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10화
몸만들기.
영화 촬영을 준비하는 배우들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기도 하면서, 박이든이 농담처럼 말했던 ‘입금 전 vs 입금 후’라는 밈이 만들어진 계기.
‘몸만들기’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 상황이 있는데, 액션 영화 등에서 멋지고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근육을 만드는 경우(일명 벌크업)와 연약하고 불안정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근육과 살을 빼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서준이 영화 [흘러가다]에서 병에 걸린 ‘정가람’을 연기할 때, 식이조절을 하면서 살을 뺐던 것처럼 말이다.
후우- 후우-
움직이는 근육이 잘 보이도록 타이트한 옷을 입은 서준이 일정한 박자로 숨을 내쉬며 철봉을 잡은 두 팔을 굽혔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에 따라 등의 근육이 모였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자극을 받았다. 일자로 뻗은 하체 때문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는 복근도 마찬가지였다.
[쉐도우맨3] 때는 아직 어렸던 데다가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서 적당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던 서준이라 근육을 더 만들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2]에서는 상의 탈의를 했지만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직업이라 근육이 과할 필요가 없었고, [쉐도우&나이트] 때도 야구 선수에 히어로 역할이긴 했지만 탈의할 일이 없어 몸을 키우지 않아도 됐었다.
‘물론 촬영 전에 히어로 의상에 어울릴 정도로 운동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근육 만들기는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자동차 문도 찌그러뜨리고 벽도 부수는 등, 이것저것 혼자서 다 해내는 액션 영화 속 보통의 주인공들처럼 근육질의, 울퉁불퉁한 몸을 만들 예정은 아니었다.
서준이 맡은 역할은 늑대인간.
기본적으로 인간과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 있기 때문에, ‘유연하고 압축된 근육을 가지고 있는 몸’ 정도로만 만들면 충분했다. 우락부락하진 않지만, 그만한 힘과 스피드가 나올 수 있는 몸이구나, 하고 관객들이 납득할 정도의.
그게 캐릭터 설정에도 어울린다.
‘곰이 아니라 늑대니까.’
네 발로 빠르게 달려가는 늑대를 떠올린 서준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에도 할리우드 트레이너에게서 건너건너 소개를 받은 ‘한국에 있는 트레이너’ 김현규의 트레이닝은 계속되었다.
서준은 힘든 기색 없이 완벽한 자세로 트레이닝에 집중했다. 그때마다 근육과 근육 사이의 경계선이 더욱 뚜렷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오늘치 운동을 끝낸 서준이 샤워를 하고 나와, 기다리고 있던 최태우와 함께 차에 올랐다.
“어땠어?”
“괜찮았어요.”
이렇게 운동한지도 꽤 되어갔지만, 최태우는 걱정스러운 듯 이렇게 묻고는 했다.
[흘러가다] 때, 최태우가 매니저였다면 안다호와 함께 안절부절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준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식사도 잘하고 있지?”
“네. 골고루 먹고 있어요.”
식이조절은 미국에 도착하면 시작할 예정이었다. 액션 훈련도 해야 하니 일찍 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했다.
“태우 형, 3월에 미국 가는 거죠?”
“응. 4월부터 촬영하니까.”
2월에는 팬미팅. 3월에는 미국행. 4월에는 촬영.
“얼른 시간이 지났으면 좋겠어요.”
즐거운 일들로 가득한 나날들에 서준이 활짝 웃었다.
* * *
2월 1일, 토요일.
아직 차가운 바람이 불고, 몇몇 곳에서는 새하얀 눈이 내리는 시기.
새해를 맞이하며 올해는 꼭! 이라고 다짐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놀라고 말았다.
-아니, 벌써 1월이 다 지나갔다고?
=뭔데, 시간 왜 이렇게 빠른 건데?
=이러다 올해도 아무것도 안하고 금방 가겠다ㅋㅋㅋ(안웃김)
-와. 나 올해도 작심삼일이었네ㅠㅠ
=진짜 3일은 했음?
=너어어는……
-근데 오늘 무슨 날임? 지하철 되게 북적거리네. 겨울인데도 덥더라. 여름이었으면 쪄 죽을 뻔.
=이서준 팬미팅날. 기사도 뜸(링크)
=아하!(납득 완)
=글쿤!(이해 완)
=내일까지 그 방면 대중교통은 피하세요ㅎㅎ
-작년 팬미팅은 나도 재미있게 봤는데 올해는 어떠려나?
=22 자기가 연기한 캐릭터들(어른 버전)로 나타나서 연주한 건 진짜 박수 쳐주고 싶었음.
=난 그 후기보고 박수 침ㅋㅋ
=작년에 했으니까 올해는 안 할 듯.
-이서준 차기작은 뭘까?
=글쎄. 소문도 안나오는 거 보면 올해는 쉬는 거 아닐까?
=……이서준이?
=ㅋㅋㅋㅋ이름만으로 반박가능ㅋㅋ
=그니까ㅋㅋㅋ
-소문 안나는 건 이서준이라면 평범한 일.
=22 ‘이스케이프’ 때 관계자들이 너무 비밀 잘 지켜서 감독이 일부러 소문 퍼뜨리라고 했던 거 아직도 웃김ㅋㅋㅋ
=이스케이프 감독: ?왜 아직도 소문이 안 나지?
=ㅋㅋ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서준이 작품 안 한다는 거(공백기가 길다.)=군대(or 그에 버금가는 상황)
=ㅋㅋ진짜ㅋㅋ군대썰은 생각만 해도 웃김ㅋㅋㅋ
=ㅋㅋ이서준이 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ㅋㅋ
그렇게 온라인에서 서준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을 때, 오프라인에서도 서준의 일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서준 오빠 팬미팅에 오다니…….”
눈앞의 행사장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아직 학생으로 보이는 새싹.
“이선좌가 아니라니……!”
온몸으로 감격을 쏟아내는 그 모습에 다른 새싹들도 감동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모두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라는 지상 최대의 적을 물리치고 이 자리에 선 용사들이었다.
“슬로건 나눠 드립니다!”
“서준이 사진 교환하실 새싹!”
언제나처럼 팬미팅이 시작되기 전부터 행사장은 시끌벅적했다.
행사장 입구에서 감격의 말을 외쳤던 학생새싹이자 1기새싹 이미연의 조카인 김민정은 반짝이는 눈동자와 활기찬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거 하나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공식 굿즈 판매대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거지만 팬미팅 기념으로 사고,
“헉! 설마 7월 님?! 외국인이신 줄은 몰랐는데!”
“하하하. 제가 한국어를 좀 하죠.”
SNS로 대화를 나누었던, 알고 보니 외국인이었던 새싹들과 만나 쉴 새 없이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직접 그리신 거예요?”
“네……. 좀 못 그렸죠?”
“아뇨! 엄청 귀여운데요!”
직접 만든 비공식 굿즈들을 지나가는 새싹들과 교환하고,
“이거 드실래요? 맛집 쿠키예요.”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저도 초콜릿 가지고 왔어요!”
준비해 온 과자와 초콜릿을 주고받고.
“여기 너무 좋아……!”
아직 팬미팅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모도 이랬겠지.’
팬사인회와 팬미팅 모두 낙첨된,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제 손에 용돈을 쥐여주던 이모 이미연을 떠올린 김민정은 이모 대신 확실하게 즐겨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새롭게 알게 된 새싹들과 함께 거의 십년지기 친구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김민정은 행사장 입장을 알리는 스태프의 목소리에 가슴이 벅차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드디어 서준 오빠를 보게 된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까운 자리에서!
순서대로 입장한다는 이야기에 앞에 서 있는 새싹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자리에 앉게 된 김민정이었다. 손에는 코코아엔터에서 나눠준 굿즈와 간식이 든 종이가방이 있었다.
‘이게 왜 내 손에 있지?’
무슨 정신으로 받았는지 모르겠다.
‘안 되지.’
정신 차리자.
이러다가는 한순간 한순간 눈에 새겨야 하는 서준 오빠의 모습도 그냥 넋 놓고 볼 것 같았다.
굳게 각오한 김민정이 가방에서 응원봉을 꺼냈다.
파란 머리의 미니미 서준이 왕좌에 앉아 있고 등 뒤로 파란 보름달이 떠 있는 새싹봉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새싹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블루문으로 입덕하셨어요?”
“네. 원래는 다른 아이돌 팬이었는데…….”
새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분들 많죠.”
서준의 [블루문] 무대 이후로 아이돌 팬들이 많이 입덕했다. 배우 서준만 파는 새싹도 있었고, 아이돌 팬을 겸하면서 서준도 덕질하는 새싹도 있었다.
어떤 새싹이든 다 같은 새싹이었다.
‘사고만 안 치면.’
12년 차 새싹은 웃으며 5년 차 새싹, 김민정을 바라보았다. 서준의 경력이 경력인지라 5년 차 경력은 아직 파릇파릇할 때였다.
“저도 블루문 무대 좋아해요. 또 무대에 서줬으면 할 정도로요.”
“저도요! 물론 배우인 서준 오빠가 더 좋지만요!”
‘아이돌 서준’에게 덕통사고 당했지만, 입덕하고 서준의 작품을 찾아 보다 보니 배우로서의 서준이 더 좋아진 김민정이었다. 그 말에 주위에 앉아 있던 새싹들이 뿌듯하게 웃으며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 모든 새싹들이 자리에 앉고 시작 시간이 될 때까지 잡담을 나누던 중.
팬미팅장이 어두워졌다.
“이제 시작하나 봐요!”
팬미팅의 시작의 알리듯, 새싹들이 손에 든, 중앙제어장치로 연결된 새싹봉이 물결처럼 색색깔로 번져 나갔다. 마치 무지개처럼 번져 나가던 새싹봉의 빛이 이내 파랗게 물들었다.
그에 새싹들은 눈을 반짝였다.
“블루문?!”
“블루문인가?!”
김민정도 입을 쩌억 벌리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보는 [블루문] 무대라니. 심장이 뛰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관객석의 모든 새싹봉의 불이 꺼지더니,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어?”
수백 수천 번을 봤던 [블루문]의 무대의 도입부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는 노래였다.
그만큼 유명하고 유행한 노래.
블루문의 [엑시트EXIT].
격렬한 댄스가 인상적인 노래로, 가수들과 댄서들이 챌린지를 했었던 곡이었다.
……이게 왜 나와?
하고 모두가 생각할 때.
어두운 무대 위.
쿵! 쿵! 문을 두드리는 듯한 도입부가 들리고,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무대 뒤에서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번쩍!
단 하나의 스포트라이트가 켜져, 무대 중앙을 비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나오던 누군가가 무대에 내리쬐는 스포트라이트로 구둣발을 내디뎠다.
그는 거침없이 빛 속으로 들어와 모습을 드러냈다.
새싹들의 고개가, 화면을 비추는 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눈에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새싹들의 입이 저도 모르게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허벅지를 꽉 조이는 검은 가죽 바지와 넉넉한 크기의 새하얀 셔츠. 그리고 그 새하얀 셔츠 위에 걸친 새까만 가죽으로 된 하네스.
허억!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도 들렸다. 한두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들에도 새싹들의 시선과 카메라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새하얀 목을 장식한 검은 초커를 지나, 이내 남자의 얼굴에 닿았다.
미소 한 점 없는 입술. 반듯하고 날카로운 코끝. 진하고 날카로운 눈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밤하늘처럼 아주 새까만 머리칼.
새싹들은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늘한 얼굴로 관객석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싱긋 웃었다.
일순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에 숨도 못 쉬고 남자를 바라보던 새싹들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
커다란 환호성과 함께, 배우 이서준의 팬미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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