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975화
“나도 옛날에는 단역배우였잖아.”
“네. 그랬죠.”
서준과 강명헌은 점심을 먹으며 두 사람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이야기해 주었다. 백건하와 민재원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분명 조사할 때, 그런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제작진도 그랬다.
“그때 출연했던 작품 중에서 서준이가 촬영했던 작품이 있었거든. 그때 만났었어.”
처음 듣는 이야기에 민재원이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근데 왜 이야기 안 했어요?”
“편집돼서 얼굴이 나오진 않았거든.”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강명헌에 민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 혼자 이서준 배우가 활동하는 거 보면서 ‘와, 서준이!’ 하고 내적 친밀감을 쌓았지.”
그래서 저도 모르게 친근하게 대해버린 거였다.
“겨우 하루 촬영한 거라서 기억해 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와! 그럼 서준이 형은 엑스트라 분들도 다 기억하세요?”
백건하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나라도 다 기억하는 건 힘들어.”
최대한 많은 배우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려고 하는 서준이지만.
[내의원]이나 [역]에 나오는 궁인들처럼 엑스트라가 많이 나오는 장면이나 [이스케이프]의 좀비처럼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상황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명헌이 형은 그때 대화도 잠깐 했었거든. 같이 촬영하는 장면도 출연자가 적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어떤 작품인지 못 들었네요! 어떤 작품이에요? 옛날이라고 하면, 악령? 내의원? 이스케이프?”
“역이야.”
강명헌의 말을 이어,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노산군, 그러니까 단종한테 사약을 주러 온 병사들 중에 한 명이셨어.”
[역]이란 말에 오! 하고 감탄하던 민재원과 백건하, 제작진의 눈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사약? 사약!
“이럴 것 같더라. 이거 방송 나가면 나 큰일 나는 거 아니야?”
“하하.”
강명헌의 농담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가 아마 중학생 때였던가?”
“그땐 아직 중학교 입학하기 전이었어요.”
와.
영화 [역]에서 사약을 받아 들던 노산군을 떠올리던 백건하와 민재원, 제작진이 생각보다 더 어린 나이에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확실히 그때부터 서준이를 봐왔으면 친근하게 부를 만했어요.”
민재원의 말에 강명헌이 민망한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건 진짜 실수였다니까. 드라마랑 영화로만 보다가 눈앞에 나타났는데 안 놀라 사람이 어디 있겠어.”
“맞아요! 저도 진짜 놀랐다니까요!”
백건하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첫 만남이었다.
“내가 상상한 만남은 서준이랑 같이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하면서 만나는 거였다고. 뭐, 운 좋으면 서준이가 기억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그런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었던 서준이 스쳐 지나간 단역배우를 기억이나 할까 싶었다.
하지만 가끔, 단역배우 강명헌은 낡은 원룸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상상하고는 했다.
서준이 자신을 알아보고 ‘오랜만이에요!’ 하고 말하는 그 모습을.
강명헌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때의 단역배우가 이렇게 국민 삼촌이라고 불릴 정도의 배우가 됐다는 걸 알면 얼마나 신기해했겠어.”
묵직한 그 말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신기하기만 할까요. 완전 멋있어요, 명헌이 형.”
“그래? 하하하!”
존경하던 배우의 칭찬은 열심히 살아온 강명헌을 아주 기쁘게 했다.
“근데 예능에서 만날 줄은 몰랐지. 서준이랑 만나면 어떻게 말할지도 다 생각해 뒀는데, 놀라서 다 까먹었어.”
정말로 시무룩해진 강명헌에, 다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민재원과 강명헌이 어떻게 알게 됐는지 이야기하며 점심 식사를 끝낸 후.
서준과 백건하가 설거지와 뒷정리를 하는 동안, 민재원과 강명헌은 만들다가 만 화덕을 마무리했다.
작지만 빈틈없이 잘 만들어진 진짜 화덕이었다.
“와! 진짜 화덕이다! 전문가가 만든 것 같아요!”
단역배우 시절, 강명헌도 민재원처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했다고 들었는데 손재주가 뛰어난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뭐 하지?”
“대나무숲 가는 건 어때요? 제가 대통밥 레시피를 알아왔거든요.”
서준의 말에 백건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통밥이 뭐예요?”
“전라남도에서는 죽통밥이라고 하는데, 대나무통 안에 쌀하고 잡곡을 넣어서 쪄서 만드는 담양군 향토음식이야.”
오!
세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서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는 길에 밭에도 들러서, 닭고기도 좀 얻으면 좋을 것 같아요.”
“닭은 왜요?”
“대나무 백숙이라고, 대통밥처럼 닭을 대나무 안에 넣어서 만드는 요리가 있거든. 그것도 건강식이래. 맛도 있고.”
어디선가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가자!”
그렇게 네 배우의 목적지가 정해졌다.
“근데 대나무 베어도 돼?”
“제작진한테 물어보니까 몇 개 정 도는 괜찮대요. 그리고 저희는 쓰러진 걸 사용할 거라서 괜찮아요.”
하고 이야기하던 서준과 민재원은 창고 쪽에서 들려오는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건하야! 연장 챙겨라!”
“옙! 형님!”
죽이 잘 맞는 둘이었다.
* * *
톱은 기본에, 뭐가 필요할지 몰라서 일단 다 챙겨온 서준과 세 배우는 대나무숲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시원하고 좋은데?”
“그렇죠? 근데 가끔…….”
냥!
“와씨! 깜짝이야!”
“고양이가 튀어나와요.”
치즈 고양이가 튀어나와 서준에게로 향했다.
아이고! 하고 놀란 심장을 가라앉히는 강명헌에 다들 작게 웃었다.
“대통밥 대나무 크기는 작아도 괜찮은데, 백숙을 넣을 대나무통은 큰 게 좋아요. 못 찾아도 작아도 반으로 잘라서 넣으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마시고요.”
서준의 말에 세 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대나무 채집을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외친 백건하가 먼저 튀어 나가고, 서준과 민재원, 강명헌도 웃으며 출발했다.
사사삭-
하고 대나무 잎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서준은 적당한 크기의 대나무를 찾아 돌아다녔다.
“이거 괜찮은 것 같은데.”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대나무가 보였다. 크기도 적당한 것 같았다. 서준이 톱을 들어 슬근슬근 대나무를 베었다. 단단해서 제법 힘이 들었다.
대나무통을 4개 만든 서준은 그걸 들고 처음 모였던 장소로 갔다.
민재원이 먼저 도착해 있었는데, 대통밥 그릇으로 쓸 만한 조금 작은 대나무통들도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서준아.”
“네. 딱 좋아요.”
그다음으로는 강명헌이 왔다.
“닭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의 대나무는 없더라고.”
“괜찮아요. 잘라서 넣으면 돼요.”
그리고 잠시 기다리는데, 백건하가 오지 않고 있었다.
“사고가 생긴 건 아닐 테고.”
그럼 백건하와 함께 달려간 카메라맨이 연락해 왔을 터였다.
“건하야!”
목소리를 높여 부르긴 하지만, 제대로 들릴지 모르겠다.
“잠깐만.”
강명헌이 주위를 살펴보더니, 손가락만 한 대나무와 빨대만 한 대나무를 찾아 공구함에서 꺼낸 칼로 다듬었다. 순식간에 쓱쓱 잘린 두 대나무를 마치 빨대를 꽂듯 연결했다.
그리고, 힘껏 불었다.
삐이이--!
대나무에서 마치 호루라기 소리처럼 강렬한 소리가 터져 나와 대나무숲을 가득 채웠다.
“그건 뭐예요, 명헌이 형?”
“대나무 피리. 어렸을 때 아는 형이 종종 만들어줬어.”
서준의 물음에 강명헌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다시 한번 대나무 피리에 숨을 불어넣었다.
삐이이--!
“아, 하긴 대금이나 소금 같은 악기도 대나무로 만들지.”
“그래도 이렇게 직접 만드는 건 처음 봐요.”
민재원과 서준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대나무 피리와 우뚝 서 있는 대나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때.
멀리서 사람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백건하였다.
“와! 형! 방금 전 그거 뭐예요! 삐이이- 하고 새소리? 아니, 호루라기 소리 같은 게 나던데! 진짜 깜짝 놀랐어요!”
“대나무 피리라는 건데, 어디까지 갔었어?”
강명헌의 말에 백건하가 히히 웃으며 가져온 대나무통들을 내밀었다.
“찾다 보니까 좋은 게 많이 보여서요! 이것 보세요! 크죠? 나중에 또 먹을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많이 모아왔어요!”
꽤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차곡차곡 쌓여 밧줄로 꽁꽁 묶인 대나무통들을 보며 민재원이 입을 열었다.
“……건하야. 너 혹시 나무꾼이었니?”
서준과 강명헌, 제작진이 빵 터졌다.
* * *
대나무통을 넉넉하게 모은 네 배우의 관심은 대나무 피리로 향했다.
“입술이 닿는 부분은 다치지 않게 잘 다듬어.”
강명헌의 가르침 아래, 각자의 대나무 피리를 만들었다.
삐이이-
하나의 소리만 내는 것이 피리라기보다는 호루라기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여기서 좀 더 길게 만들어서 구멍을 여러 개 뚫으면 진짜 피리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네. 아마 인터넷에 만드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강명헌의 말에 서준이 눈을 반짝이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했다.
“피리 만들려고?”
“네. 가능하면요.”
그 말에 대나무 피리를 삐삐- 거리던 나무꾼 백건하가 눈을 번뜩였다. 그러고는 쓰러져있는 대나무 하나를 가져와 말했다.
“이건 어때요? 서준이 형. 크기나 모양으로 봐서는 멋진 악기가 탄생할 것 같은데!”
“그건 좀 큰데. 단소 알지? 그 정도 크기면 괜찮을 것 같아. 그것보다 작아도 괜찮고.”
“알았어요! 단소 말이죠!”
서준이 형한테 도움이 될 수 있다니!
백건하가 들뜬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민재원과 강명헌도 웃으며 적당한 크기의 대나무를 찾았다.
“잘 만들어지면 우리 것도 만들어줘, 서준아.”
“네. 그럴게요.”
대나무 피리도 처음 만들어보는 서준이 진짜로 만들 수 있을까 싶지만, 재미있을 것 같았다.
* * *
밭에 들러 잠깐 일한 네 배우는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했다.
어제 열심히 일해서 저축해 놓은 돈도 있어서 닭고기와 잡곡, 백숙에 들어갈 재료들도 모두 살 수 있었다.
서준은 깨끗하게 씻은 대나무통에 불려놓은 쌀과 잡곡을 넣고 깨끗한 천으로 입구를 닫았다. 그리고 찌기 위해 물과 함께 가마솥 안에 넣었다. 강명헌이 얼마나 먹을지 몰라서(+제작진) 넉넉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다른 가마솥에는 백숙을 넣은 대나무통들을 쪘다.
“으아아! 진짜 맛있겠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새하얀 연기에 백건하와 두 배우, 제작진이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대나무향도 조금 느껴지는 듯했다.
그동안 서준은 양념장과 겉절이 등의 반찬을 준비했다. 세 배우도 얼른 도왔다.
잠시 후.
서준이 가마솥 뚜껑을 열었다.
새하얀 연기가 마치 만두집의 그것처럼 화아악- 솟구쳤다. 카메라가 가려질 정도라서 가마솥 안의 모습을 찍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건하야.”
“넵!”
뜨거운 연기에 데이지 않게 조심하며 서준은 천천히 대나무통들을 꺼내 쟁반을 들고 있는 백건하에게 전달했다. 백건하는 쟁반이 가득 찰 때마다 형들에게로 넘겼다. 민재원과 강명헌은 대나무통의 입구를 막은 천을 제거하고 넓은 그릇에 안에든 백숙을 부었다.
완벽한 호흡이었다.
모락모락 새하얀 연기와 함께 잘 익은 백숙이 쏙- 빠져나오자, 여기저기서 와! 하고 감탄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감탄이었다.
그렇게 백숙을 모두 꺼낸 서준은 대통밥을 꺼냈다.
“이건 이대로 먹는 게 좋겠죠?”
“네네네!”
“응.”
“그렇지!”
그렇게 저녁 한 상이 차려졌다.
대나무통 안에 든 잡곡밥에, 대나무통 안에서 찐 백숙, 그리고 딱 적절히 무친 겉절이에 백숙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는 양념장 등.
“와, 죽겠는데?”
인서트 촬영을 위해 카메라가 밥상으로 다가왔다.
기다려야 한다는 건 알지만, 바로 앞에 맛있는 음식이 있으니 초조함에 다리가 저절로 덜덜덜 떨렸다. 그런 강명헌과 백건하의 모습에 서준과 민재원이 웃고 말았다.
“잘 먹겠습니다!”
촬영을 끝낸 카메라가 물러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저를 들었다.
“맛있어요! 진짜! 제가 먹어본 백숙 중에 최고예요, 서준이 형! 양념장 넣어도 맛있고! 겉절이랑 먹어도 맛있고! 그냥 먹어도 맛있어요!”
“밥도 되게 맛있어. 대나무 향도 느껴지는 것 같고. 우리 이거 종종 해먹자.”
“나도 여기 같이 살면 안 될까, 서준아? 이틀이라 봤자 세끼밖에 못 먹는 거잖아.”
그리고 그 진심 가득한 감탄들은 설거지를 하고, 이부자리를 펴고, 잠이 들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