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768화 (768/1,055)

0살부터 슈퍼스타 768화

쉐도우맨이 가지고 있던 죄책감의 크기를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테일러 국장이 한숨을 삼키며 통신기를 눌렀다.

-계획은 전에 알려줬던 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빌런이 목적지로 이동하면, 요원과 함께 곧바로 대피해 주십시오.

“네.”

테일러 국장이 연락을 끝내자, 윌리엄은 무전기 버튼에서 손을 떼고 후우, 숨을 내쉬었다.

“저기, 빌런이 이틀에 한 번씩 간다는 곳은 어디인가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 네…….”

딱딱한 퍼스트 요원의 대답에 윌리엄이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어쩔 수 없다.

‘추모관’은 소년의 역린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갈 수도 있고 관련 정보를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퍼스트가 먼저 소년에게 추모관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일은 결코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길 잠시.

-제프 맥케이. 나타났습니다.

추모관으로 들어가는 빌런 제프 맥케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로도에게 하체가 먹혀 버린 제프 맥케이의 걸음은 더욱 비틀비틀거렸다.

그런 제프 맥케이가 어느 사진 앞에 서서 점액질로 뒤덮인 손을 들어, 보고 있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카메라가 검녹색의 끈적한 손자국이 남은 사진을 비췄다.

작은 성당 앞.

예쁜 꽃들과 새하얀 천 장식들로 꾸며진 예식장을 배경으로, 살짝 부는 바람에 밝게 웃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검은색 정장을 입은 신랑이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신랑은,

제프 맥케이였다.

제프 맥케이가 가래가 끓는 듯, 더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아이였는데……열 살도 안 된 아이였는데…….”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았다.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과 자신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신발 한 짝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그걸 보며 더욱더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으니까.

“……확실해…… 휴대폰의 사진을 봤어…… 분명 그 애였어…… 아델.”

남자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림자 녀석까지 나타났어…… 그 애야……. 분명 그 애를 찾은 거야……!”

추모관에 자신만 홀로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며 중얼거리는 제프 맥케이. 그가 조심스럽게 사진을 매만졌다.

“……이제…….”

그 손길을 따라, 그의 미련이, 슬픔이, 원망이, 아픔이 검녹색의 흔적을 남겼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부정적 에너지에 아로도가 즐거운 듯 꿈틀꿈틀거렸다.

“……그 애를 찾아내야 돼…….”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프 맥케이는 추모관 밖으로 나왔다.

-윌리엄! 준비하세요.

“네!”

테일러 국장의 통신에 윌리엄이 대답했다.

“제이! 파트너!”

윌리엄의 외침에 제이와 파트너가 힘을 보탰다.

그러자 그림자 가지가 겹쳐지는 곳곳에서 검은색 기둥들이 솟아올랐다. 마치 어떠한 신전에 온 것 같은, 기다랗고 검은 기둥들이었다.

곧 기둥들의 윗부분이 그물처럼 검은색 그림자로 이어졌다. 윌리엄이 야구장에서 목격했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쉐도우맨에게서 전해 받은 힘이, 지금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제프 맥케이! 그림자 발견! 지금 이동……!

쾅!!

큰소리와 함께 데엥- 종소리가 들렸다.

오른쪽 하늘에서 날아온 검녹색의 촉수가, 화살처럼 성당 첨탑에 박힌 것이었다. 그리고 그 촉수는 금방이라도 반대쪽에 있는 것을 잡아당길 것처럼 팽팽했다.

-이렇게 올 줄이야……! 윌리엄! 피해요!

“리! 지금 가야 합니다!”

“네!”

윌리엄이 요원의 외침에 차로 달려가려던 찰나.

첨탑에 박혀 있던 검녹색의 촉수가 줄어들었다. 그 반동으로 반대편에 있던 무언가가 당겨졌다.

윌리엄의 시야에 오른쪽 하늘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검녹색의 덩어리가 보였다.

-공격!

---!!

테일러 국장의 외침과 함께, 퍼스트 전투기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공격들보다 빠르게 날아온 검녹색의 덩어리가 콰아앙! 소리와 함께 성당 앞에 박혔다.

커다란 충격에 바닥에 움푹 파이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주례와 신랑 신부가 섰을 단상도 무너지고 새하얀 천들이 거친 바람에 흔들렸다. 장식된 꽃잎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테이블과 의자가 뒤집어졌다.

-전 요원 대기.

테일러 국장의 말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곧 천천히 먼지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제프 맥케이…….”

윌리엄은 폐선에서 봤던 모습과 달리, 어느새 검녹색의 슬라임이 상체까지 뒤덮여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 * *

쉐도우맨의 원수를 뒤로하고.

마음 속에서 일렁이는 불길들을 가라앉히며, 윌리엄은 차를 타고 대피했다.

그러나.

“……리?”

퍼스트 요원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전투현장을 보고 있던 소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인물이 거기에 있었다.

그때,

쾅!

하고 큰소리가 났다.

멀리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바로 뒤쪽.

차 뒷문이 나가떨어지는 소리였다.

그것도 윌리엄 리의 공격으로!

“리!!”

당황한 퍼스트 요원이 차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윌리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외침이 들리지도 않는지, 윌리엄은 차에서 내려 폭발음과 불꽃이 사방에서 터지고 있는 전투현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묘하게 차분하면서도 무거운, 그럼에도 격식 있는 발걸음으로.

그 아래의 검은 그림자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국장님!”

-무슨 일인가?

“리가 탈출했습니다!”

-……뭐?

“윌리엄 리!”

퍼스트 요원은 말을 고쳤다.

“아니!”

두 눈이 퉁퉁 부은 관객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진 나트라가 현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 * *

자신의 히어로, 쉐도우맨을 바로 눈앞에서 잃었던 날.

그날로부터 고작 며칠이 흘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님과 제이와 파트너가 있어 힘을 내긴 했지만, 윌리엄이 정말로 슬픔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자책하고 좌절하고 절망해왔던 감정이, 그리고 오늘까지 느껴야 했던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울분이.

윌리엄 리의 모든 것을 잠식해 나갔다.

쾅!

분노에 휩싸인 소년은 차 문을 발로 걷어찼다.

“리!!”

자신의 부르는 퍼스트 요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분노.

그리고 복수.

삐걱-

하고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진짜 귀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고, 소년의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잊혀진 기억’이 담긴 상자가 조금 열리는 소리였다.

그 상자에서 스믈스믈 검은 연기와 같은 그림자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뚜벅-

분노의 감정이 가득 담긴, 무거운 걸음을 내디디며 소년은 그 그림자를 받아들였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빠졌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

하지만 소년은 깨달았다. 아직 맞춰야 하는 퍼즐 조각들이 많다는 것을.

천천히 ‘잊혀진 기억’, 아니, ‘진 나트라의 기억’이 담긴 상자에서 나온 퍼즐 조각들이 ‘윌리엄 리’의 빈 공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서서히 소년의 걸음걸이가 바뀌기 시작했다.

제법 격식 있는 걸음이긴 했지만 몸에 남은 기억이었을 뿐이라 미숙했던 ‘윌리엄 리’와 달리, 완벽 그 자체의 걸음걸이.

그와 함께.

소년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칠흑처럼 새까만 그림자는 빌런이 목격하든 말든 소년의 키 넘어까지 크기를 키워 흔들렸다.

“이게 힘…….”

소년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뚜벅뚜벅 걸어갈 때마다, 천천히 검은색 그림자가 발아래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어둠에 물들어가는 것처럼.

새하얀 운동화의 밑창부터 검게 물들며 어딘가의 군화처럼 딱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운동화가 모두 변한 다음은 바지의 아랫자락이었다. 윌리엄이 입고 있던 청바지의 아랫부분이 어딘가의 새까만 제복 바지처럼 변해갔다.

관객들은 그 제복이 누구의 제복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 제복만이 아니라 차 안에서부터 변해가던 윌리엄의 눈빛과 표정, 느껴지는 분위기과 어두운 그림자까지. 그저 영화일 뿐인데도 이렇게 살갗으로 느껴지는 오싹함과 무거움에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진 나트라.

그였다.

“이런…….”

소년을 주시하고 있던 테일러 국장은 소년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침음성을 내뱉었다.

“쉐도우맨…… 어쩌면 당신은 잘못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쉐도우맨!

테일러 국장의 말에 백배 동의하면서, 관객들은 마음속으로 쉐도우맨을 부르짖었다.

그때였다.

-국장님! 리의 움직임이 멈추었습니다!

그 보고에 테일러 국장과 관객들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요원의 말대로 거칠 것 없이 빌런을 향해 걸어가던 소년이 걸음을 멈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건 소년의 자의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걸음을 붙잡힌 것 같은 모습이었다.

테일러 국장의 생각대로, 소년은 강제로 발이 묶여 있었다.

도대체 누가 감히.

자신의 복수를 막는 것인가.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두 발에, 누구든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굳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제이? ……파트너?”

제이와 파트너가 소년의 두 발을 그림자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간절함이 가득한 몸짓으로, 소년이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었다.

아니, 그건 앞이 아니었다.

어둠이며 절망이며 외로움이며 공허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이었다.

절대 안 돼……!

소년을 지켜야 했다.

파트너! 제이!

송유정과 임예나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너희드을!

그에 잠시 당황하던 소년이 가라앉은 눈동자로 침착하게 말했다.

“제이, 내가 얼마나 쉐도우맨을 좋아하고 만나고 싶어 했는지 알잖아. 파트너, 너도 쉐도우맨이 죽어서 슬프잖아. 쉐도우맨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야.”

꼬옥-

소년의 말에도, 발을 붙잡은 제이와 파트너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왜? 어째서 막는 거야?!”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바로 눈앞에 쉐도우맨을 죽인 놈이 있는데! 어째서!!

“아무리 너희라고 해도, 더 이상의 참견과 간섭은 용납할 수 없어.”

검은 눈동자를 번뜩인 소년은 어두운 그림자를 움직여 제 두 발에 붙어 있는 두 그림자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다.

그보다 먼저 제이와 파트너가 움직였다. 간절함이 가득한 움직임이었다.

곧 공원 바닥에 길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걸 본 소년이 멈칫했다.

- You are Hero -

그건 복수에 눈이 멀어 잊고 있었던,

- Knight JIN -

쉐도우맨이 소년에게 준 히어로네임이었다.

으아……!

감정이 격해진 관객들의 자그마한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소년의 눈이 커졌다.

쉐도우맨을 처음 봤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쉐도우맨과 대화를 나눴던 그 시간들도. 저도 모르게 깊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소년은 자신의 영웅이었던 쉐도우맨을 닮고 싶었다.

어릴 때도, 지금도.

히어로 Hero.

기사 Knight.

사람들을 지키는 자.

소년, 아니, 윌리엄의 눈동자에 빛이 돌았다.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제이, 파트너. 미안해.”

끄아앙-

제이와 파트너가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다정하게 말하는 윌리엄에게 달라붙었다. 솔직히 냉정한 말투의 소년은 너무, 너무 무서웠었다.

그사이, 스믈스믈- 어두운 그림자를 내보내던 ‘진 나트라의 기억’이 담긴 상자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다 열릴 날만을 기다리며.

관객들은 스스륵 닫히는 상자의 모습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저 상자가 앞으로 나올 시리즈 전체의 문제(떡밥)가 될 거라는 사실은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그때,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윌리엄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저기에서 검녹색의 촉수들이 난리를 치고 폭발과 총격이 들려왔다. 그 사이로 퍼스트 요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오로지 복수라는 감정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던, 보이지 않았던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였다.

“제이, 파트너.”

쉐도우맨에 대해 생각하면 마음은 여전히 아릿했지만, 지금은 복수보다 먼저 사람들을 구할 때였다.

“지금이야말로 나이트 진이 나설 때겠지?”

제이와 파트너가 반짝이는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송유정과 임예나, 관객들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곧은 자세로 섰다.

바람이 불었다. 음악이 들렸다.

두두둥!

그건 앞으로 한 소절만 들어도 사람들의 심장을 반응하게 만들, 나이트 진의 OST였다.

아니, 벌써부터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끄아아아!

모두 입을 틀어막고 눈을 반짝이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두둥!

윌리엄의 그림자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아까처럼 무시무시했던 불꽃이 아니라, 안정감과 믿음을 주는 검은 불꽃이었다. 윌리엄 리의 히어로, 쉐도우맨의 그림자를 닮은 듯했다.

두두둥!

그 불꽃 같은 그림자가 윌리엄이 신고 있던 운동화부터 청바지, 셔츠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윌리엄이 입고 있던 옷도 변했다.

둥! 둥!

아까와는 다른 디자인의 군화와 검은 바지, 몸에 딱 맞는 셔츠와 제복, 그리고 망토가 그림자를 따라 생겨났고, 목에서부터 턱, 입술, 코끝까지 올라오는 마스크가 윌리엄의 하관을 가려주었다.

두웅!

바람에 따라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망토가 흔들렸다.

따스함과 친근함, 그리고 차분함이 깃든 검은색 눈동자는 믿음직스러웠다.

둥!!

흔들림 없이 바르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희망이 되는 기사(Knight)는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가자. 제이. 파트너.”

소년은 히어로로서 각성한,

나이트 진(Knight JIN)이었다.

* * *

“……그림자……!”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트 진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상체의 대부분이 검녹색의 기생 생물 ‘아로도’에게 삼켜진 빌런도 고개를 들어 나이트 진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끓어오르는 증오와 분노로 가득한 눈동자와 차분하게 가라앉아 신념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에 어째서인지 검녹색의 슬라임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남아 있는 남자의 몸을 빠르게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림자를 보고 다시 생성되기 시작한 제프 맥케이의 분노를 아로도가 잡아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림자!”

또 한 번, 발작과도 같은 빌런의 울부짖음과 함께, 사방에서 나이트 진을 향해 검녹색의 촉수들이 화살처럼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쾅-! 콰아앙!

화살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정도의 빠른 속도와 엄청난 크기, 굉장한 파괴력이었다.

그런 공격에도 자연스럽게 검을 움직이는 몸에 나이트 진은 의아한 듯 눈을 끔뻑였다.

“계승 덕분인가? ……아니면, 날아오는 건 쳐내야 하는 야구 타자로서의 본능?”

관객들이 동시에 생각했다.

아니, 그건 네가 진 나트라라서 그래.

빌런을 향해 달려나가는 나이트 진.

그러다 촉수들의 공격에 밟을 곳이 없어진 나이트 진이 당황하는데, 눈앞에 파트너가 만들어낸 삐죽한 가시가 빠르게 나타났다. 마치 철봉 같은 가시. 나이트 진은 곧바로 왼손을 뻗어 가시를 잡고 한 바퀴 빙글- 돌아 가시 위에 착지했다.

“고마워, 파트너.”

별말씀을.

확실히 임기응변에는 쉐도우맨과 함께했던 파트너가 강했다.

그림자 가시 위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나이트 진이 빌런이 서 있는 성당 앞을 바라보았다. 공원 여기저기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빌런을 막지 못하면 저 불길이 지구 전체를 뒤덮을 터였다.

검을 든 오른손을 꽈악 쥔 나이트 진이 가시 위를 힘차게 박차고 튀어 나갔다. 검은색 망토가 그 뒤를 따르는 그림자처럼, 날개처럼 펄럭였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나이트 진이 통신기를 눌렀다.

“죄송하지만……!”

콰아앙!!

통신 도중에도 또 하나의 전투기가 뒤집힌 채로 아래로 떨어졌다. 나이트 진의 쪽이었다.

“죄송하지만, 전투기와 퍼스트 요원분들을 뒤로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예의 바르고 정중하지만,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말투였다.

-……알겠습니다.

아주 잠시, 저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게 나이트 진인가, 진 나트라인가 생각하던 테일러 국장이 명령을 내렸다. 그에 전투기들과 퍼스트 요원들이 모두 일정 거리 뒤로 물러났다.

지금부터 나이트 진과 빌런.

둘만의 전투였다.

* * *

나이트 진은 제프 맥케이가 서 있는 성당을 향해 달려가며 통신기를 눌렀다.

“아직 잠식되기 전이니까 돌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쉐도우맨의 원수였지만,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완전히 잡아먹히기 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테일러 국장의 말에 나이트 진이 밝은 표정으로 검을 꽉 쥐었다.

그 모습에 관객들이 미소를 지었다.

몸에 밴 과거의 기억(진 나트라)으로 능숙하게 싸우지만, 이런 모습에서 이제 막 히어로가 된 윌리엄의, 아니, 나이트 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촥-!

검녹색의 촉수가 단번에 베어져 나갔다.

날카로운 검은색 눈동자가 화면에 비쳤다.

……물론, 가끔 ‘진 나트라’의 모습이 슬그머니 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제이! 파트너!”

다시 한번, 허공에 그림자 계단들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나이트 진이 제프 맥케이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성당으로 달려갈 때.

성당 앞에 서 있던 제프 맥케이는 오히려 다가오는 검은색 그림자들에 온몸을 가득 채우는 부정적인 감정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제프 맥케이는 12년 전 축복과 행복으로 가득했던 결혼식 당일, 검은색 웜홀로 빨려 들어간 자신의 신부를 떠올렸다.

차라리 자신이 대신 빨려 들어갔어야 했다. 아니, 그녀와 함께 갔어야 했다!

“……아델……!”

검녹색의 슬라임이 빠르게 남자를 뒤덮어갔다.

목에서부터 턱과 입술을 장악하고 코까지. 그리고 뒷목부터 머리카락과 이마까지.

그렇게 얼굴 전체를 뒤덮고, 마지막으로 눈만이 남아 있었다.

나이트 진과 남자, 제프 맥케이의 한쪽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분노가 가득한 눈동자였다.

나이트 진은 안타까운 듯,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 분노가 기생 생물 ‘아로도’의 에너지원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리라.

“제프 맥케이! 분노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러나 나이트 진의 말은 제프 맥케이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지금 남자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후회와 슬픔, 그리고 그리움이었기 때문이었다.

끝내.

제프 맥케이는 기생 생물 ‘아로도’에게 머리끝까지 잡아먹히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약과였다는 듯,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제 인간의 형태도 잃어버린 그저 슬라임 뭉치일 뿐인 ‘아로도’가 그 크기를 부풀려 나갔다. 그에 따라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뻗어져 있던 촉수들도 굵어지고 길어지고 날카로워졌다.

“이런!”

굵은 촉수가 그림자 계단의 지지대가 되는 기둥을 후려쳤다. 타격을 받은 그림자에 발판이 흔들렸고 그 위에 서 있던 나이트 진 또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다행히 몸이 먼저 반응해 안전하게 바닥에 착지할 수 있었다.

사뿐-히 망토를 펄럭이며 바닥에 내려앉은 나이트 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녹색의 촉수들이 땅속을 파고들어 나이트 진을 향해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바닥에 깔려 있던 포장재들이 마치 거북이 등딱지처럼 울퉁불퉁하게 사방으로 갈라졌다.

눈에 훤히 보이는 움직임이었지만, 공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땅 속을 파고들었던 촉수들에서, 마치 나뭇가지처럼 다른 촉수들이 자라나 사방에서 나이트 진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파아악! 팍! 파악!

망가지는 포장재들 사이에서 언제 거대한 촉수가 나올지 주시하고 있던 나이트 진은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작지만 날카로운 가시 같은 촉수가지들에 표정을 굳히고 검을 휘둘렀다. 제이와 파트너도 각자 방패를 만들어 막아냈다.

그때, 두꺼운 촉수가 땅속에서 튀어나와 나이트 진과 두 방패를 후려쳤다. 제이와 파트너가 빠르게 그림자를 키워 나이트 진을 감쌌다.

콰앙!

소리와 함께 검은 구체가 지상으로 추락해 있던 전투기와 부딪혔다. 콰아앙! 엔진과 부딪혔는지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윌리엄! 괜찮습니까?!

테일러 국장의 외침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커다란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관객들은 괜스레 불안해졌다.

‘아니, 물론 나이트 진까지 죽이진 않겠지만…….’

쉐도우맨도 죽여 버린 감독 아닌가.

어떤 미친, 아니, 상상도 못 한 전개가 펼쳐질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괜찮아요. 제이와 파트너가 지켜줘서 다친 곳은 없어요.”

뜨거운 불꽃 속에서 나이트 진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잠깐의 여유도 없이, 나이트 진은 정면으로 날아오는 굵은 촉수를 피해 움직이며 그 옆에서 뻗어 나와 화살처럼 온몸을 관통할 듯 내리꽂는 수십 개의 촉수가지들을 검으로 잘라냈다.

이번에는 마치 채찍처럼, 굵은 촉수들이 바닥을 내려쳤다. 공원 바닥재가 아주 가루가 될 정도로 힘껏 내리는 모습이, 그림자 방패로 막기에는 그대로 짓눌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윌리엄.

최대한 몸을 움직여 그 촉수 채찍들을 피하느라 바빴던 나이트 진이, 테일러 국장의 부름에 조금 늦게 통신기 버튼을 눌렀다.

“……네!”

-지금부터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참 착하기도 하지.

관객들은 촉수들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하는 나이트 진의 모습에 작게 웃고 말았다.

-제프 맥케이는 아로도에게 완전히 먹힌 것 같습니다. 생존 반응도 없다는 의견입니다.

나이트 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가까워진 성당 앞에 물컹거리는, 불투명한 검녹색 물체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에도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로도는 핵이 있습니다. 그 핵을 부수면 아로도를 처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핵.

나이트 진이 노려야 할 목표물이 정해졌다.

-핵의 위치는…….

테일러 국장이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아로도와 접촉하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로도와 접촉하면 윌리엄, 당신 안의 부정적인 감정이 증폭될 겁니다.

촤악-!

하고 검으로 촉수를 베어낸 나이트 진이 자세를 바로 하고 성당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쉐도우맨 일 때문에 걱정하는 거겠지.’

지금은 왠지 모르게 침착한 감정에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었지만, 아로도와 닿았을 때 어떤 감정이 들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로도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접촉하자마자 핵의 위치를 알아내고 부숴야 합니다. 윌리엄.

제이와 파트너가 그런 나이트 진을 둥글게 감싸 불길처럼 일렁이며 다가오는 검녹색의 촉수들을 모두 베어내고 짓누르고 파괴했다.

든든한 두 친구의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지은 나이트 진이 통신기의 버튼을 눌렀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있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해내야 했다.

* * *

촉수들과 싸우면 싸울수록 그림자들을 다루는 데 익숙해졌다.

진짜 기사처럼 처음 만들어낸 검으로 촉수들을 베어냈기도 했고, 때때로 형태가 고정되지 않다는 그림자의 특성을 이용해, 채찍이나 연검(탄성이 있어 부드럽고 유연한 검)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촤아악!

검은 제복에 망토를 휘날리며, 끈적한 촉수를 베어내는 나이트 진의 모습의 일견 시원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묘하게 기품 있는 모습이…… 누군가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자아를 가진 제이와 파트너까지 나이트 진을 보조해 공격에 가세하니, 히어로는 하나뿐이지만 마치 세 명이 있는 듯한 화려한 액션 장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타앙! 하고 방패를 만들어 나이트 진을 보호하는 데 열심히인 제이와, 촤악! 하고 촉수를 베어내며 나이트 진과 함께 날뛰는 파트너의 모습이 달라 재미있었다.

두 그림자의 성격 차이가 확실히 느껴졌다.

그렇게 나이트 진은 두 그림자와 함께, 열심히 지상을 달리고, 그림자 계단을 밟으며, 하늘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하면서 착실하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침내, 커다란 종이 달린 성당 앞에 다다랐다.

거기에 아로도가 있었다.

쉐도우맨의 원수가 있었다.

나이트 진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면 안 된다.

-침착해야 합니다. 윌리엄.

테일러 국장의 목소리에 소년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이트 진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나는 나이트 진.

사람들을 지키는 기사다.

두 그림자 친구가 촉수들의 공격을 막는 사이, 소년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끈적할 것 같은 검녹색의 물체에 검을 들지 않은 손을 집어넣었다.

두근두근.

자신의 것이 아닌 불쾌한 감정이 밀려 들어온다.

분하다. 슬프다. 아프다. 괴롭다. 그립다.

마치 불이 난 곳에 부채질하듯, 아니 기름을 들이붓는 듯한 속삭임이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그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집중한다. 더더욱 열중…….

‘안 돼.’

나이트 진은 집중했다.

귀를 막고 아로도의 핵을 찾았다.

어디지? 어디에 있지?

“어디에 있는 거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잠시 관객들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확실해. 이거 진 나트라야.

그렇게 핵을 찾고 있던 나이트 진이, 끈적거리는 아로도에서 급하게 손을 빼냈다. 그리고 통신기 버튼을 눌렀다.

“이거 본체가 아니에요! 핵이 없어요!”

목표물이라고 생각했던 아로도가 본체가 아니었다!

-!!

“벌써 분열한 걸까요?!”

나이트 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이와 파트너도 길쭉하게 그림자를 늘려 마치 등대처럼, 망원경처럼 주위를 살폈다.

테일러 국장과 퍼스트 요원들도 나이트 진의 보고에 급하게 컴퓨터를 조작했다. 벨 나트라가 전해준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했다.

-아직, 아직 아닙니다. 분열까지는 멀었습니다. 아마도 윌리엄, 아니, 나이트 진 당신의 등장에 위험을 감지하고 일부분을 잘라내고 중요한 부분만 도망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치 도마뱀의 꼬리처럼 말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로…….”

나이트 진이 말을 멈추고 뒤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종이 달린 작은 성당.

닫혀 있던 성당의 문이 열려 있었다.

* * *

나이트 진이 천천히 성당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콰아앙! 무언가 날아와 나이트 진이 서 있던 자리에 박혔다. 성당 내부에 있던 의자였다.

빠르게 몸을 피한 나이트 진이 성당 내부를 살펴보았다. 끈적거리는 액체들과 촉수들이 가득한 성당 안.

“국장님. 여기 있어요.”

나이트 진은 성당 단상 앞에서 아로도의 본체로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크기는 밖에 있던 가짜보다 작았지만, 느껴지는 에너지는 그보다 훨씬 강했다.

-부탁합니다. 나이트 진. 조심하세요.

“걱정 마세요.”

통신기에서 손을 뗀 나이트 진은 숨을 가볍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고는,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제이와 파트너도 그 뒤를 따랐다.

성당 안에서의 전투는 더욱 치열했다.

아무래도 건물 안이라 피할 수 있는데 한계가 있기도 했고, 공격하고 막다가 뜻하지 않게 건물의 벽이나 물건이 떨어져 내려 방어에 몇 배로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촉수들도 더욱 끈질겼다.

촤악……!

한 번에 베이지도 않고 오히려 나이트 진이 들고 있는 검을 진득하게 감싸 그 끝을 타고 올라와 나이트 진의 손에 닿으려고 했다.

미간을 찌푸린 나이트 진은 검을 다시 그림자 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만들어내며 촉수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나이트 진과 아로도의 전투에 벽과 기둥들이 부서지니, 천장이 유지될 리가 없었다.

쿠우웅!

천장의 돌덩어리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간이 넓어지자, 나이트 진과 두 그림자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다.

그에 아로도의 본체는 주춤주춤 뒤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한번, 나이트 진은 아로도의 앞에 서게 되었다.

후우-

한 번 겪어봤던 일이지만, 다시 그 속삭임을 들으려고 하니 조금 겁이 났다.

그런 나이트 진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제이는 ‘괜찮아.’ 하고 말하는 듯 나이트 진을 토닥거렸고, 파트너는 ‘쫄?’이라고 하는 듯 알짱거렸다.

“괜찮아, 제이. 안 쫄았어!”

후우-

다시 숨을 내쉰 나이트 진이 한쪽 무릎을 꿇고 가짜 아로도보다 작은, 본체 아로도의 끈적이는 검녹색 몸에 손을 집어넣었다.

----!!!

아까보다도 강한 메시지들이 머릿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소리였다. 세뇌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어디냐.’

나이트 진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차갑고 냉정한 진 나트라의 조각이 도움이 되었다.

“찾았다……!”

나이트 진은 빠르게 아로도의 핵에 검을 찔러 넣었다.

날카로운 검이 무언가 통과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치 크게 부풀어 있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검녹색의 물질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제대로 핵을 부순 것이었다.

이제는 들려오지 않는 메시지에, 나이트 진은 녹아 사라지는 듯한 아로도에서 손을 빼내 검녹색의 진득한 체액을 털어내듯 장갑을 낀 손을 흔들었다.

뭐랄까.

많은 일이 있었던 것치고는 허무한 끝이랄까.

후우-

긴장을 풀며 숨을 내쉰 나이트 진이 성당 안을 둘러보았다.

“……뒤처리는 퍼스트가 해주겠지?”

부서진 성당에 뒷감당에 눈앞이 아찔해진 (전 나트라 왕자님) 현 소시민, 나이트 진은 제이와 파트너에게 그렇게 말할 때였다.

……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나이트 진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주변은 조용했다.

그때, 겁 없는(그냥 생각이 없는 듯한) 파트너가 녹아 없어지는 아로도의 잔재 뒤쪽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거기 뭐가 있어?”

나이트 진이 파트너 쪽으로 걸어갔다. 제이는 방심하지 않고 나이트 진 주변을 경계했다.

“……!”

거기에는 검녹색의 체액으로 뒤덮인 제프 맥케이가 있었는데, 죽은 아로도와 함께 녹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착한 윌리엄은 통신기를 눌러 퍼스트를 부르려고 했다. 제프 맥케이가 소년의 손을 강하게 잡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왜…….”

제프 맥케이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거친 목소리였지만, 힘이 쭉 빠져 있는 목소리였다.

성당 중앙.

밝은 빛이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나이트 진과 제프 맥케이를 비추었다.

두 사람과 바닥에 아름다운 빛 그림자가 생겨났다.

언뜻 보면 성스러워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너만…… 돌아온 거지……?”

제프 맥케이의 눈동자에 번진 원망은,

나이트 진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나만…… 돌아와?’

“그게 무슨…….”

혼란스러워하던 나이트 진이 무어라 되묻기도 전에, 제프 맥케이는 검녹색 체액으로 변해 그대로 녹아내렸다.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나이트 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이트 진! 윌리엄! 괜찮습니까? 아로도의 반응은 사라졌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통신기로 테일러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손을 들어 통신기의 버튼을 누른 나이트 진이 입을 열었다.

“……아뇨.”

자신에게만 있는 그림자.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던 퍼스트.

그리고 자신을 납치하고, 의미 모를 말을 남긴 제프 맥케이.

나이트 진은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비치는 빛을 뒤로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 * *

그렇게 아로도 사건이 모두 끝나고, 윌리엄은 집으로 돌아왔다.

창 밖으로 주황빛 노을이 보일 때.

윌리엄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펼쳐져 있는 노트와 한쪽에 놓여져 있는 야구 배트.

두 가지를 번갈아 보던 윌리엄은 고민을 끝낸 듯 손을 뻗었다.

손에 잡힌 것은 그림자 색을 닮은 검은색 펜.

윌리엄은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윌리엄, 저녁 먹자.”

“네.”

엄마의 부름에 펜을 노트 옆에 내려놓은 윌리엄이 의자에서 일어나 1층으로 향한다.

잠시 후, 1층에서 윌리엄과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아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데?”

“저 대학 가려고요.”

그 대화를 들려주며 카메라는 노트를 보여주었다.

일곱 살 꼬마가 적은 삐죽빼죽한 질문 아래로,

근사한 글씨체의 대답이 적혀 있었다.

[WHO AM I?]

[I AM KNIGHT JIN]

* * *

두두둥!

스크린이 검게 변하며, ‘나이트 진’의 OST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감동적이다. 재밌었다. 역시 이서준이다. 액션씬 멋있다. 연출 좋았다.

그런 모든 감상들을 뒤로하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쉐도우맨……진짜 죽은 거야?”

그에 상영관이 시끄러워지려던 찰나, 누군가 외쳤다.

“아직 쿠키 영상이 남아 있어요!”

그에 다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끝날 리가 없다.

이렇게 끝나면 안 된다악!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에 쫀 것처럼 엔딩스크롤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화면이 밝아졌다.

“……역시!”

그 한마디를 끝으로 상영관이 조용해졌다.

쉐도우맨. 쉐도우맨. 쉐도우맨!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송유정과 임예나, 그리고 관객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퍼스트 국장실이었다.

……어?

모두가 의아해할 때.

의자에 앉아 있던 테일러 국장과 퍼스트 요원의 대화가 들려왔다.

“정말로 어셈블의 뒤를 이을 새로운 단체를 만들 생각이세요?”

“그래야지.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영웅들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퍼스트 요원이 들고 있던 파일들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꼭 이런 사람들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다 능력은 출중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능력은 출중하죠. 능력은…….”

테일러 국장이 웃으며 ‘극비’라고 적힌 파일들을 펼쳤다. 그리고 관객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천천히 서류를 넘겼다.

[팬텀] 위험도 XX

[화이트블러드] 위험도 XXXX

[버서커] 위험도 X

[매드해터] 위험도 XXXXX

지금까지 마린사 슈퍼히어로 시즌2 솔로 무비로 나왔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테일러 국장이 마지막 파일을 펼쳤다.

[나이트 진(진 나트라)] 위험도 XXXXX(xxxxx)

“위험도는 최대 5개 아니었어요?”

“특히 더 주의해야 하는 인물이라, 예외적으로 더 넣었지.”

위험도 10이라니.

듣기만 해도 오싹해진 퍼스트 요원이었다.

“정말 이런 인물들로 만들 거예요, 국장님?”

“만들어야지. 이름도 벌써 정해놨어.”

테일러 국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일레귤러스Irregu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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