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83화
마린사에서의 회의를 끝낸 서준은 기념품을 사러 돌아다니고 있는 친구들과 합류했다.
“좋아. 다음은 저기다!”
친구들의 두 손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줄 선물들로 가득했지만, 아직도 모자란 모양이었다.
“내년 3월에 크랭크인이면 내년에 개봉할 수도 있겠네?”
기념품을 사고 집으로 돌아온 친구들은 서준의 이야기에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아직 기사도 안 뜬 이야기다 보니 밖에서 할 수는 없었다.
기대가 가득한 전성민의 물음에 강재한과 양주희도 들뜬 얼굴로 말했다.
“내 생각엔 WTV 시상식 전에 개봉할 것 같아. 마린사 영화는 지금까지 계속 받아왔으니까.”
“하긴. 쉐앤나도 3월에 촬영하고 9월에 개봉했고.”
WTV 시상식이 다른 시상식들보다는 권위가 낮다고 해도, 슈퍼히어로 영화가 받을 수 있는 상 중에서는 놓칠 수 없는 상이었다. 사람들의 투표로 진행되는 거라 인기가 가늠되기도 하고 말이다.
“공동수상, 엄청났지.”
그리고 화제성에서도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개봉일은 아직 확실하게 안 정해졌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서준의 말에 친구들이 으흐흐 웃었다.
“내년에 이레귤러스가 나올지도 모른다니.”
“관계자를 알면 이게 좋다니까. 미리미리 일정 알 수 있는 거.”
응응.
마린사 히어로영화의 팬인 세 사람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 나오나? 하고 궁금해할 때 자신들은 내년에 촬영한다는 걸 알 수 있다니, 정말 좋았다.
“먼저 안다고 해도 영화를 먼저 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그건 그래. 아, 서준아. 대본은 봤어? 어땠어? 재미있었어?”
강재한의 물음에 양주희와 전성민도 눈을 반짝였다.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놉시스만 읽었지만, 재미있었어.”
“으아아! 서준이가 재미있대!”
“와. 진짜 보고 싶다.”
“얼른 개봉했으면!”
아직 대본도 안 나왔는데.
기대로 가득한 친구들의 모습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다음 날.
다 챙긴 짐을 미리 차에 싣고 출발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띵동-
에반 블록과 스왈린 애넘이 방문했다.
“배웅하러 왔어. 공항까지는 못 가도 말이야.”
서준처럼 일코가 가능했다면 갔을 테지만, 평범한(?) 스타인 에반 블록과 스왈린 애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분명 두 배우의 정체가 밝혀지면, 서준 리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고, 그러면 공항이 아주 떠들썩해질 터였다.
“저희도 작별인사하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두 배우를 반겼다.
“자, 이건 선물.”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구나./”
에반 블록과 스왈린 애넘은 각자 집에서 들고 온 것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물을 받은 아이들의 눈이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저는요?”
“넌 많이 받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서준의 표정이 뾰로통해지자 에반 블록과 스왈린 애넘이 웃으며 가져온 선물을 서준에게 주었다. 서준의 얼굴이 환해졌다.
작은 선물에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선물을 주는 사람까지 기뻐졌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들 뭐 할 예정이야?/”
“/서준이랑 저희는 학교요. 아직 졸업을 못 했거든요./”
“/전 영화 오디션을 볼 생각이에요./”
“/어떤 영화를 생각 중이니?/”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일상이나 연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이런 대단한 배우들과 이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해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잠시 후.
최태우가 이제 곧 출발할 거라는 걸 알려주었다.
“/그럼 우리도 이만 가 볼게. 다음에 또 보자./”
자리에서 일어난 에반 블록이 웃으며 말했다.
스왈린 애넘도 뒤따라 일어났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의 연기에 대한 열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열정은 스왈린 애넘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조심해서 가렴. 다음에도 같이 연기하자꾸나./”
그 말에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스왈린 애넘이 또 같이 연기하재!
어쩐지,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 더 기뻐 보이는 친구들의 표정에 서준 또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두 배우가 떠나고.
서준과 아이들은 짐을 실은 차에 올라탔다.
최태우가 운전하는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아이들은 창문 너머로 몇 주간 지냈던 숙소와 근처 배우들이 사는 집들, 그리고 그 너머 할리우드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음에 또 여기에 올 수 있을까.’
먼 이야기 같으면서도, 눈앞에 있는 친구와 자신이 겪은 몇 주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먼 이야기 같지도 않았다. 한국에 가자마자 할리우드에서 열리는 오디션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푸는 꿈에 가슴이 조금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친구들의 표정을 읽으며 작게 웃은 서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뭐 해, 서준아?”
“이제 귀국한다고 메시지 보내려고.”
한국과 미국 지인들에게.
서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강재한과 전성민이 휴대폰을 보고 있는 또 한 사람을 보았다. 양주희였다.
“주희 너도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메시지 보내?”
“응. 바네사한테.”
“……바네사?”
서준과 강재한, 전성민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에 눈을 끔벅였다.
동명이인이 있긴 하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연극을 보러와 줬던, [생존자들]에 출연했던 바네사 올슨이었다.
“바네사 올슨……?”
“맞아.”
양주희가 씨익 웃었다.
“레스토랑에서 전화번호 교환했지.”
그 말에 강재한과 전성민은 입을 쩌억 벌렸고 서준은 저도 모르게 짝짝 손뼉을 쳤으며 운전석에 앉아 있던 최태우와 1팀 직원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역시 양주희.”
무서운 친화력이었다.
* * *
한국에 도착하고 이틀 후.
시차 적응을 끝낸 서준과 아이들은 친구들과 만나고 있었다.
“어땠어? 미국은?”
한예대 근처 단골 가게의 개인룸.
한지호와 김주경, 박시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완전 재미있었어!”
“스왈린 애넘이랑 에반 블록도 만났고.”
“리첼 힐은 바빠서 못 오셨지만.”
세 사람은 신나게 미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한지호와 김주경, 박시영은 부러워하는 표정으로 친구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1부, 2부로 나뉘어 출연해서 스왈린 애넘과 에반 블록과 함께 무대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연습하면서 여러 조언을 들었던 것, 스왈린 애넘과 에반 블록의 연기를 바로 앞에서 직관한 것, 팬미팅이 끝나고 촬영할 때 다른 할리우드 배우들이 와서 이야기를 나눴던 것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우와아! 탄성만 나왔다.
“그리고 양주희는 양주희 했지.”
“아하.”
“그럴 것 같았어.”
그 한 문장만으로도 알아듣는 친구들에 서준와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준아. 다음에도 팬미팅 할 거지?”
“다음엔 내가 가야지! 꼭 가야지!”
의욕에 불타오르는 친구들에 서준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연극으로 미국 투어를 할지도 몰라.”
갑자기 미국 투어요?
“……그건 스케일이 너무 커진 것 같은데?”
눈을 끔벅이는 세 사람에 다들 빵 터졌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자 서준과 아이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뭐 먹었어?”
“연습하는 날은 집에서 먹었어. 관리해 주시는 분이 계시더라.”
“오……!”
“밖에서 사 먹기도 했어.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다던 햄버거 가게에서도 먹었는데, 맛있더라.”
“현지인 추천 음식점도 있었지.”
서준의 말에 강재한, 전성민이 입술을 씰룩거렸고 양주희가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응? 하고 눈을 깜빡이는 친구들에 강재한과 전성민이 펜팔 이야기를 해주었다.
으하하핳!
웃음소리가 개인룸을 가득 채웠다.
“또 다른 일은 없었어?”
흥미로 가득한 친구들의 얼굴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내년에 찍을 영화 회의도 갔었어.”
“내년에 찍을 영화? 차기작이야?”
“올해 다른 작품을 안 찍으면 차기작이긴 하지.”
어쩐지 대답하는 서준보다 강재한과 양주희, 전성민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한지호가 조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뭔데?”
서준이 휴대폰을 두드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에 세 사람이 얼른 휴대폰 바나나톡을 열었다.
>이서준: 이레귤러스.
“헐! 미친.”
“이걸 촬영한다고? 내년에?”
화들짝 놀란 세 사람이 얼른 목소리를 낮추었다. 붉게 상기된 볼이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걸 시작으로 슈퍼히어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이레귤러스]에 나올 시즌2 히어로들, [쉐도우앤나이트]와 [쉐도우맨 시리즈]의 연결점, 시즌1의 히어로들과 그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의 연기까지.
연기과답게, 배우답게 다들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팬텀의 연기도 괜찮았다는 거지.”
“그래도 그 장면에서는 좀 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영상이라는 게 행동과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되니까 말이야.”
“때로는 침묵이 많은 것을 전해줄 수도 있어.”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한지호가 순간 몸을 움찔했다.
“……우리 놀러 온 거잖아. 왜 수업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하하.”
직업병인가 보다.
“수업이라니까 떠올랐는데, 다들 강의계획서 봤어? 좀 있으면 수강신청하잖아.”
“난 일단 실패할 거에 대비해서 플랜C까지 정해둠.”
“우리는 이제 봐야지.”
박시영의 물음에 한지호가 대답했고, 이제 막 미국에서 돌아온 서준과 강재한, 전성민이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졸업생 김주경과 양주희가 이히히 웃었다.
“강의 추천해 줄까?”
“주희 너 졸업했…… 참, 양주희지.”
양주희의 말에 강재한이 갸웃하다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여전히 한예대 학생들과 연락하고 있다고 해도 납득이 됐다. 참고로 ‘연기과’가 아니라 ‘한예대’다.
“너흰 언제 졸업할 것 같아? 난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야.”
박시영은 내년 2월에 졸업할 예정이었다.
“나랑 지호랑 성민이는 아직 3학기 정도 남아서 내년 학기까지 들어야 해.”
“휴학만 안 한다면 그다음 해 2월에 졸업하겠지.”
강재한과 전성민의 말에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넌?”
서준이 잠시 졸업까지 남은 학점과 필수 강의들을 떠올렸다.
학점은 괜찮았다.
휴학을 좀 하긴 했지만 리포트로 대체한 강의들도 있었고, 영화 출연으로 대체한 강의들도 있었다. 그리고 계절학기도 들었고.
“나는 아마 너희가 졸업하고 난 뒤에, 8월에 졸업하지 않을까 싶어.”
“8월에?”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1학기마다 촬영이 있어서 1학기 전필, 교필 강의들을 못 들었거든.”
“그러고 보니 너 1학기에는 계속 촬영 갔었네.”
[쉐도우앤나이트]와 [뉴 이클립스]도 1학기에 촬영을 했고, [이레귤러스]마저도 내년 1학기에 촬영할 예정이었다.
“1학년 때 빼고는 1학기 수업을 전혀 못 들었지.”
아무래도 내후년에는 2학년 1학기, 3학년 1학기, 4학년 1학기 강의까지 모두 한 학기에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김주경이 작게 웃었다.
“2학년들 엄청 좋아하겠다. 서준이랑 같은 강의 들어서.”
그에 다른 아이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서준에 와악! 하고 놀라 벌떡 일어날 후배들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내후년 2학년이면 지금은 고3이네.”
한예대에 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고3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쩌면 이서준이 졸업한 학교를 다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설마 같은 수업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겠지.”
“내후년 3학년도 지금은 1학년임.”
“완전 병아리들이네!”
그것까진 생각 못 했던 서준이 음, 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그래도 몇 명은 있지 않을까? 2학년만 듣는 수업은 아니던데…….”
“없을 듯.”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한지호와 친구들에, 서준은 그나마 착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재한아.”
“응?”
“졸업하지 말고, 나랑 1학기만 더 다녀줄래?”
으하하하!
서준의 말에 아이들이 빵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