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900화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고 외친 클레어가 집으로 달려갔다.
세상에. 마녀라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앗.
쓰러질 뻔한 짐을 다시 바로 세워둔 클레어는 현관 열쇠를 찾으며 중얼거렸다.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고, 휴대폰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하고 통화를 하고, 엄청 비싸긴 하지만 우주여행도 하는 시대인데 말이야.”
담벼락 위로 새까만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뒤돌아 서 있던 클레어는 눈치채지 못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은 클레어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으며 입을 열었다.
“마녀라니!”
-옭!
“응?”
이상한 소리에, 클레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쏴아아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가 숲이 되어 있었다.
“여, 여긴 어디야?”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클레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 *
옅게 남은 마녀의 냄새를 쫓아온 남자는 반짝이는 이층집을 보았다.
그리고,
-미야옭!
담 위를 우아하게 걷고 있던 검은 고양이가 마당 안으로 뛰어들려다가, 그대로 튕겨 나와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도.
“뭐야.”
남자가 손으로 낡은 후드를 들어 올렸다.
밝은 햇빛 아래, 후드 속에 숨겨져 있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거칠어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오뚝한 코, 시원하게 올라간 입꼬리.
조금 창백해 보이지만, 누가 봐도 잘생긴 외모의 남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마녀 맞잖아.”
으아아악!
클로즈업된 서준의 얼굴에 송유정과 임예나가 마음속으로 난리를 쳤다.
하관만 봐도 잘생김이 느껴지는 서준이었지만, 역시 크고 자세하고 선명하게 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넌 뭐야.”
‘마녀’라고 말한 남자에, 검은고양이의 노란색 눈이 가늘어졌다.
“넌 저 마녀의 고양이야?”
“내가 먼저 물었어.”
킁킁.
이게 뭐더라. 어디서 맡아봤는데…….
하고 미간을 찌푸리고 기억을 더듬던 검은고양이가 펄쩍 뛰었다.
“너! 너! 늑대잖아! 늑대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오, 냄새가 나? 일부러 다른 냄새로 가렸는데…… 너 좀 한다?”
그렇게 고양이와 늑대가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사이.
쏴아아아-
클레어는 여전히 빗속에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집을 나와 저 끝에 있는 나무까지 걸어갔다가 왔다. 진짜 비에 옷이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클레어는 안경에 묻은 물방울들을 닦아내며 침착하려고 애썼다.
“괜찮아, 클레어 매닝. 이건 꿈……이 아니지만 돌아갈 수 있어. 눈을 감았다 뜨면 집일 거야.”
다시 안경을 쓴 클레어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쏴아아아-
실패다. 전혀 변한 게 없었다.
만약 놀러 온 것이라면 비 오는 날의 운치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클레어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일단 위치파악부터 하자.”
클레어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믿을 건 인공위성과 GPS뿐이었다.
그에 관객들이 작게 웃었다.
보통 판타지와 관련된 작품이라면 기계나 과학적 요소를 많이 넣지 않을 텐데, 소설 [이클립스]에는 자주 나왔다. 영화에도 잘 반영한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야?”
물론 그게 잘 쓰이는 건 다른 이야기였지만.
지도에 클레어의 위치가 떴다.
미국 땅이긴 했다. 하지만 온통 숲이었다. 게다가 클레어가 살던 지역과 한참 떨어져 있었다.
세상에.
눈앞이 아찔해진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손으로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베뉴힐로 어떻게 돌아가지……?”
충격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클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레어를 비추고 있던 카메라가 빙글 돌았다. 풍경이 바뀌었다. 비가 내리는 숲이 아니라 햇빛이 비치는 도시였다. 차들이 이동하는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어떤 마녀가 늑대인간을 만나! 빨리 사라져!”
“볼일이 있다니까! 이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고양이야!”
“한 입 거리?! 한 입 거리이?! 이 냄새 나는 똥개가!?”
“똥개가 아니라 늑대라고!”
“늑대나 똥개나!”
으르르릉!
캬아악!
말하는 검은 고양이와 그 고양이와 싸우는 이상한 남자의 목소리도.
“하…….”
다시 한번 아찔해지는 눈앞에, 클레어는 몸을 돌려 현관문에 이마를 박고 말았다.
* * *
검은고양이의 정체는 몰리였다.
이 집과 이 상황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클레어는 몰리가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클레어 최고!”
“잠깐만, 마녀! 나는?”
그말에 클레어는 고양이와 싸우던 남자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오는 길에 부딪혔던 남자.
“마녀. 나도 들어가게 해줘. 너한테 의뢰할 게 있어.”
“안돼! 저 똥개는 안돼!”
낯선 남자까지 집 안으로 들일 생각은 없었던 클레어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남자가 다급하게 허공을 두드렸다.
그러자 투명한 벽이 화르륵! 불꽃을 일으키며 남자의 손에 상처를 입혔다.
갑작스러운 불길에 관객들이 몸을 꿈틀했다.
와, CG 대박.
소설을 읽어서 알고 있었던 장면이었는데도, 영상으로 보니 느낌이 달랐다. 고양이 몰리도 자연스러웠고. 앞으로 나올 장면들이 기대됐다.
“마녀! 젠장! 잠깐이면 돼!”
하고 외치는 남자를 뒤로하고 클레어는 현관문을 닫았다.
이상한 남자에, 비가 오던 숲에, 말하는 고양이에, 불꽃을 만들어내는 집까지.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다.
“클레어!”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부르는 검은고양이에, 클레어는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 * *
클레어는 마녀의 패밀리어인 몰리에게서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 어머니도 마녀였을까?”
갓난아기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란 클레어가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바라고 있던 그것.
가족.
“그럴걸?”
클레어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몰리가 대답했다.
“마녀는 적이 많으니까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라.”
아…….
그랬구나. 그랬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거야.
……내가 싫어서 버린 게 아니야.
방울방울 흘러내리던 눈물이 어느새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런 클레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몰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싸아아-
언제부턴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근데…… 적이 많다는 건 무슨 이야기야?”
조금 시간이 지나 진정한 클레어의 물음에 몰리가 설명해 주었다. 마녀 말고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에 대해서.
반쯤 진지하게, 반쯤 넋 놓고 듣던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남자가…… 뭐라고?”
“응? 내가 말 안 했나? 늑대인간이야.”
마치 자신의 능력을 뽐내듯, 몰리가 재잘거렸다.
“예를 들면, 아까 봤던 늑대인간 녀석이 성체 된 지 얼마 안 된 어린 나이라는 거나, 가진 힘이 다른 늑대인간들에 비해 약하다는 거나. 또 무리 없이 혼자 다니는 것 같다, 라는 정보 말이야.”
그 말에 클레어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금도 있으려나?
아니, 돌아갔겠지.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아! 짐!”
클레어가 벌떡 일어났다.
몰리의 이야기를 듣느라, 현관 옆에 놔둔 짐을 깜빡 잊고 있었다!
클레어는 얼른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멈춰 섰다.
대문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빗물에 흠뻑 젖어 덜덜 떨며.
“아…… 나왔네.”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변한 얼굴의 남자는 클레어와 눈이 마주치자 안도하듯 희미하게 웃었다.
“클레어, 설탕!”
“아!”
그런 남자의 모습에 잠깐 홀릴 뻔한 클레어가 몰리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일단 짐부터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처럼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결계를 두드릴 줄 알았는데, 남자는 조용히 클레어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클레어의 눈을 피하는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남자의 속눈썹에 맺혀 있는 동그란 물방울이 보였다.
비를 맞은 남자는 청초하고 연약하고, 어리고 불쌍해 보였다.
송유정과 임예나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너무, 너무 좋다. 좋다는 생각밖에 안 떠올랐다.
“의뢰할 곳이 마녀 너밖에 없어서 그랬어. 내가 정말, 정말 급해서…… 미안해.”
늑대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축 처진 귀와 꼬리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도 비에 흠뻑 젖은.
아아아! 진짜!
클레어는 마음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여전히 비를 피할 생각도 없이, 아래만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클레어는 이내 결심한 듯한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몰리에게 물었다.
“몰리. 마법 중에 뭔가 보호할 수 있을 만한 거 없을까?”
몰리가 펄쩍 뛰었다.
“저 똥개 데리고 오려고!?”
“비 오는데 저렇게 놔둘 수는 없잖아. 네가 어린 데다가 약하고 혼자라고 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클레어에 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마녀 클레어의 패밀리어.
마녀가 원하는 일은 도와줘야 했다.
“잠시만 기다려 봐.”
그러자 몰리의 옆,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검은 원이 생겨났다. 클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 마법인 것 같았다.
“그, 그건 뭐야?”
“마가렛의 창고랑 연결되어 있는 입구야. 패밀리어만 쓸 수 있는 마법이지.”
그렇게 말한 몰리가 폴짝 뛰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뭔가를 물고 다시 튀어나왔다. 제정신으로는 처음 보는 마법적인 것이 클레어가 감탄했다.
“이걸 쓰면 될 거야.”
몰리가 클레어에게 물고 있던 것을 건네고 말했다.
클레어가 손바닥 위의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초록색과 연두색 실로 만든 실팔찌였다.
* * *
비는 계속 내렸다.
남자는 굳게 닫힌 마녀의 집만 바라보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조금 냉막하고 많은 체념과 절망이 느껴지는, 그러나 미약한 끈질김이 있는 그런 눈빛과 표정으로.
그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은 남자와 태어날 때부터 함께 있었던 것처럼, 남자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때.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문이 열렸다. 어두운 주변으로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따스해 보였다.
조금, 눈이 부셨다.
그 따스한 집에서 나온 마녀가 입을 열었다.
“일단 비가 그칠 때까지는 내 집에 있어. 그 의뢰라는 것도 뭔지 들어볼게.”
“……고마워.”
진심이었다.
정말로 고마웠다.
“하지만 집에 들어오려면 먼저 이 팔찌를 해줬으면 해. 이걸 하면 나랑 몰리, 그러니까 아까 그 검은고양이한테 해를 끼칠 수 없게 돼. 공격하려고 하거나 해를 끼치려고 하면 고통이 느껴질 거야. 생각하는 것도 안 돼.”
수갑이나 족쇄보다 더한 것을 차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클레어는 남자가 아예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조금 싫은 기색을 내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거면 돼?”
남자는 클레어의 예상과 달리 기쁘게 웃었다. 그러고는 케이크 먹기보다 쉽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 그 팔찌.”
* * *
남자가 이층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동마법이 걸린 집이 마녀의 숲으로 이동하는 작은 사고가 있긴 했지만 다시 베뉴힐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클레어 매닝이라고 해.”
씻고 새 옷을 입고 나온 남자에게 마실 것을 건넨 클레어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난…… 테오. 테오라고 불러줘.”
클레어의 옆자리에 누워 있던 몰리가 벌떡 일어났다.
“패밀리 네임은? 왜 패밀리 네임을 말하지 않는 거야, 똥개?”
몰리의 노란 눈동자가 매서웠다.
“늑대인간들은 무리를 중요하게 생각해, 클레어. 자기 이름을 말할 때도 자신이 어떤 무리인지 숨기지 않아. 숨기는 녀석이 있다면,”
몰리가 클레어를 보호하듯 섰다.
“굉장히 수상한 녀석이라는 거지.”
갸르릉거리며 털을 바짝 세우는 마녀의 패밀리어, 몰리의 반응에 집 안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마법의 ㅁ도 모르는 클레어도 그걸 알 수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테오의 숨통을 조일 듯 모여들었다.
이게 마법.
마녀의 힘이었다.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에 당황한 테오가 목소리를 높였다.
“레이필드! 레이필드야!”
처음 느끼지만 아늑하고 편안하고 조금 황홀하기까지 한 기운이 밀려들자, 반쯤 넋 놓고 있던 클레어가 그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일찍 무리에서 독립해서, 아직 패밀리 네임을 정하지 않아서 그랬어. 전에 있던 무리의 패밀리 네임은 레이필드야!”
몰리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수상한데…….”
하지만 테오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집 안을 가득 채웠던 마법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바짝 섰던 몰리의 털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실팔찌가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일단 두고 보겠어.”
그렇게 말하며 테오를 노려본 몰리가 깡총깡총 달려와 클레어의 옆에 앉았다.
멋지다.
내 고양이.
그런 몰리를 쓰다듬으며 클레어가 물었다.
“의뢰하고 싶다는 건 어떤 거야?”
“나한테 마법이 걸려 있거든. 아니면, 저주라고 해야 할까.”
테오의 얼굴에 그림자가 생겼다.
“저주가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게 어떤 종류의 저주인지, 몇 개나 있는지, 어떻게 푸는 건지 하나도 몰라.”
테오의 이야기에 몰리가 노란 눈동자로 테오를 살폈다.
“태어났을 때 걸린 저주라면 푸는 데 꽤 시간이 걸리겠는데…….”
“시간은 얼마나 걸려도 괜찮아. 풀 수만 있다면. 그런데 내가…… 돈이 없어…….”
“뭐!?”
몰리가 펄쩍 뛰었다.
그와 동시에 번쩍 번개가 쳤다.
“의뢰라며! 의뢰! 의뢰라면 당연히 의뢰비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저주를 알아보는데도 시간이랑 재료가 들고, 오래된 저주라서 푸는 데도 엄청나게 필요할 텐데! 땅 파면 재료가 나오는 줄 알아?”
“미안…….”
“특히 저주를 푸는 데 필수로 들어가는 재료들이 얼마나 비싸고 구하기 힘든지 알아!”
송유정과 임예나가 작게 어깨를 들썩였다.
잔소리하는 몰리도, 쭈그러든 테오도 귀여웠다.
클레어가 고양이를 말렸다.
그리고 시간이 늦어, 남은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했다.
“몰리. 내가 저주를 풀 수 있을까? 난 마법 하나도 모르잖아.”
테오를 1층 작은방으로 들여보내고 2층으로 올라와 침대에 누운 클레어가 말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마가렛의 책과 물약들과 재료들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거야. 마가렛은 훌륭한 마녀였거든. 나도 도와줄게.”
그렇다면 다행이다.
클레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무슨 저주인지는 알고 풀어주자, 클레어.”
“응? 왜?”
검은고양이의 노란 눈이 현명함으로 반짝였다.
“아마도 교류하는 녀석들이 풀기에 어려운 저주거나…… 풀면 안 되는 저주일지도 몰라.”
“풀면 안 되는 저주?”
“응. 그런 경우에는 저주라기보다는 봉인이라고 해야겠지.”
몰리가 말을 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힘이 너무 강했다든가 피를 보면 이성을 잃는다거나, 뭐 그런 문제들이 있어서 마법을 걸어둔 걸지도 몰라. 저 녀석은 저주라고 생각하는 마법을.”
몰리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초보 마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떤 마법인지 확실하게 알고 풀어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 우리야 실팔찌가 있으니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은 위험하니까.”
“알았어. 그럴게.”
그에 클레어가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클레어는 일어나자마자 청소하고 있는 테오와 마주쳤다.
“편하게 있어도 되는데.”
“의뢰비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니까.”
뭐, 그렇다면야.
“아침 식사 준비할 건데, 뭐 못 먹는 음식 있어?”
“아니, 없어. 다 잘 먹어.”
소설을 읽은 관객들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테오를 바라보았다.
수갑 같은 실팔찌를 거리낌 없이 하는 것도, 눈치를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못 먹는 음식이 없는 것도.
또 클레어를 슬쩍슬쩍 바라보며 어색하게 빵에 잼을 바르는 모습과 따뜻한 스크램블 에그와 잘 구워진 소시지를 눈을 반짝이며 먹는 모습도.
지나가는 대사마다 장면마다 ‘테오’, 아니, ‘시어도어 레이필드’의 과거가 느껴졌다.
“내가 조금 생각을 해봤는데…….”
테오가 입을 열자, 클레어와 몰리가 바라보았다.
“의뢰비로 내 털이나 피는 어때? 늑대인간의 털과 피가 재료로 꽤 가치가 있다고 들었거든.”
“좋지!”
“그럼 그걸로 의뢰비…….”
몰리의 반응에 밝아지던 테오의 표정이 클레어에게로 향하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클레어는 소시지가 꽂혀 있는 포크를 든 채로 그대로 얼어있었다.
……내가 뭐 잘못 말했나?
맛있게 먹던 것도 멈춘 채 테오는 클레어의 눈치를 봤다.
“……털? ……피?”
아. 그렇구나.
원인을 찾은 테오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아침 식사 중에 할 이야기는 아니지.”
“그럼 밥 먹고 하자!”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이 늑대인간아.
이 말하는 고양이야.
* * *
의뢰비는 다른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쿠키…… 가게?”
“1층의 거실이랑 주방을 가게로 만들 생각이야. 2층은 내가 생활하는 공간으로 쓰고.”
클레어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마녀와 늑대인간과 고양이가 앉아있는 거실과, 거실과 이어져 있는 주방.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는 세탁실과 화장실과 작은 방,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래서 거실이랑 주방을 리모델링할 생각이야. 물론 전문가도 쓰겠지만, 돈을 아껴야 해서 혼자서 할 생각이었거든. 힘쓸 일이 많을 것 같으니까 테오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정말…… 그것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클레어였지만, 테오는 조금 찜찜했다.
평생 바라왔던, 저주를 푸는 대가로는 너무 쉬운 일 아닌가.
그때, 몰리가 말했다.
“클레어, 집 공사는 마법으로 하면 돼.”
“마법으로?”
클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오도 눈을 깜빡였다.
“응. 이 집에는 변형마법도 걸려 있거든. 더 넓어질 수도 있고 좁아질 수도 있어. 내부만 변하는 거라서 외관은 그대로지만.”
몰리가 꼬리를 살랑이며 말했다.
“먼저 이 집에 있는 마법을 느껴봐. 집중해서 연결한다고 생각하면 돼. 나도 도와줄게.”
몰리의 말에 클레어는 정신을 집중했다.
마법은 어제 한 번 느꼈었다. 클레어는 아늑한 그 느낌을 좇았다. 아마도 몰리의 것인 듯한 힘이 길잡이처럼 이끌어주었다.
찰칵.
집에 걸린 변형마법과 연결된 것이 느껴졌다.
“이제 집을 어떻게 바꿀지 떠올리면 돼. 가게의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하고 싶어?”
“그렇게 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여기 거실이랑 부엌 정도?”
클레어의 말과 동시에, 마법처럼 천천히 내부가 바뀌기 시작했다.
가구는 그대로인 채로, 현관문 쪽 벽이 쭈우욱 멀어졌다.
!
그에 소파에 앉아 있던 클레어와 테오가 놀라 일어났다.
벽과 함께 천장과 바닥도 점점 늘어났다. 마치 길쭉하게 늘어나는 반죽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1층 크기만 한 텅 빈 공간이 또 하나 만들어졌다.
“가게랑 생활공간을 구분할 벽도 필요하지?”
넋이 나간 클레어를 향해 고양이 몰리가 히히 웃으며 말했다.
“……응. 맞아.”
그 대답과 함께, 생활공간으로 쓸 거실과 부엌, 그리고 가게로 쓸 공간과 주방 사이에 벽이 마치 겹겹이 쌓이는 케이크 층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관문이 있던 자리에는, 나무가 자라는 듯한 모습으로 문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럼 가게로 가 볼까?”
몰리의 말에 상기된 얼굴의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가 그 뒤를 쫓았다.
문을 열자, 가게로 쓸 공간이 보였다. 텅 비어 있었지만 넓고 깨끗했다.
“콘센트랑 수도꼭지가 있으면 전기랑 수도랑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어, 클레어. 아. 가구는 못 만들어.”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이게 마법!
클레어의 눈이 반짝였다. 그 어느 마법보다 멋졌다.
그렇게 가게가 만들어지고 클레어는 준비를 시작했다.
테오도 클레어를 도왔다. 아주 열심히. 클레어보다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하고 먼저 나서서 일을 도왔다. 한숨 덜 수 있어서 좋긴 한데,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몰리는 그렇지 않은지, 그런 테오를 이리저리 부려 먹었다.
“오늘도 안 나갈 거야?”
“난…… 집 지키고 있을게.”
그건 의뢰비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치더라도 밖을 나가지 않는 건 이상했다.
겨우 몇 걸음인데.
왜 집에서 나오지 않는 걸까.
배웅 나온 테오의 운동화가 대문 바로 앞에 섰다. 절대로 저기를 건너오지 않았다.
“조심해서 다녀와.”
“응.”
테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클레어는 집을 나와 마켓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뒤를 보았다.
대문 안에 테오가 서 있었다.
자유롭게, 언제든지 나갔다 들어올 수 있는 나무 대문을 마치 무언가 막고 있는 듯이, 결계라도 있는 듯이, 가만히 바라보며.
이내 등을 돌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테오를 보며.
클레어는 문득 테오가 왜 그렇게 일을 하는 것인지, 집을 나오지 않는 것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클레어는 낮에는 가게를 열 준비를 하고 밤에는 몰리에게 마법 수업을 듣고 있었다.
2층에는 숨겨져 있는 서재와 창고가 하나 더 있었다. 마녀를 위한 물건들로 가득한 곳이었는데, 마가렛 도트의 물건들도 여기에 있었다.
마가렛 도트의 사진을 보며 클레어는 감사를 전했다.
마법수업은 마치 동화 속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뜨겁지 않은 불꽃, 수정처럼 반짝이는 얼음, 밤하늘을 잘라낸 듯한, 별이 빛나는 검은색 비단, 마녀하면 떠오르는 고깔모자와 빗자루, 시곗바늘이 5개나 있는 뻐꾸기시계 등등.
마녀의 서재와 창고에는 생전 처음보는 물건들과 아름답고 기묘한 것들이 많아서 멍하게 구경하게 되었다.
클레어는 예상과 달리 말린 개구리나 이상한 벌레의 무언가 같은 것 없어서 안심했다. 몰리와 마가렛이 ‘그건 익숙해지면 가르쳐 줘야지.’ 하고 의논한 것도 모르고.
“마가렛은 물약을 제일 잘 만들었어. 이건 상처를 치료해 주는 약, 이건 오래된 흉터를 지워주는 약, 그리고 이건…….”
몰리가 여러 가지 마법이 깃든 물약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중에서 클레어의 눈길을 끈 건 시력을 좋아지게 하는 약이었다.
안경테를 만지작거린 클레어는 이내 몸을 돌려 ‘이제 마법 용품을 소개해 줄게!’ 하고 말하는 몰리에게로 향했다.
마법약을 쓰는 덴 조금 용기가 필요했다.
* * *
“자, 이번엔 이쪽!”
늑대인간을 발끝으로 조종한다는 사실에, 몰리의 고개가 가면 갈수록 위로 솟아올랐다. 마치 초원을 지배한 사자의 그것 같았다.
그런 검은고양이와 늑대인간의 모습을 마녀가 바라보고 있었다.
“맛있어! 클레어의 쿠키가 최고야!”
이제는 간식으로 준 쿠키까지 뺏어 먹고 있었다.
테오가 쿠키를 처음 먹어본 게 며칠 전인 걸 알고 있는 몰리인데도!
소파에 앉아, 부럽다는 얼굴로 몰리를 바라보는 테오의 모습에 클레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테오.”
“어?”
그에 테오가 놀란 듯 어깨를 움찔하고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하는 표정으로 클레어를 올려다보았다.
테오는 클레어가 부르기만 해도 깜짝 놀라고는 했다.
“네 간식이잖아. 네가 먹어야지.”
“그래도 몰리가 좋아하니까…….”
“그렇게 양보하지 않아도 여기 있어도 돼.”
테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청소를 하지 않아도, 하루종일 일을 하지 않아도 여기 있을 수 있어. 물론 도와주면 고맙겠지만.”
클레어가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서로 상처 입을 정도로 싸우지만 않으면, 몰리랑 싸워도 돼.”
씹고 있던 쿠키 조각이 소파에 떨어진 것도 모를 정도로 입을 쩍 벌린 몰리와 달리, 테오는 그저 멍하니 클레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가도 돼. 언제든 테오 네가 들어올 수 있게 열어 놓을게.”
그에 테오가 마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데,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건 마치 아이의 눈물처럼 뜨겁고 무거웠다.
“그러니까 테오 네 간식은 네가 먹어. 몰리 주지 말고. 몰리, 너도 테오 거 뺏지 마.”
“뺏은 거 아닌데! 테오가 줬는데!”
몰리가 펄쩍 뛰었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테오를 바라보았다. 마침 클레어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던 테오도 시선을 내려 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죽-
어쩐지 조금 물기가 서려 있던 테오의 얼굴에 심술궂은 미소가 떠오른 것 같았다.
그에 클레어도 웃었다. 확실히 기죽은 모습보다는 이런 모습이 훨씬 잘 어울렸다.
“그럼 새 간식 갖다 줄게. 아직 쿠키가 좀 남았을 거야.”
“앗! 클레어!”
나만 두고 가지 마! 하고 달려나가려던 몰리가 턱! 하고 날쌘 손에 붙잡혔다.
몰리의 노란 눈동자가 그 손을 따라 움직였다. 얌전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첫날에 만났던 성격 더러운 똥개가 거기에 있었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지, 몰리?”
아니, 히죽히죽 웃는 모습을 보니 요 며칠 부려먹은 게 있으니 성격은 더 더러워졌을지도 몰랐다.
“클레어!!”
몰리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클레어는 주방으로 향했다.
고양이는 사냥놀이를 좋아한다던데, 둘 다 재미있게 놀았으면 좋겠다.
“어? 어?”
그때, 몰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테오? 너 왜 그래? 클레어! 클레어!”
조금 전과는 달리, 진짜 다급한 듯한 목소리였다.
챙기던 쿠키와 우유를 내려놓은 클레어가 얼른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돌아다니는 몰리와, 그 앞 소파에 쓰러져 있는 테오를 발견했다.
“테오!”
테오는 붉게 물든 얼굴로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온몸이 불덩이였다.
음악이 바뀌었다.
불안으로 가득한 선율이 빠르게 흘러갔다.
뜨거운 열기에 괴로워하는 테오의 얼굴 너머로 테오의 과거가 흘러나왔다.
그저 버티기만 했던 날들의 고통과 체념, 처음으로 탈출한 날의 통쾌함.
그리고 마녀를 만났던 날의 강렬함.
테오의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빠르게 지나갔다.
닫혀 버린 문을 보며 난감해하는 테오의 표정, 내리는 비에 반사적으로 후드를 쓰려다가 멈칫하고는 그냥 비를 맞는 테오의 모습, 집 안으로 들어온 후 ‘이게 진짜 통한다고?’ 하고 의아해하는 얼굴까지.
마녀와 고양이와의 생활은 테오가 겪어보지 못했던 것들로 가득했다.
침대는 폭신했고 이불은 따뜻했다. 따뜻한 음식은 맛있었고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식사도 좋았다.
그래서 오히려 테오는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쫓겨날 것 같아 테오는 자신의 할 일을 찾아 헤맸다. 마녀의 고양이와 싸우지도 않았다. 마녀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쫓기다 생긴 상처로 아픈 것도 숨겼다.
여기에 머물고 싶어서.
몰리의 심술도 괜찮았고, 클레어가 시키지 않은 일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을 클레어가 눈치챘다.
여기 있어도 돼.
역시 착한 마녀였다.
‘사과해야지.’
꿍꿍이가 있었다는 것도 다 말해야지.
어쩐지 때렸으면 때렸지, 쫓아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믿음이 있다.
어느새 부드러워진 음악과 함께, 테오가 눈을 떴다.
“테오!”
“테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시야 가득, 클레어와 몰리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과 안도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것 또한 처음이었다.
언제나 혼자 아파야 했고 견뎌야 했고 참아야 했는데. 누군가가 함께 있어주었다.
“아프다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가슴이 무겁다 했더니, 몰리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두 앞발에 체중을 담아 꾹꾹 누르기까지 했다.
“몰리. 그러다 테오 또 기절하겠어.”
역시 클레어. 착한…….
“다 나으면 때려.”
음. 으음.
할 말을 찾지 못하던 테오가 저도 모르게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지금 웃음이 나와? 나오냐고!”
“테오.”
눈꼬리가 삐죽 올라간 마녀와 고양이를 보면서도 테오는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마녀와 고양이는 알까.
자신이 이렇게 웃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걸.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테오는 아주 크게 웃었다.
* * *
테오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레이필드의 늑대들과 부모, 그리고 저주 때문에 약한 자신과 없는 꼬리까지.
“꼬리가 없다고?!”
검은고양이의 꼬리가 물결처럼 파도쳤다.
“이렇게 멋진 꼬리가 없다고?”
몰리가 자신의 부드러운 꼬리를 솜방망이 두 앞발로 소중히 감싸 안았다. 노란색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아래위로 흔들렸다.
“세상에…… 꼬리가 없다니…… 꼬리가…….”
“꼬리가 그렇게 중요한 거야?”
“그럼! 이렇게 멋지잖아!”
“몰리.”
히잉.
몰리가 입을 삐죽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야. 꼬리가 없으면 보기 흉하기도 하고. 우리한테는 힘을 쓰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부분이야.”
테오가 설명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힘을 쓰는 걸 쿠키를 만드는 방법에 비유해 보면, 꼬리는 뭐일 것 같아?”
“으음.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버터? 밀가루? 아니면 베이킹 소다?”
“불이야.”
“불?”
요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거?
놀란 클레어의 모습을 본 테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건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 있지만 불은 그렇지 않잖아. 쿠키를 완성하는 작업에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우리한테 꼬리는 그 정도로 중요한 거야.”
그제야 클레어는 꼬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테오에, 클레어도 자신이 초보 마녀라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에 놀란 몰리는, 첫날부터 예상하고 있었다는 테오의 말에 더더욱 놀라야 했다.
* * *
컨디션이 좋아진 테오는 늑대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저주를 알아내는데도 좋을 것 같았다.
장소는 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곳이 선정되었다.
“마녀의 숲.”
클레어가 현관문 손잡이를 비틀어 문을 열자, 비가 오던 날에 봤던 잔디밭과 숲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길 내 발로 올 줄은 몰랐는데.”
허허.
해탈한 듯 웃은 클레어가 총총 걸어가는 몰리의 뒤를 쫓아갔다. 테오도 마녀와 고양이를 뒤따라갔다.
잔디밭 위.
테오는 클레어와 몰리를 마주 보며 섰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 테오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늑대를 처음 보게 된 클레어도 조금 떨렸다. 궁금함도 조금 섞여 있었다.
몰리가 슬쩍 클레어의 다리 뒤로 몸을 숨겼다.
“왜 그래, 몰리?”
“내, 내가 뭘!”
쫄았구나.
마녀와 늑대인간의 눈빛을 알아챈 몰리가 펄쩍 뛰었다.
“늑대 엄청 크단 말이야! 진짜! 진짜……! 나 정도면 한 입 거리라고오……!”
뒷말은 거의 속삭이듯 말했지만, 다 들렸다.
테오와 클레어가 웃음을 터뜨렸다.덕분에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싫어하는 모습이라도 클레어와 몰리라면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테오는 웃으며 늑대로 변했다.
클레어의 옆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천천히 감탄이 가득 담긴 시선이, 자신보다 큰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 위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서서히 카메라가 뒤로 물러났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주먹보다도 까만 코. 그리고 회색 털로 뒤덮인 길쭉한 주둥이, 꾹 다문 입과 노란 눈동자, 쫑긋 선 두 귀가 보였다.
카메라가 점점 더 뒤로 움직였다.
한 화면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회색늑대가 거기에 서 있었다.
본 적 없는 거대한 생명체에 신비롭고 묵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클레어는 어째서 몰리가 한입거리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꾹 닫힌 입안에는 뾰족한 송곳니가 있을 것이고, 두툼한 앞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을 터였다. 거대한 몸뚱아리는 한 번 치이기만 해도 저 멀리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런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짐승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무섭지 않았다.
노란 눈동자가,
테오의 눈동자와 똑 닮아 있었다.
낯설지만 친근했고, 친근했지만 낯선 느낌.
클레어는 손을 뻗어 자신이 겁먹을까 봐 숨도 제대로 안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늑대의 코끝을 만졌다.
강아지의 코처럼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오! 크네!”
몰리도 같은 걸 느꼈는지, 다시 팔팔하게 살아났다.
“잠깐만 살펴볼게, 테오.”
“나도!”
클레어와 몰리의 말에 테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클레어는 거대한 늑대를 살펴보았다.
테오가 말했던 대로 꼬리가 없었다. 하지만 꼬리가 없어도 신비롭고 멋진 늑대였다.
그사이 늑대의 머리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몰리가 클레어가 서 있는 곳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올려다볼 정도로 거대했던 늑대는 다시 인간으로 변했다.
머리에 쫑긋 선 늑대 귀가 보이긴 했지만, 틀림없이 테오였다.
묘한 기분이었다.
늑대인간이란 이야기는 들어서 잘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인간에서 늑대로, 늑대에서 반인간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하게 실감이 됐다.
클레어 자신이 새로운 세상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도.
“늑대 모습으로도 말할 수 있긴 한데, 그 모습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테오의 말에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반인간화한 상태에서도 꼬리가 없네.”
어느새 테오의 뒤를 살펴본 몰리가 병을 진단하는 의사 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다른 건 없어?”
“다른 건 괜찮아.”
“으음. 그럼 힘을 약하게 하는 저주 맞는 것 같아.”
저주라는 이야기에 테오의 귀가 움찔움찔 움직였다.
!!
송유정과 임예나가 몸을 움찔거렸다. 저도 모르게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귀여워서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마녀와 늑대와 고양이는 마녀의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클레어, 이거 여기 넣어줘.”
몰리가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회색 털과 물약이 든 병을 클레어에게 내밀었다. 언제 뽑았는지 모를 늑대의 털이었다.
“힘을 약하게 하는 저주에도 여러가지가 있거든. 힘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도 있고, 신체의 균형을 깨서 조금씩 새어 나가게 하는 것도 있고, 힘을 지속적으로 빼내서 모아두는 것도 있고, 아예 봉인해 두는 것도 있지.”
클레어와 몰리가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테오는 순한 얼굴로 얌전히 앉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표정과 달리, 늑대 귀는 얌전히 있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아닌 척하지만 테오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으아아……!
그때마다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켜거나 몸을 움찔거린 관객들은 모두 새싹이 아닐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