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73화
“바쁜 거 아니야?”
“괜찮아. 오늘 안에만 체크하면 되는 거라서.”
서준이 신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모습에 전성민과 양주희, 강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누가 무슨 역할 할래? 배역은 세 개인데, 배우는 네 명이야.”
“가위바위보 할까?”
“좋아.”
가위바위보!
하며 우당탕탕 계단을 내려가는 네 아이를 보며, 최태우가 미소를 지었다.
친구들이 오니 서준이 즐거워하는 게 보였다.
‘귀국할 때까지 시끌벅적하겠네.’
나중에 배가 고플지도 모르니 간식 좀 챙겨둬야 할 것 같았다.
* * *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MOEB-436] 연습이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2부의 대사들은 조선시대의 말투다 보니 영어로 완벽하게 구현할 수는 없어서 그냥 편하게 현대어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도 느낌은 살려야 해서 다들 열심히 연습했다.
“영어가 입에 안 붙어……!”
그렇게 대사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는 건 좀 힘들었다.
“한국어로 연기할 때랑 비슷한 느낌이 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치? 영어로 말하기만 하면 힘이 들어간달까. 대사랑 움직임이랑 따로 노는 것 같기도 하고…….”
“한국어로 하면 어색한 부분을 알겠는데, 영어로 말하니까 어디가 어색한지도 모르겠어! 그냥 다 어색해!”
평생 들어온 터라 한 단어만 들어도 뉘앙스까지 파악할 수 있는 모국어와 크고 나서 배운 외국어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강재한이 프린트한 대본을 보았다.
영어로 가득한 대본에 빨간 펜으로 악센트와 강약 조절에 도움이 되는 물결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서준이가 대본에 악센트도 표시해 줬지만.’
저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발음에 신경 쓰면 말하는 게 어색해지는 것 같고, 말하는 거에 신경 쓰면 연기가 어색해지는 것 같고, 연기에 신경 쓰면 발음이 어색해지는 것 같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우린 망했어!”
“흐흐흐…….”
끙끙 앓는 친구들을 보며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연습 첫날보다 많이 자연스러워졌으니까. 지금 속도로 보면 며칠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쉬엄쉬엄 해도 돼.”
이제 7월 중순.
친구들의 성실함과 실력을 생각하면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말?”
“서준이가 그렇다면야.”
자신들이 보기엔 별로 나아진 게 없어 보여 불안함이 들었었는데, 서준이 그렇다고 하니 순식간에 안도감이 들었다.
금세 편안해진 표정을 짓는 친구들에 작게 웃던 서준이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이틀 뒤에 스왈린이랑 에반이 올 거야.”
그에 이제는 아예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워서 다시금 대본을 읽고 있던 양주희와 강재한, 전성민이 벌떡 일어났다.
“스왈린 애넘 배우랑 에반이?!”
“여기 온다고!?”
“뭐 하러?!”
처음보는 스왈린 애넘은 그렇다 치고, 에반 블록은 만난 적이 있으면서도(특별 강의도 들었다.) 놀라운 모양이었다.
“1부 연습도 하고 너희도 보러.”
“우, 우리? 우리는 왜?”
“영화랑 연극 잘 봤다고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허억!
동시에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인! 사인받아야지!”
“나도!”
세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고는 신나게 스왈린 애넘이 출연한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와 에반 블록이 [쉐앤나] 이전에 찍은 영화에 대해서 재잘댔다.
“근데, 1부 연습을 한다는 건 무슨 말이야?”
문득 지나갔던 서준의 말을 떠올린 전성민이 물었다. 그에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이야기하던 서준이 대답했다.
“연극 연습을 여기서 하기로 했거든. 앞으로 계속 오실 거야.”
스왈린이랑 에반의 집에도 연습할 장소가 있긴 한데, 우리 집처럼 크진 않거든.
하고 서준이 말을 이었지만 세 사람에게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스왈린 애넘과 에반 블록이 여기서 연극 연습을 한다면, 분명 자신들이 연습하는 모습도 보게 될 거다.
“스왈린 배우랑 에반이 내 연기를 본다고……?”
“내가 영어로 연기하는 걸?”
친구들이 입을 쩌억 벌렸다.
아니, 미친!
스왈린 애넘과 에반 블록이 내 망한 연기를 본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연습! 연습해야 돼!”
첫날보다 나아졌다는 서준의 말에 잠시 수그러들었던 불길이 다시금 화르륵 불타올랐다.
잠시 그런 친구들을 보며 진정시킬까, 생각한 서준이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열심히 하면 좋지, 뭐.’
친구들이 스왈린 애넘과 에반 블록에게 많이 배웠으면 했다.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더라도, 연습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울 게 많을 터였다.
‘그럼 언젠가 다 같이 할리우드에서 연기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서준이 히히 웃었다.
이틀 후.
특별한 손님들이 도착하는 날.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할 거라는 어린 왕자 속 여우가 이러했을까.
친구들은 아침부터 현관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그런 친구들을 보던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서준도 스왈린 애넘 같은 대단한 배우를 만난다고 하면 하루 전부터 들떴을 거다.
‘난 애프터 파티에서 만나서 들뜰 시간은 없었지만.’
그래도 굉장히 놀라웠고 기뻤다.
스왈린 애넘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린 서준이 작게 웃었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바짝 기합이 들어간 친구들이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못하고 서준만 바라보았다. 눈빛이 아주 애절했다.
서준이 웃으며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 서준의 뒤를 친구들이 병아리들처럼 쪼르르 쫓아갔다. 초인종이 울린 순간부터 숨 쉬는 것도 잊은 것 같아 보였지만, 본인들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스왈린, 에반.”
그에 현관에 서 있던 두 할리우드 스타가 빙그레 웃었다.
“잘 지냈니, 준? 친구들도 만나서 반가워요.”
“안녕. 다들 오랜만에 보네.”
반갑게 인사하는 스왈린 애넘과 자신들을 기억하는 에반 블록의 모습에, 친구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 * *
최태우는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 지하로 향했다.
방음이 잘 되어 있는 지하지만 어쩐지 발소리를 줄이게 된다.
계단 옆 연습실.
투명한 유리 창문으로 배우들이 보였다.
‘연습 중인가?’
1부를 연습 중인지 서준과 스왈린 애넘, 에반 블록이 서로를 바라보며 연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준의 친구들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얼마나 세 사람의 연기에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스왈린 애넘과 에반 블록이 연습하기 위해 처음 이 집에 온 날로부터 열흘이 흘렀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을 텐데도, 스왈린 애넘과 에반 블록과 있을 때면 아이들은 언제나 들떠 보였다.
‘조금 편안해지기도 한 것 같지만.’
연기도 그랬다.
스무 번 넘게 본 장면일 텐데도 아이들은 언제나 처음 보는 것처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런 배우들의 열정에 매니저인 자신까지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최태우는 카메라를 들어 배우들이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찍었다.
팬미팅이 끝나고 너튜브에 [MOEB-436(영어 버전)]을 업로드할 때 함께 올릴 생각이었다.
사진을 찍은 최태우는 다시 연습실 안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몇 번이나 봤던 장면이라서 그런지 움직임만 봐도 어떤 장면인지 알 것 같았다.
‘조금만 있으면 끝나겠네.’
손목시계를 본 최태우는 밖에서 잠시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최태우가 얼른 손을 젓자, 서준은 눈만 웃고는 다시 연기에 집중했다.
!!
진짜 유진, 에반 블록이 죽고 분노한 과학자, 스왈린 애넘과 고장 난 M, 서준이 목소리를 높여 연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영어 버전으로 바꾸면서 수정한 부분들이 굉장히 인상 깊은 데다가,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 대단해서 몇 번을 봐도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게 된다.
최태우는 마치 관객이 된 것처럼, 배경도 소품도 의상도 갖춰지지 않았지만 배우들의 열연만으로도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연극을 숨을 죽이고 감상했다.
서준의 매니저로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건 이런 연습을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1부 연습이 끝나고 서준이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태우 형, 무슨 일이에요?”
“킹즈 에이전시에서 배경 세트를 완성했다는 연락이 와서 말이야.”
오!
서준과 열린 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던 양주희와 강재한, 전성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상과 소품 등의 제작이 끝나고(몇 번의 수정을 거쳤다.) 이제 배경 세트만 남아 있던 상태였다. 크기가 커서 그런지 다른 것들보다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제 거기서 연습해도 된대.”
“정말요?”
기쁜 소식에 서준과 아이들이 활짝 웃었고, 뒤에서 듣고 있던 스왈린 애넘과 에반 블록도 미소를 지었다.
연습실도 좋지만, 역시 완벽하게 꾸며진 무대 위에서 의상을 갖춰 입고 연기하는 게 훨씬 좋았다.
“지금 가도 돼요, 태우 형?”
제발 가도 된다고 해줘요!
하고 서준과 친구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바라보자, 최태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도 괜찮아. 의상이랑 소품도 다 옮겨놓은 상태고 조명도 설치해 뒀어. 스태프들도 있고 카메라도 준비해 둬서 연습하기 편할 거야.”
와아!
배우들만 가면 되는,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에 아이들이 환호했고 스왈린 애넘과 에반 블록도 호오, 하고 감탄했다.
* * *
세트장이 있는 장소는 팬미팅 장소와는 다른 건물이었다.
팬미팅 장소는 총 나흘(무대 준비&리허설 기간 1일, 팬미팅 2일, 너튜브 영상 촬영&무대 철거 기간 1일)만 사용하기로 계약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회사에서 일주일 동안 빌린 곳이니까 앞으로는 이쪽으로 와서 연습하면 돼.”
차에서 내린 최태우는 서준과 배우들을 창고 같은 건물 안쪽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스태프들이 계속 있을 거고 식사도 시간이 되면 가져다줄 거야.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줘.”
“네!”
“두 분도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에반 블록과 스왈린 애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트장 안내는 킹즈 에이전시 직원이 해주었다.
1부 세트(우주선 내부)와 2부 세트(주막)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 것이 배우들의 눈에 들어왔다.
“이쪽이 1부 세트인 우주선 내부, 저쪽은 2부 세트인 주막입니다. 발밑을 보시면 노란색 테이프가 있죠? 이건 팬미팅장의 무대 크기를 측정해 놓은 거니, 잘 보시고 움직여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말에 서준이 활짝 웃었다.
아무래도 연습실이 무대보다 작아서 조금 걱정했는데, 미리 표시해 준 덕분에 동선을 수정하기 쉬울 것 같았다.
“한국 세트랑 크게 다른 건 없는 것 같지?”
“아무래도 한국 세트를 모델로 만들어달라고 했으니까.”
프로들이 만들어서 좀 더 세밀하고 사실적이라는 것(초가집인 주막의 지붕이 하나하나 지푸라기처럼 보였다. 아니, 잠깐. 저거 진짜 지푸라기인가? 어디서 가져왔지?)과 우주선 내부가 더 화려하다는 것만 빼면 한국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세트장을 둘러본 서준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제 연습 시작할까? 스왈린이랑 에반도 괜찮죠?”
기대로 가득한 어린 배우들의 표정에 스왈린 애넘과 에반 블록은 웃고 말았다.
저렇게 열심히인 배우들을 보며 어떻게 괜찮지 않다고 말하겠나.
“그럼 1부부터 해볼까? 의상도 갈아입고 말이야.”
“붕대랑 목발도 할까요, 선생님?”
“익숙해지려면 그게 좋겠지.”
그렇게 의상과 소품까지 갖춰 입은 배우들이 연습을 시작했고,
“……아니, 이게 뭐야?”
내가 뭘 본 거야?
스태프들은 연습이 끝날 때까지 입을 쩍 벌리고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