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79화
아버지. 형.
그 호칭으로 알 수 있었다.
M의 머리카락이 이 정도로 길어질 때까지, 늙은 과학자와 그 아들이 M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순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M을 보면 그 계획은 성공한 것 같았다.
희미한 미소를 띤 과학자와 무표정한 유진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쉽게 속아 넘어가냐 싶지만.
“내가 군인이라서 표현에 서투른 건 이해해 줘.”
“괜찮아요!”
아버지를 부르는 것도, 걷는 것도 모두 다운로드받아야 할 정도로 가지고 있는 지식이 적은 M이었다. 게다가 표정을 읽는 것도, 거짓말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어린아이와는 다를 바 없는 M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M은 그저 그 두 사람이 표현하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늘은 좋은 고기가 들어와서 스테이크를 해봤어요.”
M은 정말 좋았다.
진짜 유진, 아니, 형이 돌아오고 얼마 동안은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이제는 아버지,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이게 가족이라는 걸까.’
두근두근 가슴이 뛰는 것 같았다.
행복한 M은 나이프와 포크로 스테이크를 썰며 오늘 준비한 요리들에 대해 재잘거렸다.
과학자와 유진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유진이 턱으로 M을 가리키자 늙은 과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M.”
“네. 아버지.”
신이 나서 그런 두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도 듣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M이 아버지의 부름에 대답했다.
아버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M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지막이겠구나.”
“네?”
“M은 모델명에서 따왔잖니. 진짜 이름을 지어야지.”
그에 M이 멍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름?
내 진짜 이름?
M은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름이요?”
“그래. 언제까지고 M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니.”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유진은 비웃듯 말했지만, M은 정말로 ‘잘됐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형까지 이렇게 말하다니.
잘못 들은 게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연구실로 찾아오렴.”
두근두근.
아버지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아니, 온몸이 뛰는 것 같았다.
새 이름이라니. 진짜 내 이름이라니! 정말로, 진짜로 아버지, 형과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네! 그럴게요!”
M이 밝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었다.”
몇 번 포크 질을 한 유진과 늙은 과학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옆으로 사라지고, M 홀로 남아 테이블을 치웠다.
하하.
빈 그릇들을 치우는 동안에도 M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행복했다.
조금 전에도 행복했는데, 지금은 더 행복했고, 나중에 이름을 받으면 더더더 행복할 것 같았다.
나이프와 포크를 모으는 손길에도, 테이블을 정리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발길에도 설렘과 기대가 스며들어 있었다.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따로 조명을 비추지 않았는데도 M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M이 그렇게 빛날수록 새싹들의 마음은 저려왔다.
행복해하는 모습과 환하게 웃는 얼굴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좋았지만.
딱 봐도 이제 사건이 일어날 때였다.
‘나쁜 놈들……!’
그냥 신체를 빼앗아 가도 너무한데, 거부감을 없애겠다며 저런 거짓말까지 하다니.
멱살을 잡고 탈탈 털어주고, 한바탕 욕을 쏟아부은 뒤 우주선 밖 차가운 우주로 날려 버리고 싶었다.
이야기를 이렇게 바꾼 작가도!
‘……준이겠지?’
딱 봐도 내 배우가 한 것이다.
새싹들은 자신도 모르게 나오려던 앓는 소리를 삼켰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스토리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았을 테니, 늙은 과학자와 진짜 유진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야…… M도 그렇잖아…….’
벌써부터 눈물이 찔끔 나왔다.
* * *
무대가 잠시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졌다.
밝아진 무대는 조금 바뀌어 있었다. 중앙에 있던 테이블과 의자가 구석으로 이동해 있었고, 연극의 초반 M이 나왔던 유리관이 왼쪽에 하나 더 생겨나 있었다.
그 앞에서 늙은 과학자가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한데 묶인 긴 머리카락을 꼬리처럼 살랑이며 M이 나타났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 어서 오렴.”
아버지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동상이몽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한국에서 미국까지 온 한국 새싹들이 생각했다.
M은 새 이름 때문에, 과학자는 아들의 치료 때문에 웃고 있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뭐 하고 계셨어요?”
“너한테 이름을 지어주기 전에, 검사를 하려고. 네가 건강해야 나도, 유진도 마음이 편할 테니까.”
“아버지…….”
M의 얼굴이 감동으로 차올랐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었다.
그런 얼굴을 보면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들 법한데, 산전수전 다 겪어본 늙은 과학자는 변함이 없었다. 평소처럼 웃으며 유리관 2개 중 하나로 M을 안내했다.
“잠시 자고 있으면 다 끝나 있을 거다.”
“네!”
M은 아버지의 안내에 따라 유리관 속에 몸을 넣었다. 좁고 딱딱하고 어두운 유리관이 조금 무섭긴 했지만, 투명한 유리관 너머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버지가 보여서 안심이 됐다.
입가에 미소를 띤 M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뜨면 새 이름도 받고 아버지, 형과 진짜 가족이 될 것이었다.
“오래도 걸렸군요.”
투덜대는 목소리가 새싹들의 귀에 들어왔다. 유진이었다.
그 투덜거림마저 반가운 늙은 과학자는 하하하 웃으며 버튼들을 눌렀다. 그러자 스크린으로 M의 몸 상태와 감정 상태 등 현재의 컨디션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타났다.
“몸 상태가 좋아. 팔, 다리, 눈이 아주 건강해.”
늙은 과학자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발을 짚고 선 유진 또한 비슷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감정 상태도 그래. 거부감은 아예 제로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 지금 진행해도 되겠어. 부작용은 전혀 없을 거야. 아니, 오히려 유진 네 몸처럼 느껴질 거다.”
“비위를 맞춰준 보람이 있군요.”
유진이 유리관 안에 잠들어 있는 M을 비웃었다.
“바로 들어가면 됩니까?”
“그래. 잠깐 눈 감고 있으면 끝날 거란다. 통증도 전혀 없을 테지만,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면 바로 비상 버튼을 누르거라.”
유진은 걱정이 가득한 늙은 과학자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곧바로 목발을 옆에 세워두고 유리관 안으로 몸을 넣었다. 열려 있던 유리관 뚜껑이 닫히고 눈을 감은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과학자는 새하얀 가운을 휘날리며 넓은 조종석의 끝과 끝을 오가며 기계를 조작했다.
모니터로 여러 가지 그래프와 글자들이 나타났다. 삐- 삐- 삐- 심장 박동과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새싹들은 숨을 죽였다.
오른쪽, 왼쪽 스크린으로 눈을 감고 있는 M과 유진의 모습이 클로즈업돼서 보였었는데, 곧바로 유리관이 불투명해지며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좋아…….”
마지막 버튼을 누른 과학자는 뒤로 물러섰다.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이제 곧 결과를 보여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곧 스크린에 흰색 파동과 파란색 파동이 나타났다.
서로 겹치지 않게 일렁이던 두 개의 파동은 점점 서로 가까워져 겹쳐지는 부분이 생겨났다.
“조금만 더……!”
겹쳐지는 부분은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결국, 두 개의 파동은 하나로 합쳐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겹쳐진 두 개의 파동은 하나의 녹색의 파동으로 변했고, 삐-삐- 규칙적인 신호음이 들렸다.
동시에 푸시식- 하고 유진이 들어갔던 유리관 쪽에서 새하얀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늙은 과학자가 얼른 그 앞으로 달려갔다.
천천히 유리관의 뚜껑이 열리고.
누군가 바닥으로 발을 디뎠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
아무런 지지대도 없이 두 다리가 곧게 섰다. 유리관 옆에 세워져 있던 목발이 옆으로 툭- 쓰러졌다.
또 연기 속에서 손이 하나 튀어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 더.
두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하! 하하!”
연기가 사라지고, 유리관 앞에 유진이 서 있었다.
얼굴 한쪽과 다리 한쪽을 감싸던 붕대는 사라져 있고, 왼쪽 팔도 멀쩡한 모습으로.
환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유진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은지 두 손을 쥐었다 펴기도 하고 두 발로 바닥을 몇 번 차기도 했다. 또 얼굴을 만져보기도 했다.
“유진!”
늙은 과학자 또한 벅찬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이거 정말 제 몸 같습니다.”
“아직 적응이 덜 됐을 거야. 익숙해지면 이식받는 팔과 다리, 눈은 안드로이드처럼 인간의 것보다 강해질 거란다.”
“그래요? 그거 멋지군요.”
유진이 황홀한 표정으로 왼쪽 팔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분명 연기일 텐데도 정말 이식받은 팔처럼 낯섦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M은 어떻게 할 겁니까, 아버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유진이 물었다.
“이제 처리해야지. 괜히 놔뒀다가 연방에 들킬지도 모르니까. 네가 치료된 것도 어떻게 둘러대야 할…….”
“남겨두죠.”
고민하는 과학자의 말에, 유진이 산뜻하게 말했다.
“아직 쓸 만한 것들이 남았지 않습니까.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죠.”
“음. 그건 그렇구나.”
다시 군인이 되어, 다칠지도 모르는 아들을 생각하면 그게 더 좋을지도 몰랐다.
“그럼 지금은 얼려두고…….”
과학자는 기계를 조작하자, 스크린에 진행 상황 바가 생겨났다.
1%, 4%, 10%
점점 숫자가 올라가자, M이 들어있던 유리관 표면이 어는 듯 천천히 서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점점 커지는 숫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과학자가 아들에게 말했다.
“그럼 쉬거라. 정신은 괜찮겠지만, 몸은 이식 수술 때문에 지쳐 있을 테니까.”
“네. 아버지도 고생하셨습니다.”
히죽 웃은 유진이 제 두 발로 방으로 걸어갔고, 마지막으로 냉동장치를 확인한 늙은 과학자도 이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유진의 방과 과학자의 방을 비추던 조명이 꺼졌다.
무대 중앙의 조종석과 유리관을 비추던 조명도 점점 어두워졌고, 73%까지 차오른 스크린도 그 빛이 점점 약해졌다.
그때.
74%로 올라가려던 숫자가 그대로 멈추었다.
그리고 오류가 난 듯, 74와 73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74, 73, 74, 73…….
과학자와 유진의 행태에 뒷목을 잡고 있던 새싹들이 숨을 죽였다. 점점 빠르게 변하는 숫자는 마치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74, 73…… 72.
숫자는 3에서 2로 변했다.
72%로 변한 숫자는 빠르게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향하던 진행 상황 바도 다시 왼쪽으로 줄어들기 시작했고, 유리관에 보이던 서리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50%, 39%, 21%, 12%
숫자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새싹들의 숨도 잦아들었다. 모두 입을 틀어막고 조용히 반쯤 어두워진 무대 위만 바라보았다.
2%
1%
0%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스스스- 연기가 흘러나왔다.
천천히 유리관의 뚜껑이 열리고.
안에 있던 이가 유리관을 나오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내디딘다고, 모두 생각했다.
-!!
제법 큰 소리와 함께 남자, M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쓰러짐으로 인해 바람이 일어났고, 그 바람은 연기를 모두 지워냈다.
그제야 새싹들은 M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M도 그랬다.
두 팔을 짚고 일어나려던 M은 제 팔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 다리 한쪽에도 붕대가 감겨 있다는 것도.
“이, 이게…… 도대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엉거주춤 바닥에 앉은 M은 오른손을 올려 제 얼굴을 매만졌다. 오른쪽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아버지가, 분명 잠깐 자고 일어나면 된다고 했는데…… 왜 내 몸이 이렇게…….”
M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연구실. 자신만 홀로 있었다.
“아버지? 형?”
미약한 목소리가 연구실을 울렸다. 대답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자신이 이렇게 될 정도면 아버지도 형도 위험했다. 걱정된 M은 제 능력을 발휘했다.
M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건 다운로드를 받거나, 업로드를 할 때의 모습이었다.
배경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우주선 중앙컴퓨터에 접속한 M은 컴퓨터에 저장된 것들을 살펴보았다.
스크린으로, 우주선 외부 감시 카메라와 우주선 내부에 설치된 여러 카메라들로 찍은 화면들(무대 위 사진들)도 스크린에 떴다 사라졌다.
“아…….”
빠르게 움직이던 스크린 화면이 멈추었다.
멀쩡하게 서 있는 유진의 사진이 보였다. 그 옆으로 조종석 앞에서 연구하는 늙은 과학자의 사진도 나타났다.
“아, 아니야……!”
무언가를 직감한 M은 부정하면서도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뒤졌다.
스크린으로 새싹들이 봤던 흰색, 파란색의 파동이 합쳐져 녹색 파동으로 변하는 것과 여러 가지 그래프, 그리고 글자들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야…… 아니라고……!”
쏟아지는 자료들에 M의 표정은 점점 처참해져 갔다. 혼란과 슬픔으로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그사이에도 스크린 영상이 빠르게 지나갔다. 글자와 그래프, 사진이 뒤섞였다. 마치 에러가 난 것처럼 화질이 깨지고 지지직- 거리고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러다, 모든 것이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M도, 빠르게 흘러가던 배경음도, 숨을 죽이고 있던 새싹들도.
[그래!]
영상 속 아버지가 외쳤다.
[M의 신체를 너에게 이식하는 거다!]
아.
M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비명을 지를 힘도, 정신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고개만 들고 있었다.
왼쪽 눈에서 넘친 눈물이 볼을 따라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오른쪽 눈은 이제 없어 눈물도 흘리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머릿속도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그때, M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그 머릿속을 보여주는 듯, 검게 물든 스크린에 사진이 하나 떴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과학자의 사진이.
그건 ‘유진’이 없을 때 찍은 것이었다.
“그래.”
무거운 적막 속.
M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되돌리자.”
묘한 열기가 담긴, 이제 하나 남은 M의 눈동자가 유진의 방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