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790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연습 열심히 해.”
꾸벅 인사한 앰버와 버밀리온이 신난 발걸음으로 연습을 위해 떠나는 걸 보며, 서준과 박이든, 정은성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럼 나도 사무실 가 볼게. 팬사인회 좀 알아봐야겠다.”
버밀리온 아이들에게 시달렸던 최태우도 사무실로 향했다. 흥미로워하는 서준의 모습을 보니 이것저것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마세요, 태우 형.”
“알고 있어…….”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말하는 서준에, 최태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두 사라지니, 열댓 명이 모여 시끌벅적하던 3층 미니휴게실은 서준과 박이든, 정은성밖에 남지 않아,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북적했는데…….”
“그러게. 조용해졌네.”
아쉬운 듯 말하는 서준에, 고개를 끄덕인 정은성이 서준의 어깨를 툭툭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쉬워하진 마.”
“우리 뭐 하고 놀래?! 나 우리 연습실에 VR 게임기 갖다 놨는데! 그거 할래? 트레이너 쌤이랑 매니저 형들 몰래 숨겨 놓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 아니면 밖에 나가서 놀아도 되고! 이서준 실드는 이럴 때 쓰는 거지!”
“……여기 5인분 하는 애가 남아 있으니까.”
눈을 반짝이며 숨도 안 쉬고 말하는 박이든과 해탈한 듯한 정은성의 표정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서준이 두 사람과 놀고 있을 무렵.
안다호는 천천히 종이를 넘기며 대본을 읽고 있었다
이사가 된 이후 살펴볼 일들이 많아, 서준에게 들어온 대본이나 시놉시스를 모두 챙겨보는 건 힘들었지만, 1팀에서 한 번 걸러 올라온 작품들은 여전히 빠짐없이 읽어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과로하지 않는 게 최태우와 차이가 나는, 베테랑 매니저 안다호였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대본을 읽으며 서준의 차기작으로 무엇을 추천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안다호였다. 여기서 통과되면 최태우가 서준에게 대본들을 건네준다.
‘물론 서준이가 먼저 작품을 들고 올 때도 있지만…….’
안다호가 작게 웃고는 다시 한글로 적힌 작품을 살펴보았다.
[운명]
좋은 작품이다.
감독도 괜찮은 사람이고, 영화의 형식에 맞춰 대본을 쓰는 각색가도 중요한 부분을 놓지지 않고 잘 각색했다. 그리고 원작 소설도 좋았다.
‘송문석 작가.’
원작자 옆에 쓰여진 이름을 보며, 안다호는 송문석 작가의 다른 소설, [배심원]을 떠올렸다.
‘배심원 괜찮았지.’
예전 서준이 중학교 졸업 무대에 연극 [거울]을 올렸을 당시, 서준의 출연이라는 오보로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김종호 배우가 출연했던 연극 [배심원].
그 송문석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운명]이 이번에 영화화될 예정으로, 이렇게 서준에게 캐스팅 제안이 들어온 것이었다.
‘서준이도 소설 재미있다고 했었지.’
책도 꽤 좋아하는(정확히 말하자면 영화화나 드라마화가 될 만한 책들) 서준이 그렇게 말했으니, 제작사에서 정말로 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운명]은 괜찮은 성적을 낼 터였다.
‘누가 일부러 망하려고 하겠냐마는.’
작게 웃은 안다호는 ‘이걸 해도 괜찮겠네.’ 하고 생각하며 테이블 한쪽에 [운명]을 놓고, 다음 대본을 들었다.
“아.”
알파벳으로 쓰여진 제목을 보자마자, 안다호의 눈이 커졌다.
“……여기 있었네.”
영화 제작사가 일부러 망하려고 했던 것 같은 작품.
[뉴 이클립스]
서준의 매니저로서, 모를 수가 없는 제목이었다.
“벌써 대본이 나왔나?”
서준을 통해, 친구인 그레이스 웰튼의 언니이자 소설 [이클립스]의 원작자인 로라 웰튼이 여름쯤 제작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벌써 대본이 나온 것 같았다.
‘그래도 서준이한테 대본이 들어온 건 의외인데…….’
아니, 의외는 아닌가.
소설 [이클립스] 속에서 남자주인공은 다른 대륙의 피가 흐르는 혼혈늑대로, 특별히 인종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서준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소설 [이클립스]의 ‘습작’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의 모델이 서준과 친구인 찰리 베르나르라고 했었다.
‘거기에 서준이의 티켓 파워를 생각하면, 안 들어오는 게 이상한 일이지.’
[망클립스] 때는 왜 안 들어왔나 싶지만.
안다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작품은 오히려 우리 쪽에서 거절했겠지.’
여하튼.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은, 소설 [이클립스]의 새로운 영화화 작품 [뉴 이클립스]의 대본이 이렇게 안다호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것 참.”
안다호가 떨떠름한 눈으로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펼치기가 무섭네.”
그래도 1팀의 검토를 통과한 걸 보면 기본은 하는 모양인가 보다.
표지에 제목과 함께 감독과 각색가의 이름이 보였다. 로라 웰튼의 다른 작품인 [클라우드]를 성공적으로 영화화한 인물들이었다.
‘그럼 좀 믿을 만하지.’
가볍게 숨을 내쉰 안다호가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천천히 글자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른 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운명]만큼 빠르게, 그러나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자세히 읽어 내려갔다.
마침내, 안다호가 맨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리고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잘 만들었네.”
서준을 위해 오랜 시간 대본을 읽어왔던 안다호인 만큼, 감독과 각색가, 원작자가 이 하나의 대본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 대본의 완성도를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안다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른 작품들도 괜찮았지만, 서준은 분명 [운명]과 [뉴 이클립스] 중에서 차기작을 고를 것 같았다.
“그럼 어쩐다…….”
비슷한 수준의 작품이 두 개라면, 서준은 먼저 읽은 걸 선택할 터였다.
‘첫 작품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어떻게 연기할지 상상할 테니까.’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상상을 하고 나서, 두 번째 작품을 읽으면 그 두 번째 작품이 월등하게 좋지 않은 이상, 서준은 첫 번째 작품을 놓지 못할 거다.
마치, 배가 고플 때 먹는 첫입이 가장 맛있는 것처럼.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그렇다고 촬영 장소가 미국과 한국인 두 작품을 함께 촬영하는 건 힘들 테고.
안다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운명]과 [뉴 이클립스]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작품을 상자의 맨 위에 놓느냐.
그래서 서준이 어떤 작품을 가장 먼저 읽느냐.
본의 아니게, 안다호의 선택에 따라 서준의 차기작이 정해지게 생겼다.
“물론 선택하는 건 서준이지만.”
그래도 서준의 전 매니저로서, 이 두 작품 중 하나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유심히 책상 위에 올려놓은 [운명]과 [뉴 이클립스]를 번갈아 바라보는 안다호.
그때.
책상 한편에 장식되어 있는 겹작약꽃 무늬가 새겨진 나침반이 뱅그르르 돌았다.
[(선/제작)황금 인어 파르비타의 나침반이 방향을 가리킵니다.]
음.
안다호는 대본 중 하나로 손을 뻗었다.
* * *
다음 날.
서준의 집.
“서준아. 대본 들고 왔어.”
서준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최태우가 코코아엔터에서 대본이 든 상자를 들고왔다.
“고마워요. 형!”
매번 듣는 감사 인사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서준을 보면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 항상 따라 웃고 마는 최태우였다.
“커피 마실 거죠?”
서준이 신나게 최태우를 거실에 앉히고 미리 준비한 커피를 건네주었다. 얼음이 가득한 커피에, 얼죽아 회원인 최태우가 씨익 웃었다.
서준도 함께 들고온 오렌지주스를 탁자에 올려두고, 뚜껑이 덮인 상자를 마치 보물상자를 열듯 기대 가득한 얼굴로 열어보았다.
“……오…….”
대본 상자의 제일 위에 놓인 대본을 본 서준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어냈다.
[뉴 이클립스]
뱉어내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그레이스에게선 별말 없었는데…….’
다른 이야기는 했지만, 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준에게 캐스팅이 왔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 있지만 서준이 작품을 고르는 데 ‘인맥’ 같은 영향을 주기 싫었다거나.
‘……아니면 언급하기 싫을 정도로 이번에도 망했다거나.’
그 셋 중에 하나가 아닐까.
“어땠어요, 형?”
[망클립스]보다는 나아요?
흔들리는 서준의 눈빛에서 뒷말을 읽은 최태우가 웃고 말았다. 아마 [뉴 이클립스]에 대해 듣는 사람들은 모두 저런 눈빛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괜찮았어. 예전 거보다 훨씬.”
“하아. 다행이네요.”
친구에 대한 걱정으로 무거워졌던 마음이 가벼워진 서준이 활짝 웃으며 표지를 살폈다. 이제 보니 감독과 각색가가 [클라우드]의 촬영팀이었다.
인맥으로 들어왔던 감독과 각색가에서, [클라우드]팀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그레이스한테 들었는데, 이 사람들은 과연 어떨까.
서준은 조금 의심이 서린 눈빛으로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렌지주스를 조금씩 마셔가면서 읽다가 점점 오렌지주스를 마시는 빈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은 채 대본만 조심스럽게 넘기고 했었다. 완전히 [뉴 이클립스]에 빠져든 것이었다.
그런 서준을 보며 최태우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 서준이 가장 빛나는 모습은 연기와 관련된 때가 아닌가 싶었다.
“와…….”
서준이 감탄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의심이 서렸던 검은색 눈동자가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완전 다른데요? 원작이랑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영화적 요소들을 놓치지 않은 게 보여요. 캐릭터들도 원작보다 개성적이지만, 캐릭터들을 관객들의 머릿속에 깊이 남기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겠죠. 그래서 되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전투장면들도 멋있을 것 같고…….”
다다다.
이야기하는 서준에 최태우가 말했다.
“그렇지? 되게 열심히 만들었나 보더라고.”
“저 이거 할래요. 형.”
응. 그럴 줄 알았어.
단박에 튀어나온 서준의 말에 최태우는 예상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안 읽어봐도 되겠어?”
“다른 거요? 오. 운명? 이거 영화화하네요?”
[뉴 이클립스] 대본을 옆에 소중히 내려둔 서준이 최태우의 말에 그 아래 깔려 있던 [운명]의 대본을 발견했다.
“그것도 좋더라고. 1팀 추천 작품 중 하나야.”
“그래요?”
[뉴 이클립스]에 출연할 생각이 가득하지만, 다른 대본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흐흐흥♪
재미있어 보이는 차기작을 찾아 신이 난 서준은 콧노래를 부르며 별 생각 없이 [운명]을 펼쳤다. 그리고 이내 울상을 짓고 말았다.
“으아아. 이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태우 형…….”
안다호의 예상대로 [운명] 또한 서준의 마음에 쏙 든 것이었다.
“같이 하면 안 되겠죠?”
마치 눈앞에 정말로 갖고 싶은 장난감 두 개를 둔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서준에, 작게 웃고 만 최태우가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촬영 시기가 겹치는 데다가, 촬영 장소가 미국하고 한국이라서 하나만 결정해야 할 것 같아.”
“끄으응.”
인생은 타이밍.
서준이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며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두 대본을 바라보다가, 하나를 선택했다.
먼저 읽었던 [뉴 이클립스]였다.
안다호의 예상대로, [운명]보다 먼저 읽어버린 탓에 이미 어떻게 연기하면 좋을까, 하고 상상해 버린 것이 결정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진짜!
진짜진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아주 미련이 가득한 손짓으로 툭툭 [운명]의 대본을 건드려보는 서준의 모습에서 어쩐지 축 처진 강아지 귀와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아, 최태우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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