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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731화 (731/1,055)

0살부터 슈퍼스타 731화

“근데 저 배우는 어떻게 저기서 연기하고 있대? 나 같으면 뒤돌아봤을 때 놀라서 NG 냈을 것 같은데.”

저런 서준 리의 연기에도 잘도 NG를 내지 않고 연기를 이어나가는 퍼스트 요원 역의 배우를 바라보며 누군가 말했다. 그에 어디선가 대답이 들려왔다.

“쉐도우맨 시리즈에 출연했던 배우래요. 그땐 진 나트라 부하였다더라고요.”

아하.

어쩐지 저런 ‘진 나트라’의 옆에서도 무난하게 연기를 이어나간다 싶었는데, 경력자였던 모양이었다.

“음음. 우리도 꽤 익숙하지.”

“몇 년이 지났어도 포스는 여전하네. 준의 연기는.”

서준의 연기에 감탄하는 다른 사람들에, 어쩐지 [쉐도우맨 시리즈]를 함께했던 스태프들이 더 자랑스러워했다. 그에 김재연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재연이 형이 저런 빌런의 스턴트맨을 하셨다는 거죠?”

“뭐, 흉내 내기 정도였지만.”

눈을 반짝이는 필립 윤의 모습에 김재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는 못 따라가지.”

모니터 속.

‘진 나트라’가 걸어가고 있었다.

* * *

자신의 히어로, 쉐도우맨을 바로 눈앞에서 잃었던 날.

그날로부터 고작 며칠이 흘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님과 제이와 파트너가 있어 힘을 내긴 했지만, 윌리엄이 정말로 슬픔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아니, 몇 달이 지나도, 몇 년이 지나도 윌리엄은 그때의 무력함을 잊지 못하고, 그때의 절망을 잊지 못했을 거다. 그저 마음속 한구석에 감춰두고, 어느 순간 쉐도우맨을 그리워할 만한 계기가 생기면 조용히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하였을 터였다.

그렇다.

윌리엄의 마음속에는 빌런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퍼스트의 작전에 참여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외계 기생 생물인 ‘아로도’가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이 살고 있는 지구를 먹어치우는 것을 막기 위한 마음 반. 그리고…… 쉐도우맨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한 마음 반.

윌리엄은 퍼스트의 계획대로 미끼 역을 잘해냈다.

그대로 빌런과 마주치지 않고 잘 대피했다면, 어쩌면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빌런은 퍼스트의 계획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했고, 윌리엄은 거기에서 빌런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빌런.

인간, 제프 맥케이와 외계 기생 생물, 아로도.

왠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는 검녹색의 슬라임과 그 숙주인 남자의 초췌한 얼굴이 윌리엄의 눈에 선명하게 박혔다. 어둠 속에서 봤던 그 얼굴과 같았다.

쉐도우맨을 죽인 그 남자였다.

분노가 타올랐다.

그러나 조금 전 미끼 역을 했을 때를 생각해 봐도, 아직 계승받은 힘을, 그림자를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윌리엄에게는 저 남자에게 복수할 능력이 없었다. 힘이 없었다. 무력했다. 윌리엄은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났고 억울했고 분했다.

그런 생각을 마음 한편에 숨겨두고 윌리엄은 대피했다.

뒤쪽에서 폭발음이 터지고 피가 튀고 총격음이 들리는데, 또 무능력하게 혼자서만 도망치고 있었다.

윌리엄은 뒤를 돌아보았다.

검녹색의 촉수들이 마치 그날, 폐선에서처럼 창날로 변해 하늘에 있는 퍼스트의 전투기와 지상에 있는 요원들을 공격했다. 그 모습이 사진처럼 한 장 한 장 윌리엄의 머릿속에 담겼다. 동시에 쉐도우맨의 몸에 무자비하게 꽂혀 있던 검녹색의 촉수들이 떠올랐다.

또다시 분노가 윌리엄을 잠식했다.

콰아앙!!

소리와 함께 차가 옆으로 회전했다. 추락한 전투기가 보였다. 폭발음과 함께 전투기가 활활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조종사의 생존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차갑게 식어갔던 쉐도우맨처럼.

그게 방아쇠가 되었다.

그날부터 쌓여왔던 분노가,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자책하고 좌절하고 절망해왔던 감정이, 그리고 오늘까지 느껴야 했던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울분이.

윌리엄 리의 모든 것을 잠식해 나갔다.

쾅!

분노에 휩싸인 소년은 차 문을 발로 걷어찼다.

“리!!”

자신의 부르는 퍼스트 요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소년은 뚜벅뚜벅 걸어갔다.

불타오르고 부서진 공원, 시끄러운 총격음, 촉수에 박힌 전투기들이 폭발하고 추락하는 소리, 뜨거운 열기.

그 모든 것이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오로지 분노.

그리고 복수.

-윌리엄! 정신 차리세요!

테일러 국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손을 들어 통신기를 끄고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목적지는 빌런이 있는 곳.

소년의 한 걸음 한 걸음에 검은 불꽃처럼 그림자가 진득하게 남았다.

삐걱-

하고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진짜 귀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고, 소년의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잊혀진 기억’이 담긴 상자가 조금 열리는 소리였다.

그 상자에서 스믈스믈 검은 연기와 같은 그림자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뚜벅-

분노의 감정이 가득 담긴, 무거운 걸음을 내디디며 소년은 그 그림자를 받아들였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빠졌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

하지만 소년은 깨달았다. 아직 맞춰야 하는 퍼즐 조각들이 많다는 것을.

천천히 ‘잊혀진 기억’, 아니, ‘진 나트라의 기억’이 담긴 상자에서 나온 퍼즐 조각들이 ‘윌리엄 리’의 빈 공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서서히 소년의 걸음걸이가 바뀌기 시작했다.

제법 격식 있는 걸음이긴 했지만 몸에 남은 기억이었을 뿐이라 미숙했던 ‘윌리엄 리’와 달리, 완벽 그 자체의 걸음걸이.

그와 함께.

소년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칠흑처럼 새까만 그림자는 빌런이 목격하든 말든 소년의 키 넘어까지 크기를 키워 흔들렸다.

“……그림자……!”

자신을 숨기려고 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는 검은 그림자를 빌런이 놓칠 리가 없었다.

제프 맥케이는 전투기와 요원들을 공격하면서, 나머지 촉수들로 그림자와 그 중앙에 서 있는 소년을 노렸다.

솨아악!

날카로운 촉수들이 화살처럼 소년에게로 쏘아졌다.

그러나 그림자는 가볍게 촉수들을 막아내고 튕겨냈다. 소년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다치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았다.

“이게 힘…….”

소년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몸 전체가 활기와 힘으로 넘치는 것 같았다.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쉐도우맨을 죽인 빌런이 보였다.

이것이 저 빌런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이었다.

소년은 무능력했던 예전의 자신을 경멸하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뚜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

뚜벅뚜벅 걸어갈 때마다, 천천히 검은색 그림자가 발아래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어둠에 물들어가는 것처럼.

새하얀 운동화의 밑창부터 검게 물들며 어딘가의 군화처럼 딱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운동화가 모두 변한 다음은 바지의 아랫자락이었다. 윌리엄이 입고 있던 청바지의 아랫부분이 어딘가의 새까만 제복 바지처럼 변해갔다.

“이런…….”

소년을 주시하고 있던 테일러 국장은 소년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테일러 국장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쉐도우맨…… 어쩌면 당신은 잘못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퍼스트의 국장, 테일러 워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때였다.

-국장님! 리의 움직임이 멈추었습니다!

그 보고에 테일러 국장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요원의 말대로 거칠 것 없이 빌런을 향해 걸어가던 소년이 걸음을 멈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건 소년의 자의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걸음을 붙잡힌 것 같은 모습이었다.

테일러 국장의 생각대로, 소년은 강제로 발이 묶여 있었다.

도대체 누가 감히.

자신의 복수를 막는 것인가.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두 발에, 누구든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굳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제이? ……파트너?”

제이와 파트너가 소년의 두 발을 그림자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간절함이 가득한 몸짓으로, 소년이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었다.

아니, 그건 앞이 아니었다.

어둠이며 절망이며 외로움이며 공허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이었다.

절대 안 돼……!

파트너는 쉐도우맨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쉐도우맨은 진 나트라를 안타까워했고 구해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돌아온 윌리엄을 보며 행복해했다. 파트너도 윌리엄이 좋았다. 게다가 쉐도우맨이 윌리엄을 지키라고 했다.

제이는 외로워하던 진 나트라의 감정과 진 나트라의 사랑하는 튤 나트라의 그림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자아였다. 그 때문인지 제이의 제1순위는 오로지 윌리엄의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없어도 제이는 윌리엄이 좋았다.

그러니,

지켜야 했다.

그에 잠시 당황하던 소년이 가라앉은 눈동자로 침착하게 말했다.

“제이, 내가 얼마나 쉐도우맨을 좋아하고 만나고 싶어 했는지 알잖아. 파트너, 너도 쉐도우맨이 죽어서 슬프잖아. 쉐도우맨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야.”

꼬옥-

소년의 말에도, 발을 붙잡은 제이와 파트너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알고 있다.

슬프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 소년을 망치는 길이었다.

“……왜? 어째서 막는 거야?!”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바로 눈앞에 쉐도우맨을 죽인 놈이 있는데! 어째서!!

“아무리 너희라고 해도, 더 이상의 참견과 간섭은 용납할 수 없어.”

검은 눈동자를 번뜩인 소년은 어두운 그림자를 움직여 제 두 발에 붙어 있는 두 그림자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다.

그보다 먼저 제이와 파트너가 움직였다. 간절함이 가득한 움직임이었다.

곧 공원 바닥에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걸 본 소년이 멈칫했다.

- You are Hero -

그건 복수에 눈이 멀어 잊고 있었던,

- Knight JIN -

쉐도우맨이 소년에게 준 히어로네임이었다.

소년의 눈이 커졌다.

쉐도우맨을 처음 봤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쉐도우맨과 대화를 나눴던 그 시간들도. 저도 모르게 깊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소년은 자신의 영웅이었던 쉐도우맨을 닮고 싶었다.

어릴 때도, 지금도.

히어로 Hero.

기사 Knight.

사람들을 지키는 자.

차갑게 식어 있던 소년의 심장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소년, 아니, 윌리엄의 눈동자에 빛이 돌았다.

그러자 무릎을 거쳐 허벅지까지 올라오고 있던 어두운 그림자가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고, 제복과 군화는 다시 평범한 청바지와 운동화로 변했다.

윌리엄이 무릎을 굽혀, 바닥에 있는 두 그림자에게 말했다.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제이, 파트너. 미안해.”

끄아앙-

제이와 파트너가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다정하게 말하는 윌리엄에게 달라붙었다. 솔직히 냉정한 말투의 소년은 너무, 너무 무서웠었다.

그사이, 스믈스믈- 어두운 그림자를 내보내던 ‘진 나트라의 기억’이 담긴 상자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다 열릴 날만을 기다리며.

콰아아앙!!

그때,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윌리엄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저기에서 검녹색의 촉수들이 난리를 치고 폭발과 총격이 들려왔다. 그 사이로 퍼스트 요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오로지 복수라는 감정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던, 보이지 않았던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였다.

윌리엄을 향해서도 촉수들이 달려들었다. 그림자가 방패를 만들어 윌리엄을 보호했다. 잠깐 자신이 미쳐 있던(?) 사이, ‘계승’받은 그림자는 더욱 강해지고 조절도 제법 능숙해졌다. 그에 윌리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제이, 파트너.”

윌리엄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이와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쉐도우맨에 대해 생각하면 마음은 여전히 아릿했지만, 지금은 복수보다 먼저 사람들을 구할 때였다.

윌리엄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나이트 진이 나설 때겠지?”

제이와 파트너가 반짝이는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곧은 자세로 섰다.

바람이 불었다.

윌리엄의 그림자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아까처럼 무시무시했던 불꽃이 아니라, 안정감과 믿음을 주는 검은 불꽃이었다. 윌리엄 리의 히어로, 쉐도우맨의 그림자를 닮은 듯했다.

그 불꽃 같은 그림자가 윌리엄이 신고 있던 운동화부터 청바지, 셔츠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윌리엄이 입고 있던 옷도 변했다.

아까와는 다른 디자인의 군화와 검은 바지, 몸에 딱 맞는 셔츠와 제복, 그리고 망토가 그림자를 따라 생겨났고, 목에서부터 턱, 입술, 코끝까지 올라오는 마스크가 윌리엄의 하관을 가려주었다.

바람에 따라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망토가 흔들렸다.

따스함과 친근함, 그리고 차분함이 깃든 검은색 눈동자는 믿음직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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