뜩였다.
“저도요! 스케줄 완전 텅텅 비어 있어요! 또 이대로 촬영을 끝내면 태풍한테 지는 느낌이라서 싫어요!”
태풍한테 지는 느낌이라.
어쩐지 그런 느낌도 좀 들긴 했던 터라, 서준과 배우들, 제작진은 작게 웃고 말았다.
물론 역대급 태풍이었다면 얌전히 촬영을 접고 육지로 돌아갔을 거다.
“저도 괜찮습니다. 모레까지 시간도 있고, 정이 들어서 그냥 이렇게 떠나는 건 아쉽네요.”
그렇게 민재원까지.
네 배우 모두 하루 더 죽묘도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럼 매니저분들에게는 저희가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주예진 피디는 그렇게 말하며 배우들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서준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돌려 백건하와 민재원, 한지호를 바라보았다.
“그럼 일은 나중에 하고 태풍 대책부터 세워야겠어요.”
“그래. 그래야겠다.”
“주 피디님! 이것도 일당으로 쳐주시는 거죠?”
백건하의 외침에 주예진 피디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비상상황이니 평소보다 가격을 더 싸게 해줄 계획이었다.
빠르게 제작진과 협상한 배우들이 평상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단 집부터 보강하자. 유리로 된 부분들은 다 나무나 박스로 막고, 창틀을 테이프로 고정해야 해.”
민재원의 말에 서준과 백건하,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믿음직스러웠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 평상도 어디 잘 고정해 두고 천막도 걷어놓자.”
“화덕은 몰라도 아궁이는 접착제 없이 벽돌을 쌓기만 한 거니까 날아갈지도 몰라요, 재원이 형.”
서준의 말에 민재원도 동의했다.
“그럼 요리는 어디서 해요? 가스레인지도 없는데?”
백건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궁이를 허물면 다시 쌓을 때까지 불은 전혀 못 쓰게 된다.
태풍이 지나가는 내일 낮까지. 오늘 저녁, 내일 아침, 어쩌면 내일 점심까지 못 먹을 수도 있었다.
“제작진분들한테 가스버너 빌리면 돼. 빌려주실 거죠?”
서준의 물음에 제작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발도 가져오고, 밭도 한번 둘러보고…….”
해야할 일을 이야기하는 그때, 서준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럼 고양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피디님?”
죽묘도에 사는 고양이들이 태풍을 어떻게 피할지 걱정이 됐다.
그에 백건하와 민재원, 선착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 누렁이를 소개받은 한지호도 제작진을 바라보았다.
“저희도 여쭈어봤는데,”
제작진들 또한 촬영하면서 고양이들에게 정이 든 상태였다.
“고양이들이 알아서 집 마루 밑이나 창고 같은 데로 피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각자 가는 집이 따로 있대요.”
길고양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섬사람들이 다 같이 기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저 아랫집은 흰 고양이네, 저 감나무 집은 검은 고양이네, 선장님 집은 누렁이네. 그렇게 이번 태풍처럼 큰일이 일어났을 때 각자 가는 집이 있었다.
“다행이네요.”
서준과 배우들은 안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다와 섬을 휩쓸 태풍에 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