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36화
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서준이 부드럽게 웃고는 케이지에서 조금 떨어졌다.
‘강아지와 고양이 둘 다 좋아하지만 꼭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고양이!’라고 말했던 헤일리 로지도 상기된 얼굴로 서준처럼 움직였다.
두 사람 모두 고양이가 예민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열어주시죠.”
회의실 문이 꼭 닫힌 것을 확인한 윌마 감독의 말에 세 보호자가 케이지들을 열었다.
달칵.
하고 케이지의 자물쇠가 열리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안 그래도 조용하던 회의실이 더욱 조용해졌다.
낯선 환경, 낯선 공간, 낯선 존재들.
대부분의 고양이라면 케이지에서 나오지 않거나, 나오더라도 금방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말 터였다. 윌마 감독도 그래서 회의실 문을 확인한 것이리라.
‘나오려면 시간 좀 걸리려나?’
라고 서준이 생각한 지 1초도 지나지 않아, 검은색 솜방망이가 케이지 밖으로 삐죽 나타났다.
검은 고양이 잭이었다.
잭의 오른쪽 앞발이 케이지 밖으로 나오고 곧이어 왼쪽 앞발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서준의 주먹보다 작은 머리와 유연한 몸통, 물결처럼 움직이는 꼬리가 뒤따라 나왔다.
오…….
그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거침없는 행동에, 서준이 나지막한 감탄을 흘렸다.
케이지 밖으로 나온 고양이 잭은 잠시 노란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저 눈앞에 있는 서준을 보고, 그 옆에 있는 헤일리 로지를 보고, 고개를 돌려 윌마 감독과 세 보호자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자신의 집사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강아지라면 자신의 주인을 보자마자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흔들며 다가갈 텐데, 고양이라서 그런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주인을 눈으로만 흘깃 보고는 두 앞발을 쭈욱 뻗어 기지개를 켰다. 검은 꼬리가 물결처럼 일렁였다.
“아……”
손을 흔들던 보호자가 ‘그럼 그렇지. 내가 뭘 바란 거야.’ 하고 해탈한 듯 웃었다. 익숙한 무관심인 듯했다.
그런 보호자와 반려묘의 모습에 서준과 사람들이 숨죽여 웃었다.
보호자에게도 가지 않고 케이지 바로 앞에 앉아 앞발을 혀로 그루밍하는 잭의 뒤를 이어, 릴리와 벨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 마리 정말 똑같네.”
“그러게요. 이름표를 떼면 헷갈리겠어요.”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털, 반짝이는 노란색 눈동자.
같은 틀에서 뿅! 하고 만들어낸 것인지, 세 마리 검은 고양이는 귀 끝부터 꼬리 끝까지 똑 닮아 있었다.
“성격도 비슷한가?”
“그런 것 같은데요?”
앞서 잭이 그랬던 것처럼, 릴리와 벨라도 낯선 곳인데도 불구하고 얼어붙지 않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서준과 헤일리 로지를 지나 윌마 감독을 바라보고, 자신의 주인을 발견했다.
“아, 아닌가 봐요.”
서준이 작게 웃으며 고쳐 말했다.
잭과 다르게, 릴리와 벨라는 주인들을 발견하더니 곧바로 그쪽으로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활짝 웃으며 릴리와 벨라를 안아 드는 두 보호자와,
“재액…….”
하고 부르는 잭의 보호자가 보였다.
그리고 보호자의 눈물 섞인 부름에도 1도 신경 쓰지 않고 느긋하게 그루밍하고 있는 잭의 모습까지.
서준과 사람들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 마리 모두 낯선 장소에서도 편안해 보이네요.”
서준의 말에 윌마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낯선 촬영장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만한 고양이들로 섭외했습니다. 스태프들도 많을 테니, 사람들도 좋아하는 녀석들로요.”
그말 그대로, 어느새 회의실이 익숙해진 릴리와 벨라가 처음 보는 사람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리저리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잭은 좀 아니, 많이 무덤덤한 편이지만요. 오디션 때도 이랬죠.”
고양이 잭은 뭐, 여기가 집인가, 싶을 정도로 편안한 모습으로 테이블 위에서 식빵을 굽고 있었다.
“촬영은 잘할까요?”
어쩐지 촬영 중에도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것만 같은 녀석이었다.
헤일리 로지의 물음에 윌마 감독이 웃었다.
“괜찮습니다. 이래 보여도 잭이 여기서 가장 베테랑 고양이 배우입니다. 광고도 몇 개 찍었고요. TV쇼에도 짧게 나왔습니다.”
“그래요?”
크게 하품까지 하는 고양이 잭을 바라보는 서준과 헤일리 로지의 눈이 커졌다. 그에 슬퍼하고 있던 보호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넵, 그렇습니다. 잭은 똑똑한 고양이죠. 제 말도 다 알아듣지만,”
알아듣지만?
서준과 헤일리 로지가 눈을 끔벅이자, 잭의 보호자가 해탈한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냥 무시하는 거예요. 촬영 때는 잘해요. 간식 주면.”
하하하.
회의실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벨라도 간식 좋아합니다.”
“릴리도요. 아, 낚시 장난감도 좋아해요.”
보호자들의 가방에서 고양이 장난감들이 튀어나왔다. 바스락거리며 하늘하늘거리는 미끼에 릴리와 벨라가 눈을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동물과 촬영할 때는 동물의 성격도 중요하지만, 좋아하는 것이 있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왜죠?”
윌마 감독의 말에, 동물과의 촬영이 처음인 서준이 물었다.
“그래야 동물을 의도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거든요. 간식을 좋아하는 고양이는 간식으로 유혹해 동선대로 움직이게 하고, 장난감을 좋아하는 고양이는 이렇게,”
윌마 감독이 들고 있던 장난감을 휘둘렀다.
그에 검은고양이들이 먕! 하고 마치 흑표범처럼 하늘을 날아올랐다.
“와아!”
헤일리 로지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양이들을 바라보았다.
“움직이게 하죠.”
“그렇군요.”
윌마 감독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잭도 움직입니다!”
먕먕! 거리며 잔상이 보일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릴리와 벨라와 달리 이제는 잠까지 자는 것 같은 잭의 모습에, 어쩐지 초조해진 보호자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잭이 번뜩 눈을 떴다. 그러고는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아 보호자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서준이 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고양이 보호자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이른바, ‘고양이 캔따개’가 바로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참치 트릿인데, 잭에게 한번 줘보시겠어요? 참치를 동결건조한 간식입니다.”
보호자에게서 서준에게로 넘어가는 간식을 빠안히 바라보고 있는 잭의 눈빛이 아주 따가웠다. 손이 뚫릴 것만 같았다.
“잭이 간식을 정말 좋아하나 봐요.”
“네. 먹는 걸 워낙 좋아해서 조절하지 않으면 살이 찌거든요. 그러면 아무래도 건강에 안 좋으니까, 아주 가끔 주고 있어서 더욱 간식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아주 침까지 흘릴 것 같은 잭의 모습에 서준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간식을 들고 무릎을 치면 잭이 무릎 위로 올라갈 거예요.”
“한번 해볼게요.”
서준이 눈을 빛내며 보호자의 말대로 잭에게 손톱보다도 작은 참치 트릿을 보여주며 툭툭, 허벅지를 쳤다.
그에 거의 사흘을 굶은 눈빛(보호자는 억울하다.)으로 바라보던 잭이 마치 맹수처럼, 테이블 위에서 서준의 허벅지 위로 날아갔다.
타닥- 하고 단단한 허벅지 위에 부드러운 고양이젤리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오…….”
가볍고 완벽한 착지였다.
서준의 허벅지 위에 반듯한 자세로 앉은 고양이 잭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잘했지? 나 간식 줘.’ 그런 눈빛이었다.
그에 서준이 작게 웃으며 잭에게 참치 트릿을 주었다.
먕! 하고 처음으로 운 잭이 빠르게 참치 트릿을 입에 넣고 아주 열심히 씹었다. 맛있는 모양이었다.
쨥.
작은 참치 트릿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보호자가 또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잭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후, 다시 테이블 위로 올라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테이블 위로 향하기 위해 자세를 잡던 잭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앞발로 꾹꾹 서준의 허벅지를 누르는 게 아닌가.
“응?”
잭이 테이블에 올라가길 기다리던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꾹- 꾹-
잭은 마치 쿠션의 폭신함을 측정하듯, 서준의 무릎 위를 빙글빙글 돌며 꾹꾹 눌러댔다. 그러고는 마음에 들었는지, 그대로 서준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아 식빵을 굽기 시작했다.
그르릉, 하고 고양이가 기분이 좋을 때 내는 골골송도 들려왔다.
그 모습에 보호자가 감탄하며 말했다.
“신기하네요. 처음 본 사람한테 이렇게 다가가지 않는데…… 리가 엄청 좋은가 봐요.”
오.
보호자의 설명에 서준이 웃으며 조심스럽게 고양이 잭의 등을 쓰다듬었다. 서준도 친구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 검은고양이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
하고 헤일리 로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준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헤일리 로지와 장난감으로 신나게 놀고 있던 두 고양이가 어느새 서준의 근처에 와 있었다.
아마도 서준과 잭의 모습에 호기심을 가진 모양이었다.
미야옹!
서준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던 릴리와 벨라가 가볍게 위로 점프해 서준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그대로 자리를 잡았다. 먼저 있던 잭이 납작쿵이 되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어어? 하는 사이, 서준은 고양이들의 인간 방석이 되었다.
아니,
납작쿵이 된 잭이 잽싸게 두 고양이의 틈에서 빠져나와 서준의 어깨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으니, 인간 캣타워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순식간에 인간 캣타워가 된 서준이 눈을 깜빡이다가, 자신의 얼굴을 치는 고양이 잭의 꼬리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도……!”
헤일리 로지는 부러운 듯 서준을 바라보았고, 보호자들은 고양이들에게 둘러싸인 서준 리를 보며 아찔한 탄성을 터뜨렸다.
배우와 어떤 고양이가 함께 연기하는 게 케미가 좋을까, 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관찰하던 윌마 감독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스노우화이트.
촬영은 걱정 없을 것 같았다.
* * *
그렇게 고양이 배우들과의 대면식도 만족스럽게 끝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촬영을 하루 앞둔 4월 3일.
“……이건 뭐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댄 켄드릭은 오늘이 만우절(April Fool's Day)인가 싶어 눈을 끔벅였다.
동그란 돼지 인형이 놓인 테이블에 과일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윌마 에반스 감독이 또 희한한 것을 가지고 온 듯했다.
“고사입니다!”
“고사!”
브라이언 구델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설명을 바라는 댄 켄드릭과 헤일리 로지, 다른 배우들의 시선에 서준의 팬인 브라이언 구델이 신나게 떠들어댔다.
“영화 촬영이 잘 되고, 배우들이나 스턴트맨들한테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건데, 준이 촬영하는 영화는 꼭 고사를 지낸대요!”
“꼭은 아니고.”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쉐앤나]는 했지만, [오버 더 레인보우2]는 고사를 지내지 않았다.
‘음. 액션 씬이 안 들어가서 그런가.’
데굴 눈을 굴린 서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감독님이 원하시면 하는 거죠. 그리고 미신이라서요.”
“미신이라고 해도 효과는 좋은 것 같아. 고사 지낸 영화 촬영에서는 스턴트맨들이나 배우들이 크게 다치지 않거든. 작품도 흥행했고.”
고사를 지낸 영화라고 해봤자, 서준이 출연한 영화나 한국계 배우와 감독이 연출한 [민들레]같은 영화가 다였지만. 서준이 출연한 영화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민들레] 또한 오스카상을 받을 정도로 흥행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댄 켄드릭의 스턴트맨이 덧붙이자, 배우들이 눈을 반짝였다. 스포츠계와 더불어 영화계 또한 미신이나 징크스를 신경 쓰는 동네였다.
“다치는 것보다는 낫지!”
“영화도 흥행한다고 하고!”
[망클립스]와 [뉴 이클립스]가 다르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는 배우들이었지만, 역시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하는 거야, 준?”
의욕이 가득한 배우들에, 서준이 웃으며 고사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잠시 후.
“흥행! 흥행! 흥행!”
“제발 부탁드립니다!”
“본전만이라도!!”
서준은 돼지인형에 대고 간절히 기도하고 절하는 배우들과 윌마 감독, 뉴 에이지 직원들을 볼 수 있었다.
‘음.’
[(선)오크 제사장의 기도-중급이 발동됩니다.]
효과는 확실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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