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60화
이번 촬영은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이었다.
서준은 배경부터 바닥까지 파란색 크로마키가 뒤덮은 세트장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하늘은 나뭇가지들이 뒤덮고 있고 바닥은 돌멩이와 흙으로 깔린 숲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런저런 액션 장비들이 많았다.
숲에서는 두 개밖에 설치할 수 없었던 와이어 장치도 실내 스튜디오에서는 여기저기 설치해 놓았고 바닥도 파란색 크로마키 매트가 깔려 있어 데굴데굴 굴러도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발이 푹 빠질 정도로 폭신한 재질은 아니었다.
“서준아, 분장할 시간이래.”
“네.”
최태우의 부름에 바닥에 깔린, 적당히 단단한 매트를 이리저리 밟아보던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먼저 저번 촬영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의상을 입고 분장실로 이동했다.
“어서 와, 준!”
먼저 도착해 분장을 받고 있던 몇몇 배우들이 서준을 반겼다. 다들 인간 귀를 숨기고 늑대 귀를 다느라 고개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잘 쉬었어?”
“네. 푹 쉬었어요. 형들은요?”
“집에서 꼼짝달싹도 안 했지.”
“난 계속 잤어.”
배우들과 어제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하며 서준도 늑대 귀를 장착했다. 그사이, 나머지 배우들도 하나둘 출근했다.
“어제도 늑대 꿈을 꿨는데 진짜 실감 났어요!”
의자에 앉은 브라이언 구델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꿈에서 느꼈던 것들이 데자뷔처럼 촬영장에서 느껴지는 것도 신기했는데, 촬영장에서 느꼈던 감각들이 꿈속에서 느껴지는 것 같더라고요! 으아아. 지금도 여운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얼마나 신기한 경험이었는지, 엉덩이까지 들썩들썩했다.
야간촬영을 할 때, 중간중간 쉴 때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이 신기한 경험을 자신만 느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다른 배우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더 잘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런 배우들의 반응에 서준이 씨익 웃었다.
꿈속에서 경험하게 해주는 [(선)드리머의 꿈여행]과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선)에리모스의 구현]의 시너지가 참 좋은 것 같았다.
* * *
“더 좋은 장면이 떠올라도 촬영 중에는 혼자 움직이지 말아 주십시오. 액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연습한 대로 합을 맞추는 거니까요.”
무술감독의 말에 서준과 배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무술감독과 함께 촬영할 액션 장면들을 다시 확인하는 중이었다. 몇 번을 확인해도 모자란 것이 안전이었으니까 말이다.
“촬영이 끝난 다음에는 이야기하셔도 좋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괜찮다면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그 제안을 사용할 수도 있거든요.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그렇다고 융통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각자의 캐릭터에 집중해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직접 고민해 제안하는 만큼, 그런 구도, 동성 하나하나가 관객들을 좀 더 몰입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바로 직전에 바꾸는 만큼 큰 틀은 바뀌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동선을 체크한 서준과 배우들은 세트장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스태프들이 줄자까지 동원해서 확실하게 체크하여 표시해 둔 자리에 섰다. 그제 촬영에서 서준과 배우들이 섰던 바로 그 위치였다.
“와이어 연결할게요.”
딸깍.
스태프가 다가와 서준의 의상 안에 장착한 벨트와 와이어 장치에 쑥 뽑아낸 와이어를 연결했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 잘 연결되었는지, 어디 끊어질 만한 곳은 없는지 와이어를 당겨 두 번 세 번 확인해 보고는 서준에게 물었다.
“준, 불편한 곳은 없어요?”
“네. 괜찮아요.”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본 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곧 스태프가 세트장 위에서 내려가고, 다른 배우들의 준비를 도와주던 스태프들도 모두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났다.
“와이어가 좀 흔들린다든가 어디가 좀 불안하다든가. 뭔가 걸리는 게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촬영 중에라도 말입니다.”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서준과 배우들을 보던 윌마 감독이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 나타난 파란색으로 뒤덮인 배경과 소품들 위로 숲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레디, 액션!”
* * *
솔직히 웨이드 무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끝이 좋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이 갔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 쫓아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도망칠 수는 없었다. 계속 피해 다닌다고 웨이드 무리가 쫓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테오는 이제 일상을 알았다.
맛있는 음식도 먹어봤고 달콤한 쿠키도 먹어봤고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에서 잠도 자봤다. 다른 이들과 함께 밥도 먹어봤고 놀아보기도 했다. 햇살을 받으며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도 했고 장난도 쳐봤다. 한 페이지도 찢어지지 않은 책도 읽어봤고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을 경험하기도 했다.
행복을 알았다. 즐거움을 알았다. 기쁨을, 웃음을 알았다.
그러니 클레어와 몰리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또 인연을 맺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클레어와 몰리만 하겠냐만은.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테오는 픽, 웃고 말았다.
하여튼.
그런 행복을 겨우 알게 됐는데, 다시 혼자 지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고 웃고 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레이필드의 늑대들이 쫓아오는 한, 언제든 자신의 일상을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죽어도 두 번 세 번 확인할 놈들이었다.
테오의 선택지는 평생 쫓기며 살거나 끌려가 죽는 것.
두 가지밖에 없었다.
‘어차피 끌려갈 거라면……’
그리고 죽을 거라면.
웨이드에게 한 방이라도 먹이고 갈 생각이었다.
빠르게 달려간 테오가 웨이드의 머리를 노리고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그 웨이드 레이필드가 이 공격에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테오는 곧바로 다음 공격을 생각했다.
그대로 손목이 잡혀 내던져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퍼억!
내팽개치듯 던져진 테오의 몸은 빠르게 날아가 나무에 부딪혔다. 커다란 나무가 삐걱 흔들렸다. 조금 부서진 것 같기도 했다.
“……젠장!”
퉤, 하고 속에서 올라오는 피를 뱉어낸 테오가 고개를 들었다.
“피하지도 않냐?!”
“피할 것도 없지.”
진짜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한 웨이드의 표정과 주위에서 작게 들려오는 비웃음 소리에 테오는 이를 갈았다.
훈련은커녕 꼬리도 없는 자신이 약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탈출할 때까지, 멍청한 척하며 견뎌온 자신이 아닌가.
한 방 먹여주기 전까진 계속할 생각이었다.
꽈악 주먹을 쥔 테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자세를 갖추었다.
그에 제레미가 웨이드의 앞에 섰고, 다른 늑대인간들 또한 테오의 목숨줄을 조이듯 포위망을 좁혔다.
꼬리가 없다고 해도 늑대인간.
방심하다가 목이 뜯기는 수가 있었다.
후우-
짧게 숨을 내쉰 테오가 먼저 달려들었다.
목표물은 세상 모든 짐승이 그러하듯 무리에서 가장 약한 녀석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발톱에 늑대인간이 얼른 몸을 피했다. 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굴 한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시어도어의 것이 아닌 피 냄새도 맡아졌다. 시X! 가주의 핏줄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건지, 꼬리가 없는 상태일 텐데도 저 놈은 빠르고 강했다.
그사이 다른 늑대인간이 테오의 아래로 빠르게 파고들려고 했지만, 테오는 이미 뒤로 물러선 상태였다.
그렇다고 뒤가 안전한 건 아니었다.
늑대화한 늑대인간이 커다란 입을 벌리며 테오의 몸통을 노렸다.
그다지 강하고 빠른 공격은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내장이 상해 죽지 않도록, 목을 물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저 거대한 발과 날카로운 발톱도 자주 휘두르지 않을 거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깔끔하게 늑대의 공격을 피한 테오가 땅을 딛고 눈앞의 늑대인간에게로 달려들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땅이 움푹 파였다.
그 소리에 목표물이 된 늑대인간의 귀가 바짝 섰다. 동시에 몸을 낮춰 테오의 공격을 피했다. 테오의 뒤에 선 늑대인간이 테오의 옆구리를 노려 공격했다.
--!
바닥에 몸을 굴려 그 공격을 피한 테오는 곧바로 뒤에서 있던 늑대인간에게로 달려들었다. 검은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무게에 속도까지 더해진 공격에 제법 타격을 입은 늑대인간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렇다고 빈틈이 생긴 건 아니었다.
곧바로 새로운 늑대인간이 나타나 빈자리를 채웠다.
‘탈출할 생각은 없지만.’
뭐, 얌전히 있는 것도 이상하니 탈출하는 척해보긴 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테오는 바로 다음 목표물을 노려 움직였다.
웨이드와 제레미를 제외하고 여덟의 늑대인간들이 테오에게 달려들었다. 늑대의 모습으로 공격하기도 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딱히 테오가 강해서 여덟이 덤비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가지고 노는 것에 불과했다.
죽지 않을 정도로, 탈출하지 못할 정도로 작신작신 다져놓는 것이었다.
그 의도대로 테오의 상처가 하나둘 늘어가기 시작했다.
낡았지만 깨끗했던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피에 붉게 물들었고, 얼굴도 상처로 가득했다. 옷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팔다리도 타격을 많이 받은 듯 움찔거렸다.
시야가 흐릿했다. 눈이 부어선지 피 때문인지 모르겠다. 입에서 피 맛이 났다. 퉤, 하고 뱉어내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었다.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통각이 맛이 갔나 보다.
힘이 빠져 어느새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고 있던 테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벅저벅-
그런 테오에게 웨이드가 다가갔다.
그리고 땀과 피와 흙먼지로 더러워진 테오의 머리채를 잡아 들었다. 테오가 고개를 들었다. 웨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힘이 빠진 다리는 제대로 서지도 앉지도 못했다.
“그러니 얌전히 따라올 것이지. 시어도어, 이제 만족해?”
“……ㄱ.”
“뭐?”
그 되물음과 동시에, 얼굴 한쪽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웨이드가 시선을 돌렸다.
테오의 피 묻은 주먹이 웨이드의 오른쪽 볼에 닿아 있었다. 나름 힘을 주는 것 같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팔은 힘을 내지 못했다.
그래도 심적으로는 타격을 준 것 같았다.
“아직이라고…… 이 새끼야…….”
웃으며 말하는 테오에 웨이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은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반사적으로 윽- 하고 신음을 뱉은 테오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신경은…… 충분히 돌린 것 같지?’
진득한 피비린내 속.
깨끗하게 세탁된 낡은 옷에서 흘러나오는 세탁세제와 햇빛과 쿠키의 냄새를 맡으며 희미한 미소를 짓던 테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퍼억!
미간을 찌푸린 웨이드에게 걷어차인 테오는 의식을 잃은 채 늑대로 변한 늑대인간의 등에 실려 옮겨졌다.
* * *
“와…… 진짜 아파 보이네요.”
분장팀에서 열심히 그려넣은 상처들을 보며 서준이 감탄했다.
야간촬영처럼 이렇게 상처가 많이 있는 분장도 처음이었는데, 진짜 어디서 엄청 맞고 온 것 같았다. 발톱이 스쳐 지나간 흔적도 있었고 시퍼런 멍이 남을 것 같은 상처도 있었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전투 장면이나 다치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상처가 눈에 띄지는 않았다. [생존자들]도 그랬다.
‘병이라면 몰라도.’
하여튼.
진짜 상처 같은 분장들은 계속 봐도 신기했다.
근데 태우 형은 아닌가 보다.
서준이 분장실 한쪽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는 최태우를 쳐다보았다.
분장을 하고 촬영을 하고 다시 분장을 하고 촬영을 하면서(점점 상처가 늘어나야 하기 때문에) 최태우의 미간은 점점 더 찌푸려지고 있었다.
“……진짜 상처도 아니고 촬영도 연기인 거 아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네.”
서준이 연기를 할 때마다 몸을 움찔댔던 최태우가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하하.”
그에 서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만큼 실감 난다는 거니까 말이다.
“새싹분들도 슬퍼하시겠다.”
아, 그건 좀.
영화를 보며 눈을 그렁그렁할 새싹들을 떠올린 서준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