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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825화 (825/1,055)

0살부터 슈퍼스타 825화

잠시 당황하던 댄 켄드릭이 정신을 차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준과 함께 연습하는 날이 언제지?’

매니저가 보여준 스케줄 표가 머릿속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모레.

서준과 함께하는 훈련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도 이번처럼 함께 연기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날 예정된 액션 장면의 동선과 동작을 배워야 하니까.’

쉬운 동작이라서 일찍 몸에 익힌다면 오늘처럼 시간이 남겠지만, 어려운 동작이라서 배우는 게 늦는다면 이렇게 연기에 몰입할 시간도 없을 터였다.

‘게다가 앞으로는 다른 배우들과 함께하는 장면이 많아.’

영화 스토리상, 오늘처럼 서준과 댄 켄드릭 둘만 연습하는 때는 드물었다.

물론 다른 배우들이 함께 연기할 때도 지금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의 실수 때문에, 몰입이 와장창 깨질 수도 있었다.

댄 켄드릭의 고민이 깊어졌다. 끝내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어쩌면 촬영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촬영이라니…….’

아직 한 달 넘게 남았다.

댄 켄드릭이 초조한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준. 다음 일정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

미안하지만.

오늘 약속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이미 잡힌 다섯 물고기, 아니, 배우들과 같은 말을 꺼내는 댄 켄드릭에, 무술 감독과 트레이너는 웃음을 삼키며 소리가 나지 않게 짝짝 박수를 쳤다. 몇 번을 봐도 감탄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이제 준이 말할 거다.

“다음 일정이요? 조금 부족한 것 같아서 개인 훈련을 하려고 했어요.”

라고.

그러면 댄 켄드릭이 묻겠지.

“개인 훈련?”

“네. 뉴 에이지에서 옆 훈련장도 빌렸거든요.”

그럼 댄 켄드릭은 기억을 더듬다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반색할 터였다.

그럼 준이 웃으며 덧붙이겠지.

“괜찮으면 댄도 같이 연습하실래요?”

“그래도 될까?”

“당연하죠.”

언제나 그렇듯, 월척이었다.

* * *

“Welcome까지만 할까?”

“그래. hell까지 붙이면 그대로 도망갈지도 몰라.”

“으흐흐. 도망가면 안 되지.”

B2 훈련장.

플래카드까지는 아니지만, 휴대폰 전광판 앱으로 ‘WELCOME!!’ 하고 새로운 어린 양을 맞이하려는 다섯 물고기, 아니, 배우들의 모습에 트레이너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댄 켄드릭 배우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트레이너 중 하나가 물었다.

그에 다섯 배우가 동시에 픽- 하고 웃었다. 자신들이 서준에게 낚였던(?) 당시를 떠올린 것이었다. 아마 댄 켄드릭도 지금쯤 같은 경험을 겪고 있을 거다.

“배우라면 올 수밖에 없어요.”

유난히 ‘배우’라는 단어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브라이언 구델의 말에, 다른 배우들도 동의하듯 얼른 말을 덧붙였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랄까.”

“그런데 먹어도 되나 싶어서 한 모금만 마셨다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물을 마시려는데 신기루처럼 사라진 기분이죠.”

“엄청 배고픈데 애피타이저만 먹은 느낌.”

“그것도 엄청나게 맛있는.”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서준 리의 연기는 총천연색의 물감처럼 흑백이던 배우들의 세계를 순식간에 물들였다. 마법처럼 ‘세계’가, ‘내’가 변하는 그 짜릿함.

“준과 연기하면 연기하는 게 이렇게 재미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말이지.”

서준에게 홀랑 홀려 버린 배우들에, 트레이너들이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너들도 서준이 연기하며 훈련하는 것을 보면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은 어떻겠나.

서준에게 낚인 것도 웃어넘기며 시간이 날 때마다 B2 훈련장에 오는 배우들을 보면, 서준의 연기가 준 여파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그리고 이제 여기에, 또 한 명의 배우가 합류할 터였다.

“와요!”

문 앞에서 입구를 보고 있던 브라이언 구델이 낮게 외쳤다.

“댄 켄드릭은?”

“준이랑 같이 오고 있어요!”

역시.

성공률 100%.

“……준 말이야. 다른 일 했으면 큰일 났을 것 같지 않아?”

사기라든가. 사이비라든가.

속닥거리는 트레이너들을 뒤로하고, 배우들은 새로운 동료를 맞이하기 위해 문 앞에서 대기했다.

그리고.

“WELCOME!”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기대에 부푼 얼굴로 서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온 댄 켄드릭은 먼저 잡혀온 배우들을 보며 눈을 끔벅여야 했다.

* * *

“……그래서 이렇게 됐군요.”

며칠 후.

무술 감독의 설명에, 뉴 에이지 담당자가 벙긋거리다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한 명도 안 쓸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넓은 B2 훈련장은 텅 비어 있기는커녕, 훈련하는 배우들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훈련 중인 배우들은 두 손으로 꼽을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준 덕분이죠.”

흐뭇하게 웃으며 말한 무술 감독이 아, 하고 말을 이었다.

“다들 열심히 해준 덕분에 액션 난이도를 더 높여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윌마 감독님.”

그 말에, 입을 쩍 벌리고 훈련하는 배우들을 보고 있던 윌마 에반스 감독이 눈을 번뜩였다.

“좋죠! 배우들만 괜찮다면요!”

로맨스도 로맨스지만, 전투 장면 또한 빼놓을 수 없었다.

더 화려해지고 거세지고 격렬해진다면 당연히 승낙할 수밖에!

그렇게 무술 감독과 윌마 감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너무 좋아…….”

원작자 로라 웰튼은 거의 울먹이며 훈련하는 배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뉴 이클립스]를 위해 이렇게 노력해 주다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 아니, 이미 서준이 휴지를 건네줄 정도로 울고 있었다.

“와! 이거 연습 맞아?”

그레이스 웰튼도 감탄했다.

[망클립스]의 액션 장면보다도 더 멋졌다.

그건 편집에 후보정까지 끝난 영상이었고, 이건 의상도, 분장도 하지 않은 연습인데도 말이다.

담당자와 윌마 감독, 웰튼 자매의 감탄에 서준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다 자신이 잡은 물고기, 아니, 모은 배우들이었다.

그때.

사람만 한 크기의 매트를, 한 배우(댄 켄드릭이다)가 후려쳤다. 퍼억!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났다. 매트를 들고 있던 트레이너가 두어 걸음 물러설 정도로 충격이 컸다.

“저 트레이너가 내 역할이야.”

“준이 맞는 장면이구나. 으, 아프겠다. 완전 진심으로 찬 것 같은데?”

“뭐…….”

서준이 데굴 눈을 굴렸다.

정말 진심이 들어갔으니까?

아마 지금 마음속으로는 ‘서준 리……!’ 하고 이를 갈고 있지 않을까.

서준이 작게 웃었다.

정말 싫다면 안 나오면 될 텐데 말이다.

“그럼 나도 이제 연습하러 갈게.”

“그래.”

잠시 웰튼 자매와 이야기하기 위해 쉬었던 서준은 다시 훈련을 시작하기 위해 트레이너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방향을 바꿔 댄 켄드릭 쪽으로 향했다.

“댄. 감독님도 오셨으니까 진짜 촬영처럼 연기하면서 해보면 어떨까요? 다른 분들도 함께요.”

“……좋아…….”

조금 전까지 매트를 서준이라고 생각하며 후려쳤던 댄 켄드릭이 한숨처럼 말했다.

‘……이렇게 간간이 당근을 주는데, 안 올 수가 있나.’

힘들지만 좋고, 좋지만 힘들다.

참 복잡한 심경이었다.

다른 배우들도 댄 켄드릭과 같은 생각인 듯 비슷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얼른 자신이 서야 하는 자리로 향했다. 그런 배우들의 발걸음에 설렘과 기대가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서준의 연기력 아래, B2 훈련장은 격렬한 싸움터로 변했다.

* * *

점심시간.

트레이닝 센터 내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무술 감독과 담당자, 윌마 감독은 회의하러 갔다), 그레이스의 감탄이 끊이질 않았다.

“진짜 대단하더라! 진짜 싸우는 것 같았어! 엄청 살벌하기도 했고! 구르기도 엄청 구르고 맞기도 엄청 맞았잖아. 진짜 맞은 건 아니지?”

“괜찮아. 다 동선대로 움직이는 거니까.”

“와…… 아니, 어떻게 아직 열흘도 안 됐는데 벌써 그렇게 합이 잘 맞아? 언니. 언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레이스가 옆에 앉은 원작자 로라 웰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서준과 배우들의 연습을 볼 때 빠져나갔던 로라 웰튼의 영혼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네. 정말 좋았나 봐.”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그레이스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네.”

천국에서 아기천사들과 놀고 있는 원작자 로라 웰튼은 뒤로하고, 서준과 그레이스는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데 격투가처럼 몸으로 싸우는 장면이 많네? 망클립스는 뭔가 초능력인가 마법 같은 걸 사용해서 싸우던데. CG도 많았고.”

“늑대인간이니까.”

그레이스의 의문에 서준이 대답해 주었다.

“뱀파이어나 마법사, 마녀였으면 그랬을 거야. 직접 몸으로 부딪히기보다는 CG를 넣어서 화려하게 싸우는 것처럼 보이게 했겠지. 뉴 이클립스에서도 마녀인 여주인공이 그렇게 싸울 예정이고.”

하지만 늑대인간은 다르다.

“늑대인간 하면 보편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하는 인간’이나 ‘힘이나 스피드가 인간보다 강하다’ 같은. 물론, 작가마다 소설마다 설정이 다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늑대’를 바탕으로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서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늑대들은 치고받고 싸우지, 마법이나 초능력을 쓰진 않거든.”

“아하.”

그레이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망클립스는 왜 그랬지?”

그레이스는 CG로 범벅되어 있던 [망클립스]의 전투씬들을 떠올려 보았다. 반사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쩐지…….

캐릭터나 스토리는 둘째 치고. 전투 장면에서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늑대인간들을 데리고 마법 전투씬을 찍어버려서 그랬나 보다.

서준도 [망클립스]를 떠올렸다.

마법이나 초능력으로 싸우는 늑대인간들이라니.

많은 세계가 있으니 어딘가엔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는 맞지 않았다.

“전투 장면이 화려하기만 하면 흥행할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캐릭터 설정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망할!”

서준의 [망클립스] 이야기에, 정신을 차린 로라 웰튼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에 서준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5년 동안 익숙해진 그레이스는 놀라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언니 깨울 때는 망클립스 이야기를 하면 돼.”

진짜 안 일어날 때 [망클립스] 이야기를 들려주면 벌떡 일어난다고 말하는 그레이스에, [망클립스] 제작진을 향해 이를 갈던 로라 웰튼이 눈을 번뜩이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그레이스의 등을 짜악- 하고 내려쳤다.

“아파!”

“아프라고 때린 거야!”

그 모습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자매가 확실했다.

“그런데 오늘 왜 온 거야?”

서준이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첫날은 트레이닝 센터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로라 웰튼을 따라왔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방해가 되지 않게 트레이닝 센터에 오지 않았던 그레이스 웰튼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다니.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그에 그레이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 내일 생일이잖아.”

오.

새로운 배우들과 즐겁게 트레이닝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일 축하해 주려고 왔지!”

그랬다.

내일은 한국 시간으로 3월 10일.

서준의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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