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730화 (730/1,055)

0살부터 슈퍼스타 730화

“컷!”

안타깝게도 오케이 사인은 들려오지 않았다. 때문에 스태프들은 다시 한번 같은 장면을 찍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날아다니고 마법을 쓰고 순간이동을 하는 등. ‘보통’의 사람들이 직접 할 수 없는 액션 장면이 많은 슈퍼히어로 영화는, 달려가는 장면이나 매달려 있는 장면 등 영화 속에서는 단 1초도 안 될 부분들을 짧게 잘라 촬영할 때가 많았다.

이번 장면도 그랬다.

현재 빌런 ‘제프 맥케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찍는 중이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액션 장면이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배우 커크 로렌스 대신 스턴트맨인 김재연이 촬영 중이었다.

“와이어는 괜찮아요, 재연?”

“예. 괜찮습니다.”

안전을 위해 몸에 매단 와이어를 체크하는 스태프의 물음에 김재연이 상체의 안전띠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그런 김재연에게 조나단 감독이 다가가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속도는 좋았는데, 떨어질 때의 모습이 조금 안정적이었어요, 재연.”

김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훈련으로 몸에 박힌 낙법이 무의식에 발현된 모양이었다.

“안정적으로 내려앉기보다는 그림자를 보고 이성을 잃은 상태가 잘 느껴지도록 땅에 처박히는 느낌을 더 살려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재연과 조나단 감독의 모습을 서준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왠지 흐뭇해졌다.

서준은 지금 그늘막 아래에 만들어진 배우 대기석에서 다음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장면 촬영 이후, 연기 속에서 나타난 ‘빌런, 제프 맥케이’가 ‘윌리엄’에게 목격되는 장면을 찍을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준의 옆에 커크 로렌스도 앉아 있었다.

액션 장면이 시작되니 세트장도 바뀌어 있는 상태였다.

‘검녹색 촉수’로 부서진 부분을 CG로 만들기 위해, 성당 첨탑의 오른쪽 부분이 초록색 크로마키로 뒤덮여 있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결혼식이 열릴 것같이 단정하던 테이블과 의자들, 그리고 소품들을 엉망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물론 단상도 부서진 단상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곧 전투가 일어날 것 같은 풍경이었다.

“레디,”

반사적으로 서준의 고개가 돌아갔다.

와이어를 매단 재연이 형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높은 높이는 아니었지만,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와이어뿐이니 고소공포증이 있으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액션!”

그 외침과 함께 김재연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인정사정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당연하게도 그 아래에는 초록색 크로마키를 대신할, 푹신한 매트가 깔려 있었다.

“컷! 오케이!”

커다란 카메라들에 찍힌 영상을 살펴보던 조나단 감독이 외쳤다.

“바로 다음 촬영 가겠습니다!”

매튜 조감독의 외침에 서준과 커크 로렌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크 로렌스는 들뜬 얼굴로 촬영장으로 향하는 서준을 바라보았다. 오늘 함께 촬영하면서 살펴보니, 서준 리는 촬영을 할 때 항상 저렇게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괜찮나?’

밝은 성격의 ‘윌리엄 리’를 연기할 때는 ‘저런 긍정적인 감정’이 괜찮을지는 몰라도, 앞으로 찍을 장면에서는 조금 힘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쉐도우맨 시리즈]를 보기도 했고, 연기력에서 누가 누굴 걱정하나, 싶기도 했지만.

맛있는 쿠키 덕분인지, 아니면 서준의 분위기가 사람을 편안하고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건지. 커크 로렌스는 잠시 서준에 대해 걱정했다.

* * *

“레디, 액션!”

빌런, 제프 맥케이는 성당의 첨탑을 부수고 야외 결혼식장을 엉망으로 만들 정도로 과격하게 등장한 것과 다르게, 어딘가 고장 난 듯 가라앉는 먼지 속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제프 맥케이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우주 생물인 ‘아로도’도 검녹색의 촉수들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 제프 맥케이를 윌리엄이 바라보았다.

밝은 빛 아래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바로 알아보았다.

퀭한 눈동자, 초췌한 얼굴, 덥수룩한 수염.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어두웠던 폐선, 달빛 아래에서 봤던 그 남자의 얼굴이었다.

화르륵.

마음 깊은 곳에 검은 불꽃 하나가 피어났다.

윌리엄에게는 길게 느껴졌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전 요원, 공격!

테일러 국장은 제프 맥케이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바로 반응했다.

“리! 지금 대피해야 합니다!”

무전기로 테일러 국장의 목소리가, 다른 쪽 귀로 퍼스트 요원의 외침이 들려왔다. 윌리엄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당장에라도 저 악당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지금의 윌리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너무 분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퍼스트 요원이 운전석에 오르고 윌리엄도 뒷자리에 탔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차량 뒤쪽으로 퍼스트의 전투기와 요원들이 공격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움직이지 않는 지금……!

오른쪽 귀에 꽂힌 무전기에서도 끊임없이 지시와 보고가 오가고 있었다.

윌리엄은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차창 너머, 멀어지고 있는 전투 현장이 보였다. 쏟아지는 포격 때문에 먼지 구름이 일렁였다.

무자비한 공격을 받고 있는 제프 맥케이는 이상할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불안감이 들었다.

마치 폭풍전야 같았다.

윌리엄은 전투 현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윌리엄의 예상이 맞다는 듯, 무전기로 요원의 외침이 들렸다.

-목표물! 움직입니……!

보고를 끝내기도 전에, 먼지 구름 속에서 검녹색 촉수들이 뻗어져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공격했던 전투기들을 마치 꼬챙이로 꽂듯 찔러댔다.

콰아앙!!

치명타를 맞은 일부 전투기들이 커다란 불꽃과 함께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녹색 촉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촉수에 꽂힌 전투기들을 사방으로 내던져 땅에 처박았다.

콰앙! 쾅! 콰아앙!

사방에서 들려오는 큰소리들.

공원의 나무들이 부서지고 불길이 피어올랐다. 부상을 입고 대피하는 퍼스트의 요원들이 윌리엄의 시야에 들어왔다. 등받이에 손을 올린 윌리엄의 손에 핏줄이 보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화르륵.

또 하나의 검은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쾅!

끼이이익-!

큰 소리와 함께, 윌리엄이 타고 있던 차량이 급하게 옆으로 돌았다. 그 움직임에 뒷좌석에 앉아 있던 윌리엄의 몸도 옆으로 기울였다. 뒤의 전투 상황만 보고 있던 윌리엄이 놀라 앞으로 보았다.

회색의 길다란 물체가 보였다.

낯선 모습이었지만, 윌리엄은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에 알아보았다.

퍼스트의 전투기였다.

윌리엄이 타고 있는 차량 앞으로 퍼스트의 전투기가 추락한 것이었다.

콰아앙!

검녹색 촉수에게 당해, 바닥에 처박혀 찌그러진 전투기는 윌리엄의 눈앞에서 커다란 소음을 내며 터져나갔다. 그리고 곧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잔인하고도 뜨거운 열기는 차 안에 있던 윌리엄과 퍼스트 요원에게까지 전해졌다.

“조, 조종사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안해하는 윌리엄에, 뜨거운 불길로 막혀 버린 길을 피해 후진하고 있던 퍼스트 요원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임무는 일반인 윌리엄 리를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리. 추락하기 전에 탈출했을 겁니다.”

안심하라는 듯 설명했지만, 그 추측성 발언이 윌리엄을 더욱 숨 막히게 만들었다.

무전기로 들어오는 목소리들도 그랬다. 보고하고 지시를 내리고 있는 와중에도 폭발음이 계속 들려왔다. 고통과 아픔이 뒤섞인 상태에서도 빌런을 처치하려는 퍼스트의 의지가 느껴졌다.

천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바깥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불길이, 어쩐지 차갑게 느껴졌다.

마치 며칠 전, 폐선에서 느꼈던 쉐도우맨의 체온처럼.

화르륵.

또 하나.

검은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런 윌리엄의 감정을 느꼈는지, 빌런에게 목격되면 윌리엄이 노려질까, 지금까지 그림자 속에서 잠잠히 있던 제이와 파트너가 안절부절못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전투 현장에 고정된 윌리엄의 시선을 어떻게든 끌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하지만 윌리엄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로 전투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리 없는 소란을 느낀 듯, 퍼스트 요원이 백미러로 뒤를 바라보았다.

“……리?”

퍼스트 요원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전투 현장을 보고 있던 소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인물이 거기에 있었다.

그때,

쾅!

하고 큰소리가 났다.

멀리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바로 뒤쪽.

차 뒷문이 나가떨어지는 소리였다.

그것도 윌리엄 리의 공격으로!

“리!!”

당황한 퍼스트 요원이 차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윌리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외침이 들리지도 않는지, 윌리엄은 차에서 내려 폭발음과 불꽃이 사방에서 터지고 있는 전투현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묘하게 차분하면서도 무거운, 그럼에도 격식 있는 발걸음으로.

그 아래의 검은 그림자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국장님!”

퍼스트 요원이 급하게 무전기의 버튼을 누르며 외쳤다.

-무슨 일인가?

폭발음과 함께 테일러 국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가 탈출했습니다!”

-……뭐?

“윌리엄 리!”

퍼스트 요원은 말을 고쳤다.

“아니!”

조금 전 뒷좌석에 앉아 있던 인물은 윌리엄 리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등골이 싸늘해지는 그 분위기의 주인공은 오래전부터 퍼스트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진 나트라가 현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 * *

커다란 카메라들이 차 안을 촬영했다.

여기저기 초록색 크로마키가 설치되어 감정 이입하기 어려운 배경이었지만, 두 배우는 훌륭하게 연기를 해나갔다.

“조, 조종사분은…….”

“괜찮습니다. 리. 추락하기 전에 탈출했을 겁니다.”

퍼스트 요원 역을 맡은 배우의 대사에, 서준은 불타오르는 전투기(로 만들어질 초록색 크로마키)를 바라보며 능력을 발동했다.

[(악)데스 나이트의 기사도(중급>>하급)가 발동됩니다.]

[(악)마셰드의 그림자술(중하급>>하급)이 발동됩니다.]

오랜만에 사용해서 그런지, 능력들이 즐거워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아니, 어쩌면 오랜만의 악역에 자신이 즐거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작게 웃은 서준은 다시 촬영에 집중했다.

하급에 불과하지만, 마기를 에너지원으로 삼는 능력이었다.

[쉐도우맨 시리즈]촬영 때도 그랬듯, [쉐도우앤나이트] 촬영장 전체에도 어둡고 섬뜩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윌리엄 리와 퍼스트 요원이 탈출하는 장면’을 찍고 있던 중이라 다들 촬영장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이곳까지 그 싸늘함이 흘러들어와 있었다.

“와아. 이게 진 나트라구나……!”

소름이 돋은 양팔을 열심히 문지르면서도 필립 윤은 연신 감탄을 흘렸다. 서준의 ‘진 나트라’ 연기를 처음 보는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로 봤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마무시했다.

“평소의 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네요.”

“그러게요.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뭐랄까…….”

소피아 켈리의 탄성에 커크 로렌스가 말을 늘렸다.

짧은 시간 봤지만, 쿠키를 나눠주던 모습이나 ‘윌리엄 리’의 연기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순하고 친근해서 조금 상상하기 어려웠는데.

“진짜 빌런 같네요!”

필립 윤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빌런.

그것 말고 다른 설명은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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