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767화
토요일.
윌리엄은 공원에서 맥을 만나 감사 인사를 전하며 말했다.
“저 야구선수가 되려고요. 훌륭한 선수가 돼서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거예요. 물론 야구가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예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윌리엄의 모습에 맥이 미소를 지었다.
* * *
새로운 야구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탄 윌리엄의 뒤를 따라 몇몇 사람들이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스 계단에 발을 내딛는 남자가 있었다.
모자를 꾹 눌러 쓰고, 후드까지 뒤집어써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카메라는 윌리엄의 뒤에 앉는 그 남자를 스치듯 비쳐주었다.
창밖에서 햇빛이 들어왔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낸 윌리엄은 갤러리 앱에 들어가 부모님과 찍은 사진을 보았다.
현재부터 과거로, 천천히 돌아가는 사진들.
하나하나 넘겨보던 윌리엄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일곱 살 윌리엄이 곰인형을 안고 엄마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윌리엄이 작게 웃었다.
그때의 어린 나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
다고.
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너……!”
뒤에서 목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짙은 녹색의 무언가가 뒷자리에서 사방으로 터지듯 뻗어 나가 버스의 철판을 뚫고 바로 옆에 있는 차량들까지, 날카로운 창날들처럼 찔러댔다.
꺄아아악!!!
놀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윌리엄이 상황을 파악하고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제이가 반응했다.
검은색 그림자가 방패처럼 솟아올라 뒤에서 내리꽂히는 어두운 녹색의 송곳을 막아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내 윌리엄의 시야는 새까맣게 물들었다.
“……너였구나……윌리엄 리가.”
목표물을 찾은 남자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녹색 촉수에 휘감겨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윌리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 *
“아로도라는 기생 생물이라고 합니다.”
퍼스트 본부.
테일러 국장이 쉐도우맨에게 벨 나트라에게서 전해 받은 자료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부정적인 에너지를 흡수하며, 숙주가 가장 행복해하는 장소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숙주를 찾아내 이동한다……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테일러 국장이 영상들을 보여주었다.
퍼스트의 비젯이 야구장으로 떨어지는 영상이었다.
“여기에서 야구장에 있던 누군가에게 파고들었겠죠.”
그리고 뉴욕 여기저기에서 터진 자잘한 사건들의 영상들도 보여주었다. 검녹색의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화면에 여러 번 잡혔다.
“저 검녹색의 촉수가 아로도입니다. 사람들의 부정적 에너지를 먹으면서 점점 더 성장하고 있죠.”
이어지는 영상 속에서도 점점 커져가는 검녹색의 촉수 덩어리가 보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분열할 정도로 성장하게 될 겁니다. 그 전에 막아야 합니다.”
“지금의 숙주가 누군지 밝혀졌습니까?”
쉐도우맨의 질문에 테일러 국장이 고개를 저었다.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밤낮없이 계속해서 터지던 사건들도 최근 들어 잠잠해졌고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쉐도우맨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일어난 사건이 어딥니까?”
“그건…….”
테일러 국장이 대답하려고 할 때, 요원 하나가 긴급한 소식을 알렸다.
“국장님. 윌리엄 리가 납치됐습니다!”
그에 테일러 국장과 쉐도우맨이 눈을 부릅떴다.
“범인은…… 아로도! 아로도에 잠식된 인물로 보입니다!”
“뭐!?”
“영상이 있습니까?!”
“지금 재생하겠습니다!”
쉐도우맨의 외침에 스크린으로 영상이 재생되었다.
당장에라도 사건 현장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쉐도우맨은 침착하게 영상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의 손아귀에서 일그러져 가루가 되는 테이블을 보면 침착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거대한 화면으로 사건 당시의 버스 내부와 외부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온 검녹색의 촉수들의 중심에 있는, 후드를 쓴 남자를 본 테일러 국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남자의 몸에 들어가 있었군.”
빌런을 살피는 국장과 달리, 쉐도우맨의 눈에는 남자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는 검녹색의 고치(윌리엄)만 보였다.
“현재 장소는?”
“지금 추적 중입니다.”
요원의 말에, 쉐도우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당장에라도 뛰어나갈 것 같은 쉐도우맨을 향해, 테일러 국장은 침착하게 말했다.
“아로도가 누군가를 납치한 건 처음입니다, 쉐도우맨. 벨 나트라의 자료에도 없었고요.”
부정적 에너지를 흡수하고 숙주의 행복한 장소를 파괴하는 것이 ‘아로도’의 본능이며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단순한 생물이 납치 같은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그 말은…….”
“숙주인 저 남자가 의식을 잃지 않고 아로도를 조종하고 있다는 거겠죠.”
테일러 국장이 덧붙였다.
“게다가 저렇게 많은 사람들 중, 윌리엄 리만 데려간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이유를 알면 윌리엄 리가 있는 장소도 알 수 있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테일러 국장의 말에, 깊은숨을 내쉰 쉐도우맨이 화면에 나타난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초췌한 모습.
쉐도우맨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윌리엄이 무사하지 않다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 *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폐선, 맨 아래.
벗겨진 페인트와 녹이 슨 철근들, 마구잡이로 버려진 쓰레기들과 오랫동안 방치된 듯 쌓여 있는 먼지로 가득한 곳.
“으음…….”
불길하고 기분 나쁜 검녹색의 진득한 액체에 휘감겨 공중에 매달려 있던 윌리엄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 친구, 제이도 번쩍 깨어났다.
“제, 크흠, 제이?”
툭-
제이가 볼을 두드리는 느낌이 느껴졌다. 윌리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시야가 트인 윌리엄은 또래답지 않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건 ‘사라진 누군가’와 닮아 있는 표정이었다.
윌리엄이 물었다.
“제이, 이거 풀 수 있겠어?”
시무룩하게 고개를 젓는 제이가 고개를 저었다.
“빛이 없구나…….”
‘그림자’ 친구, 제이의 약점은 어둠.
사방이 꽉 막힌 이곳처럼,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곳에서는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고민하고 있을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윌리엄이 있는 구역 전체가 위에서 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에 놀란 윌리엄과 제이가 반사적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물론 녹슨 철판으로 막혀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콰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이번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방 전체가 기울었다. 그에 따라 촉수에 달랑달랑 매달린 윌리엄도 함께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에 윌리엄은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이, 누가 구하러 왔나 봐.”
첫 번째는 자신을 구하러 온 누군가(아마도 히어로)가 위에서 빌런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여긴 배 안인가?”
이곳이 물 위라는 것이었다.
* * *
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로, 마치 천장을 통과하듯 올라가는 듯한 연출을 보여주며 맨 꼭대기까지 도달했다. 어둠이 내려앉고 달빛만 비치는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윌리엄의 추리대로 그곳은 배였다. 이제 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폐선.
그 낡고 녹슨 갑판 위에서 검은색 그림자와 검녹색의 촉수가 강렬하게 맞부딪히고 있었다.
“아이는 어디 있지?!”
아로도의 숙주를 발견했다는 정보를 듣고 곧바로 온 쉐도우맨이었지만, 하늘은 벌써 깜깜한 상황이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초조해진 쉐도우맨의 외침에도 남자는 오직 ‘……그림자!’만 중얼거리며 공격하고 있었다.
“정말 제정신인 거 맞습니까?”
-쉐도우맨 당신만 공격한다는 것부터가 제정신이라는 거죠. 그것보다 남자의 얼굴을 확실하게 찍어주세요. 누군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윌리엄 리를 납치한 이유를 알 수 있겠죠. 당신을 공격하는 이유도요.
“먼저 윌리엄부터 찾아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냉정하게 말한 쉐도우맨이 그림자로 남자를 휘감았다. 마치 슬라임처럼 유연해진 남자가 그림자 밧줄을 피해 도망쳤다. 다시 한번 그림자와 촉수가 강하게 부딪혔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파트너.”
응?
쉐도우맨의 어깨 위에 나타난 파트너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근처에 윌리엄이 있는지 찾아봐. 일단 배 안부터.”
알았어!
파트너가 길게 그림자를 늘리며 배 안으로 사라졌다.
* * *
콰아아앙!
낡은 배라서 그런지, 충격을 받을 때마다 쇳가루와 먼지가 부슬부슬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 윌리엄이 침을 꼴깍 삼켰다.
“……구하러 온 거 맞겠지? 설마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 위쪽에 가서 히어로분한테 나 여기 있다고 좀 알려줄래? 동료 중에 쉐도우맨이 있으니, 이상한 그림자 취급은 하지 않을 거야.”
제이가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그림자를 늘려나갔다.
그때였다.
빼꼼-
천장을 가득 채운 불길하고 기분 나쁜 검녹색의 슬라임 사이로, 검은색의 무언가가 나타났다. 익숙한 느낌이 든 윌리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회색의 제이도 놀란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 파트너!”
윌리엄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쉐도우맨의 그림자, 파트너였다.
쉐도우맨이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파트너! 쉐도우맨에게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 좀 알려……!”
윌리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콰아아앙!!
하고 큰 충격이 전해졌다.
지금까지 느꼈던 충격 중에서도 가장 강한 충격이었다. 동시에 먼지와 바람이 크게 일었다.
처음에는 먼지 바람이, 그 뒤로는 시원하고 바다 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윌리엄에게까지 밀려들었다. 불안함으로 가득하던 마음을 시원하게 날리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빛이 비쳤다.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커다란 구멍이 뚫린 천장에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 아래 한 남자가 있었다.
빛을 등지고 선 남자는 새까만 그림자로 인해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림자야말로 남자, 그 자체였으니까.
“괜찮니, 윌리엄?”
쉐도우맨.
윌리엄의 히어로였다.
으아아아악!
멋있어! 진짜 멋있어!
하고 나올 것 같은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은 송유정과 임예나는 눈을 반짝이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둘 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쉐도우맨. 근데 버스에 저 말고 타고 있던 분들이 많았는데…….”
바닥에 발을 딛고 선 윌리엄이 쉐도우맨에게 말했다. 그에 쉐도우맨이 웃으며 답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다니, 참 잘 자랐다.
“다른 사람들은 다치긴 했어도 괜찮아. 너만 납치됐거든.”
“저만요? 어째서요?”
“그건-”
의아해하는 윌리엄에, 쉐도우맨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파트너와 제이가 공격과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제 물어봐야지.”
쉐도우맨이 뚫은 구멍으로, 끈적하고 불쾌한 점액성 액체들이 한 방울, 두 방울 진득하게 떨어졌다. 천장에 가득하던 액체들과 윌리엄을 묶고 있던 촉수까지 꾸물꾸물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된 검녹색의 액체 위로, 누군가 내려왔다.
“……그림자……!”
마치 검녹색의 슬라임과 한 몸이 된 것 같은 남자였다.
딱 봐도 윌리엄을 납치한 범인인 것 같은 남자는 몸의 반 이상이 슬라임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놈들이……!”
남자의 으르렁거림과 함께, 촉수들의 끝이 창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십수 개의 촉수들이 내리꽂을 듯 허공으로 떠올랐다.
“피해 있어, 윌리엄. 제이, 부탁한다.”
쉐도우맨이 그림자 속에서 기다란 무기를 꺼냈다. 파트너도 어둠 속에 숨어든 사자처럼 빈틈을 노리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
“네.”
끄덕.
윌리엄은 자신들이 쉐도우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제이는 윌리엄을 보호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콰아앙!
그리고 큰 소리와 함께 쉐도우맨과 빌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그사이 윌리엄은 탈출구를 찾아보았다. 아무래도 여기 있으면 방해가 될 것 같았다.
달빛을 조명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 탈출구는 한 군데밖에 없었다. 윌리엄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쉐도우맨이 천장에 뚫어놓은 구멍.
그곳으로 탈출하려고 고민하던 윌리엄은 찰박- 하는 낯설고도 익숙한 소리에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
신발 쪽에 물이 고여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곳은 물 위였다.
빌런의 공격으로 배에 구멍이 뚫린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윌리엄은 쉐도우맨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쉐도우맨은 파트너를 윌리엄에게 보내 탈출을 돕도록 했다.
그렇게 탈출 준비가 끝나고.
한결 마음이 편해진 윌리엄이 쉐도우맨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파트너가 다시 주인에게로 복귀하려고 할 때.
콰아아앙--!!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커다란 충격음이 들렸다.
“……쉐도우맨?”
파트너가 촐랑거림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고, 윌리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먼저 보이는 것은 두 다리를 바닥에 딛고 우뚝 서 있는 빌런과 검녹색 촉수들이 길게 뻗어져 있는 모습. 윌리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페인트가 벗겨진 벽 아래.
녹슨 철근과 쓰레기로 가득한, 검녹색 촉수들이 창처럼 꽂혀 있는 그곳은 먼지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아니야…….”
윌리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왠지 모르겠지만, 아무 움직임 없이 우뚝 서 있는 빌런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찰박- 어느새 종아리까지 올라온 바닷물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천천히 가라앉는 먼지 사이로, 파트너가 검녹색 촉수들을 뽑아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검녹색의 촉수에 묻어 있는 붉은색 피에,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쉐도우맨!!!”
쓰레기 더미 속.
몸에 검녹색의 촉수들이 꽂힌 쉐도우맨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 * *
쉐도우맨을 관통한 검녹색 촉수들을 통해, ‘쉐도우맨의 부정적 에너지’가 아로도에게로 쏟아졌다.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소화하다 못해 폭주해 버린 빌런.
그 반동에 폐선이 엉망진창으로 흔들렸다.
파트너와 제이가 쉐도우맨과 윌리엄을 둥글게 감쌌고 윌리엄은 쉐도우맨을 꽉 끌어안았다.
거친 숨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짧고도 긴 시간이 흘렀다.
배의 움직임이 멈추자, 파트너와 제이가 그림자를 걷어내며 쓰레기를 이리저리 치웠다. 마치 무너진 공간처럼, 쉐도우맨과 윌리엄은 겨우 몸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에 갇혀 있었다.
빌런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사방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후우-
하지만 그것들보다도 작아진 쉐도우맨의 숨소리가 윌리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윌리엄.”
“쉐, 쉐도우맨, 말하지 마세요. 지금 제이에게 부탁해서 도와줄 사람들을 불러오게 할게요!”
약해진 쉐도우맨의 목소리에 윌리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둘 다 나가는 건 힘들 것 같구나…….”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이랑 파트너가 같이 힘내면……!”
윌리엄의 눈에 맺힌 눈물이 쉐도우맨의 위로 떨어졌다. 직접 만난 건 짧은 기간이었지만, 오랜 시간 윌리엄의 영웅이 되어주었던 쉐도우맨이었다.
“……파트너…….”
쉐도우맨의 목소리에 파트너가 쓰레기 더미를 헤쳐나갔다. 그리고 바깥과 이어진 틈을 만들어냈다.
반짝.
바깥에서 비친 밝은 달빛이 쉐도우맨과 윌리엄 사이로 내려앉았다.
“……배워놓길 잘했군.”
“……쉐도우맨?”
의미 모를 말에 윌리엄이 훌쩍이며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좀 더 정식으로 해야겠지만 조건은 충분했다.
필요한 것은 빛과 그림자, 접촉과 주술문.
쉐도우맨이 윌리엄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나의 어둠이-]”
나트라의 오래된 고어(古語)로 된 주술문에, 쉐도우맨의 심장에서 검고 동그란 것이 천천히 올라왔다. 나트라인들이 ‘씨앗’ 또는 ‘순수한 어둠’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구체에, 눈물로 붉어진 윌리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쉐도우맨……이게 무슨……?”
놀라는 윌리엄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쉐도우맨은 주술문을 이어나갔다.
“[너의 빛이 되기를-]”
달빛을 받은 ‘순수한 어둠’이 환하게 빛났다.
마치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Eclipse)처럼 환하게.
그리고 ‘빛나는 순수한 어둠’은 쉐도우맨의 손과 이어진 윌리엄의 손을 따라 이동해, 윌리엄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두근!
순간, 윌리엄은 심장이 크게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디딘 기분이었다.
밀어닥치는 새로운 감각에 당황하는 윌리엄을 보며, 약해진 자신의 힘과 사라진 파트너를 느끼며, 쉐도우맨은 다시 한번 작게 중얼거렸다.
“나의 어둠이, 너의 빛이 되기를.”
계승(繼承/succession)이었다.
그 엄숙하고도 장엄한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 이제 윌리엄이 힘을 얻고 둘이서 함께 탈출하겠지? 하고 벌써부터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던 관객들은 이어지는 장면들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쉐도우맨! 같이 탈출해요!”
“……미안하다. 그러기엔 힘이 부족해.”
“제가,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전…… 전 안 갈 거예요! 쉐도우맨과 함께가 아니라면 절대로……! 그러니까 같이 탈출해요! 쉐도우맨!”
“……윌리엄. ……평범하고 행복하게 지내렴.”
“저 혼자서는 안 간다니까요! 절대로 안 갈 거예요!”
쉐도우맨, 맥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부탁한다. 아버지의 그림자…….”
희미한 달빛 아래.
‘계승’을 받은 검은색 그림자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쉐도우맨! 같이 가요! 제발! 제발 같이……!!”
이어지려던 윌리엄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검은색 그림자가 윌리엄의 머리끝까지 감쌌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윌리엄이 인식할 틈도 없이 빠르게 아래로, 마치 물속으로 잠수하는 것처럼 그림자 안으로 스며들었다.
윌리엄이 사라지고 고요한 주변.
바닷물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윌리엄…….”
부디, 오래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메이저리그 경기…… 보고 싶었는데……아쉽네.”
아버지와 벨도 불러서 함께.
쓰레기 더미에 등을 기댄, 피투성이의 쉐도우맨이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부터 무거웠던 눈꺼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아주 천천히,
온기가 깃든 숨이 잦아들었다.
……어? 어어? 어어어??
저기요!?! 아니? 잠깐만요???
관객들이 입을 쩌억 벌리고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이게…….”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아!?
누군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서 말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다들 경악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아닐 거야. 아니겠지.
설마, 진짜,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런 관객들의 생각을 비웃듯.
싸아아아-
어두운 밤.
누군가의 슬픔을 아는 듯, 비가 내렸다.
빛이 비치지 않는 잔디밭 위, 동그란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 안에 윌리엄이 있었다.
“제이! 돌아가야 해!”
당장 돌아가야 했다.
당장 돌아가서 쉐도우맨을 구해야 했다.
“제이!! 제발!!”
철벅-
윌리엄은 젖어 있는 바닥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렸다. 윌리엄은 자신의 그림자 친구에게 부탁했다. 소년의 평생, 이렇게 간절한 적이 없었다.
“지금 당장 가야 해!”
하지만 윌리엄의 간절한 모습에도,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제이는 시무룩한 모습으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제발…… 가야 한다고…….”
제이의 생각이 전해졌다.
그건 ‘계승’으로 제이와 이어져 있는 윌리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 제이에게는, 그리고 자신에게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막을 우산을 만들 힘조차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쉐도우맨이 있는 폐선까지 이동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 돼…….”
구할 수 없다.
나의 영웅을.
쉐도우맨을.
바닥에 주저앉은 윌리엄은 넋이 나간 듯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비로 내려간 체온 탓인지 아니면 현재의 상황 때문인지, 창백해진 윌리엄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건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그런 윌리엄의 슬픔이 관객들에게도 전해졌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반응하지도 못했던 관객들은 그제야 하나둘 이야기를 이해하고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쉐도우맨이 죽었어?
아니지? 아니겠지?
관객들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스크린만 바라보았다.
비가 온다.
늦은 밤까지 잠 못 이루며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엄마와 아빠.
“윌리엄…….”
전혀 정보를 알 수 없는 상황에, 그나마 부부가 이렇게 기다릴 수 있는 것은 퍼스트에서 나온 요원이 윌리엄을 무사히 데려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꼭 데려오겠습니다. 돌아오면 맞이할 수 있게 집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퍼스트 요원, 아니, 쉐도우맨은 그렇게 말하고는 굳은 얼굴로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꼭 데려오겠다는 말과 표정에서 쉐도우맨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근데…… 근데……!’
부모님의 품에 안겨 우는 윌리엄을 보며 관객들도 결국 머리끝까지 차오른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기가 죽어버리면 어떡해!!’
* * *
윌리엄을 퍼스트 본부에 데려간 테일러 국장은 ‘아로도’에 대해 설명했다.
“분열한 아로도들은 끊임없이 부정적 에너지를 흡수하고 분열한다고 합니다. 그 행성에 살고 있는, 감정이 있는 생명체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말이죠.”
어느새 검녹색밖에 보이지 않는, 붉었던 행성을 보며,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지구도…….”
“네. 분열하기 전에 막지 않으면 저렇게 변할 겁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회사에 있을 부모님과 학교에 있을 친구들, 그리고 반갑게 인사하던 이웃 주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두가 사라진다.
……쉐도우맨처럼.
그런데 어째서일까.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불안정하게 뛰던 심장이, 갑자기 차분해졌다.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도 누군가 깔끔하게 정리한 듯 깨끗해졌다.
‘언제나 침착하셔야 합니다. -님.’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윌리엄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착하다 못해 냉철한 목소리였다. 그건 민간인인 소년이 낼 수 없는, 많은 일을 겪어본 자에게서나 나올 법한 차분함이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누군가의 모습에 잠시 희망을 가졌다가 국장의 확인 사살에, 계속 흘러나오는 눈물만 닦고 있던 관객들은 이어지는 장면에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환청처럼 들리는 작은 목소리(자막은 확실히 나왔다)와 방금 전 그 모습.
‘진 나트라 떡밥인가?’
하지만 관객들이 더 이상의 생각을 이어나갈 새도 없이 테일러 국장이 말했다.
“미끼가 되어주십시오. 윌리엄 리.”
미끼?!
* * *
집에 도착한 윌리엄은 슬픔에 빠졌다.
그런 윌리엄을 위로하는, 움직이는 곰인형.
“제이…… 고마워.”
그러자 제이가 볼록 튀어나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시에 곰인형이 윌리엄의 오른팔을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윌리엄의 고개도 제이와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제이는 여기 있는데?
윌리엄과 제이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했다.
곰인형이 있었다.
“……윌?”
그건 곰인형 ‘진’이 아니었다.
곰인형 ‘진’과 나란히 장식되어 있던 낡은 곰인형 ‘윌’이 움직이고 있었다.
안녕!
하고 발랄하게 춤을 추는 그림자에 의해.
윌리엄은 눈을 크게 뜨며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관객들도 퉁퉁 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트너!!”
쉐도우맨의 그림자, 파트너였다.
* * *
파트너는 열심히 그림자 연극으로 자신이 왜 윌리엄의 그림자 속에 있는지 설명했다.
“쉐도우맨이…… 맥이…….”
맞아! 맥!
파트너가 느낌표를 머리 위에 띄웠다. 그러고는 윌리엄의 방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맥은 어디 있어? 맥! 맥!
그 순진하고도 천진난만한 파트너의 모습에 윌리엄은 붉어진 눈가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관객들도 파트너의 귀여운 모습과 윌리엄이 슬퍼하는 모습에,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나올 눈물도 없다고 생각하며.
“맥이 죽어버렸어…… 널…… 널 나에게 주고…… 거기서 죽어버렸어…….”
……죽어? 맥이?
그림자도 숨을 쉰다면 아마 숨 쉬는 것까지 멈추어버리지 않았을까.
파트너는 석상이 된 것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미안해…… 미안해. 파트너. 나 때문에…… 맥이…….”
문득, 파트너의 머릿속에 십여 년 전에 봤던 어린 윌리엄, 아니, 진 나트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하고 미안해하고 구해주고 싶어 했던 맥의 모습도.
‘윌리엄을 지켜줘, 파트너.’
‘계승’ 직전, 자신에게 전해졌던 맥의 의지도.
톡톡-
파트너가 윌리엄의 무릎을 두드렸다.
“……파트너?”
놀라 고개를 든 윌리엄의 눈앞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윌리엄이었다.
그리고 두 개의 그림자가 마치 방패처럼 윌리엄 앞에 세워져 있었다. 마치 윌리엄을 지키겠다는 듯이.
“……날 지켜주겠다는 거야?”
끄덕.
그리고 파트너는, 그림자 방패 중 하나(아마도 파트너)의 옆에 한 남자의 모습을 만들었다.
쉐도우맨, 맥이었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쉐도우맨, 맥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아닌 든든한 모습으로 방패 옆에 서 있었다. 꼭 맥도 윌리엄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처럼.
그에, 윌리엄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테일러 국장와 통화한 윌리엄은 파트너에게 미끼 계획을 설명했다.
“어, 음. 다시 설명해 줄까, 파트너?”
굉장히 쉽게 설명한 것 같은데.
볼을 긁적인 윌리엄이 더욱더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잠깐 동안만 내가 쉐도우맨이 되는 거야.”
갸웃?
파트너는 여전히 윌리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파트너는 쉐도우맨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애가 히어로라…….’
노을이 지는 어느 날.
쉐도우맨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적, 히어로가 되고 싶었다던 윌리엄의 말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러면 코드네임이 필요하겠네. 뭐가 좋을까.’
맥은 반듯하게 자란 윌리엄 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잊혀진 진 나트라를 떠올렸다.
‘……그게 좋겠다. 어때, 파트너? 괜찮지?’
파트너는 벽에 그림자로 글자를 만들어나갔다.
윌리엄은 고개를 들어 필기체로 쓰여지는 알파벳을 바라보았다.
- You -
마치 심장 박동의 파형을 알려주는 그래프처럼,
- are -
검은 선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생겨나는 글자들에, 윌리엄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 Knight JIN -
아니었다.
더 나올 눈물이 있었다.
쉐도우맨이 나오는 회상 장면부터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그렁그렁하고 있던 관객들이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냐고. 진짜로 죽여 버리냐고. 딱 봐도 죽은 거잖아. 진짜로 죽은 거잖아……!’
쉐도우맨이 유언처럼 남긴 히어로네임을 보고 있는 윌리엄의 모습에 모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끼며 눈물을 흘려댔다.
* * *
작전 날.
“……왜 하필 여기인가요?”
차에서 내린 윌리엄은 눈앞의 풍경에 눈을 끔벅였다.
새하얀 레이스 천들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조화인지 생화인지 모를 색색의 꽃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곳.
야외 결혼식장이었다.
관객들도 의아해하긴 마찬가지였다. 빌런과 싸우기엔, 너무 화려한 장소가 아닌가.
“조금이나마 계획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죠.”
윌리엄의 질문에 퍼스트 요원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사이.
테일러 국장은 모니터로 어떤 영상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건 쉐도우맨이 윌리엄을 만나고 추모관에 갔던 날의 영상이었다.
지금은 꽃병이 놓인, ‘윌리엄 리’의 사진이 있던 곳.
그곳을 바라보던 쉐도우맨이 자리를 떠나고, 그 옆을 스쳐 지나가듯 비틀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다른 사진 앞에 계속 서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옷 아래의 몸은 마치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울룩불룩거리고 있었다.
‘행복한 장소’에 도착한 아로도가 폭주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로도는 폭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숙주가 무언가 발견하고는 제정신을 차렸기 때문이었다.
그건 꽃병이었다.
아니, 10년 전까지 그 꽃병의 자리에 있던 사진이었다.
와장창!
놓여 있던 꽃병을 깬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텅 비어 있는 벽을 짚으며 울부짖었다.
-……여기 분명히…… 사진이 있었어…… 사진이 있었다고! 사진이! 어린애 사진이 있었단 말이야!! 왜 사라진 거지!? 왜 이것만 사라진 거야!!
고함을 치며 행패를 부리는 남자를 경비원들이 제지하는 모습으로 영상이 끝났다.
다음에 떠오르는 기억에 테일러 국장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쉐도우맨과 빌런의 전투 당시의 기억이었다.
-쉐도우맨. 빌런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통신기로 테일러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정보인가 싶었지만, 두 손을 모두 사용 중이라 통신기를 끌 수 없어 그냥 듣고 있는 쉐도우맨이었다.
-이름은 제프 맥케이.
그게 실수였다.
-12년 전 발생한 이상 웜홀 피해자의 가족입니다.
그 말에 쉐도우맨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움직임이 멈추었다.
훈련과 실전으로 단련된 몸이 반사적으로 빌런의 공격을 막았지만, 쉐도우맨은 생각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후드가 벗겨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추모관에 걸려 있는 수많은 사진들이 지나간다. 윌리엄, 아니 진 나트라의 얼굴도 함께.
‘……이렇게 자랄 수 있었구나.’
지구를 파괴하려던 진 나트라. 아이를 구하던 윌리엄.
괴로워하던 진 나트라. 행복하게 웃던 윌리엄.
자신만 없었더라면.
이상 웜홀만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모두 평범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윌리엄도.
추모관의 사람들도.
그리고…… 이 남자도.
눈앞에 절망을 먹는 아로도에게 반 이상 잡아먹힌 남자가 보였다.
인간의 형태가 얼마 남지 않은 그 모습이 마치 남자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괴롭다. 슬프다. 억울하다. 분하다. 참담하다.
어째서 내가! 우리가!
“……그림자아악!!”
12년 동안 쌓인 남자의 슬픔과 원망과 분노가,
지금 ‘이렇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몰려 들어왔다.
그리고 쉐도우맨은 꼼짝도 못 한 채 그 쓰나미에 그대로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콰아아아앙!!
검녹색의 날카로운 촉수들에 몸 이곳저곳이 뚫려 벽에 박힌 쉐도우맨의 처참한 모습에, 관객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어째서 쉐도우맨이 질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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