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878화 (878/1,055)

0살부터 슈퍼스타 878화

에반 블록의 등장은 스왈린 애넘보다는 덜 놀라웠다.

서준과 가장 친한 배우라서 한 번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연극에서 등장할 줄은 몰랐지만.

거기다 그것보다 더 놀랄 만한 것이 있었다.

‘……모습이 왜 저래?’

진짜 유진의 모습이 굉장히 달라졌다.

기존의 연극에서는 멀쩡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굉장히 많이 다쳐 있는 모습이었다.

표정도 그랬다.

냉소적이면서도 피곤하고 귀찮은 듯 보였다. 제멋대로 떠났다가 돌아와서도 재수 없고 태평하던 기존의 캐릭터와는 전혀 달랐다.

어쩐지 앞으로의 내용이 심상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싹들이 놀라는 사이에도 연극은 계속되었다.

“유, 유진. 진짜 유진이냐……?”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늙은 과학자가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목소리보다 더 탁하고 낮았지만, 같았다.

“아, 아…….”

늙은 과학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10년 만에…….”

10년 전 행방불명된 아들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으면 사라질까 싶어 닿지는 못하고 얼굴과 몸 주위만을 맴돌았다. 그러자 천천히 아들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어,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냐?”

“뭐, 그렇게 됐습니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연방의 손이 닿지 않는 행성에서 10년(어쩌면 그보다 오래)이나 지냈는데, 멀쩡한 게 이상한 거였다.

“아니, 아니다. 괜찮다. 말하지 않아도 돼. 돌아왔으면 됐지. 살아 있으면 됐어!”

과학자는 얼른 아들을 의자에 앉혔다. 어디 하나 거슬리지 않게 애지중지했다.

그 모습을 지금까지 존재감 없이 서 있던 유진이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에 초조함과 불안함이 가득했다.

“근데 저건 뭡니까.”

지친 몸을 의자에 앉힌 남자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저랑 닮은 것 같은데. 동생은 아닌 것 같고.”

늙은 과학자가 아들의 지적에 몸을 크게 떨었다.

그런 아버지를 흘깃 본 남자가 바짝 굳어 서 있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마치 내부까지 해체할 것만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유진의 위아래를 훑었다. 과학자의 아들답게 대령은 금세 유진을 파악했다.

“안드로이드군요. 그것도 제 유전자를 바탕으로 만든. 이거 불법이지 않습니까? 어쩐지 아까 그렇게 펄펄 날뛰시더니, 이걸 숨기려고 하셨군요.”

유진, 아니, 안드로이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 사람의 유전자? 눈동자를 굴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저 남자가 들어온 후로, 자신을 한 번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난…… 난 네가 죽은 줄 알고…….”

아버지가 슬퍼하시는데도, 안드로이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행복했던 우주선이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런 안드로이드를, 남자는 관찰하고 있었다.

과학자의 아들로서의 호기심과 불법을 눈앞에 둔 군인으로서의 태도였다.

“신기하군요. 보통 안드로이드랑은 다르게 감정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초조한 건가? 불안한 건가? 이름이 뭐지?”

몇 번을 분석해 봐도 고장은 아니었지만, 입술이 떨리는 것 같았다.

연방군과 아버지가 저 남자를 불렀던 이름이라는 건 애써 무시했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유,진입니다.”

“허.”

남자가 헛웃음을 뱉었다.

“반갑군.”

남자가 전혀 반갑지 않은 듯한 어투로 말했다.

“나도 유진이다.”

자신을 유진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과학자를 바라보았다.

“제 이름까지 붙였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버지.”

“난…… 난…… 그저 네가 그리워서…….”

늙은 과학자는 안드로이드를 원망하는 듯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안드로이드는 제 눈이, 시각 장치가 고장 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조한 마음에 안드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꽈악 마주 잡았다. 그에 유진의 시선이 닿았다 떨어진다.

두 개의 손.

추궁하던 얼굴에 기운이 쭉 빠졌다.

유진 대령, 아니, 이제 대령이 아닌 남자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래요. 제 유전자로 안드로이드를 만들건 이름이 같건 달라지는 건 없죠.”

“유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난 아들이 목발을 짚고 애써 멀쩡한 듯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며 자신의 방(지금까지는 안드로이드의 방이었던)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늙은 과학자는 슬퍼졌다. 언제나 씩씩하고 자신만만하던 아들이 아닌가. 저렇게 기운 없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런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안드로이드 또한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마치 시계나 장식품이 된 것 같았다.

* * *

무대의 불이 꺼졌다가 켜졌다.

불이 꺼진 사이 옷을 갈아입은 과학자와 진짜 유진이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쪽 팔을 잃은 아들을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유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신문을 보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아니, 음식은 그대로 둔 채 와인을 병째로 들고 마시는 모습을 보니 그냥 술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유진. 이제 술은 그만 마시는 게…….”

“이것 말고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자포자기한 일부의 사람들이 그렇듯 유진도 술에 빠져 사는 듯했다.

무대 위, 유진의 방에도 술병이 가득했다.

“M. 술 가져와.”

텅 빈 와인병을 내려둔 유진이 말했다.

M.

그 이름에 새싹들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무대 옆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빈틈 하나 없이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에 와인을 들고 있는, 마치 집사처럼 보이는 남자.

유진, 아니, 안드로이드 M이었다.

꽁지머리로 묶을 만큼 긴 머리칼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M은 조금 창백한 얼굴로 유진의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M에게서 와인병을 낚아채 바로 입으로 들이부었다.

탁!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통각 기능이 아픔을 전달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자신을 전혀 바라보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M을 슬프게 했다. 그리고 유진에게 분노를 느끼게 했다.

“역시 신기하다니까.”

슬픔과 약간의 분노가 서린 M의 얼굴에,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멀쩡한 모습의 유진이 말했다. 슬픔이라면 몰라도 분노는 제법 쓸모가 있었다.

“똑같은 건 못 만든다고 하셨죠, 아버지.”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냉정한 눈빛이다.

“그래.”

“연방군에서 쓰면 좋을…… 아니, 아닙니다.”

한때 대령이었던 남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술을 들이붓다가 M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MOEB-436입니다.”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M이 대답했다.

유진이 나타나고 바로 아버지가 바꾼 자신의 이름.

“MOEB 안드로이드 모델을 바탕으로 436번째 만들어졌지.”

슬픔 아래에 더 큰 슬픔이 있었다.

“그럼 일단 그것부터 써보라고 해야겠군.”

“……아직도 군에 미련이 남아 있니? 널 그렇게 만든 곳인데?”

“글쎄요.”

유진이 마시던 와인병을 내렸다.

“남아 있다고 해도 불구가 된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 평온한 대답에, 오히려 늙은 과학자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때.

늙은 과학자의 시야에 제 불쌍한 아들을 닮은, 건강한 안드로이드가 들어왔다.

* * *

무대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조용한 무대 위.

홀로 선 늙은 과학자가 모니터 앞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스크린으로 여러 가지 창들이 떴다가 사라졌다. 심장 박동처럼 두근두근 뛰는 그래프도 있었고, 끝을 모르고 위로 솟구치는 그래프도 있었다. 비처럼 떨어지는 글자들도 있었고 실패를 알리는 듯 붉은 글자가 뜨기도 했다.

“안 돼. 좀 더…… 좀 더……!”

그건 마치 연극을 시작했을 때의 모습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화면이 초록빛으로 변했다.

“아, 아아!”

늙은 과학자가 감격에 찬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다 얼른 아들의 방으로 달려갔다.

“유진! 유진! 얼른 나와보렴!”

문을 두드리며 유진을 부르자, 손에 술병을 든 유진이 방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목발을 짚고 있었지만, 이제 늙은 과학자에게는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널 치료할 방법을 찾았다!”

“치료요?”

늙은 과학자는 미간을 찌푸리는 아들을 스크린 앞으로 데려갔다.

스크린에는 어느새 두 개의 인체 그림이 나타나 있었다.

하나는 보통의 사람처럼 팔다리가 멀쩡했고, 하나는 왼쪽 팔과 다리 하나, 그리고 얼굴 오른쪽이 붉게 칠해져 있었다. 마치 유진처럼.

그 화면을 보는 새싹들의 심장이 불안으로 두근두근 뛰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그래!”

늙은 과학자가 외쳤다.

“M의 신체를 너에게 이식하는 거다!”

여기저기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가 맞았다.

‘그래도 진짜 유진이 거부하지 않을까?’

기존 연극의 재수 없는 유진(한지호가 연기한)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유진은 좀 냉정하고 무관심하긴 해도 싸가지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에반 블록이잖아!’

새싹들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서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하지만 유진의 목소리는 그런 새싹들의 생각과 달리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로 그게 가능하냐고요, 아버지.”

번뜩이는 아들의 눈빛에, 이 넓은 중앙은하연방에서 한 손에 꼽는 늙은 과학자가 크게 웃었다. 그래, 이래야 내 아들이지!

“다른 안드로이드는 불가능해도 M이라면 가능하단다. 네 유전자를 바탕으로 만들었으니까! 게다가 감정이 있어서 인간과 더욱 비슷하지!”

늙은 과학자가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왼쪽 인체 그림에서 떨어진 팔과 다리, 그리고 눈동자가 오른쪽 인체 그림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신경과 핏줄이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새싹들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물론 신체 이식을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단다. 일단 네 건강부터 챙겨야 해. 몸 컨디션이 가장 중요하니까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과학자의 말에 유진은 얼른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늙은 과학자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M의 거부감을 줄여야 해.”

“거부감이요?”

“그래. 감정이 있는 안드로이드라서 너나 나에게 대한 반발심이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니까.”

유진이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감정을 제거하면 안 됩니까?”

뭐요?

새싹들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제 슬슬 싸가지 없는 유진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건 안 된다. 감정이 있어서, 시뮬레이션에서 이식이 성공한 거니까.”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에 늙은 과학자가 무어라 말했다.

마이크가 꺼진 듯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적막 속에서 무대가 천천히 어두워졌다.

과학자의 말을 듣던 유진은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늙은 과학자는 애가 타는 얼굴로 아들을 설득했고 유진은 짜증이 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무대의 불이 켜졌다.

늙은 과학자와 유진이 테이블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M은 없었다.

새싹들은 M을 찾아 무대를 살펴보았다.

아버지의 방은 그대로였고, 유진의 방은 술병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 심장이 철렁했지만, 아직 유진이 붕대를 감고 있는 걸 보니 신체 이식은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급해진 새싹은 M의 행방에 대한 힌트를 찾으려고 무대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때마침 무대 중앙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이제 보니 의자가 하나 늘어 있었다.

그때, 무대 옆에서 누군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M!’

M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기존의 연극에선 진짜 유진이 돌아온 이후로는 계속 정장만 입는데, 희한하게도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었다. 색도 검은색이 아니라 화사한 색이었다.

뭐지?

하고 눈을 깜빡이는데, M이 활짝 웃으며 테이블이 있는 무대 중앙으로 날아갈 듯 사뿐히 걸어왔다. 등까지 내려오는 까만 머리칼이 꼬리처럼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버지! 형!”

……예에?

입을 쩍 벌린 새싹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M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잘못 본 게 아닌 것 같았다. 오른쪽 스크린으로 화사하게 웃고 있는 M이 클로즈업돼서 보였다.

“많이 기다리셨죠? 요리하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그리고 왼쪽 스크린으로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가 삐죽 비웃음을 지었더니,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유진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니, 괜찮아. 별로 안 기다렸어.”

“고생했다. M.”

“고생은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M은 이것보다는 더 이상 행복할 일은 없을 거라는 듯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반짝반짝 빛이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 M의 모습에 새싹들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 깨물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