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03화
마주 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져, 서준은 조금 더 힘을 주며 웃었다.
눈앞에 있는 ‘예나 누나’의 떨리는 눈빛, 물기 가득한 목소리, 조심스러운 말투, 그리고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까지. 모든 것이 ‘이서준’이라는 사람을, 배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게 아주 절절히 느껴져서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제 곧 끝날 시간이기도 하고.’
스태프가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좀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다른 새싹분들도 많았다. 자신의 마음대로 시간을 늘려 이야기를 나눈다면 다른 새싹들과 대화할 시간이 줄어들 거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예나 누나.”
그 말에 서준과 손을 마주 잡고 있고 벌벌 떨고 있던 임예나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니, 벌써 끝날 시간이야?! 뭘 했는지, 뭐라고 말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데!
경악하는 임예나의 자아1을 저 멀리 던져 버린 자아2가 임예나의 몸을 차지해 입을 열었다. 서준의 손을 꼭 잡고서.
“서준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내의원이야. 지금도 시간 날 때면 정주행해. 1화부터 24화까지.”
거의 랩을 하듯 빠른 속도로 말하는 임예나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준 화관을 쓰고 그런 표정을 짓는 서준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고 멋지고……. 하여튼 너무 황홀해서 잠깐 자아2까지 기절할 뻔했지만, 임예나의 자아2는 강했다.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성녕대군 마마랑 허 의관이 등산하는 장면이야. 서로를 얼마나 의지하고 좋아하는지 보여서 좋았어. 그리고 성녕대군 마마 등장씬도 좋아하고, 약초꾼 아이가 허 의관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장면도 정말정말 좋아해.”
이어지는 임예나의 감상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서준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뺨까지 옅게 붉어져 보이는 건, 눈의 착각인가?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빛. 빛밖에 보이지 않는다.
“서준아! 사랑해!”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며 선물까지 잊지 않고 전한 1번 새싹 임예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황홀함과 벅참과 설렘을 온전히 느꼈다.
‘손, 안 씻어야지!’
나중에, 임예나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송유정이 서준과 악수했다는 이야기에 ‘나도 한 번만 만져보자!’하고 달려들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임예나였다.
2번 새싹이 무대 위로 오르기 직전.
관객석에 앉아 있던 새싹들이 셔터를 빠르게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임예나의 모습 때문에 가려져 있던 화관 쓴 서준의 모습이 아주 잘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에 서준도 웃으며 손을 흔들거나 이런저런 표정을 지으며 기꺼이 사진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더 좋은 카메라 들고 올걸!”
안타까워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정말 짧은 포토타임이 끝나고, 2번 새싹이 의자에 앉았다.
삐걱삐걱 걸어올 때부터 심상치 않긴 했지만, 외국 새싹인 2번 새싹은 서준과 마주 보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1번 새싹님은 어떻게 겨우(?) 울기만 하셨지? 난 꼼짝달싹도 못 하겠는데.
“/괜찮으세요?/”
눈을 깜빡이는 서준의 속눈썹까지 이렇게 잘 보이다니…….
미친 것 같았다. 감정이 벅차올랐다. 이게 현실인가, 꿈인가 헷갈리기까지 했다. 사실 나 집에서 자고 있는 게 아닐까?
감정이 허리케인에 휩쓸린 듯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리고 결국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 2번 새싹이었다. 그에 서준이 아, 하고 얼른 휴지를 건네주었다.
어쩐지 앞으로 익숙해질 것 같은 패턴이었다.
그렇게 새싹들은 차례로 서준에게서 사인을 받아갔다.
우는 새싹들도 있었고 제법 담담한 새싹들도 있었다. 반응도, 물어보는 질문도 달랐지만, 모두 소중히 가져온 선물을 서준에게 주고는 활짝 웃었다.
“손…… 손 잡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리고 또 다들 잊지 않고 서준과 악수를 하고 갔다.
와악! 하고 기뻐하는 새싹의 모습에 서준도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써줄 수 있어?”
“어? 이거…….”
서준이 눈을 크게 떴다.
토끼 모자다. 늘어진 양쪽 발을 누르면 귀가 움직이는.
“저 아기 때 썼던 거랑 같은 거예요?”
“맞아!”
서준이 쓰고 있던 화관을 내려놓고, 새하얀 토끼 모자를 썼다. 그러고는 토끼의 발을 눌렀다. 새하얀 토끼의 양쪽 귀가 그에 맞춰 펄럭펄럭 움직였다. 테이블 한쪽에 놓인 거울을 보며 서준이 아하하! 웃었다.
“어때요? 어울려요?”
“……완전……!”
새싹들이 입을 틀어막고 셔터를 눌러댔다.
토끼 모자를 준 새싹이 내려가고, 서준은 토끼 모자 위에 아까 받은 화관을 썼다. 토끼의 양쪽 귀를 화관에 통과시키려고 꼼지락거리는 게 귀여웠다. 그냥 숨만 쉬어도 귀여웠다.
“안녕하세요.”
화관을 쓴 흰토끼 서준이라니.
서준의 공격력(?)이 더욱 강해져, 다음 차례의 새싹은 거의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몇 명이 지나고, 새로운 아이템이 나타났다.
화관이었는데, 검은색과 빨간색의 장미로 보이는 꽃으로 만든 것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흰색 토끼 모자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서준은 토끼 모자를 벗고 그 화관을 썼다.
“어울려요?”
“완전 잘 어울려요!”
외국 새싹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새까만 머리칼에, 검고 붉은 화관, 그리고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흰색의 셔츠까지.
“뱀파이어 같아요!”
물론 진짜 뱀파이어는 이런 화관을 쓰진 않겠지만 말이다.
“저 오버 더 레인보우 엄청 좋아해요. 특히 공원에서 삼총사가 함께하는 장면은 다 좋아해요. 그래서 취미로 바이올린도 배웠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어요. 정말정말 좋아해요. 준!”
“고마워요.”
빙그레 웃는 서준에, 얼굴이 새빨개진 외국 새싹은 잊지 않고 악수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으아! 준과 악수했어!
그리고 외국새싹이 내려오자, ‘뱀파이어 같아요!’라는 외침을 들을 때부터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던 관객석의 새싹들이 눈을 반짝였다.
그런 새싹들의 기대를 눈치채고 작게 웃은 서준이.
순간 분위기를 바꾸었다.
아주 살짝, 서늘하고 오싹한 마기를 흘려보내며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검은 눈동자에 처음 보는 감정, 오만이 깃들었다.
그건 서준이 아니었다.
인간을 낮잡아 보는 오만한 뱀파이어였다.
차자자작!
물론, 흥분한 새싹들의 앞에서는 한낱 모델일 뿐이었지만.
“/으아아! 너무 좋아!/”
“흑화한 서준이!!”
“/준!!/”
그에 따라 서준이 자세를 바꾸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반쯤 감았다. 모든 것이 권태로운, 영원을 사는 불멸자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그렇게 한바탕 뱀파이어 소동이 끝나…….
“이것도 해주세요!”
지 않았다.
가방에서 검은색 초커를 꺼낸 새싹에, 서준이 손을 들어 자신의 새하얀 목을 문질렀다.
“초커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서준이 검은색 초커를 목에 걸었다.
“어울려요?”
흰 셔츠에, 새하얀 목에, 검은색 초커라니……!
크아아악!
어디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미친 듯이 누르는 셔터 소리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 * *
“20분 동안 잠시 쉬는 시간이 있겠습니다. 편하게 움직이셔도 됩니다.”
짧은 쉬는 시간.
50명의 새싹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인을 하고 악수도 한 서준도 무대 뒤에서 숨을 돌렸다.
“힘들지는 않고?”
안다호의 물음에 서준이 활짝 웃었다.
“괜찮아요. 재미있어요.”
그 말대로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왠지 팬사인회 전보다 더 혈색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의아해하는 안다호와 최태우에 서준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는데…… 새싹분들이 제 작품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감상을 말해주시는 거 있죠.”
서준이 무대 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쉐도우맨 시리즈를 좋아했는데, 쉐도우앤나이트가 최애작이 됐어요. 나이트진이 나오면 그게 최애작이 될 것 같아요.
-내의원을 좋아합니다. 정말이지 매번 볼 때마다 울어버려서 큰일이에요. 이런 또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오네요.
-이스케이프를 좋아해요. 주인공들이 좀비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이 정말 멋졌어요.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당연히 고주원이에요!
-생존자들은 지금까지 봤던 재난영화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요. 그래도 몇 번이고 다시 볼 만큼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울음이 가득한 얼굴로, 누군가는 긴장한 얼굴로, 누군가는 행복해하는 얼굴로, 누군가는 담담하지만 조금 들뜬 얼굴로.
“지금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요.”
-정말 좋아해요. 준의 작품.
그렇게 서준에게 말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을 리가 있나.
몸은 조금 힘들어도,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기쁨으로 충만했다.
물을 마시면서 활짝 웃는 서준에, 안다호와 최태우도 미소를 지었다.
한편.
배우가 사라진 팬사인회장은 시끌벅적했다.
“서준이가 최고야! 최고라고!!”
“여기가 내 무덤입니다. 같이 누우실 분 계십니까?”
“저요!”
본인 앞에서는 할 수 없었던 주접들을 거침없이 뱉어내고.
“사진! 사진!”
“오른쪽에서 찍은 사진 구합니다!”
“메일 주소 교환해요!”
각자의 위치에서는 찍지 못했던 방향의, 서준의 사진들을 구하기 위해 메일주소를 뿌려댔다.
인터넷에 중간 후기를 올리는 새싹들도 있었다.
[서준이 팬사인회 중간 후기]
서준이 초커함.
-초커!?!
=사진!! 왜 사진이 없어!?
=사진ㅠㅠㅠ
약 올리는 듯 사진을 올리지 않는 새싹들도 있었지만.
[서준이 팬사인회 중간 후기입니다(사진 많음, 데이터 주의)]
(사진1)(사진2)…… (사진50).
-감사. 압도적 감사.
-(그랜절)
다른 내용은 없이 사진만 꽉꽉 채워서 올리는 은혜로운 새싹들도 있었다.
“잠시 후, 팬사인회를 재개하겠습니다.”
물론 그런 소란도 팬사인회가 재개되면서 잠잠해졌다.
“크흡. 검은 고양이……!”
……아닌가.
서준이 74번 새싹이 가져온 검은 고양이 귀를 머리에 썼다. 검은 초커가 마치 고양이 목걸이처럼 아주 잘 어울렸다.
“잠시만 서준아! 장갑도 있어!”
가방에서 나오는 분홍색 젤리가 박힌 검은 고양이 발. 서준은 그것까지 흔쾌히 두 손에 끼웠다.
“오. 이거 생각보다 잘 움직여요.”
라고 말하며, 서준은 고양이 발 모양의 장갑을 잼잼, 쥐었다 폈다.
그러고는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관객석에 앉은 새싹들에게도 두 손을 쥐었다 펼 때마다 분홍색 젤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 봐요. 귀엽죠?”
응! 엄청 귀여워!
고양이 젤리 말고 서준이 너!
마치 검은 고양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것 같은 서준의 모습에 새싹들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저 저런 고양이 있으면 평생 모시고 살 수 있어요.”
“저도요.”
거의 입을 틀어막고 울 것 같은 새싹들이었다.
멀리서 본 새싹들도 그럴진대, 바로 앞에서 고양이 서준을 목격한 새싹은 거의 넋이 나간 듯 비틀비틀 걸어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다행히도 이럴 줄 알고, 최애작에 대한 감상과 서준과의 악수는 검은 고양이 변신 세트를 건네주기 전에 끝냈다.
‘잘했다. 나!’
그렇게 새싹들의 심장에 큰 충격을 주는 검은 고양이 타임이 끝나고, 다음은 다행히도(?) 인간 타임이었다.
아니, 다행이 아닐지도 몰랐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경을 쓴 서준 때문이었다. 더구나 안경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얇은 금색 테의 안경과 그 테에 달린 금색 체인.
둥글게 늘어져 목 뒤로 이어진 안경 줄이 서준의 지적인 미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키고 있었다.
옆으로 앉은 서준이 왼손에 들고 있는 책을 보는 척하다가, 새싹을 발견하고는 오른손으로 안경을 살짝 내리고는 씽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에 따라 금속 체인도 작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왔어요?”
으아아…….
그 능청스러움에 새싹들은 다시 앓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