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37화
다음 날.
>그레이스: 오늘 첫 촬영이지?
<응. 지금 가는 길이야.
[뉴 이클립스]의 첫 촬영을 위해 이동하는 차의 뒷좌석.
등받이에 등을 기댄 서준은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레이스와 원작자 로라 웰튼은 서준의 생일이 지나고 며칠 후, LA를 떠나 뉴욕으로 돌아갔다. 세트장이나 촬영지, 배우 등 확인할 것은 다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살펴보는 건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아.’
뉴욕으로 떠나기 전, 서준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중 그렇게 말한 로라 웰튼의 얼굴은 아주 시원해 보였다.
‘역시 윌마 감독님! 감독님만 믿으면 돼!’
그리고 윌마 감독에 대한 깊은 믿음이 생긴 것 같았다.
‘물론, 준하고 배우들도 믿고 있어!’
초롱초롱 눈을 빛내던 로라 웰튼을 떠올린 서준이 작게 웃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최태우가 백미러로 그런 서준의 모습을 흘깃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LA에서의 운전도 아주 익숙해진 매니저 최태우였다.
>그레이스: 전에 보내준 사진들 고마워!
>그레이스: 언니가 엄청 좋아하더라!
제작사 뉴 에이지에서도 원작자 로라 웰튼에게 보고했겠지만.
늑대와 울프독을 만난 사진, 늑대 귀 머리띠를 쓰고 있는 사진(동영상도), 고양이들과 만난 사진, 그리고 종종 훈련하는 사진을 보냈었다.
사진을 본다면 그레이스와 로라 웰튼이 더더욱 안심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종종 보낼게.
>그레이스: 괜찮아!
>그레이스: 지금까지 보내준 것만 해도 충분해!!
>그레이스: 촬영하느라 바쁠 거 아니야.
<쉬는 시간에 보내면 돼ㅎㅎ
>그레이스: 주운ㅠㅠㅠ
그레이스의 메시지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무리의 멘탈 케어도 대장의 임무였다.
>찰리: 이걸 준이 찍는구나.
>찰리: 내가 다 떨리네.
>그레이스: 그러니까!
>그레이스: 소설 나왔을 때 준이 찍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레이스: 망클립스 나오고 아주 끝난 줄 알았는데!!
서준도, 그레이스도, 찰리도.
어렸을 적 핼러윈에서의 만남을, 그리고 그 만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 [이클립스]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화된다는 소식에 기뻐했지만, 결과물이라고 나온 [망클립스]에 아주 실망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실망을 지우고,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 때가 되었다.
>그레이스: 배우님만 믿겠습니다!
>찰리: 믿겠습니다!
<예. 맡겨주십쇼!
어른이 된 두 늑대인간과 마녀가 키득키득 웃었다.
* * *
“엑스트라는 다 도착했어?”
“조명팀에서 전기선 몇 개 더 연결해달라고 합니다!”
촬영장은 이제 곧 시작될 촬영을 준비하느라 시끌벅적했다.
마음에 든다.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최태우와 함께 대기실로 향하던 서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촬영 중일 때의 조용함도 좋아하지만, 촬영 준비로 떠들썩한 풍경도 무척 좋아했다.
“크로마키 하나 찢어졌답니다!”
“뭐어!?”
이건 좀 큰일이다 싶었지만.
아직 촬영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 유능한 할리우드 스태프들이 알아서 잘 해결할 것 같아서 딱히 걱정되지는 않았다.
“준! 일찍 왔네요!”
서준의 도착 소식을 들은 윌마 감독이 웃으며 서준을 반겼다.
“첫 촬영이잖아요. 조금 들떠서 일찍 와버렸어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촬영장을 안내…….”
“감독니임!!”
그때, 윌마 감독을 애타는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얼른 가 보세요. 감독님.”
“빨리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준! 둘러보고 있으세요!”
그렇게 말한 윌마 감독은 얼른 자신을 부른 곳으로 향했다.
어느새 조감독과 스태프들이 따라붙어 윌마 감독에게 이것저것 의견을 물어댔다. 윌마 감독은 차근차근 하나씩, 그러나 빠른 속도로 지시를 내렸다.
“윌마 감독님. 엉뚱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모습은 또 베테랑 같으시네.”
“그러게요.”
물론, 그 엉뚱한 모습들도 배우와 촬영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라, 작품에 진심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럼 가 볼까?”
“네.”
서준과 최태우는 먼저 대기실에 들러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뉴 이클립스]의 첫 촬영은 야외촬영이었는데, 어느 도시의 길거리를 떼어낸 듯한 세트장이 보였다. 물론 이곳저곳에 설치된 초록색 크로마키들도.
“아까 찢어졌다고 했던 곳, 새로 설치하나 봐요.”
“그러네.”
잠시 둘러보고 있으니, 윌마 감독과 함께 헤일리 로지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헤일리. 일찍 왔네요?”
“첫 촬영이라 떨려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준, 너는?”
“저도요.”
아하하 웃는 주연배우들에 윌마 감독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같이 구경을……!”
“감독님!”
“……저는 다시 가 봐야겠습니다.”
시무룩해하며 자신을 부른 스태프에게로 향하는 윌마 감독의 모습에 서준과 헤일리 로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첫 촬영이다 보니, 모두들 기합이 잔뜩 들어간 것 같아요.”
“그러게. 아까 들어올 때부터 시끌벅적하더라.”
서준과 헤일리 로지는 웃으며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배우들뿐만이 아니라 스태프들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의 촬영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우리도 준비하러 갈까?”
“네. 그래요.”
시간을 확인한 헤일리 로지의 말에 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분장까지 끝낸 주연배우, 서준과 헤일리 로지가 촬영장에 나타나며, 본격적으로 촬영 준비가 시작되었다.
엑스트라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대기하며 동선을 재차 확인하고, 헤일리 로지는 두 손 가득 소품을 들고 자신의 위치에 섰다.
서준도 마지막으로 의상을 체크한 후,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촬영은 언제나, 어떤 장면이든 서준을 설레게 만들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감독의 외침에 촬영장이 조용해졌다.
윌마 에반스 감독은 신중하게 모니터와 촬영장을 번갈아 보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레디,”
그 목소리에 맞춰, 서준은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액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미국의 어느 작은 도시.
대도시는 아니지만,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곳에 막 대형마켓에서 무언가를 잔뜩 사 들고 나온 여자가 있었다.
머리카락을 한 가닥도 나오지 않게 질끈 묶고,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옷도 알록달록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두침침한, 그리고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있는 여자였다.
차들이 지나가는 차도 옆, 인도를 걸어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여자를 바라보았다.
양팔에 끼워진 물건이 가득 든 비닐봉지들과 눈 바로 아래까지 쌓인 네모난 상자들. 제대로 들고 갈까, 싶을 정도로 짐이 많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지나가겠습니다.”
여자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저, 좀 도와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누군가 친절하게 물었지만, 여자, 클레어는 거절했다. 혼자서도 충분히 들고 갈 수 있었다.
……도둑일지도 모르고.
‘밖에선 항상 조심해야 한다. 클레어!’
보육원 원장선생님의 말을 다시금 깊게 새기며, 클레어는 읏차! 하고 짐을 고쳐 들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차가 달리는 차도에 실수로 발을 딛지 않게, 인도를 걷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그리고 처음 오는 도시인 만큼 길을 잃지 않게 조심하면서.
어두침침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클레어의 표정은 그 누구보다도 밝았다.
너무 많이 샀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몸을 힘들게 하는 이 짐들의 무게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무겁게. 클레어는 행복했다.
이게 다 자신의 것이었다.
자신만의 것이었다.
세상에!
다시 생각해도 하늘을 날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힘들어도 자신이 직접 들고 가고 싶었다.
이 많은 짐의 원인은 바로 아닌 클레어 본인이었는데, 보육원을 퇴소한 후, 지낼 집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모아온 돈으로 이것저것 사버린 것이었다.
왜 집을 구할 돈을 썼냐고 물어본다면.
‘내 집이 있으니까!’
집이 생겼다.
클레어, 자신의 집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행운을 다시금 떠올린 클레어는 정말이지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워서,
“으악!”
미처 앞을 보지 못했다.
단단한 무언가와 부딪힌 클레어가 그대로 비틀거렸다.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들고 있던 짐이 와르르 떨어졌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인도 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창피하게 벽에 부딪혀 버리다니…….
얼른 쭈그려 앉은 클레어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듯 아래로 내려, 인도 위로 쏟아진 물건들을 열심히 주웠다.
다행히 비닐봉지는 찢어지지 않았고, 상자도 끝만 조금 구겨졌다. 흙먼지가 묻어 지저분하긴 했지만, 어차피 포장이 되어 있으니 안의 물건만 상하지 않으면 괜찮았다.
그때, 클레어의 시야로 낯선 손이 보였다. 클레어가 산 물건을 집는 낯선 손이.
도둑인가!
하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데, 후드를 쓴 남자가 물건을 주워 클레어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에 클레어의 얼굴이 다시금 붉게 변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제대로 안 보고 걸었으니까.”
나랑 부딪힌 게 이 남자였어?!
꽤 강하게 부딪혔는데, 자신의 비명 소리만 들리길래 벽이랑 부딪힌 줄 알았다.
클레어는 남은 물건을 주우며, 자신을 도와 물건을 줍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후드를 깊게 쓴 남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흙과 먼지가 묻고, 낡고 더러워진 옷차림만이 클레어의 눈에 들어왔다.
‘……노숙자인가?’
이 도시에도 노숙자가 있구나. 친절한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며 클레어는 마지막으로 놓친 물건은 없는지 살펴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도 클레어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친절한 남자에 클레어가 감사 인사를 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보답하고 싶었다.
남자가 답을 할까 싶어, 잠시 기다리던 클레어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드에 가려져서 제대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너…….”
입을 뗀 남자가 클레어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어쩐지 후드 아래로, 그나마 보이는 남자의 코가 움찔움찔대는 것 같았다.
“네, 네?”
어어?
마치 냄새를 맡는 듯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에, 클레어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런 클레어를 보며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마녀군.”
상상도 못 한 남자의 말에, 클레어는 입을 쩌억 벌렸다.
그리고 외쳤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고.
그리고는 무거운 짐을 번쩍 들고 집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세상에. 마녀라니……!
아무래도 남자에 대한 생각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친절한 노숙자에서 미친 노숙자로 말이다.
다시는 만나질 않길 바라면서, 클레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런 클레어의 모습을, 후드를 쓴 남자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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