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76화
서준의 손가락이 검고 하얀 건반을 누르자 발랄한 선율이 흘러나왔고, 그 선율을 배경으로 영상의 캐릭터, 어린 윌리엄 리가 움직였다.
곰인형을 들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바닥에 앉아 소꿉놀이를 하기도 하고 드러누워 데굴데굴 구르거나 고롱고롱 잠을 자기도 했다.
이목구비 하나도 보이지 않은, 그저 새까만 그림자 캐릭터였지만 충분히 귀여웠다.
그 발랄하고 귀여운 분위기가 바뀐 것은 그때였다.
단-!
하고 서준이 낮고 굵직한 음을 뱉어내는 건반을 누르고 이내 빠르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스크린 속 애니메이션의 상황 또한 급박하게 돌아갔다.
엄마로 보이는 듯한 캐릭터가 달려온다. 어린 윌리엄이 엄마를 발견한다. 그런 윌리엄 뒤로 새까만 소용돌이가 생겨난다.
---!!
비명과도 같은 선율이 관객석을 가득 채웠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슬프며 무력하고 참담한 엄마의 심정이, 이상 웜홀의 무시무시함이, 그런 상황을 모른 채 그저 밝게 웃는 아이의 작은 웃음소리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빨려 들어가는 윌리엄 리.
남겨진 신발 한 짝.
단-!
하나의 에피소드를 끝내는 듯 낮은 선율이 울리고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따단!
서준이 건반을 눌렀다.
아무래도 그림자 애니메이션의 시점은 윌리엄 리인지, [쉐도우맨2]에서는 아주 짧게 지나갔던 나트라 행성에서의 삶도 보여주었다.
의식을 잃은 어린 윌리엄을 구해주고 자신의 그림자 일부를 떼어주는 튤 나트라, 팔랑거리는 치마를 입고 신나게 달려가는 벨 나트라에게 손이 잡혀 끌려가는 윌리엄과 그런 윌리엄에게 꼭 붙들린 곰인형, 다 같이 소풍을 가 재잘대는 나트라 가족.
그리고 나트라인이 아닌 윌리엄을 따돌리고 괴롭히는 인물들까지.
아름답지만 조금은 슬프고 괴로운 피아노 선율을 따라, 비공식인지 공식인지 모르는 이야기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쉐도우맨 시리즈]와 [쉐앤나] 팬들은 감격한 얼굴로 진짜 눈도 깜빡하지 않고 영상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공간에 윌리엄, 아니 진 나트라(의 그림자 캐릭터)가 홀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첫 장면보다 훨씬 큰 모습의 진 나트라에게로 누군가 다가왔다.
쉐도우맨, 맥이었다.
큰 그림자와 작은 그림자가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끝에는 추모관이 있었다.
---.
피아노의 선율이 앞으로의 비극을 알리듯 점차 묵직해졌다.
두 사람이 추모관에 발을 디딘다.
어둠이 깔린 추모관은 새까만 그림자인 두 사람을 그대로 삼켜 버린다.
그때.
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한 곳에 쏟아졌다.
작은 그림자가 그 앞으로 다가간다.
조그마한 신발 한짝과 곰인형을 안고 웃고 있는 어린아이의 사진, 그리고 편지가 밝은 빛 아래에 있었다.
그걸 본 작은 그림자의 뺨 위로 새하얀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동시에,
둥!
하고 새싹들의 심장을 떨리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 나트라의 OST였다.
둥둥!
오싹, 소름이 돋은 새싹들의 시야로, 새하얀 눈물방울이 새까만 어둠 위로 떨어져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였다.
그대로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새하얀 눈물.
마치 변화하고 있는 진 나트라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다-단-.
계속 이어지던 진 나트라의 OST가 바뀌었다.
묵직하고 오싹한 선율이 새싹들에게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튤 나트라와 그가 누워 있는 침대, 그리고 벽에 걸린 나트라의 국기가 진 나트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그림자에 그대로 삼켜지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그러나 선명하게.
새하얀 스크린이 검게 물들어갔다.
그렇게 나트라 행성을 모두 물들인 후.
새하얀 지구로 검은 잉크 한 방울이 떨어졌다. 지구 또한 검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서준은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여 피아노 연주에 집중했다.
마치 거대한 불꽃으로 세상은 물론이고, 자신마저 태울 듯이.
빠르고 위험하며 두렵고 절망스럽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진 나트라의 앞을 쉐도우맨이 막아선다.
잠시 느릿하게 긴장감이 흐르다가 다시금 폭발하는 선율.
--! ---!!
길게 꼬리를 남기는 붓 자국처럼, 검은 번개처럼 진 나트라와 쉐도우맨이 서로 부딪혔다. 벨 나트라와 튤 나트라도 가세했다.
--!! --!
빠르고 강하게!
더 빠르고 더 강하게!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바짝 줄 정도의 격렬한 선율이 관객석을 휘몰아쳤다.
그리고,
단!
강렬했던 앞서 선율과 달리, 단 한 음으로 모든 것이 끝을 맺었다.
영상 속에는 [쉐도우맨3]에서 그랬던 것처럼 쉐도우맨과 벨 나트라, 튤 나트라의 그림자에 꿰뚫린 진 나트라가 있었다.
조금의 침묵이 흘렀다.
상체를 가볍게 숙이며 연주하고 있던 서준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가볍게 건반들을 눌렀다.
잔잔한 피아노 음이 들려왔다.
미안함과 그리움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이별의 선율이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오며, 새하얀 물감이 모든 것을 지우듯 스크린을 물들였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손을 꼭 잡은 어린 윌리엄의 뒷모습이 짧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와아아.
언제부터인가 숨을 참고 있던 새싹들이 소리 없이 숨을 뱉어냈다.
몇 번이고 봤던 영화지만,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애니메이션을 보니 색다르게 보였다.
캐릭터들의 모습이 확실히 보이는 컬러풀한 애니메이션도 괜찮았을 것 같지만, 흑백의 단순한 애니메이션은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림자도 생각나고.’
액션 신도 참 멋졌다.
그리고 곡도 정말 좋았다.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아마 준이 작곡했을 거다.
‘아니, 한국 팬미팅에서 한 걸 그대로 하는 거 아니었어?’
쪼오끔, 진짜 조금 아쉽긴 하지만 영화 촬영도 있으니 이해했는데, 첫 무대도 그렇고 지금 이 무대도 그렇고 이전까지의 팬미팅 DVD에서는 보지 못했던 완전 새로운 공연들이었다.
우리를 위해서.
바빴을 텐데 열심히 준비해 준 서준을 보는 새싹들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가볍게 숨을 내쉰 서준이 다시 건반 위로 두 손을 올렸다.
이제 [쉐도우앤나이트]의 차례였다.
♪♬-!
시작은 경쾌했다.
두 개의 곰인형과 그림자 제이와 함께 놀던 어린 윌리엄이 점점 자라나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그다음으로는 왼쪽에서 나타난 윌리엄과 오른쪽에서 나타난 쉐도우맨 맥이 서로 마주치는 장면이 나왔는데, 피아노 선율이 더욱 밝아졌다.
왜냐하면 ‘안녕! 우와! 너도 그림자구나! 반가워!’ 하고 손을 흔드는 파트너와 ‘나도 반가워!’ 하고 손을 마주 흔드는 제이 때문이었다.
귀여워!
맥뿐만이 아니라 관객마저도 당황했던 영화 속 장면이 떠올라,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윌리엄과 맥, 제이와 파트너가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조금 더 길게 나왔다.
아, 너무 좋다.
새싹들의 얼굴에 미소가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또다시 낮은 음들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검은색 촉수들이 윌리엄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어?’
빌런을 뒤쫓아간 쉐도우맨은,
‘그러고 보니.’
빌런의 촉수에 공격당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기서……!’
어두운 배경.
희미한 달빛 아래.
주변의 네모난 상자들보다 좀 더 짙은 두 그림자가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보였다.
지친 듯 반쯤 누워 있던 쉐도우맨이 몸을 일으켜 윌리엄의 손을 잡았다.
[나의 어둠이-]
스크린 위에, 처음으로 영어 자막이 떴다.
동시에, 검은색 쉐도우맨 캐릭터의 심장 부근에서 빛이 생겨났다.
이것 또한 처음으로 황금빛이었는데, 마치 생명을 담은 듯 눈이 부셨다.
찬란하고 경이로우나, 슬프고 아련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너의 빛이 되기를-]
그 황금빛 씨앗이 쉐도우맨의 손과 이어진 윌리엄의 손으로 이동해, 마침내 윌리엄의 심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계승이 됐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 윌리엄의 몸이 잠시 반짝였다.
♩-
불꽃처럼 피어난 그림자가 윌리엄을 감싸고 이내 사라졌고, 쉐도우맨은 그 좁고 어두운 곳에 몸을 뉘었다.
곧 어둠이 모든 것을 지워 버렸다.
♩♪-
죽은 이를 위한 레퀴엠 같은 선율이 들려왔다.
배에서 탈출한 윌리엄의 뺨으로 새하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눈물방울은 어둠으로 떨어져 물결을 만들어냈다.
그 선율은 진 나트라의 OST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새하얀 눈물은 어둠에 잠기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을 빛으로 물들였다.
[-You are Knight JIN-]
두두둥!
나이트 진의 OST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빠르고 경쾌하게!
나이트 진의 OST를 편곡한 듯한 선율과 함께 빌런과 싸우는 나이트 진의 모습이 보였다. 제이도 파트너도 함께 싸워주었다.
마침내 빌런을 쓰러뜨리는 나이트 진.
화면이 새하얗게 변했다.
윌리엄이 홀로 나타났다. 아니, 뿅! 뿅! 튀어나와 장난을 치는 제이와 파트너가 있어서 혼자는 아니었다.
♩♬
하지만 조금 쓸쓸했다.
윌리엄은 이내 고개를 돌려 왼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때 파트너가 반대편으로 쭈욱- 늘어났다.
그에 윌리엄과 제이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화면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나타나는 또 하나의 그림자.
‘안녕.’
하고 말하는 듯 손을 들어 보이는 쉐도우맨, 맥이었다.
♪!
굉장히 놀란 듯 얼어붙어 있던 윌리엄이 단번에 달려가 쉐도우맨을 껴안았다. 제이와 파트너도 신이 난 듯 아코디언처럼 몸을 줄였다 늘였다 움직여댔다.
쉐도우맨이 윌리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
쉐도우맨이 손짓했다.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가는 도중 파트너가 쭈욱 늘어나 쉐도우맨의 그림자에 쏙- 하고 들어가 버려,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는 계속 걸어갔다.
♩-
쉐도우맨과 함께 오른 길로.
나이트 진의 OST를 편곡한 듯한, 가슴이 벅차오르는 선율을 끝으로.
서준의 두 손이 피아노 건반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곧.
박수와 함께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왔다.
* * *
“재미있으셨나요?”
네에!
엄청 재미있었어!!
여기저기서 대답하는 바람에 어쩐지 함성처럼 들렸지만, 새싹들이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건 알겠다고 생각하며 서준이 말을 이었다.
“영상 정말 멋졌죠? 저도 1차로 보내주신 영상보고 깜짝 놀랐어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멋있어서 말이죠. 알고 보니 제작해 주신 분들이 쉐도우맨과 나이트 진의 팬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어쩐지.
서준의 콘티가 있었겠지만, 애정이 없으면 나올 수 있는 퀄리티가 아니었다.
눈물이 어둠으로 떨어지며 타락하는(그리고 타락하지 않는) 연출도. 전투 장면도. 윌리엄이 자라는 모습도. 계승 문구를 글자로 나타낸 것도. ‘씨앗’을 황금색으로 표현한 것도. 마지막에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것도.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좋았다.
“곡은 제가 작곡한 거예요. 진 나트라와 나이트 진의 OST를 편곡해서 넣고 새로운 멜로디를 붙였죠. 나중에 음원 사이트에도 올라갈 예정이니까 다들 한 번씩 들어주세요.”
한 번이 아니라 그냥 계속 틀어놓을 거다!
새싹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준은 웃으며 말했다.
“영상은 지금 협의 중이긴 한데 팬미팅 DVD랑 유니버스에 올라가지 않을까 싶어요. 너튜브에 업로드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영화 줄거리가 그대로 들어가 있어서 말이에요.”
괜찮다.
팬미팅 DVD도 살 생각이었고, [유니버스]는 이미 결제 중인 상태였다.
편집은 1도 필요 없으니 그냥 빨리 올려줬으면 좋겠다.
새싹들에게 이번 무대에 관해 이것저것 이야기하던 서준이 스태프의 신호에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다음 무대를 보여 드릴 시간이네요. 다음 무대는 바로, [MOEB-436]이에요.”
하고 서준이 말하자마자, 새싹들은 눈을 번뜩이며 바로 자신의 자리를 체크했다. 통로! 계단!
슉! 슉!
양옆으로 돌아가는 새싹들의 고개에, 서준이 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준비할 때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니까 나눠 드린 간식 드시면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