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729화
“오늘 하루만 실례하겠습니다.”
서준은 그렇게 오늘 하루 커크 로렌스의 대기실에서 머물게 되었다.
제법 큰 대기실은 두 배우와 그 관계자들이 들어가도 넉넉한 크기였다.
게다가 분장실과 의상실은 따로 준비되어 있었고, 오늘 촬영은 야외촬영이니 야외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더 많기도 해서, 정말 잠시 ‘대기’하는 것 말고는 배우들이 대기실에 있는 시간은 짧았다.
“편하게 있어도 됩니다, 리.”
커크 로렌스의 말에 서준이 헤헤 웃었다.
이렇게 된 김에 커크 로렌스 배우와 친해지면 좋겠다는 흑심이 가득한, 배우 컬렉터(?)였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비장의 무기도 있었다.
“앞으로 촬영도 같이 할 텐데, 준이라고 불러주세요.”
서준이 손을 내밀자, 잠시 머뭇거린 커크 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예. 커크라고 불러주십시오. 준.”
“말도 편하게 하시고요!”
“그건 천천히…… 하겠습니다.”
반짝이는 서준의 눈을 슬그머니 피한 커크 로렌스가 대답했다. 이번 영화 [쉐도우앤나이트] 촬영 이후 만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직장 동료와의 거리는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서준은 ‘시작이 반이지!’ 하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네. 편할 때 해주세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배우들의 사이가 좋은 편이 촬영에도 좋았으니까 말이다. 비록 빌런과 히어로 역할이긴 하지만.
“그럼 저희는 이만 촬영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조나단 감독과 조감독, 스태프들이 대기실을 떠나고, 서준과 커크 로렌스는 어색한 듯 조금 떨어져 앉았다.
“커크, 쿠키 드실래요?”
아니, 어색한 건 나뿐인가.
커크 로렌스는 쿠키를 내미는 서준의 모습에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서준이 활짝 웃으며 열심히 쿠키에 대해 설명했다.
“이건 초콜릿 맛이고 이건 아몬드가 들어가서 식감이 좋아요. 부드러운 맛이 좋으시면 이 쿠키를 추천할게요.”
그것 참. 다양하기도 하다.
커크 로렌스가 잠시 머뭇대는 사이, 어느샌가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의 손에도 쿠키가 들려 있었다.
“오, 이거 맛있는데요?”
“그쵸?”
“어디서 파는 거예요? 가는 길에 사가야겠어요.”
“제가 만들었어요.”
……예?
커크 로렌스와 그의 스태프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서준과 최태우가 평온한 얼굴인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준이 직접요?”
“네. 마침 휴일이라서요. 시간도 남고 그래서 만들어 봤어요.”
아몬드 쿠키를 고른 커크 로렌스가 한입 베어 물었다.
‘이게 배우가 만든 쿠키라고?’
당장 가게에서 팔아도 될 것 같은 맛이었다. 아니, 웬만한 가게의 쿠키보다 더 맛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인지 오오, 감탄하며 쿠키를 먹었다.
슈퍼스타가 직접 만든 데다가 맛까지 좋으니 두 배로 놀란 표정들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쿠키를 만듭니까, 준?”
커크 로렌스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 물음에 아주 잠깐 ‘역시 먹을 걸로 꼬시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하던 서준은 이내 웃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해탈한 듯한 웃음이었다.
“……시험 기간에는 뭐든지 재미있는 법이라서요.”
만발했던 꽃이 떨어지는 4월 말.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대학생 이서준이었다.
* * *
“대학생이었군요.”
“네. 지금은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는 중이에요.”
비장의 무기 ‘쿠키’로 시작한 커크 로렌스 배우와의 대화는 제법 잘 이어졌다.
“열심히네요. 준의 연기력이라면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될 텐데…….”
자신과 촬영했던 장면은 아주 짧았지만, 그동안 봤던 서준 리를 영화를 보면 더 배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연기력이었다. 무려 12살에 오스카상을 수상하고,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처음으로 수상한 배우가 아닌가.
“저랑 다른 스타일로 연기하는 배우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연기나 촬영에 관해 배우는 게 재미있거든요.”
열정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서준 리의 얼굴에, 커크 로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서 서준 리의 열정에 공감하거나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일 아닌가.’
맡은 일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돈을 벌 수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열정이라…….’
얼떨결에 배우가 된 커크 로렌스에게는 아주 먼 이야기였다.
* * *
“레디, 액션!”
“……왜 하필 여기인가요?”
새까만 차에서 내린 윌리엄이 눈앞의 장소에 눈을 끔벅였다.
새하얀 레이스 천들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조화인지 생화인지 모를 색색의 꽃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곳. 금방이라도 저기 성당 첨탑에 달린 종이 울리고 초대된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행복한 표정의 신랑 신부가 나타날 것만 같은,
야외 결혼식장이었다.
센트럴파크는 넓었다.
국가인 ‘모나코’의 면적보다 크니, 말 다 했다.
그런데 그렇게 넓은 센트럴파크 내에서, 많고 많은 장소 중에서 왜 이런 장소를 퍼스트는 선택했을까.
“조금이나마 계획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죠.”
윌리엄의 의문에, 윌리엄을 데리러 왔던 퍼스트 요원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음.
굳은 표정이 더이상 깊게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곧 있으면 전투라서 긴장하셨나 보다.’
그렇게 생각한 윌리엄은 퍼스트 요원을 잠시 바라보았다.
무전기를 귀에 낀 퍼스트 요원은 활동성이 좋은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몸 여기저기에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총과 단검 등, 겉에 보이는 무기는 물론이고 유니폼 속에도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작은 무기들도 몇 개 있는 것 같았다.
딱히 열심히 살펴본 게 아니라 그저 슬쩍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마치 ‘나 여기 있소.’ 하듯 무기들이 속속들이 보였다. 며칠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왤까.’
윌리엄의 시선을 눈치챈 듯 어쩐지 긴장하기 시작한 퍼스트 요원에, 멋쩍어진 윌리엄이 고개를 돌렸다.
‘이것도 ‘계승’ 때문인가?’
뉴스나 인터넷 영상 속 슈퍼히어로들이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알 것 같았다.
‘눈에 훤히 보이는데 반응할 수밖에 없지.’
손을 쥐었다 편 윌리엄은 이 신기한 감각이 쉐도우맨의 흔적이라는 생각에 울적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울적함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이 무전기로 빌런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질 겁니다.”
“네.”
윌리엄은 퍼스트 요원이 전해주는 무전기를 귀에 꽂았다. 테일러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립니까. 윌리엄?
“네. 잘 들려요.”
-윌리엄?
어어?
윌리엄의 대답이 전해지지 않은 듯, 테일러 국장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은 여기를 누르면서 하시면 됩니다.”
“앗, 네!”
퍼스트 요원이 자신의 귀에 꽂은 무전기를 보여주며 버튼을 알려주었다. 어쩌다 보니 허공에 대답하게 된 윌리엄은 얼른 버튼을 누르고 대답했다.
-윌리엄? 들리나요?
“잘 들립니다!”
윌리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런 윌리엄을 퍼스트 요원이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테일러 국장과의 대화 중이었던 윌리엄은 알지 못했다.
-계획은 전에 알려줬던 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빌런이 목적지로 이동하면, 요원과 함께 곧바로 대피해 주십시오.
“네.”
다시 한번 계획을 확인한 테일러 국장이 연락을 끝내자, 윌리엄은 무전기 버튼에서 손을 떼고 후우, 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틀 간격으로 센트럴파크에 온다는 빌런.
그 습관대로라면 오늘도 센트럴파크에 올 터였다.
윌리엄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구름들과 파란색 하늘이 적당히 섞여, 날씨가 아주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스텔스 기능을 발동 중인 퍼스트의 전투기들이 수십 대나 대기 중일 터였다.
센트럴파크도 마찬가지였다.
빌런이 센트럴파크에 들를 때마다 가는 장소부터 이곳 야외 결혼식장의 근처에 보이는 일반인들은 모두 퍼스트의 요원들이었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저기, 빌런이 이틀에 한 번씩 간다는 곳은 어디인가요?”
센트럴파크에는 여러 장소가 있었다.
호수, 동물원, 음악 홀, 야구장, 극장, 놀이터, 놀이공원, 추모관 등.
그 많은 장소 중 빌런은 어딜 그렇게 드나드는 것일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 네…….”
딱딱한 퍼스트 요원의 대답에 윌리엄이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음. 보안이 걸려 있나 보다.
어쩔 수 없지, 하고 어깨를 으쓱인 윌리엄은 쭈그려 앉아 바닥과 가까워졌다. 햇살이 좋아서 그런지 윌리엄의 그림자가 짙었다.
그 짙은 그림자 속에서 제이와 파트너가 나타났다.
오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제이와 파트너는 평소와 다름없이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조금 긴장하고 있던 윌리엄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생겨났다. 그러나 곧바로 울적해졌다.
“파트너 넌 쉐도우맨이랑 있어야 하는데…….”
윌리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파트너를 토닥이자, 그 마음을 느낀 제이도 파트너를 위로해 주었다. 그에 파트너는 괜찮다는 듯 씩씩한 모습을 보였다. 윌리엄의 마음이 더욱 뭉클해졌다. 주인을 똑 닮은 그림자였다.
그러길 잠시.
-제프 맥케이. 나타났습니다.
무전기로 전해진 목소리에 퍼스트는 물론이고 그림자들과 놀아주고 있던 윌리엄까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프 맥케이.
우주 기생 생물체, 아로도에게 잠식당한 빌런의 이름이었다.
-윌리엄! 준비하세요.
“네!”
테일러 국장의 통신에 윌리엄이 대답했다.
“제이, 파트너. 준비하자.”
짙은 윌리엄의 그림자에서 볼록 튀어나와 있던 두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테일러 국장의 지시 아래, 하늘의 전투기와 지상의 전투요원들이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윌리엄을 대피시킬 퍼스트 요원도 차로 향했다.
-제프 맥케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윌리엄. 지금입니다!
테일러 국장의 신호에, 윌리엄은 대답 대신 그림자를 조종했다.
햇빛 아래 짙어진 그림자가 물결이 번지듯 윌리엄의 주위를 물들여갔다. 그리고 곧 가지를 뻗듯 여러 군데로 길게 뻗어져 나갔다. 새하얀 결혼식장 바닥에 새까만 선들이 그어졌다.
“제이! 파트너!”
윌리엄의 외침에 제이와 파트너가 힘을 보탰다.
그러자 그림자 가지가 겹쳐지는 곳곳에서 검은색 기둥들이 솟아올랐다. 마치 어떠한 신전에 온 것 같은, 길다랗고 검은 기둥들이었다.
곧 기둥들의 윗부분이 그물처럼 검은색 그림자로 이어졌다. 윌리엄이 야구장에서 목격했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쉐도우맨에게서 전해 받은 힘이, 지금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하아하아-
이렇게 커다란 힘은 처음 사용해 본 윌리엄은 숨을 내쉬었다.
‘계승’으로 전해 받은 쉐도우맨의 힘 덕분에 아직 에너지는 많이 남아있긴 했지만, 조종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졸졸 흐르는 작은 시냇물만 가지고 놀다가, 거친 바닷물을 조종하는 기분이랄까.
아무래도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이 진정하는 사이, 무전기로 퍼스트 요원의 외침이 들렸다.
-제프 맥케이! 그림자 발견! 지금 이동……!
쾅!!
큰소리와 함께 데엥- 종소리가 들렸다.
오른쪽 하늘에서 날아온 검녹색의 촉수가, 화살처럼 성당 첨탑에 박힌 것이었다. 그리고 그 촉수는 금방이라도 반대쪽에 있는 것을 잡아당길 것처럼 팽팽했다.
-이렇게 올 줄이야……! 윌리엄! 피해요!
“리! 지금 가야 합니다!”
“네!”
윌리엄이 요원의 외침에 차로 달려가려던 찰나.
첨탑에 박혀 있던 검녹색의 촉수가 줄어들었다. 그 반동으로 반대편에 있던 무언가가 당겨졌다.
윌리엄의 시야에 오른쪽 하늘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검녹색의 덩어리가 보였다.
-공격!
---!!
테일러 국장의 외침과 함께, 퍼스트 전투기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공격들보다 빠르게 날아온 검녹색의 덩어리가 콰아앙! 소리와 함께 성당 앞에 박혔다.
커다란 충격에 바닥에 움푹 파이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주례와 신랑 신부가 섰을 단상도 무너지고 새하얀 천들이 거친 바람에 흔들렸다. 장식된 꽃잎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테이블과 의자가 뒤집어졌다.
-전 요원 대기.
테일러 국장의 말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곧 천천히 먼지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제프 맥케이…….”
윌리엄은 폐선에서 봤던 모습과 달리, 어느새 검녹색의 슬라임이 상체까지 뒤덮여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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