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55화
“준도 아역배우 출신이라서 아이들 마음을 잘 아는 것 같죠?”
“그러게 말입니다.”
헤일리 로지의 말에 윌마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배우, 배우라…….”
잠시 생각하던 윌마 감독이 헤일리 로지를 불렀다.
“헤일리, 만약 이렇게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이야기를 들은 헤일리 로지가 눈을 반짝였다.
“괜찮은데요? 다들 좋아할 것 같아요.”
“그럼 좀 있다 준이랑 다른 스태프들에게도…….”
그렇게 윌마 감독과 헤일리 로지가 무언가를 속닥거리고 있고, 아이들은 서준에게 사인을 받고 [쉐도우맨]이나 [오버 더 레인보우]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얼굴로 듣고 있는 동안, 촬영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준. 준비할 시간이에요.”
“네.”
스태프의 말에 아이들과 놀고 있던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준의 근처에 몰려 있던 아이들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이내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역배우분들도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이쪽으로 와주세요.”
“네에!”
아이들도 촬영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풍날 선생님을 따라가는 학생들처럼, 아이들은 서로 손을 꼭 잡고 스태프의 뒤를 따라갔고, 어른들은 그 귀여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클레어가 자란 보육원으로 향하는 길.
“클레어. 난 여기서 기다릴게.”
담벼락을 따라 걷던 검은고양이 몰리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에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한 아름 들고 옆에서 걷고 있던 클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같이 안 가?”
“어린애들은 힘들어.”
몰리가 에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보통의 사람들 눈에는 몰리는 그저 고양이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밖에 나갈 때면 한번 만져보겠다거나 구경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어린애들은 힘 조절을 못 하거든.”
몰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에 클레어처럼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들고 있던 테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겨우 애들한테 겁먹은 거야?”
“겨우 애들이라니!”
몰리가 펄쩍 뛰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애들이 얼마나, 얼마나 무시무시한 줄 알아? 쥐어뜯긴 내 털만 해도 한 움큼이야! 또 내 꼬리는 얼마나 주물럭거리는데!”
“그거야 네가 약해서 그런 거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테오에 씩씩거리던 몰리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렇게 어린애들이 많은 곳은 별로야. 안 갈래. 여기서 기다릴게.”
“음.”
하고 잠시 생각하던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육원의 동생들이 그렇게 막무가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자제력이 약하다 보니, ‘얌전하게 보기만 해야지.’ 하고 생각하던 게 언제 ‘한번 만져보고 싶다.’로 바뀔지 몰랐다.
“그럼 그렇게 해.”
클레어의 말에 몰리가 꿍실꿍실 춤을 췄다.
“인간 꼬마들이 뭐가 무섭다고.”
도망치듯 달려가는 몰리를 비웃으며 말하는 테오에, 클레어는 잠시 후에 벌어질 상황을 떠올렸다가 이내 웃고 말았다.
* * *
‘지금 찍는 건 그다음 장면.’
의상을 갈아입고 나와 어제 촬영했던 장면을 떠올리던 서준의 눈에 준비를 끝낸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도 서준을 발견했는지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서준은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촬영을 해야 한다는 걸 아는 아이들은 조금 들뜨면서도 많이 긴장한 얼굴이었다.
“다들 연습 많이 했지?”
“……네!”
“많이 했어요!”
다른 작품이라도 열심히 연습했겠지만, 서준 리와 함께 연기하는 장면이라서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연습했다.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에게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선기를 풀어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실수하더라도 나랑 다른 배우분들이랑 감독님이 도와줄 테니까.”
서준의 말에 아이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준이 도와준다니.
아주아주 든든했다.
“그러니까 편하게 해. 알았지?
“네!”
씩씩한 아이들의 대답에 서준과 헤일리 로지, 윌마 감독이 빙그레 웃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윌마 감독이 ‘레디, 액션!’을 외치자, 아이들만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보육원 마당에서 놀고 있는 장면을 찍는 거였는데, 촬영의 워밍업으로는 딱 좋을 장면이었다.
‘그렇게 길지도 않고 찍기도 편하고.’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기에도 좋았다.
어린아이들은 그저 놀기만 해도 됐고, 큰 아이들은 카메라를 신경 쓰지 않고 헤헤- 웃는 작은 아이들을 돌봐주면 됐다.
‘그리고 자신감을 불어넣기에도 좋지.’
분장할 때, 헤일리 로지가 와서 속닥거리던 것이 떠오른 서준이 작게 웃었다.
“컷! 오케이!”
윌마 감독이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짝짝짝!
촬영장이 박수소리로 가득해졌다.
“와! 잘하는데?”
“멋지다!”
“원 테이크만에 끝내다니. 다들 대단한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아역배우들이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조지 스튜어트와 큰 아이들은 이번 장면이 아주 간단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 번 촬영 만에 끝나는 것이 당연할 정도라서, 이렇게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칭찬이 쏟아졌다.
스태프들과 배우들, 감독님이 짝짝,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정말 잘했어.”
자신들의 우상인 서준 리까지.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라도 그랬다.
아니, 아직 많은 성취감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라서 칭찬이 더욱 크게 다가갔다.
꾹- 꾹-
무언가 옷을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조시 스튜어트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붉어진 볼로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아마 지금 자신도 이런 얼굴이지 않을까.
“형아, 우리 잘했어?”
그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응. 잘했대.”
뭣 모르는 꼬마들도, 일찌감치 이 세계를 파악하고 어른스럽던 큰 아이들도.
모두 어른들의 칭찬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이내 헤헤- 하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 *
한바탕 칭찬 세례가 지나가고 다음 촬영이 준비되었다.
서준과 헤일리 로지가 두 손 가득 소품(보육원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들고 세트장 길 끝에 섰다.
“애들 엄청 좋아하더라.”
“윌마 감독님이 좋은 제안을 해주셨어요.”
칭찬을 받아 어쩔 줄 몰라 하던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서준이 작게 웃었다.
아마 친구들이 들으면 ‘왜 우리 때는 그런 감독님이 안 계셨을까!’ 하고 탄식하지 않을까.
“그치? 난 지금도 저렇게 칭찬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아.”
“저도요. 연기에 관한 칭찬이라면 더더욱 받고 싶어요.”
어른이지만 칭찬이 고픈 서준과 헤일리 로지가 작게 키득키득 웃었다.
그사이 카메라 앵글을 조정한 윌마 감독이 외쳤다.
“레디,”
그에 서준과 헤일리 로지, 그리고 담장 안 보육원 마당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집중했다.
“액션!”
조시 스튜어트는 동생들과 놀아주면서 기다렸다.
보육원 대문 앞에서 ‘클레어’가 ‘코리!’ 하고 부르기를.
그러면 자신은 ‘클레어!’ 하고 부르면서 대문 쪽으로 달려가면 된다. 다른 아이들도 자신을 따라 뛰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잘해야지.’
서준이 도와줄 거라고 했을 때는 실수해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감독님과 스태프들 그리고 서준에게서 잘했다는 칭찬을 듣고 나니 더 잘하고 싶어졌다. 또 칭찬을 듣고 싶었다.
조시 스튜어트는 아이들과 놀아주면서도 부르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게 귀를 쫑긋 세웠다.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좋아.
이제 곧 헤일리 로지가 자신을 부를 터였다.
“코리!”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조시 스튜어트가 고개를 번쩍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예쁘게 포장된 선물들을 가득 든 헤일리 로지가 대문 앞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클레어!”
조시 스튜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박에 대문 앞까지 달려갔다. 열심히 연습한 만큼 환하게 웃는 표정까지 아주 자연스러웠다.
“클레어어!”
“언니!”
그런 조시 스튜어트의 뒤를 아이들이 따라왔다. 큰 아이들부터 작은 아이들까지.
보육원의 동생들을 보며 헤일리 로지가 활짝 웃었다. 조시 스튜어트가 얼른 대문을 열어주었다.
“다들 잘 지냈어?”
“응! 클레어는?”
“나도 잘 지냈지! 자, 이거 선물이야!”
“와아아!”
작은 아이들이 기뻐하며(연기가 아니다) 헤일리 로지가 건네주는 선물상자를 받아 들었다. 큰 아이들도 기대하는 얼굴(연기다)로 자신의 선물을 기다렸다.
자신이 들고 있던 선물을 모두 나눠준 헤일리 로지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에 조시 스튜어트는 알아차렸다. 헤일리 로지의 옆에 남자가 하나 서 있다는 것을.
‘어, 왜 몰랐지?’
대본에도 나와 있었고 사인도 해줬고 칭찬도 해줬다. [쉐도우맨 시리즈]와 [쉐도우앤나이트]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조금 전까지 눈이 마주치면 웃기도 했다.
오늘 함께 연기한다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서준 리.
조시 스튜어트의 우상.
자신은 지금 그 사람과 함께 연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그 사람과 연기를 하고 있는 중일 터였다.
“이건 코리 선물!”
헤일리 로지가 손을 뻗어 남자가 들고 있던 선물상자 중 하나 꺼냈다.
그런 헤일리 로지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던 조시 스튜어트가 남자를 보았다. 다른 아이들도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조시 스튜어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오케이! 컷!’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조시 스튜어트와 아이들의 시선은 남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와! 조시! 연기 진짜 잘한다!”
감탄이 가득한 헤일리 로지의 목소리가 조시 스튜어트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진짜 처음 보는 사이인 줄 알았다니까!”
“다들 정말 잘했어. 주춤하고 뒤로 물러서는 게 진짜 낯선 사람을 본 것처럼 보였어.”
윌마 감독까지 웃으며 아이들을 칭찬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지금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의문만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조시 스튜어트가 내뱉은 그 말은 대사였지만, 대사가 아니었다.
진짜로 묻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눈앞에 서 있는 저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조금 전 봤던 얼굴을 하고,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저 낯선 남자는 누구인가.
그 질문에 답을 해주듯, 남자의 분위기가 일순 바뀌었다.
그 남자는 바로,
서준 리였다.
준.
그래.
준이다.
그 당연한 것이, 이제야 조시 스튜어트와 다른 아이들의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다.
허억! 하고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조시 스튜어트 자신인지도 몰랐다.
조시 스튜어트와 아이들은 서준을 살펴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변한 게 없는데, 변했다. 연기를 할 때와 하지 않을 때가 전혀 달랐다.
“와…….”
“……진짜 미쳤다.”
영상으로만 보던 것도 대단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더더욱 대단했다.
이 사람이 자신들과 비슷한, 열 두 살의 어린 나이에 오스카상을 받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짜 준이었네요.”
‘쭌이야!’ 하고 자신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안은 서준은, 한숨처럼 나오는 조시 스튜어트의 말에 잠시 눈을 깜빡였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테오’ 보고 놀란 거야?”
“테오…….”
그 이름을 한 번 불러본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달랐어요!”
“완전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깜짝 놀랐어요! 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눈을 빛내며 진짜 처음 보는 사람인 줄 알았다, 놀랐다, 낯설었다 하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에, 상황을 파악한 윌마 감독과 헤일리 로지도 웃고 말았다.
“연기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나 봅니다.”
“어른인 저도 준의 연기에 휩쓸리는데 아이들은 오죽하겠어요. 게다가 밖에서 보는 거랑 준과 함께 연기하는 것은 제법 큰 차이가 있거든요. 충분히 그럴 만하죠.”
지금도 때때로 서준의 연기에 휩쓸려 버리고 마는 헤일리 로지가 공감하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