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90화
요즘 BNA 방송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을 뽑으라면 바로 [패션위크] 제작진이 아닐까.
“윗분들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요? 저흰 월급만 받는데…….”
들어오는 돈은 다 회삿돈 아닌가.
“그래도 뭐, 보너스도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잠시 회의를 멈춘 [패션위크] 제작진은 법인카드로 산 음료를 쭈우욱 마시며 쉬고 있었다.
방영을 시작하면서 일이 많아져 조금 지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들 밝은 얼굴이었다.
미션을 내는 거나 촬영 방법이나 편집 방식에 많이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관리해야 할 출연자가 5명밖에 안 남기도 했고.
그 5명 중 한 명을 떠올리면 으흐흐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박민형.
그리고 이서준.
“이서준 배우가 계속 도와주는 것 같네.”
“그쵸?”
[산과 늑대], [MOEB-436(E)], [쉐도우]까지.
계속해서 나오는 이서준의 영상에, 덩달아 [패션위크]까지 계속 언급되고 있었다. 아마 화제성만으로는 요즘 예능들 중 최고가 아닐까, 싶었다.
“이젠 패션쇼까지 와주고.”
으흐흐흐.
[패션위크] 제작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 못했다.
며칠 전, 이서준 배우가 패션쇼에 온다고 박민형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코코아엔터에서도 따로 연락이 왔었다.
“강재한 배우도 함께 온다죠?”
“그래.”
대학교 때문에 찍는 작품은 적었지만, 나오는 작품마다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강재한도 제법 인기가 많았다.
그런 강재한과 이서준이 함께 온다니.
“거기다 다니엘 티메 씨도 오잖아요.”
아레시스의 수석 디자이너.
[패션위크]를 기획하고 지휘하는, 아레시스의 기둥이 이번 패션쇼에 올 예정이었다.
“이번 패션쇼 진짜 대박이겠다.”
[패션위크] 제작진의 귀로 시청률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TOP5 패션쇼 당일.
차량 한 대가 패션쇼가 열리는 스튜디오의 관계자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이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특별심사위원들과 출연자들의 가족, 지인들을 스튜디오 안으로 안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가 얼른 차 쪽으로 향했다.
조수석의 문이 열리자, 스태프가 얼른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패션위크의 스태프입니다. 혹시 누구의 초대…… 헉!”
강재한이다.
미리 이야기를 들었지만, 눈앞에서 보는 선하게 생긴 얼굴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에 스태프의 얼굴이 문이 열리는 운전석 쪽으로 돌아갔다.
이서준!
배우 이서준이 운전석에서 내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재한이 웃으며 인사하고, 서준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스태프는 반사적으로 꾸벅 인사했다.
“박민형 씨 지인으로 왔는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아! 넵!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하고 말하며 스태프는 얼른 문자를 보냈다.
<도착!
>오!
휴대폰만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답장이 도착했다. 그걸 확인한 스태프는 얼른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이서준 배우와 강재한 배우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간단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출연자들은 다 다른 대기실을 써서 기다리시기 편하실 겁니다. 이번 패션쇼는 출연자들이 서로의 옷을 모르는 상태로 진행되거든요.”
참 블라인드를 좋아하는 제작진인 것 같았다.
“그리고 대기실에는 카메라가 없으니 편하게 쉬셔도 됩니다.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계시면 패션쇼가 시작하기 전에 짧게 인터뷰를 하고 패션쇼장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화장실은 이쪽이고요.”
드문드문 다른 스태프들이 지나가는 복도를 걸으며 스태프가 설명했다. 놀란 스태프들의 시선이 느껴져 서준과 강재한은 웃고 말았다.
“피디님이 곧 오실 겁니다.”
눈을 조금 크게 뜬 서준이 안 오셔도 된다고 말하려는 순간, 스태프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다른 분들도 다 인사드리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서준과 강재한이 작게 웃었다.
“여기가 박민형 씨의 대기실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밖에 있는 스태프한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박민형의 대기실 앞까지 안내해 준 스태프는 꾸벅 인사하고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똑똑-
서준이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박민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렸다.
“어? 서준이 형! 재한이 형!”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바느질하고 있던 박민형이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에 활짝 웃었다.
“빨리 오셨네요! 아직 부모님도 안 오셨는데…….”
박민형은 제작진에게서 받은 초대권 2장을 부모님께, 2장은 서준과 강재한에게 주었다.
“차도 안 막히고 신호도 잘 바뀌더라고. 오는 길에 진짜 한 번도 안 멈췄다니까.”
강재한의 말에 박민형이 멈칫했다.
“어…… 저희 엄마 아빠는 계속 차도 막히고 횡단보도마다 신호 걸리고 있대요.”
“그거 큰일이네. 그래도 시간이 꽤 남았으니까 패션쇼 보실 수 있을 거야.”
“네. 최대한 빠른 길로 올 거라고 하셨어요!”
박민형과 이야기하고 있던 강재한이 응? 하고 서준을 보았다. 서준이 대기실로 들어와서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박민형도 의아한 얼굴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서준은 뭔가 묘한 표정으로 대기실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카메라를 찾는 건가?’
“카메라 없어요, 형. 편하게 쉬어도 돼요.”
박민형의 말에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아니, 그건 아니고. 대기실이 좀 좋아 보여서.”
“어? 그러게.”
서준의 말에 강재한도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다른 방송에서도 볼 법한, 화장대와 소파,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는 작고 평범한 대기실이었는데, 왠지 더 아늑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원인을 찾기 위해 서준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 피디님 오신다고 했지.”
강재한의 말에, 문 가까이 서 있던 서준이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패션위크]의 피디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예상도 못 한 인물도 있었다.
“다니엘 티메!”
박민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인물을 이름을 불렀다.
아레시스의 수석디자이너, 다니엘 티메였다.
* * *
“잠깐 촬영 가능할까요?”
두 배우와 인사를 한 피디가 활짝, 아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서준과 강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카메라맨과 작은 조명을 든 스태프들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고, 곧 촬영이 시작되었다.
다니엘 티메와 박민형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반갑습니다. 민형 박./”
“/저,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니엘 티메가 손을 내밀자, 촬영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다니엘 티메만 바라보며 숨도 못 쉬고 있던 박민형이 작게 떨리는 손으로 마주 잡았다. 아무래도 악수해 본 적이 드물어서 조금 어색하게 보였다.
“/지금까지 만든 옷 잘 봤습니다. 박. 점점 성장하는 게 보이더군요./”
통역사가 다니엘 티메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루테 씨가 잘 가르쳐 주셔서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루테는 [패션위크]에 참여한 아레시스의 디자이너였다.
다니엘 티메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자이너로서도 선생님으로서도 능력 있는 사람이죠, 루테는. 그래도 박이 노력하지 않았다면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감, 감사합니다!”
박민형의 눈이 아주 그렁그렁해졌다.
“/오늘 패션쇼도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박민형과 짧게 이야기를 나눈 후, 다니엘 티메는 고개를 돌려 서준 리를 바라보았다.
아레시스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은인이자, 자신을 슬럼프에 빠지게 만든 원인.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뮤즈인 배우.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준 리./”
왠지 묵직한 감정이 담긴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한 서준이었지만, 나쁜 감정은 아닌 것 같아 웃으며 내밀어진 다니엘 티메의 손을 마주 잡았다.
* * *
다니엘 티메는 강재한과도 인사한 후, 피디와 함께 떠났다.
“으아아! 저 실수한 거 없겠죠? 악수할 때 손 엄청 떨었던 것 같은데, 다니엘 티메 씨가 다 느꼈을까요, 형?”
박민형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하자, 소파에 앉은 서준과 강재한이 웃었다.
“이해해 주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그것보다 패션쇼부터 준비해야지. 이거 뭐 만들던 거 아니었어, 민형아?”
강재한이 가리키는 바느질거리를 본 박민형이 아! 하고 얼른 의자에 앉았다.
물론 그전에 스태프들이 우르르 들어오면서 조금 밀려난 테이블을 제자리에 두는 것과 그 위의 꽃장식도 바로 세워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훅!
하고 밀려드는 무언가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기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스태프들이 들어왔다 나가면서 조금 어수선해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건…….’
커진 서준의 눈동자가 대기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아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물건들이, 그 위치가 눈에 들어왔다. 서준과 강재한이 앉아있는 소파, 박민형이 앉아있는 의자, 조화가 심어진 화분 등.
그러다 서준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이 모든 것의 열쇠가 되는, 테이블과 그 위의 꽃장식.
‘진법이잖아?’
서준이 손을 들어 쩍 벌어지려는 입을 가렸다.
진법.
나뭇가지나 돌멩이 같은 자연의 것이나 사람이 만든 인공적인 물건을, 적당한 위치에 배치해 특별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방법.
어떤 진법은 돌멩이와 나뭇가지 등을 이용해 주변의 풍경 속에 마치 카멜레온처럼 몸을 숨길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 또 어떤 진법은 영험한 힘이 깃든 물건들과 사람들을 이용해 환각과 환청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다른 진법은 자연의 기를 한곳에 모아 내공을 좀 더 쉽게 모을 수 있게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진법은 집 주위에 설치하여 적이나 도둑이 들어올 수 없게 막거나 길을 헤매도록 만들기도 한다.
서준의 전생이 언젠가 살았던 무림 세계에서는 제갈세가라는 곳이 대표적으로 진법을 사용하고는 했다.
서준이 [신전 프로젝트] 때, 사용한 [(선/제작)제갈세가의 초급 환영진(하급)]도 제갈세가의 진법이고.
그것 말고도 생의 도서관에는 ‘진법’의 능력이 담긴 삶의 책이 많이 있었지만, 특별한 힘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걸 쓰네. 민형이가.’
서준이 다시 한번 ‘진법의 효과’로 아늑하고 편안해진 대기실을 둘러보다 눈을 감았다.
박민형과 강재한은 바느질에 집중하고 있어 딱히 서준을 신경 쓰지 않았다.
빠르게 생의 도서관으로 이동한 서준은 진법과 관련된 능력을 찾아 나왔다.
[(선)제갈세가 앵무새의 진법서(중급)]
제갈세가 진법당주와 함께 쓴 진법서에 대한 기억이 담긴 책입니다.
제갈세가의 진법에 대한 지식을 일부 알 수 있습니다.
제갈세가의 진법당주가 키우던 앵무새로 태어나, 진법당주와 함께 살아가며 많은 책을 썼었다.
물론, 직접 쓴 건 아니고 틀린 곳이 나오면 발에 먹물을 묻혀서 찐하게 찍으면, 진법당주가 허허허 웃으며 ‘여기가 틀렸구나.’ 하고 고치는 수준이었지만.
작게 웃은 서준이 능력을 발동했다.
[(선)제갈세가 앵무새의 진법서(중급)가 발동됩니다.]
진법에 대한 아주 기초부터 깊은 지식까지.
마치 뇌에 새겨지듯 쏟아졌다.
서준의 눈동자에 특별하고 깊은 빛이 맴돌았다. 새로운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서준은 다시 한번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진법이라고 말하기엔 많이 어설픈 것들이 눈에 보였다. 아주아주 기초적인. 우연인가? 싶을 정도의.
“완성! 끝났다!”
오늘 아침, 이동 중에 부딪혀 떨어진, 옷에 달 장식을 다시 완성한 박민형이 만세를 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강재한이 짝짝 박수를 쳤다.
“민형아.”
서준이 박민형을 불렀다.
“네?
“저 테이블 네가 옮긴 거야?”
어떻게 알았지?
눈을 깜빡이던 박민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래는 저기 있었는데, 좀 불편한 것 같아서 여기로 옮겼어요.”
“왜 옮겼어?”
“음. 그냥 여기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꽃장식도?”
“네.”
“또 뭘 옮겼어?”
“그러니까 소파랑, 의자랑 화분이랑…….”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대답하는 박민형에, 서준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 진법의 기초가 되는 물건들이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박민형은 어떠한 지식도 없이, 그저 느낌만으로 이러한 진법을 만들어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