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952화
쾅!
버서커가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괴생물체를 주먹으로 후려치고, 화이트 블러드는 시꺼먼 독액을 내뿜는 벌레들을 태워 죽였다.
“체셔 캣, 얼마나 남았지?”
반쯤 기계인(그 이상일지도) 버서커라 평소라면 지치는 것도 모르고 상대할 수 있었다. 아니, 지치기도 전에 미친 듯이 날뛰어 다 처리했겠지.
하지만 지금. 시간은 버서커의 편이 아니었다.
-6분 남았어!
기지가 폭발한다.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서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정신줄을 붙잡고 달려야 했다.
버서커가 이를 악물었다.
어디 숨어 있었는지 모를, 밀려들어 오는 괴물들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더 힘들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옆에 있는 화이트 블러드까지 적으로 인식해 버릴 터였다.
퍼억!
버서커는 사납게 얼굴을 찡그리며 달려드는 괴물을 날려 버린 후, 화이트 블러드에게 말했다.
“먼저 가는 게 좋겠어.”
박쥐로 변할 수 있는 화이트 블러드라면 괴생물체들의 틈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시간 안에 못 가면 그 애들까지 폭발에 말려들 거야.”
그에 버서커가 무슨 말을 해도 버티려던 화이트 블러드가 멈칫했다.
그럴 것 같았다.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와 함께 탈출하기 위해, 아슬아슬할 때까지 기다릴 것 같았다.
“……팬텀이 데려갈 겁니다.”
하지만 팬텀이라면 화를 내면서 두 사람을 끌고 웜홀을 넘어가겠지.
물론 그렇다고 팬텀이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를 쉽게 버리는 건 아니었다. 팬텀 또한 분명 괴로워할 터였다.
-5분!
버서커가 픽- 웃었다.
“나이트 진이랑 싸우겠지.”
화이트 블러드도 쓰게 웃었다. 분명 그럴 거다.
기다리겠다는 나이트 진과 탈출해야 한다는 팬텀.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매드해터.
그리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아닌데, 그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둘보다는 하나가 나을 거다.”
둘을 잃는 것보다 하나를 잃는 게 나았다.
미간을 찌푸린 화이트 블러드가 막 입을 열려던 때.
버서커의 뒤쪽에서 검은색 그림자가 솟아나며 괴생물체를 베어냈다. 마침 그 괴생물체를 공격하려던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가 눈을 크게 떴다.
“저 왔어요!”
나이트 진의 밝은 목소리에 버서커와 화이트 블러드가 이마를 짚었다.
……그래.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었다.
* * *
“젠장! 왜 이렇게 안 와!”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한 팬텀이 초조한 듯 커다란 동굴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매드해터는 웜홀 생성 기계 앞에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양이! 지금 어디쯤에 있어?”
-나도 몰라. CCTV가 부서졌어!
체셔 캣은 컴퓨터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공생명체.
따로 눈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카메라가 없으면 밖의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이트 진이 버서커, 화이트 블러드와 합류한 후로 간간이 CCTV에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괴생물체 때문인지 폭발 전의 장치인지 CCTV가 군데군데 보이지 않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가고 있습니다.
화이트 블러드가 통신기로 그렇게 말했지만, 어디쯤인지를 모르니 기다리는 사람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매드해터. 언제쯤 끝나?”
“잠시만요……! 끝났어요!”
몇 번이고 웜홀 좌표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 매드해터가 말했다.
웜홀의 좌표가 확실하긴 했지만, 하나라도 잘못 입력했다가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할 수도 있었다.
“다들 도착하기 직전에 작동하면 돼요. 지금 여기 있는 에너지로는 웜홀을 길게 유지할 수가 없어서 다 모였을 때 작동시켜야 하거든요.”
임무를 다 끝내고 난 뒤였다면 이렇게 급박하지는 않았을 텐데.
한숨 돌린 매드해터가 통신기를 눌렀다.
“이쪽은 다 끝났어요! 다들 어디쯤에 있어요?”
-거의 다 도착했어!
통신기 건너편에서 나이트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콰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다. 분명 버서커가 괴생물체를 벽으로 집어 던지는 소리일 터였다.
“그런 것 같네.”
팬텀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웃음을 뱉어냈다.
-남은 시간은?
버서커의 목소리도 아까보다 안정적이었다.
-1분 31초 남았어.
“널널하네.”
웜홀만 넘으면 탈출이니,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보인다!
남아 있는 CCTV로 세 히어로의 모습이 보이자 체셔 캣이 소리쳤다.
-바로 앞이야!
곧 체셔 캣의 말대로 나이트 진과 버서커, 화이트 블러드가 동굴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멀쩡한 모습이었다. 문제가 되는 건 자폭장치였지, 괴생물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작동할게요!”
활짝 웃은 매드해터가 웜홀 생성 장치를 작동했다.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웜홀 생성 장치가 작동됐다. 에너지가 웜홀 생성 장치의 중앙으로 몰려들었다.
“이건 한 10초쯤 걸려요.”
-1분 3초 남았어.
넉넉하다.
그에 이레귤러스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런 기지가 어딘가 또 있겠죠?”
“그렇겠지. 돌아가면 다시 계획을 세워야겠군.”
나이트 진의 말에 버서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도 얻었고 괴생물체들도 일부 처리했지만, 놓친 이들이 많을 터였다. 그중엔 분명 보스도 있겠지.
“이번엔 웜홀 말고 다른 이동수단을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확실히 이번에 겪어봤으니까 다음엔 대비할 것 같아요.”
“여기가 폭발하면 지상에서도 뭔가 변화가 있겠지. 매드해터가 찾아낸 자료도 있을 거고. 그걸 바탕으로 추적하면 될 것 같은데…….”
웜홀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나이트 진과 버서커, 팬텀은 뒤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괴생물체들을 경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이트 블러드. 혹시 이 글자 알아요?”
“글자요?”
“여기 컴퓨터에 있던 글자인데, 마법과 관련된 글자 같아서요.”
-우린 못 알아냈어.
매드해터가 해트8의 손바닥을 펼치자 파란색 빛으로 이루어진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발견한 고문서였다.
“잠시만요.”
화이트 블러드는 눈을 깜빡이며 홀로그램 속에 있는 고문서의 글자들을 살펴보았다.
“이 글자는 잘 모르겠지만, 비슷한 건 알고 있어요. 음. 그걸 그대로 해석하면 조금 다르겠지만 의미는 통할지도 몰라요.”
영어 단어 Music(음악)을 알면 스페인어 단어 Musica를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화이트 블러드가 머릿속으로 더듬더듬 고문서를 해석하는 사이, 웜홀 생성 장치 중앙에 새까만 웜홀이 생겨났다.
“일단 탈출부터 하죠!”
-나도!
매드해터가 씩씩하게 웜홀 안으로 들어갔고, 기지의 컴퓨터에서 빠져나온 체셔 캣도 얼른 해터8 안으로 이동해 함께 통과했다.
“가자, 제이.”
그 뒤로 웜홀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어깨를 으쓱인 나이트 진과 그림자 제이가 따라갔다.
다음으로 팬텀이 이동하고 화이트 블러드가 이동할 차례였다.
“으음…….”
생각에 잠겨 있던 화이트 블러드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멈칫했다. 표정 또한 평소답지 않게 굳어 있었다. 버서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지?”
“아뇨. 제가 잘못 해석한 것 같아서요.”
급하게 해석한 거라 잘못한 것일 터였다. 글자를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화이트 블러드가 웜홀 안으로 이동하고, 마지막까지 주변을 경계하던 버서커가 마지막으로 웜홀을 통과했다.
* * *
웜홀 반대쪽.
좌표상으로는 이레귤러스가 출발했던 맨해튼의 어느 빌딩 위.
“뭐야, 왜 여기 서 있어?”
웜홀을 통과한 팬텀이 웜홀과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매드해터와 나이트 진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동하는 데 조금 방해가 되는 데다가, 대기하고 있던 퍼스트 요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요원들은 어디 있고?”
그런데 퍼스트 연구원들과 요원들은 없었다.
팬텀의 질문에도 나이트 진과 매드해터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고 서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보고 있는…….”
팬텀이 매드해터와 나이트 진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커다란 그림자가 팬텀의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비젯이다.
──!
그것도 한 대가 아니라 여러 대였다.
“……!”
콰아앙! 쾅!
그제서야 팬텀의 귀로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도 보였다.
“……이게 뭐야?”
팬텀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몇 걸음 걸어나왔다. 그리고 아마도 맨해튼일, 센트럴 파크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빌딩과 건물들에서 연기들이 피어올랐다.
깨진 유리창들과 건물 벽이 보였고, 벽을 타고 올라가는 괴생물체들과 그 괴물들을 공격하는 퍼스트 비젯들이 보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날고 있던 괴생물체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지상도 상황은 마찬가지.
사람들은 벌써 다 도망갔는지, 아니면 다 어디엔가 숨은 것인지 독액을 떨어뜨리는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퍼스트 요원들이 보였다.
“……저건 또 뭐고!”
하지만 그것보다도 팬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건.
센트럴 파크 중앙.
하늘에 떠 있는 무언가였다.
핏빛 같은 붉은색과 죽음과 같은 검은색이 뒤섞여 있는 거대한 구체.
같은 색의 마법진 같은 것들로 둘러싸여 있는 그 구체는 마치 누군가의 심장처럼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주변을 떠도는 새까맣고 시뻘건 연기 같은 것을 흡수하고 뱉어내는 것이 꼭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오싹하다.
소름이 돋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손에 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금방이라도 손에 힘을 줘 심장을 터뜨려 버릴 것만 같다.
죽음.
원초적인 공포가 느껴졌다.
“……깊고 오랜 죽음을 먹고…….”
어느새 웜홀을 빠져나온 화이트 블러드가 경악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새로운 신이 될지니…….”
이레귤러스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거대한 검붉은 구체를 바라보았다.
* * *
“……컷! 오케이!”
마크 웨버 감독이 외쳤다.
항상 외쳤던 말이었지만, 오늘따라 이런저런 감정이 스며들어 있다는 걸 마크 감독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좋았어요! 지금까지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5월 말인 오늘.
[이레귤러스]의 마지막 촬영이 지금 막 끝났기 때문이었다.
마크 웨버 감독의 선언과도 같은 말에 촬영장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스태프들은 홀가분한 얼굴로 빠른 퇴근을 위해 열심히 정리했고, 서준과 배우들은 시원섭섭한 얼굴로 마크 감독을 바라보았다.
“고생하셨어요. 감독님.”
“고생은 배우들이 더 했지. 우리 스태프들도 그렇고!”
마크 감독의 머릿속으로 계약서를 썼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진짜 엎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건 정말 아찔했다고 말하는 마크 감독에, 서준과 배우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촬영이 일정대로 무사히, 그리고 연기도 만족할 정도여서, 사건의 원인인 루카스 터너도 이제 편안하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
마지막 촬영을 보러 온 마린사 담당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마지막까지 정말 좋았습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고생해 주십쇼.”
하하 웃으며 농담 같은 진담을 말하는 담당자에, 이제 촬영분들을 자르고 붙이고 CG도 넣고 음악도 배치해서 [이레귤러스]를 완성해야 하는 마크 감독이 침울해졌다.
“그렇지…… 난 더 고생해야 하지……. 개봉 날 좀 미루면 안 됩니까?”
“하하. 안 됩니다.”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마린사 담당자와 시무룩해지는 마크 감독에, 서준과 배우들이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