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20화
“리첼!”
“준!”
와아아!
분명 어제도 만났던 것 같은데,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서로를 보며 반갑게 인사하는 서준과 리첼 힐을 보며 에반 블록은 웃고 말았다.
드레스를 입은 탓에 평소보다 덜 격한 인사(왠지 아쉬워 보였다.)를 나눈 리첼 힐의 시선이 조나단 윌과 커크 로렌스에게로 향했다.
“오. 조나단 멋진데? 로렌스도 잘 어울려요.”
“하하하. 리첼도 아름다워요.”
“감사합니다.”
리첼 힐은 환하게 웃으며 [썸원]의 배우들과 감독을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우리 썸원의 감독님!”
“반갑습니다. 쉐도우앤나이트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서준도 반갑게 웃으며 [썸원]팀과 악수를 나누었다.
몇 번 얼굴을 봤던 배우도 있었고, 처음 만나는 배우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신인배우인 것 같았는데, 서준을 보는 눈동자와 악수를 나누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팬, 팬입니다, 준. 아니, 리!”
“준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영화 정말 재미있었어요. 연기도 정말 잘하시던데요?”
활짝 웃으며 말하는 서준 리에 신인배우는 감격했다.
세상에!
내가 준과 악수를 하다니! 준이 내 연기를 봤다니!
평생 오늘을 잊지 않을 거다.
그렇게 [쉐앤나]팀은 [썸원]팀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있는 친분 있는 배우, 감독들과도 웃으며 악수를 하고 몇 마디를 나눈 후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아까 그 배우, 준의 팬인가 봐.”
“다른 배우들도 준을 볼 때면 눈이 아주 반짝반짝하던데?”
웃으며 말하는 조나단 감독과 에반 블록에, 커크 로렌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을 보는 배우들의 눈빛이 마치 스타의 스타를 보는 듯했다. 어쩐지 자신의 어깨가 다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곧바로 서준과 처음 연기했을 때가 생각나서 민망해졌지만.
‘왜 그랬을까…….’
서준과 데면데면했던 날들을 떠올리면 저절로 마른 수를 하게 되는 커크 로렌스였다.
그런 세 사람의 반응에, 서준은 쑥스러운 듯 웃고 말았다. 아니라고 하기엔, 자리에 앉은 지금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좋은 시선만 있는 건 아니지만…….’
서준의 예민한 감각이 날카로운 시선들을 잡아냈다.
연기를 보고 감탄하는 이들과 세상을 들썩이게 하는 화제성을 보고 접근하는 이들도 있지만, 타국의 동양인 배우라는 이유 때문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벌써 10년이 넘게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는데도.
하지만 서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라도 (그게 한국이어도) 불평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있으니까.
‘피해만 안 주면 말이지.’
자신의 소중한 작품이나 친한 지인들에게 말이다.
친구들이 들으면 ‘저, 저 연기덕후가!’, ‘자신부터 생각해야지!’ 하고 날뛰겠지만.
서준 자신에게 오는 피해는 일전 [오버 더 레인보우2] 촬영 때 있었던 습격 사건처럼 선을 넘는 게 아니라면 너그럽게 넘어가 줄 용의가 있었다.
‘……다호 형이 안 넘어가겠지만.’
어딘가에서 시상식을 보고 있을 안다호를 떠올리며 서준이 웃었다. 왠지 열정이 많은 태우 형도 두 팔 걷어붙일 것 같았다.
아무튼.
현장에서도 느껴지는 분위기 탓에 서준은 딱히 남우주연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까.’
평생 연기를 할 테니, 평생 기회가 있는 거였다.
‘그리고 상 받으려고 촬영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하나도 받지 못했다면 욕심이 났겠지만, 다른 영화제나 WTV시상식, 칸 영화제, 그리고 여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받았던 서준이었다. 다른 배우가 받아도 진심으로 축하해줄 마음이 가득했다.
아니, 오히려.
‘다음에 같이 연기해 봤으면 좋겠다!’
상보다는 배우 쪽에 더 관심이 많은 서준이었다.
남우주연상 후보들의 얼굴이 화면에 비칠 때마다 서준은 진심으로 축하하며 박수를 쳤다. 2차 투표는 1명에게만 투표할 수 있었는데, 서준이 투표한 배우도 거기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준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TV로 보고 있을 새싹들과 가족, 지인들, 그리고 시청자들을 생각하며 서준이 선기를 흘리며 활짝 웃었다. 인사하듯 손도 흔들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영화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영화들을 보며 웃고, 울고, 감격하고, 분노하고, 무서워하고, 위로를 받죠.]
후보들의 소개가 끝나고 수상자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든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모두 귀를 기울였다. 약간의 유머가 섞인 멘트로 사람들의 웃음을 이끌어낸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도 멋진 연기를 보여주시길 바라면서, 발표하겠습니다. The Oscar goes to……!]
과연 누가 남우주연상을 받을까.
시상식장에는 짙은 긴장감이 깔리고, 서준은 박수를 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사회자가 외쳤다.
[서준 리!]
……응?
놀란 남자의 얼굴이 카메라에 담겼다.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일 때마다 살랑이는 속눈썹이 남자, 서준 리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대신 알려주고 있었다.
서준 리보다 먼저 반응한 건, 서준 리에게 투표한 사람들이었다.
와아아아!!
커다란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순식간에 시상식장을 가득 채웠다. 에반 블록과 조나단 윌 감독, 커크 로렌스가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나가야겠는데, 준?”
“으아아아! 준! 축하해.”
“축하한다.”
“무대로 가요, 준!”
“축하합니다! 리!”
아니, 정말 나라고?
내가 출연한 영화…… 슈퍼히어로 영화 아니었어?
얼떨떨해하던 서준도 세 사람과 주변 사람들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기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박수 소리가 더욱 커졌다.
“다들 리에게 투표한 거야? 나만 한 줄 알았는데?”
“감독님도 리에게 투표했어요?”
“어. 연기도 정말 잘했잖아. 다음 영화에서는 리와 함께 작업하고 싶을 정도였어.”
“와. 히어로 영화라서 나만 한 줄 알았는데, 전부 그렇게 생각했나 보네!”
가벼운 웃음이 섞인 대화들이 오갔다.
그랬다.
마치 숨어 듣는 명곡처럼, 이런 시상식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슈퍼히어로 영화라서 자신만 투표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투표한 것이었다.
“투표 안 할 수가 없죠.”
[썸원] 감독의 말에 서준에게 투표한 리첼 힐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눈이 삔 거죠!”
아니면 인종과 장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흥! 하고 불만스러워 보이는 몇몇을 바라보던 리첼 힐이 무대로 향하는 서준을 향해 외쳤다.
“준! 축하해!”
리첼 힐의 목소리를 들은 서준이 뒤를 돌아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 * *
[/서준 리!/]
……어?
아마 ‘한국’이 말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중계를 하던 박영진, 양시은, 영화객은 물론이고 촬영하던 제작진, 그리고 방송을 보고 있던 새싹들과 한국인들이 모두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어?
방송 사고라고도 할 수 있는 침묵의 3초가 훌쩍 지났지만(대신 아카데미 시상식 영상에서 환호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세 사람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지 못했다.
[……미친…….]
그때, 영화객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너튜브라면 편하게 내뱉을 수 있는, 지상파 방송이라면 조금 난감할지도 모르는 단어였지만 그 누구도 놀라울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들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오히려 영화객의 말이 신호가 된 듯, 모두 정신을 차렸다.
[으아아악!! 남우주연상! 남우주연사앙!!]
[이서준 배우가! 이서준 배우가악!!]
박영진과 양시은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고,
“으아아악! 서준아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TV를 보고 있던 새싹들이 눈물을 흘리며 미친 듯이 새싹봉을 흔들었고,
“미쳤다!!”
선생님과 함께 방송을 보고 있던 학생들이 수업 중 고함을 질렀다.
“서준이가 상 받았다!!”
회사에서 월급 루팡을 하며 생방송을 보고 있던 직장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은행과 병원 등에서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버스와 택시에서 중계를 듣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이 폭발한 것 같았다.
[지금! 우리 이서준 배우가 무대로 향합니다! 관객석에서도 아주 큰 함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느새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만세를 하듯 두 팔을 번쩍 들고 ‘남우주연상!’만 외치고 있던 박영진이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럴 수밖에 없죠. 저기 있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이서준 배우에게 투표했다는 거니까요!]
[크으!]
박영진과 함께 만세를 부르던 양시은과 영화객도 침착함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붉게 상기된 얼굴만 아니라면 말이다.
[이로써 한국 배우 최초로!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이서준 배우입니다!]
[거기에 10대 때 받고 20대 때 또 받은 배우는 한 명도 없습니다. 이서준 배우가 최초인 거죠!]
[또한, 만 23세!로 이서준 배우 자신의 기록을 빼면 최연소 수상자이기도 합니다!]
박영진과 영화객, 양시은의 설명에,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짜릿함과 벅차오름을 느꼈다.
-자신의 기록을 빼면 또다시 최연소! 미친 거 아니냐고ㅠㅠ
=22 으아아아!!
=참고: 이서준이 수상하기 전(만 12세), 오스카 남우주연상 최연소는 만 29세.
=미친ㅋㅋㅋ 17년이나 줄였었네ㅋㅋ
-역시 이서준. 이제 감탄도 안나옴.
=누구냐. 누가 이서준 못 받는다고 했냐.
=전부 못 받는다고 했음ㅋㅋ
=22 한국, 미국 할 것 없이 다섯 후보 중 이서준이 확률이 가장 낮다고 했는뎈ㅋㅋ
=33 다른 나라 언론도 그랬음.
=근데 이걸 받아버리네??ㅋㅋㅋㅋ
=다들 후보만으로 대단하다고 했는데ㅋㅋ
=이서준: 후보? 먹는 거야?
=이서준: 내 사전에 후보란 없다. 오직 수상자만 있을 뿐.
=앜ㅋㅋㅋㅋ
-내 동생 새싹인데 지금 대성통곡하고 있음.
=ㅠㅠ안 울 수 가 없죠ㅠ
=팬카페 가봐. 지금 거기 완전 바다임. ㅠㅠㅠ밖에 없음.
=거기에 트로피 취소하고 있음ㅋㅋ오스카상 못 받으면 대신 주려던 거ㅋㅋ
=아닠ㅋㅋ트로피 만들 생각이었냐고ㅋㅋ
=10년 전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ㅋㅋ
-오. 이서준 수상소감 말한다.
* * *
“축하합니다. 준.”
“감사합니다.”
사회자로부터 오스카 트로피를 건네받은 서준은 수상소감을 말하기 위해 마이크 앞에 섰다.
짝짝짝!
아까보다는 차분한, 그래도 축하의 마음이 가득 담긴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서준입니다./”
서준 리의 수상소감은 언제나 그렇듯 한국어 인사로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자리에 서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서준의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수상자를 발표했을 때, 화면에 비치던 서준의 놀란 얼굴을 모두 봤기 때문이었다.
서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조금 전 수상자로 불렸을 때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현실은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다고 말하는데, 오늘이 바로 저에게 그런 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11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정말 영화와 같은 날이었죠.”
11년 전.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저기 서 있는 배우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최연소 수상자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 세계 영화사에 길이길이 남을 천재 배우를 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주 가끔, 지금까지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모두의 기대에 잘 답하고 있는지 의문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서준은 자신의 손에 들린, 금빛으로 빛나는 사람 모양의 트로피를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이 트로피들이 확신을 줍니다. 넌 잘하고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고 말이죠. 오늘도 그런 메시지를 받은 것 같아, 정말 기쁘고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연기하겠습니다.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미소를 짓는 서준은 오늘 중 가장 빛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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