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926화 (926/1,055)

0살부터 슈퍼스타 926화

조금 전.

“감사합니다. 준.”

훈련센터에서 돌아온 서준에게 루카스 터너가 그렇게 말했다.

오전에는 그저 서준이 ‘로건 테이트’를 연기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고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동안 폐를 끼쳤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인 코너 밀스에게 들어보니 어제 하루, 하나부터 열까지 서준이 도와주지 않은 게 없었다.

고개까지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그 정중한 태도와 ‘준’이라고 부르는 모습이 지금까지 봐왔던 ‘루카스 터너’와는 확실히 달라, 최태우는 조금 놀라고 말았지만, 서준은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서준과 세 사람은 거실에 앉아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우분들에게는 이야기 안 드렸어요.”

배우들과 스턴트맨들, 촬영진 등등.

일단 개인 사정 때문에 못 나오게 됐다고 루카스 터너 쪽에서 전했지만, 아무래도 휴가 바로 다음 날부터 안 보이는 바람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까지 현 상황에 관해 이야기할지에 대한 판단은 서준이 아니라, 루카스 터너와 매니저가 해야 할 일이었다.

괜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메소드 연기 부작용’ 때문에 그랬다, 하고 이야기하면 기사로 퍼질지도 몰랐다.

‘뭐, 그 기사까지도 홍보에 쓴다면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판단은 루카스 터너와 코너 밀스가 하는 거였다.

“증인……이랄 것까진 없지만 필요하시면 증언해 드릴게요.”

안 믿는 사람도 있을 테니, 한 명이라도 증언하는 쪽이 도움이 될 터였다. 그게 배우 서준 리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준!”

코너 밀스는 숫제 은인을 보는 눈빛이었다.

“몸 상태는 어때요, 루카스?”

“멀쩡합니다.”

루카스 터너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곧바로 연습해도 될 정도로요.”

“그건 좀 이르지 않을까요?”

서준의 말에 코너 밀스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준과 같이 연습할 수 있을까 싶어서.’라는 루카스 터너의 말에 ‘좋은데?’ 하고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 코너 밀스에게 서준의 말은 신의 계시와도 같았다.

준이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먼저 의사한테 현재 상태를 진단받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마침 내일 오전에 오기로 했습니다. 준의 말대로 메소드 연기 부작용을 치료해 본 적은 없다고 합니다만…… 해리 장애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는 의사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끄아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을 마린사가 어중간한 의사를 보내진 않았을 거다.

“다행이네요.”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촬영이 코앞인데…….”

루카스 터너가 말끝을 흐렸다.

정말로 코앞이었다.

이제 8일 남았다.

배우의 사고로 영화 촬영이 미뤄진 적이 있지만, 이렇게 코앞에 두고 미뤄진 적은 아주 드물었다. [레드본]도 [쉐도우맨]이나 [그린윙]을 만들 정도로 제법 텀을 두고 사고가 나지 않았었나.

게다가 교통사고라는,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사고와 달리, 이번 사태는 루카스 터너의 정신적인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정말인가? 거짓말 아니야?’ 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루카스 터너는 그런 것보다는 자신이 연습 없이 제대로 ‘팬텀’을 연기할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오늘도 지금까지 그랬듯 서준이나 코너 밀스와 이야기할 때는 괜찮았지만, 혼자만 있을 때는 불안에 잠겼었다.

준의 완벽한 ‘로건 테이트’를 보고난 후라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아니, 아닙니다. 몸부터 완전히 나아야겠죠.”

루카스 터너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에는 어떤 사고가 날지 몰랐다. 다시금 ‘로건 테이트’가 되어 서준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그런 루카스 터너를 서준이 바라보았다.

불안한 마음은 이해했다. 메소드 연기의 부작용에서 잠깐 벗어났다고 해도 몇 년 동안 쌓아온 걱정과 불안이 아직도 남아 있을 터였다.

‘확인해야겠지만.’

또 다른 문제도 생겼을 거다.

물론 그것도 에반 블록과 라이언 감독님한테 들었던 내용이었다.

“그럼 같이 연습할까요?”

그에 루카스 터너와 코너 밀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닮은 것 같은 배우와 매니저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몰입해서 연기 연습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저녁에 잠깐 배역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싶어요.”

저녁에는 서준과 함께 ‘로건 테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 오전에는 루카스 터너 홀로 ‘로건 테이트’와 ‘루카스 터너’를 구분하는 연습을 하는 거였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서준이 상태가 괜찮은지 살펴보는 것이었다.

“완전히 괜찮아진 것 같으면 의사의 동의하에 촬영도 시작할 수 있을 테고요.”

웃으며 말하는 서준에 코너 밀스는 생각했다.

난 앞으로 평생 준의 팬이다.

“그렇게까지 해주셔도 괜찮겠습니까, 준?”

루카스 터너야 물론 바라마지않았던 일이었지만, 서준에게 괜히 폐만 끼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괜찮아요. 캐릭터 분석하는 거 좋아하니까요.”

그건, 그럴 것 같았다.

서준이 맡은 역은 ‘나이트 진’.

‘팬텀’은 그와 함께 나오는 캐릭터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완벽하게 연기해 낸 모습을 보면 주변 캐릭터들에 대한 분석도 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물론 ‘나이트 진’에 비해서는 덜 했겠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연기할 수 있다니…….’

조금 침울해지려던 루카스 터너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런 서준이 도와준다고 했다. 어쩌면 줄곧 바라왔던 ‘완벽한 팬텀’을 연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준.”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루카스 터너와 코너 밀스는 서준의 숙소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 * *

다음 날 저녁.

연습을 시작하기에 앞서, 코너 밀스가 서준과 최태우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전에 검사와 상담이 있었습니다.”

오늘 오전에 다녀간 정신과 의사의 진단 결과였다.

무척이나 개인적인 사항이었지만 루카스 터너는 서준과 그 매니저에게도 알려주었다. 서준은 함께 연습할 배우로서, 매니저는 배우의 안전을 위해서.

정신적인 문제로 눈이 확 돌아, 연습할 때 상대 배우를 상처입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코너 밀스는 들뜬 목소리로 진단 결과를 요약해 알려주었다.

“예상보다 진단 결과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전달되는 사이 과장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진짜인데 말이죠.”

코너 밀스의 말처럼 어제 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를 정도로, 루카스 터너는 그사이 멀쩡해졌다.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촬영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촬영 전까지 그리고 촬영 중에도 상담을 받기로 했습니다.”

“잘됐네요.”

서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문가까지 그렇게 말했다니, 다행인 일이었다.

“그런데 자아존중감이 많이 낮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불안과 스트레스를 많이 겪어서 그런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이건 천천히 치료해야 할 사항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만 빼면 다 좋은 소식이었다.

마린사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서준의 눈에 선했다.

“그럼 이제 연습하러 갈까요?”

서준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루카스 터너가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좀 꿈속에서 연습한 것 같았고, 서준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이틀이나 ‘로건 테이트’의 R도 못 봤기 때문이었다.

오전 시간에 그동안 외웠던 대본을 노트에 써서 보긴 했지만,

‘……그건 뭐야!?!’

코너 밀스가 기겁하며 빼앗아 갔다.

그에 최태우는 ‘루카스 터너도 서준이 과구나.’ 하고 생각했다.

걱정과 기대가 섞인 눈빛을 하고 있는 매니저들을 뒤로하고 두 배우는 1층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서준이 한두 달 정도 읽을 책과 대본들이 있는 곳이라서 꽂혀 있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짙은 종이 냄새는 기대로 들뜬 루카스 터너의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먼저 팬텀1부터 이야기해 보죠.”

루카스 터너는 눈을 빛내며 조용히 서준의 말을 경청했다.

* * *

“오늘도 괜찮았습니다.”

루카스 터너가 잠이 든 사이.

마치 악당들의 비밀회의처럼 세 사람이 모였다.

루카스 터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냥 ‘이제 다 나았군!’ 하고 넘어가기엔 일어났던 일이 너무 컸다.

‘팬텀이 히어로라서 다행이지…….’

코너 밀스는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만약 빌런이었다면, 그것도 굉장히 악명높은 빌런이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두려워졌다.

그에 코너 밀스는 루카스 터너 몰래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

오늘로서 사흘째. 시간을 내준 서준 리와 태우 최에게는 정말 몇 번이고 감사해도 모자랐다.

‘사실…….’

의사의 진단보다는 서준의 의견이 더 믿음이 가기도 했다.

아예 안 믿는다는 소리는 아니고, 의사의 진단에 서준의 판단까지 있으면 촬영에 들어가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대본이나 자료가 없으니 혼자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은데, 노트를 보면 준과 이야기했던 것들을 정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로건 테이트의 모습은 전혀 안 보이지만…… 이래도 괜찮을까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이니까요. 게다가 계속 억누르기만 하면 촬영 들어가서 폭주할지도 모르고요.”

적당히 조절하며 풀어주는 게 좋았다.

서준의 말에 코너 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이외에는 괜찮습니다. 운동도 하고 있고 의사와 상담도 잘하고 있고요.”

“잘됐네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따르는 법이었다.

‘능력도 쓰고 있고.’

코너 밀스의 차례가 끝나고, 서준이 입을 열었다.

평소의 모습도 중요했지만, 아무래도 연습할 때의 상태가 더 중요했다.

“연습은 어제랑 같았어요. 마크 감독님이 주셨던 자료를 보고 있는데, 특별한 반응은 없었어요.”

“정말 다행입니다.”

코너 밀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런데?

두 매니저가 서준을 바라보았다.

“연기가 문제예요.”

“여, 연기가요?”

코너 밀스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네. 제가 하는 분석을 듣고 있기만 하거든요.”

“?……그게 문제가……아!”

고개를 갸웃하고 말하던 코너 밀스가 이내 서준의 말을 이해하고 탄식했다.

눈앞에 ‘정답’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틀렸다는 걸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할까.

그대로 못 본 척 잘못을 고집해 나가거나, 정답을 그대로 따라 할 터였다.

루카스 터너는 두 개의 방법 중 후자를 선택했다.

낮아진 자존감과 눈앞에서 본 서준의 ‘로건 테이트’ 때문이었다.

‘완벽한 연기는 따라 하고 싶은 법이거든.’

노트 가득 배우들을 분석했던, 그리고 여전히 분석하고 있는 에반 블록은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렇게 말했었다. 라이언 감독도 마찬가지.

‘의식하지 않더라도 영향을 받게 마련이지.’

하고 말했다.

두 사람 다 서준이 ‘완벽’한 연기를 하지 못할 거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 연기할 때는 따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뭐든지 모방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루카스라면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해요.”

그러나 성장했다면 자신만의 것을 보여줘야 했다.

정답이 없는 연기라면 더더욱.

서준이 이야기하는 ‘로건 테이트’의 분석을 듣고 가만히 ‘경청’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서준의 ‘로건 테이트’를 흉내 내는 루카스 터너.

눈 깜짝할 사이에 메소드 연기의 부작용에서 깨어날 정도로, 서준(의 연기)에 집착(?)하는 루카스 터너를 이제는 알기에, 코너 밀스는 이해가 되면서도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준이라면 해결 방법을 알고 있겠지.

너무 의지하는 것 같지만, 서준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싸워야죠.”

코너 밀스가 기대한 대로 서준은 대답해 주었다.

“네, 싸워……네?”

……싸운다고요?

고개를 끄덕이던 최태우와 코너 밀스가 몸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서준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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