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49화
그 모습에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윌마 감독이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헤일리. 나쁘지 않았어요.”
대기석에 앉아 있던 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몰입이 안 된다고 걱정한 것치고는 잘했다.
물론 헤일리 로지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후우.”
다시 촬영하겠다는 윌마 감독의 말에, 가볍게 숨을 내쉰 헤일리 로지는 다시 스태프가 든 막대에 매달린 초록색 공을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저건 늑대. 저건 늑대.’
헤일리 로지는 자신을 세뇌하듯 문장을 되새기며, 몇 주 전에 봤던 울프독들과 어린 늑대의 모습을 떠올렸다.
‘저건 늑대……가 아니잖아.’
실패다.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늑대(울프독)와 허공에 떠 있는 초록색 공 사이의 다른 점만 느껴졌다.
그래도 해야 했다.
헤일리 로지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사랑 연기도 진짜로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
사랑 연기 말고도 화내는 것, 무서워하는 것도 모두 상상해 만들어낸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상대방이 있어서, 합을 맞춰줘서 더욱 쉽게 몰입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이것도 다르지 않다.
이전 촬영들에서 ‘몰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연기했던 것처럼, 그저 늑대 한 마리가 눈앞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늑대는 평범한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라서 헤일리 로지, 아니, ‘클레어 매닝’은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봐야 했을 거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거대함에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겠지.
‘테오’와 ‘몰리’에게 이야기를 들었어도 동물원이 아닌 곳, 그러니까 안전장치가 없는 곳에서 육식동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어쩔 수 없는 반사적인 반응일 터였다.
‘보통 사람들은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개만 봐도 무서워하니까.’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런데, 자신보다 큰 늑대라니.
아마 진짜 있다면 기절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이 딴 길로 샜지만, 오히려 도움이 됐다.
‘처음 보는 생물체라서 무섭지만, 그게 테오인 거야.’
함께 지낸 시간은 짧지만, ‘클레어 매닝’은 ‘테오 레이필드’가 자신을 헤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좋아.’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헤일리 로지가 눈을 부릅떴다. 눈앞에 있는 저것은 늑대다. 테오다.
“레디,”
눈을 뜬 헤일리 로지를 본 윌마 감독이 나지막이 외쳤다.
그에 긴장하고 있던 헤일리 로지의 얼굴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액션!”
클레어는 눈앞에 있는 늑대를 보았다.
거대한 크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지만, 이내 노란 눈동자에 담긴 익숙함에 이내 긴장을 풀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늑대의 콧잔등을…….
“컷! NG!”
다시 한번 NG가 났다.
초록색 공으로 손을 뻗는 헤일리 로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기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생물을 만지는 거니 주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까, 나쁘진 않은데 말입니다…….”
“‘나쁘지’ 않다는 거네요.”
좋지는 않다는 말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헤일리 로지에, 윌마 감독과 서준이 웃고 말았다.
“잘하고 있어요. 헤일리. 조금 전보다는 더 몰입했으니까 다시 촬영하면 더 잘할 거예요.”
“맞습니다. 원래 처음이 어려운 거죠.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마음 편히 연기하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조금 전 크로마키 공을 향해 손을 뻗으며 연기를 할 때, ‘이건 늑대다. 늑대야. 늑대라고!’ 하고 속으로 열심히 외쳤던 헤일리 로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에 초록색 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진짜 이게 늑대라고……?’ 하고 생각했지만,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NG……!”
여섯 번째 NG 사인이 떨어지고, 서준은 깨달았다.
‘말렸구나.’
배우가 연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렸다.’라고 표현한다.
충분히 알고 있는 대사임에도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몇 번이고 더듬거리거나 감정 연기에 몰입하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상황인 것이었다.
‘이건 배우 본인이 신경 쓰면 쓸수록 더 나빠지는데.’
잘해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긴장하는 바람에 오히려 몰입을 못하게 된다.
악순환이었다.
당사자 헤일리 로지는 물론이고, 윌마 감독과 스태프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잠시 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윌마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세트장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헤일리 로지가 내려왔다.
“하아…… 미안해, 준. 나 때문에 기다리게 해서.”
‘늑대와 클레어가 만나는 장면’이 짧아서 바로 다음 촬영에 들어갈 줄 알고 분장까지 하고 기다리는 서준에게 헤일리 로지가 한숨을 쉬며 사과했다. 자신도 이 짧은 장면에서 이렇게 막히게 될 줄 몰랐다.
“괜찮아요. 아직 촬영 시간 남았는걸요.”
잭의 경기를 보러 가야 했지만, 촬영도 중요했다.
‘잭도 자신 때문에 촬영 중간에 가는 건 싫어할 테고.’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서준에 헤일리 로지의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졌다.
“좋아. 집중한다.”
헤일리 로지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자신의 매니저에게서 받은 소설 [이클립스]와 늑대 사진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서준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헤일리 로지의 손에 들린 소설 [이클립스]는 얼마나 읽었는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여기저기 포스트잇도 붙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우도 좋지만, 노력하는 배우는 더 좋았다.
“눈이라도 그려볼까? 이렇게?”
매니저에게서 초록색 크로마키 공을 양손에 든 헤일리 로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력의 방향이 약간 이상한 쪽으로 가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눈 그리면 더 집중 안 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서준의 말에 한숨을 포옥 내쉰 헤일리 로지가 늑대 사진을 보았다. 한 장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이었다.
“뭔가 더 잘 몰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준?”
헤일리 로지는 CG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다수 출연한 서준에게 물었다.
촬영장을 직접 본 적은 없고 너튜브 영상에서만 봤지만, 슈퍼히어로 영화는 진짜 CG의, CG에 의한, CG를 위한 영화였다.
“제이와 파트너도 CG였을 텐데, 준은 진짜 있는 것처럼 연기했잖아.”
음. 여기서 그 이름들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작게 웃은 서준은 ‘에반 블록 배우도 그렇고, 리첼 힐 배우도 그렇고. 다들 진짜 어떻게 연기하셨대.’ 하고 감탄하는 헤일리 로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모습은 많이 상상했을 테니까, 다른 걸 떠올려 볼까요?”
“다른 거?”
“울프독 만났던 거 기억하죠?”
“기억하지. 그건 평생 못 잊을걸.”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헤일리 로지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풀숲에서 커다란 울프독들이 나타났을 때 엄청 놀랐죠?”
“그랬지. 나오기 전부터 긴장되더라. 뭔가 분위기가 달랐어.”
“계속 들리던 풀벌레 소리랑 새 소리도 어느샌가 멈췄고요.”
“으음. 그랬었나?”
누가 풀벌레 소리랑 새 소리까지 신경 쓰겠느냐마는.
서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주위가 아주 조용했던 것도 같았다.
“공기도 조금 달랐던 것 같지 않아요?”
“……냄새가 조금 났었던 것 같긴 해.”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서준의 말에, 천천히 헤일리 로지의 머릿속에 당시의 상황이 재구성되었다.
“울프독들이 쳐다볼 때는 어땠어요?”
헤일리 로지는 울프독들이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을 떠올렸다.
물론 다른 배우들도 있었기 때문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겠지만.
“오싹했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반들반들한 노란 눈동자들이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는 것이 느껴지자, 직접 마주 보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마치 찬물을 들이부은 것 같이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서늘했다.
한껏 집중해서 ‘늑대’를 상상하는 헤일리 로지의 모습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윌마 감독이 흐뭇하게 웃으며 엄지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서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린 늑대이긴 하지만 만져도 봤죠? 느낌이 어땠어요?”
“바깥에서 지내서 그런지 털이 거칠었지. 근데 예상했던 것보다는 부드러웠어.”
그건 아주 잘 떠올랐다. 늑대를 만져본 적이 없었던 터라 한껏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그럼 다시 사진을 보죠.”
서준의 말에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헤일리 로지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도 봤던 늑대의 정면 사진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지금 보이는 것은 전혀 달랐다.
“저렇게 발이 큰데 전 발소리도 못 들었어요. 발톱은 굉장히 날카로워 보였는데, 반대로 꼬리는 되게 풍성해서 폭신폭신했었죠. 숨 쉴 때마다 울프독의 배가 움직이고, 소리가 들릴 때마다 경계하는 것처럼 양쪽 귀도 움찔거렸던 거 기억나요, 헤일리?”
“응. 기억나.”
사진 속 늑대가 보였다.
뾰족한 귀 끝부터 몸에 가려져 있어 조금만 보이는 꼬리 끝까지 생기가 스며든다.
바람 속에 울프독 특유의 냄새가 배고, 그 냄새를 맡은 존재들이 소리를 죽인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거친 털이 움직인다.
오싹한 황색의 눈동자가 정면을 바라본다.
헤일리 로지의 머릿속에서 저절로 시각뿐만이 아니라 후각, 청각, 촉각, 그리고 육감(본능)까지, 미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통해 늑대(울프독)을 만들어졌다.
“그럼 이제 이걸 볼까요?”
어쩐지 조금 벅찬 기분이 든 헤일리 로지가 고개를 돌려 서준이 내미는 것을 바라보았다.
초록색 크로마키 공이다.
“여기에 지금 헤일리가 생각하고 있는 늑대의 모습을 천천히 덧씌워보는 거예요. 비슷한 점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니까 조금 어려울 수도 있어요.”
상냥한 서준의 말에 헤일리 로지는 작게 웃으며 초록색 크로마키 공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꼴도 보기 싫었던 초록색 공이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준의 말대로 비슷한 점은 전혀 없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작지만 확신이 가득한 어투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쫑긋 귀를 세우고 있던 윌마 감독과 조감독이 손으로 빠르게 허공을 휘저었다.
금세 촬영 준비가 끝났다.
따로 준비할 건 없었지만.
짧은 쉬는 시간을 가졌던 헤일리 로지는 다시 세트장 위로 올라가 서준에게 들었던 말을 되뇌었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시각적 정보에, 소리, 냄새, 분위기, 촉감을 더한다.
‘아…….’
문득, 서준과 자신이 하는 연기의 차이점을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서준이 저렇게 잘 몰입하는 건지도.
‘난 시각적인 정보에만 집중하는데, 준은 오감을 다 사용하는구나.’
아니, 분위기까지 더하면 육감이었다.
연기 천재인 서준 리의 비법을 알 것 같았다. 물론 비법을 안다고 해도 그걸 체득해서 사용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앞으로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알 것 같아.’
헤일리 로지는 고개를 돌려 윌마 감독과 함께 모니터 앞에 서 있는 서준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헤일리 로지에 잠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서준이 이내 힘내라는 듯 웃었다.
따라 웃던 헤일리 로지의 시선이 서준의 머리에 달린 늑대 귀에 꽂혔다.
아.
너무 잘 어울려서 이상한지도 모르고 있었다.
작게 웃는 헤일리 로지의 모습에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고갯짓에 따라서 늑대 귀도 옆으로 기울었다. 아직 스위치도 켜지 않았는데 어쩐지 늑대 귀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뒤에 선 스태프들도 어깨를 조금 떨고 있는 게 보여, 헤일리 로지는 또 조금 웃고 말았다.
“레디,”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니터를 확인한 윌마 감독의 목소리에 헤일리 로지는 촬영에 집중했다.
“액션!”
일순,
눈앞의 풍경이 바뀐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