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92화
고요한 패션쇼장.
잔잔한 피아노의 선율과 무대를 걷는 모델의 발소리만이 들려왔다.
반응이 안 좋은 것이 아니었다.
관객들은 손을 그대로 멈춘 채 한순간도 눈을 깜빡이지 못하고 모델이 입은 옷만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해가 뜨는 새벽을 그대로 담은 듯한 차분하고 고요한 푸른빛의 원피스가, 런웨이를 가로지르는 모델의 걸음걸이에 나풀나풀 흔들렸다. 서늘하지만 상쾌한 새벽바람처럼 원피스에 달린 장식들이 흔들렸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흔적이 이렇게도 깊이 남아 있는데.
마치 어디선가 나는 냄새만 맡으며 ‘이 냄새는 뭐지?’ 하고 있다가 어떤 음식을 보는 순간, ‘아! 이거였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처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패션위크]에서 제일 처음 나왔던 박민형의 옷에서 있는지도 몰랐던, 정말 아주 잠깐 코를 스쳐 지나가는 냄새가 났다면.
그 냄새, 그러니까 ‘박민형만의 느낌’은 미션을 거듭해 나가면서 점점 짙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여기 이 패션쇼에서 확연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촬영 일정과 방송 일정이 달라서 중간을 건너뛴 관객들과 달리, 박민형의 성장을 지켜봐 온 심사위원들은 그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선)제갈세가 앵무새의 진법서]를 통해 알게 된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던 서준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의상에 진법을 활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무래도 진법이 ‘주변 환경’을 이용해서 만드는 것이다 보니, 집이나 방, 어떠한 구역에서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자그마한 옷 안에 진법을 구성할 줄이야…….’
그것도 ‘이게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느낌만으로.
옷의 바탕이 되는 원단의 종류와 색부터, 옷의 모양과 장식품의 모양과 개수, 모델의 머리 스타일과 화장 등등.
하나로 어우러진 그것들은 제작자인 박민형의 의도대로 새벽녘의 고요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초보 수준이야.’
새벽을 담은 원피스를 입은 모델이 사라지고, 배턴을 터치하듯 한낮을 담은 듯한 활기차고 반짝이는 옷(이것도 진법이 구성되어 있었다.)을 입고 나온 모델을 보며 서준은 생각했다.
비유해 보자면, 박민형은 덧셈과 뺄셈만 있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곱셈’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무의식중에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덧셈으로도 충분히 계산할 수 있는 계산들이지만, ‘곱셈’으로 더 빨리, 더 정확히, 더 다양하게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구구단 2단 정도지만.’
그 정도로 아주아주 기초적인 진법이라는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진법의 세계는 아주 넓고 깊으니까.’
곧 이 구구단 2단이, 3단이 되고 7단이 되고 13단이 되고 19단이 되는 날이 오겠지.
또 곱셈을 넘어 나눗셈, 방정식, 함수, 미분 적분 등등 수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혼자서 ‘진법’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느낄 정도의 감각을 가진 박민형이라면 잘할 거다.
‘어쩌면 선기가 좀 영향을 준 건가?’
서준이 살았던 집으로 이사 왔던 박민형과 그 가족.
그 집에 남아 있던 선기가 박민형의 감각이 깨어나는 데 도움을 줬을지도 모른다.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서준과 같은 곳을 나왔고.
[MOEB-436]을 제작할 당시, 박민형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도 있었다.
‘집이랑 나랑 학교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고 했지.’
아마도 그건 선 기일 거다.
‘그 정도로 기운에 민감해진 민형이라면 진법을 깨우칠 만도 하지.’
저도 모르는 사이, 큰 영향을 주게 된 서준은 작게 웃고는 패션쇼에 집중했다.
세 번째 모델이 런웨이 위로 나타났다.
첫 번째가 새벽, 두 번째가 한낮이었다면 세 번째는 노을이 지는 저녁이었다.
아무래도 박민형은 ‘하루’를 컨셉으로 잡은 것 같았다.
세 번째 의상에도 진법이 만들어져있었다. 아까 박민형이 대기실에서 바느질하고 있던 장식품이 여기에 쓰여 있었다. 진법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잔잔한 음악이 들린다.
모델이 새하얀 런웨이를 걷는다.
조명이 빛을 비춘다.
생각해보면 조금 아쉬웠다.
이게 TOP5 패션쇼가 아니라 박민형만의 패션쇼였다면 패션쇼 무대부터 기다란 런웨이, 조명 그리고 관객들이 있는 공간까지 박민형이 만들 수 있었을 거다.
‘그러면 아까 대기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간까지 활용해서 하나의 거대한 진법을 만들 수 있었겠지.’
진법에 서툴다고 하더라도, 서준과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느낌으로 다가올 터였다.
‘음.’
패션쇼가 그 정도라면, 연극은 어떨까?
자연스럽게 서준의 생각이 연극 쪽으로 향했다.
‘영화도 괜찮겠지?’
의상부터 소품과 배경까지.
한 작품을 만드는 데는 많은 것들이 필요했고, 그 많은 것들이 각 주제에 맞게 잘 어우러져야 했다. 그 모든 게 모여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으면 더더욱 좋았다.
박민형처럼.
‘다음에 연극을 하면 데려와야겠다.’
하고 눈을 반짝이는, 앉으나 서나 작품 생각뿐인 배우가 천직인 서준이었다.
* * *
여기 천직을 가진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아레시스의 수석 디자이너, 다니엘 티베였다.
다니엘 티베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박민형이 만든 옷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지가 개벽한 것 같았다.
다니엘 티베는 새로운 방법, 영감을 얻고 싶어 했다.
기존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도통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니엘 티베는 기존의 방식으로 성공한 디자이너였으니까.
이미 덧셈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오히려 새로운 방법을 궁리한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니엘 티베는 계속해서 새로운 방법을 고민했고, 그 방법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슬럼프를 겪게 된 거였다.
새로운 방법을 원하게 된 이유는,
더 이상 아레시스의 옷을 입어주지 않았던 다니엘 티베의 뮤즈, 서준 리 때문이었다.
뮤즈에게서 쏟아지는 영감을 받아 뮤즈에게 어울리는 옷을 만들었는데, 뮤즈가 입어주지를 않았다.
그것도 몇 년 동안.
도대체 왜?
하고 묻기엔 뮤즈가 선택한 옷들은 굉장히 잘 어울렸다.
다니엘 티베는 낙담했다. 자기 실력이 이 정도뿐인가 실망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디자인을 고민했다. 하지만 도무지 새로운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지.’
‘한국’에서 열린 ‘20대’ 디자이너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서준 리와 같은 곳에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디자이너들이라면 서준 리의 마음에 드는 감각을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라마다 나이마다 미적 감각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니까 말이다.
다니엘 티베는 그걸 배우고 싶었다.
‘아니, 그냥 새 뮤즈를 찾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수석 디자이너의 계획을 들은 운영팀에서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겨우 뮤즈에게 입힐 옷을 만들려고 그 먼 나라까지 가서 돈을 주고 아레시스의 이름을 내걸고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성공할지도 확실하지 않고, 실패한다면 돈은 돈대로 나가고 아레시스의 이름도 땅에 처박힐 거다.
‘서준 리 말고도 유명한 배우는 많은데요.’
그렇게 말한 운영팀은 다니엘 티베와 디자이너들에게 아주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뮤즈가 마음대로 됐다가 안 됐다가를 할 수 있으면 뮤즈가 아니다!
그건 마치 신의 계시처럼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렬히 주장하는 예술가들을 보며 운영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패션위크]였다.
솔직히 다니엘 티베도 그렇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서준 리가 좋아할 만한 감각을 알 수 있다면 좋고, 실패하더라도 아시아 쪽 시장을 파악하는 데 좋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 서준 리의 지인이 참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연극의 의상을 만들었다는.
[패션위크] 제작진의 ‘그러니 한국에 오는 심사위원에게는 비밀로 해달라. 깜짝 놀라는 장면을 찍고 싶다.’는 이야기는 다니엘 티베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빤히 민형 박이라고 하는 청년의 포트폴리오를 바라볼 뿐이었다.
다니엘 티베는 그 포트폴리오부터 어떠한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패션위크]의 촬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민형 박의 옷들을 볼수록 그것은 더욱 짙어졌다.
다니엘 티베는 다급해졌다. 사진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래 갈 생각이 없었던 한국으로 곧장 날아갔다.
‘오길 잘했다.’
그 덕분에 서준 리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둘 다 유명인이지만 생각보다 만날 기회가 없었다. 악수도 오늘 처음 했다. 얼마나 떨리는지, 표정관리를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다.
민형 박의 옷도 실제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무어라 설명은 할 수는 없었지만, 수십 년 동안 갈고닦은 감각은 알려주고 있었다.
저게 바로 네가 원하던 것이라고.
박민형의 네 번째 의상을 입은 모델이 런웨이를 걷기 시작했다.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별과 달이 빛나는 밤하늘이 담긴 의상이 고요하게 움직였다. 소리마저 밤에 잡아먹힌 듯했다.
다니엘 티베는 처음부터 끝까지 박민형이 만든 옷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로운 감각이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던 감각인 것 같기도 했다.
퍼즐 조각처럼 흐트러져 있던 감각들이 하나씩 맞춰지는 것 같았다. 물론, 아직 그림이 완성되려면 한참 멀었다.
민형 박의 도움이 필요했다.
20살 넘게 어린 디자이너였지만, 다니엘 티베는 기꺼이 배울 마음이 가득했다.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아레시스로 불러야겠다. 물론 우승하지 못할 리가 없겠지만.
다시 첫 의상, ‘새벽’부터 ‘한낮’, ‘노을’, ‘밤’이 차례로 런웨이를 걸었다. 이렇게 다 같이 보니 또 다른 연속성(진법)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다니엘 티베가 놀람과 충격으로 굳었던 얼굴을 풀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더욱 굉장한 것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와아…….
3번 디자이너가 만든 옷들이 무대 뒤로 사라지고, 사람들은 감탄인지 한숨인지 모를 탄성을 내뱉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은데, 의상들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디자이너 새싹이 뻐근한 고개를 돌리다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보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였다. 게다가 펜은 언제 떨어뜨렸는지 모르겠다.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스태프의 말에 디자이너 새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그냥 진행했다가는 4번과 5번 옷은 그냥 밋밋하게 지나갈 것 같았다.
“3번 박민형이겠죠?”
그리고 대화할 시간도 필요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딱 보니까 미션 때 만든 옷 생각나더라고요.”
“휴대폰이 있으면 확인해 볼 텐데 말이죠.”
유출방지를 위해 휴대폰 등 전자기기는 모두 제출했다.
“저는 한번 입어보고 싶더라고요.”
앞서 1번과 2번이 일반인이 입기엔 조금 어려운 옷들이었다면, 박민형의 옷은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일상복이었다. 그럼에도 특별했다.
마치 익숙하고 평범하지만 특별한 하루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관객들에게 스태프들이 간식을 나눠주었다.
“이거 광고로 나왔죠?”
“협찬인가 봐요.”
잘 나가는 프로그램이라서 그런지 다르긴 달랐다.
작은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먹던 디자이너 새싹이 고개를 돌려 심사위원들이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심사위원들과 특별심사위원들이 보였다.
어쩐지 아레시스 디자이너들과 다른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진지한(조금 다투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박민형의 재능을 다들 알아차렸나 보다.
그 뒤로 내 배우가 보였다.
강재한 배우와 중년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으헤헤헤.
디자이너 새싹도 정말 즐거웠다.
세상에.
실제로 보기가 별보다도 힘든 내 배우에, 아레시스 수석 디자이너와 다른 유명한 디자이너들에, 이런 멋진 패션쇼까지 보게 되다니!
오늘 하루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