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50화
“준. 연기 가르쳐도 되겠는데요?”
윌마 감독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트장 위.
헤일리 로지는 조금 전까지 어려워하던 모습과 달리 완전히 몰입한 채로 연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놀라서 흔들리는 눈동자가 거대한 늑대의 크기를 가늠하듯 허공 어딘가를 맴돌고, 두려움에 발이 조금 주춤거리고,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며 숨을 크게 들이켠다.
그러나 이내 눈앞에 있는 것이 ‘테오’라는 걸 깨닫는다. 커다란 노란색 눈동자에 친밀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레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그런 헤일리 로지의 연기에 걱정하고 있던 스태프들은 자신의 눈을 비벼야 했다.
헤일리 로지의 앞에 정말 거대한 늑대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오직 헤일리 로지만이 볼 수 있는.
‘그 짧은 시간에 저렇게 몰입할 수 있게 하다니.’
몇 마디 말들로 저렇게 변화한 헤일리 로지를 보며, 윌마 감독은 서준에게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헤일리가 잘 이해한 거죠.”
“그 ‘잘’ 이해시키는 게 어려운 일입니다, 준.”
서준이 웃으며 말하자, 윌마 감독이 덧붙였다.
두 사람 다 세트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클레어’가 손을 뻗어 늑대의 콧잔등에 가볍게 올렸다.
단단하고 반들반들한 초록색 공이 헤일리 로지의 손에 닿자 어쩐지 조금 거칠지만 부들부들한 소재로 바뀐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손을 떼고 두어 걸음 물러선다. ‘클레어’의 시선은 여전히 거대한 늑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며 표정이며 움직임이며 더할 나위 없다.
“컷! 오케이!”
윌마 감독이 시원하게 오케이를 외쳤다.
뒤를 이어 조용히 바라보던 스태프들에게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헤일리 로지가 민망한 얼굴로, 한편으로는 기쁜 듯이 웃으며 세트장에서 내려왔다. 꽉 쥔 두 손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잘했어요. 헤일리.”
모니터 앞에 선 서준이 짝짝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헤일리 로지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이게 박수 칠 정도까진 아니지 않아?”
“잘한 걸 잘했다고 하는 건데요.”
“맞습니다. 정말 잘했어요, 헤일리.”
“다 준 덕분이죠, 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다들 미소를 지었다.
원래 촬영장에서는 촬영을 잘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세 사람은 모니터로 헤일리 로지가 촬영한 장면을 보았다. CG 작업을 고려해서 보더라도 잘 찍혔다.
“다음 장면 바로 가도 되겠습니다.”
헤일리 로지가 안심한 표정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준.”
“괜찮아요.”
따로 준비할 건 없었기 때문에 예정대로 곧바로 촬영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서준은 리모컨으로 머리에 쓰고 있던 늑대 귀 머리띠의 전원을 켰다. 윌마 감독과 헤일리 로지가 반짝이는 눈으로 늑대 귀를 바라보았다.
“제 귀, 잘 움직여요?”
분장실에서도 확인했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서준이 약간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물었다.
“응! 완전 잘 움직여!”
“네. 잘 움직입니다!”
헤일리 로지와 윌마 감독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목소리들에 서준이 귀를 기울이자, 저번보다 더욱 퀄리티가 올라간 외형의 늑대 귀가 털이 반응하듯 헤일리 로지와 윌마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쫑긋 섰다.
“미쳤어……!”
“멋집니다!”
헤일리 로지가 입을 틀어막았다. 윌마 감독도 감격했다.
스태프들의 시선도 쏠렸다.
전원이 꺼져 있을 때도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움직이기까지 하니 그저 감탄만 나왔다.
다시 말해도 부족할 만큼, 서준 리와도 정말 잘 어울렸다.
“그럼 얼른 촬영을 시작해 보죠!”
윌마 감독이 당장에라도 찍고 싶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서준과 헤일리 로지가 웃으며 세트장으로 향했다.
배경은 초록색 크로마키가, 바닥에는 생생한 잔디가 깔려 있는 야외세트장.
바람은 적당히 불고 하늘은 맑았다.
서준과 헤일리 로지는 조금 떨어져 서로를 마주 본 채로 섰다. 조금 전까지 ‘클레어’와 ‘늑대’가 서 있던 곳이었다.
스태프들이 세트장을 바라보며 속닥거렸다.
“아까도 잘했지만 지금은 더 잘하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상대역이 있으니까.”
헤일리 로지도 같은 마음이었다.
“준이랑 같이 연기하니까 마음이 편하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헤일리 로지에 서준이 웃었다.
“잘했다니까요.”
“그래도 어려운 건 어려운 거야. 진짜 준이 아니었으면 오늘 내내 촬영했어도 감도 못 잡았을걸.”
서준과 헤일리 로지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의상팀이 다시 한번 확인하고 카메라 앵글 밖으로 나갔다.
모니터를 확인한 윌마 감독이 외쳤다.
“레디,”
그에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서준과 헤일리 로지는 ‘자신’을 감추고 ‘캐릭터’를 입었다.
그리고 서준은 거기에 하나를 더 껴 입었다.
[(선)웨어울프의 인간화-중하급-가 발동됩니다.]
[(선)웨어울프의 인간화-중하급-]
사용자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으로 바꿔줍니다.
웨어울프의 감각을 일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웨어울프의 야생성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딱 알맞은 능력을 사용하는 건 영화 [이스케이프]의 엘프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찾기도 편했지.’
웨어울프, 그러니까 늑대인간으로 태어났던 삶들이 꽤 있었으니까.
그중에는 늑대의 귀와 꼬리가 그대로 달려있는 [(선)웨어울프의 반인간화]도 있었는데, 그건 ‘꼬리’가 보여서 가져오지 않았다.
‘나중에 쓰겠지만.’
속으로 작게 웃은 서준은 자신을 살펴보았다.
미리 확인한 대로, 현재 인간의 모습이니 변신하지는 않았고 웨어울프의 야생성만 풍기고 있었다.
서준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인간으로 있을 때보다 모든 감각이 배로 늘어난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냥 본능과 전투 본능이 생겨난 것 같았다.
선 성향이지만, 짐승 특유의 거친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그걸 느꼈는지, 마주 보고 있던 헤일리 로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런데 익숙한 느낌이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떠올렸던 것 같다.
‘아. 늑대다.’
헤일리 로지가 상상했던 늑대가 바로 눈앞에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채로 서 있었다.
아니, 어쩐지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사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있을 리가 없는 늑대인간임에도 그러했다.
헤일리 로지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흔들릴 때, 그걸 놓치지 않은 윌마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액션!”
클레어와 몰리는 눈앞에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올려다볼 정도로 거대했던 늑대는 어느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 쫑긋 선 늑대 귀가 보이긴 했지만, 틀림없이 테오였다.
묘한 기분이었다.
늑대인간이란 이야기는 들어서 잘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인간에서 늑대로, 늑대에서 반인간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하게 실감이 됐다.
분위기도 그랬다.
‘지금까지 테오에게서 한 번도 이런 분위기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고작 늑대 귀만 드러난 모습인데도 아까 그 거대한 늑대처럼 묵직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새까만 눈동자로 돌아왔지만, 짐승의 노란 눈동자가 잔상처럼 남았고, 머리카락도 마치 늑대의 그것처럼 보였다.
친근하면서도 낯설고, 낯설면서도 친근했다.
“늑대 모습으로도 말할 수 있긴 한데, 그 모습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아, 그렇구나.”
쓰게 웃으며 말하는 테오에, 클레어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마도 꼬리 때문이겠지.’
클레어의 시선으로 보자면 늑대화한 테오의 모습은 꼬리가 없어도 굉장히 신비롭고 놀랍고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모습이었지만, 테오에게는 다를 수도 있었다.
“확실히 반인간화한 상태에서도 꼬리가 없네.”
어느새 테오의 뒤를 살펴본 몰리가 말했다.
놀린다기보다는 병을 진단하는 의사 같은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 차분함에 쓰게 웃던 테오도,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클레어도 침착해질 수 있었다.
“또 다른 건 없어?”
몰리의 물음에 테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괜찮아.”
“으음. 그럼 힘을 약하게 하는 저주 맞는 것 같아.”
저주라는 이야기에 테오의 귀가 움찔움찔 움직였다. 아마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순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컷! 오케이!”
몰입을 깨듯 윌마 감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감탄도.
“준! 정말이지……!”
무어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듯했다.
윌마 감독의 눈이 반짝였다.
헤일리 로지도 헤일리 로지지만, 역시 서준 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뉴 이클립스]의 촬영을 준비하면서 서준이 늑대의 연기를 하는 걸 보는 건 많았지만 역시 볼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상상 속의 존재를 연기하는 건 굉장히 어려울 텐데도, 서준은 그걸 해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분위기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더군요. 거친 느낌이 잔뜩 들었습니다.”
“네. 아무래도 이전에는 테오가 자신의 본모습을 최대한 숨겼지만, 지금이 과거 이야기도 했고 늑대의 모습도 보여줬으니 편하게 드러내는 거죠.”
“역시 그렇군요!”
서준의 설명에 윌마 감독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 생각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해석이었지만, 그걸 연기로 보여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앞으로의 촬영도 정말 기대됩니다.”
이렇게 멋지고 거칠고 야생적인 늑대인간이라니.
소설 [이클립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즐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 * *
이후로도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윌마 감독의 말에 서준 리와 헤일리 로지는 대기실로 향했고, 스태프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촬영장을 정리했다.
“아까 NG 좀 나와서 오늘 늦게 끝나나, 생각했는데 말이죠.”
“늦게 끝나긴. 제시간에 끝나는 거지.”
후배를 타박하는 선배에,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촬영에서는 매번 스케줄보다 일찍 끝났으니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긴 해. 나도 잠깐 오늘 늦게 끝나겠는걸, 하고 생각했다니까.”
전부 첫 촬영부터 지금까지 서준과 헤일리 로지, 윌마 에반스 감독이 딱딱 합을 맞춰서 NG도 거의 없이 촬영을 해준 덕분이었다. 고양이들도 말이다.
“앞으로 촬영 인원이 늘어나면 이렇게 일찍 마치는 건 없겠죠?”
“그렇겠지. 액션 장면도 있고 하니까. 더 오래 걸렸으면 걸렸지 줄어들 일은 없을걸?”
그 말에 모두 가볍게 아쉬움의 한숨을 내뱉었다. 스케줄을 딱딱 지켜서 촬영하는 할리우드지만 일찍 끝나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오케이. 다들 내일 봅시다.”
“수고하셨습니다.”
뒷정리까지 끝내고 내일 촬영할 세트들을 체크한 스태프들이 조감독의 말에 모두 퇴근해 집으로 향했다.
그중 한 무리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단골 술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아직 경기 안 끝났지?”
운전석에 앉은 스태프의 물음에 뒷좌석에 앉은 스태프들이 휴대폰을 꺼내 경기 상황을 살펴보았고, 조수석에 탄 스태프는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었다. 다들 아주 단합된 모습이었다.
“네. 지금 6회 말인 것 같아요. 점수는 3 대 1.”
“우리가 3이야?”
“……아뇨. 1이요.”
그에 모두 침묵했다.
[아, 쳤습니다! 쳤어요! 1루와 2루 사이로 향하는 공! 안타! 안타입니다!]
동시에 켜진 라디오에서 해설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자! 홈으로 들어옵니다! 아, LA다저스! 또 한 점을 내주고 마네요!]
이제 3이 4가 되었다.
“야이……!!”
차 안 가득 한바탕 욕설이 터져 나왔다.
퇴근하자마자 실점 소식을 듣게 된 LA다저스의 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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