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42화
“들어와.”
한 번 해봐서 그런지, 남자가 집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는 건 쉬웠다.
손목에 감은 녹색 실팔찌를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클레어의 말에 조심스럽게 나무 대문을 밀었다. 불꽃이 일렁일까 싶어 순간 움찔했지만, 마법은 잠잠했다.
잠깐 숨을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클레어도 이내 아무 탈 없이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안심했다.
“갈아입을 옷은 있어?”
“……아니. 없어.”
“그럼 내가 옆 가게에서 사 올게. 몰리가 화장실을 알려줄 테니까 씻고 있어. 그 상태로 있으면 감기에 걸릴 것 같으니까.”
계단을 오르던 남자가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말하는 클레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 마녀. 돈은 갚을게.”
“그, 마녀라고 부르는 건 이제…….”
비가 그칠 때만이지만 집 안까지 들이게 됐으니, 이제 통성명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싶었던 클레어가 멈칫했다.
남자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풀밭과 나무와 나무와, 나무. 그리고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
쏴아아- 내리던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변한 풍경에 남자도 놀란 듯 주위를 살펴보았다. 반사적으로 코가 킁킁 움직였다.
도시 특유의 냄새 대신 진짜 숲 내음이 맡아졌다. 환상 마법 같은 게 아니라 진짜였다. 남자는 놀란 눈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몰리!”
하지만 또다시 변해버린 풍경에 놀란 클레어는 그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답을 가르쳐 줄 선생님을 찾았다. 그래. 다른 것보다도 이걸 먼저 물어봤어야 했다.
“무슨 일이야?”
늑대인간을 집 안으로 들인다는 사실에 투덜투덜거리던 몰리가 클레어의 부름에 빠르게 달려왔다. 늑대인간을 한 번 째려보고는 클레어를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밖이 변해.”
“아하.”
클레어의 말에 바깥 풍경을 본 몰리는 별것 아니라는 듯 꼬리를 살랑이며 말했다.
“이 집에 이동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래. 마가렛이 전 세계에 있는 자신의 집들을 연결했거든. 여긴 마녀의 숲이야.”
마녀의 숲.
이름만 들어도 어떤 곳인지 짐작이 갔다.
비가 그치고 밤이 내려앉아 별들이 반짝이는 숲을 잠시 둘러보던 클레어가 몰리에게 물었다.
“다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
무척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다시 집(그러니까 도시)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목적지를 말하면 돼.”
클레어는 몰리의 말대로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자신의 집이 있는 도시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시 한번 풍경이 변했다.
“하…….”
익숙한 도시의 풍경을 보니 어쩐지 힘이 쫙 빠졌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클레어는 우산을 들고 남자와 몰리에게 말했다.
“난 그럼 옷 사고 올게. 몰리는 화장실이 어딘지 가르쳐 주고.”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
바로 옆인데 조심까지야.
그래도 누군가의 배웅을 받는 건 좋은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클레어는 우산을 쓰고 대문을 나섰다.
“뭐 해, 똥개. 안 와?”
“……갈게.”
타박타박 걷던 몰리가 한쪽 발을 들고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뭐지?’
아까 그렇게 으르렁대던 녀석은 어디 가고 얌전한 녀석만 남아있었다.
‘실팔찌 때문인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몰리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뭐, 상관없지.
마녀의 집으로 들어온 이상, 늑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화장실은 이쪽에 있어.”
남자는 앞장서는 몰리를 얌전히 따라갔다.
* * *
“컷! 오케이!”
윌마 감독의 목소리와 함께, 오늘 촬영이 모두 끝났다.
그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최태우가 얼른 커다란 수건을 들고 서준에게로 달려왔다. 수건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보다 빠른 움직임이었다.
“얼른 닦자, 서준아.”
“하하. 네.”
닦는다기보다는 천을 뒤집어쓰고 문지르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서준은 그냥 웃으며 커다란 수건의 한쪽을 들어 물기를 닦아냈다. 계속 물에 젖은 상태로 연기했으니 걱정될 만도 했다.
“나 이거 본 적 있어.”
헤일리 로지가 웃으며 말했다.
“대형견 닦을 때 이러잖아.”
그러고 보니?
서준과 매니저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준. 내일은 푹 쉬어요.”
사람들과 함께 웃던 윌마 감독이 말했다.
날씨도 적당하고 잠깐잠깐 쉴 때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난로 앞에 앉게 했기 때문에, 하루 물에 젖은 채 연기했다고 해서 어디 아프거나 하진 않겠지만. 앞으로 남은 촬영을 위해서라도 배우의 컨디션을 확실히 챙기는 편이 좋았다.
“네.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인 서준이 열심히 물기를 닦아주는 최태우를 바라보았다.
물기 하나라도 놓치지 않게 집중하며 닦는 태우 형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 집에 가면 내일까지 아주 따뜻하게 지낼 것 같았다.
* * *
그렇게 하루를 푹 쉬고.
서준은 완벽한 컨디션으로 촬영을 이어나갔다.
“레디, 액션!”
남자가 입을 만한 옷을 사 온 클레어가 1층 화장실 앞에 옷을 놔두고는 거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앞발을 핥고 있던 몰리에게 물었다.
“몰리. 이동마법 말이야. 어떻게 작동하는 거야?”
몰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말했던 대로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목적지를 말하면 돼. 그럼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집이 이동할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거실과 이어진 주방에서 따뜻한 차를 끓이며(차 마시겠지?) 클레어가 말했다.
“나는 마녀의 숲에는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거든. 근데 마녀의 숲으로 집이 이동했어.”
“그건 키워드 때문이야.”
“키워드?”
“클레어가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마녀’라고 말하면 마녀의 숲으로 이동하도록 설정되어 있거든.”
그에 클레어가 기억을 더듬었다.
아하. 그래서 처음에도, 이번에도 이동하게 된 거였구나.
“마가렛 씨도 이렇게 사용한 거야?”
“마가렛은 생각만 해도 이동하게 할 수 있어. 키워드는 클레어를 위해서 설정한 거야.”
“나?”
“응. 너한테 마녀라는 걸 알려주면서 믿지 않으면 마녀의 숲을 보여줄 생각이었거든.”
짜잔! 집이 이동했습니다!
하고.
“근데 저 똥개가 먼저 너한테 마녀라고 알려줘 버리는 바람에, 집이 마녀의 숲으로 이동해 버려서 엄청 놀랐어.”
몰리가 투덜댔다.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마녀의 숲까지 어떻게 가야 하나 싶었다니까. 엄청 먼 곳인데 말이야!”
아까의 상황이 다시 떠오른 몰리는 꼬리로 소파를 팡팡 내려치다 아, 하고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온 거야, 클레어? 이동하는 방법 몰랐을 텐데?”
“……하하하.”
클레어는 웃으며 몰리의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것보다 다른 곳에도 집이 있는 거야?”
“응. 세계 곳곳에 있지!”
세계 곳곳에 집이 있다니.
엄청난 것을 물려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든 클레어였다.
“그럼 그 집들에도 키워드가 설정되어 있어?”
단어 하나 잘못 말했다가는 다른 곳으로 휙- 하고 이동하는 건가?
“아니. 마녀의 숲만 그래. 다른 장소에 가고 싶으면 좀 있다가 주소록 보여줄게. 키워드를 설정하고 싶으면 주소록에 써넣으면 돼.”
“그렇구나.”
현관문을 열 때마다 말조심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그때, 안쪽에서 남자가 나타났다.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인 모양인지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고, 축축하게 젖어 있던 머리카락도 여전히 거칠어 보였지만 바짝 말라 있었다. 옷도 냄새나고 지저분한 것에서 클레어가 사 온 깔끔한 새것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조금이지만 생기 있어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 클레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할까?”
“그래.”
먼저 소파에 앉아 있던 몰리는 남자가 앉을 곳을 찾자, ‘여긴 내 자리. 이 소파는 내 거. 똥개는 못 앉아.’를 시전했다. 남자가 앉으려고 할 때마다 몰리가 얼른 달려가 그 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그때마다 남자가 멈칫했다.
“몰리.”
“히잉.”
클레어의 부름에, 몰리는 귀를 축 늘어뜨리고는 클레어의 옆으로 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았다. 물론, 그사이에도 늑대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겨우 소파에 앉게 된 남자의 앞에, 클레어는 머그컵을 놓아주고 자신의 컵을 손에 들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머그컵을 들어 올렸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강하지 않은 부드러운 허브의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지 않은 허브차였다.
“못 마실 것 같으면 말해. 우유도 있고, 커피도 있으니까. 물도 있어.”
“아니야. 이거면 충분해. 고마워, 마녀.”
얌전하게 말하는 남자는, 아까 몰리랑 왁왁대며 싸우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조금 전 몰리가 심술을 부려도 조용히 있었고.
‘고맙다는 말도 계속하고…… 기가 죽은 건가?’
허브차를 마시며 남자를 살펴보던 클레어는 먼저 아까 하지 못했던 통성명을 하기로 했다.
“나는 클레어 매닝이라고 해.”
계속 마녀라고 불리는 건 싫달까.
자신이 마녀인 건 알겠지만, 아직 현실감이 들진 않았다.
“난…… 테오.”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던 남자, 늑대인간이 말했다.
“테오라고 불러줘.”
테오.
클레어가 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릴 때, 클레어의 옆자리에 누워 있던 몰리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패밀리 네임은? 왜 패밀리 네임을 말하지 않는 거야, 똥개?”
테오를 바라보는 몰리의 노란 눈동자가 매서웠다.
“몰리? 왜 그래”
“늑대인간들은 무리를 중요하게 생각해, 클레어. 자기 이름을 말할 때도 자신이 어떤 무리인지 숨기지 않아. 숨기는 녀석이 있다면,”
몰리가 클레어를 보호하듯 섰다.
“굉장히 수상한 녀석이라는 거지.”
갸르릉거리며 털을 바짝 세우는 마녀의 패밀리어, 몰리의 반응에 집 안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마법의 ㅁ도 모르는 클레어도 그걸 알 수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테오의 숨통을 조일 듯 모여들었다.
이게 마법.
마녀의 힘이었다.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에 당황한 테오가 목소리를 높였다.
“레이필드! 레이필드야!”
처음 느끼지만 아늑하고 편안하고 조금 황홀하기까지 한 기운이 밀려들자, 반쯤 넋 놓고 있던 클레어가 그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테이블 위로 올라간 몰리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듯 노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테오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테오 레이필드가 더듬더듬 말했다.
“내가 일찍 무리에서 독립해서, 아직 패밀리 네임을 정하지 않아서 그랬어. 전에 있던 무리의 패밀리 네임은 레이필드야!”
몰리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수상한데…….”
하지만 테오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집 안을 가득 채웠던 마법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바짝 섰던 몰리의 털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실팔찌가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일단 두고 보겠어.”
그렇게 말하며 테오를 노려본 몰리가 깡총깡총 달려와 클레어의 옆에 앉았다.
멋지다.
내 고양이.
어느새 말하는 이상한 고양이에서 내 고양이가 되어버린 몰리를 열심히 쓰다듬어주는 클레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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