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728화
-You are Knight JIN-
잠깐.
아주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멍하게 파트너가 만들어가던 글자를 바라보고 있던 윌리엄은 작게 중얼거렸다.
“나이트 진…….”
누군가의 히어로네임 같은 이름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벽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Knight JIN’이라고 적힌 글자 위에 손을 올렸다. 딱딱한 벽에 나타난, 형체도 없는 그림자로 쓰여진 글자였지만, 어쩐지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파트너, 누가…… 이렇게 말한 거야?”
윌리엄은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파트너는 그 물음에 한 사람의 모습을 그림자로 만들어 보여주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본 윌리엄은 ‘나이트 진’이라고 쓰여 있는 벽에 이마를 댔다. 마치 어젯밤, 제 손에서 느껴지던 한기처럼 차가웠다. 그에 눈물이 흘렀다.
쉐도우맨.
죽어버린 소년의 영웅이었다.
* * *
“컷! 오케이!”
풀샷, 바스트샷, 클로즈업샷까지.
서준 리 혼자서 연기했던 오늘의 촬영이 모두 끝났다.
분명 혼자서 연기했는데, 혼자인 것 같지 않은, 카메라 장악력을 보여주며 카메라팀은 물론이고 구경하던 스태프들의 탄성과 눈물이 가득한 감탄을 자아낸 배우 서준 리였다.
“수고했어, 준.”
“감독님도요.”
서준은 계속 울어서 붉어진 눈이 짓무르지 않게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옆에 있던 매니저 최태우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이스팩을 대며 도와주었다.
조나단 감독이 물었다.
“오늘 저녁에 뭐 할 거야?”
“에반이랑 리첼이랑 저녁 먹기로 했어요. 조나단도 올래요? 라이언 감독님이랑요.”
“오. 좋지.”
촬영에 과몰입해 훌쩍이며 촬영 장비를 정리하던 스태프들은, 언제 몰입해서 울었냐는 듯, 신나게 저녁 메뉴를 정하는 서준 리와 조나단 윌 감독의 대화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본체는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크흡……!”
촬영장 여기저기서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 *
한국.
코코아엔터 이서준 배우 전담 1팀 사무실.
현재 담당 배우가 미국에서 촬영 중이라, [새싹부터]나 일반인들의 반응을 체크하는 것 외에는 따로 할 일이 없어 한가로운 중이었다.
“들어오는 대본도 적네요.”
서준의 출연을 바라는 드라마나 작품의 대본들은 여전히 들어오고는 했지만, 그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이제는 다들 서준이가 촬영 중일 때는 출연 제안서가 들어와도 안 살펴본다는 걸 아니까요.”
연기와 촬영과 작품에 진심인 이서준 배우가 촬영을 시작하면, 예능 출연이나 광고 섭외는 물론이고 대본도 읽지 않고 촬영에만 집중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촬영 끝나면 일이 밀어닥치겠죠.”
“그래도 좀 익숙해졌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이제는 신입이라는 단어를 뗐지만, 여전히 팀에서는 막내인 직원들이 해맑게 말했다.
그에 선배 직원들이 빙그레 웃었다. 어쩐지 해탈한 웃음이었다.
“평소보다 더 많이 들어올걸요?”
“진 나트라잖아요.”
“지금은 윌리엄이죠.”
지금 보고 있는 인터넷 반응들만 봐도 그렇다.
-쉐앤나! 쉐앤나! 개봉해라!
=지금 촬영 중이겠지만…… 개봉해라!
=아직 편집도, CG 처리도 안 했겠지만…… 개봉해라!
-쉐앤나 개봉 소취 47134일째.
=그……어르신? 그땐 쉐도우맨도 없었는뎁쇼.
=ㅋㅋㅋ129세ㅋㅋㅋ
-누구 쉐앤나 소식들은 사람 없어???
=없다. 마린사. 계약. 고소. 무섭다.
-누가 실수인 척 촬영본 좀 흘려줬으면……!
=22 촬영 직전, 촬영 직후 대기실 상황도 괜찮음.
=33 그냥 히어로 슈트만, 아니면 무기만, 아니면 일상복이라도 좋으니까!!
=44 배경만 찍어줘도 알아서 주워 먹을게!! 마린사아아악!!
=555 (입 벌리고 있는 새끼 새들 이모티콘)
-만우절 사진들처럼 하나만 올려주라ㅠㅠ
=22 만우절이라는 게ㅠㅠ 눈물 나긴 하지만ㅠ 떡밥만 던져주면 알아서 해석할게요ㅠ
뭐, 서준이 연기한 캐릭터 중에 안 그런 게 있냐 싶겠냐마는,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찍어왔던 [쉐도우맨 시리즈]의 ‘진 나트라’는 다른 캐릭터들보다 유난히 사랑을 받고 있는 캐릭터였다.
안달 난 사람들의 반응에 1팀 직원들이 해탈한 미소를 지었다.
“개봉하면 난리 나겠죠?”
“그렇겠죠. 만우절 사진은 예고편에 불과하니까요.”
먼저 [쉐도우앤나이트]의 대본을 읽어본,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 당한 1팀 직원들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직원이기 전에 그들도 [쉐도우맨 시리즈]의, ‘진 나트라’의 팬이었다.
그때, 모두의 아련함을 깨는 알림이 떴다.
“태우 씨한테서 보고서 왔습니다!”
현재 저녁 시간일 LA에서 보낸 매니저 최태우의 보고서였다. 그에 모두 메일로 도착한 보고서를 읽었다.
코코아엔터 10층, 이사실에 있던 안다호 이사도 마찬가지였다.
띵동-
알림 소리까지 설정해 둔 안다호는, 소리가 울리자마자 살펴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두고 (급한 일이었지만 서준의 일보다 우선되는 일은 없었다.) 최태우 매니저에게서 온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1팀으로 가는 보고서는 주로 일과 관련된 내용이었고, 안다호에게 가는 보고서는 서준의 사적인 영역까지 포함된 내용이었다. 물론 서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보고서를 살펴보던 안다호가 미소를 지었다.
“딱히 문제는 없군.”
오늘도 촬영을 무사히 끝냈고, 저녁때 에반 블록 배우, 리첼 힐 배우와 조나단 감독, 라이언 감독과의 저녁 식사를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에 저절로 즐겁게 식사를 했을 서준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만우절 사진들을 봤을 때도 ‘나트라 패밀리……!’ 하며 과몰입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서준이 얼마나 즐겁게 ‘진 나트라’를 연기하며 사진을 찍었을지부터 떠올리며 웃었던 안다호였다.
여전한 팔불출 매니저였다.
[내일과 모레 휴식 예정.]
[이후부터 전투 장면 촬영 예정.]
촬영 일정도 미리 정해진 스케줄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안다호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답장을 보냈다.
<무엇보다 서준이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최태우: 넵!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전한 팔불출 매니저 안다호였다.
* * *
그렇게 이틀간의 편안한 휴식 시간을 보내고.
“여긴 휴식 시간이 철저히 지켜져서 좋다니까요.”
“그건 그래.”
서준과 최태우는 다음 촬영을 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향했다.
오늘 촬영은 스튜디오 구역 내의 야외촬영이었다.
“여긴…… 진짜 크구나.”
“그렇긴 하죠.”
최태우는 오늘 촬영할 세트장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이전 ‘쉐도우맨’과 ‘윌리엄’이 만났던 공원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세트장은 더욱 대단했다.
배경은 센트럴 파크.
그 안에 있는 작은 성당과 야외 결혼식장이었다.
성당은 작았지만 뾰족한 첨탑과 그 아래 커다란 종이 달려 있었고, 군데군데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했지만 새하얗게 칠해진 모습이 잘 관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앞, 야외 결혼식장.
푸른 잔디가 깔린 위로 주례가 설 단상과 그 앞에 신부와 신랑이 설 단상이 있었고, 입구부터 단상까지 새하얀 천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신랑 신부가 걸어갈 통로(Aisle)였다.
그 통로 양옆에 하객들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가 활짝 핀 꽃들과 새하얀 레이스가 달린 천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정장을 입은 신랑이 나타나, 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며 행복한 결혼식을 올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멋지네요.”
서준이 감탄하며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슈퍼히어로 영화 촬영이 아니라, 로맨스 영화 촬영장에 잘못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게. 센트럴파크에 진짜 이런 곳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최태우의 물음에 막 대답해 주려던 서준 대신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서준과 최태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매튜 조감독이 거기에 있었다.
“매튜 조감독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조감독님.”
서준과 최태우가 인사했고, 매튜 조감독도 웃으며 인사했다.
“조나단 감독님은요?”
“지금 촬영 준비 때문에 바쁘십니다. 그래도 준이 오셨으니 곧 달려오시겠죠.”
농담같은 진담에 서준과 최태우가 웃고 말았다.
매튜 조감독이 촬영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센트럴파크에 이런 결혼식장은 없습니다. 저희가 만든 거죠. 여기 결혼식장도 진짜 결혼식장 관계자들에게 자문해서 만든 거고, 꽃장식도 플로리스트에게 의뢰해서 만든 겁니다. 성당도 작지만 진짜 예배도 드릴 수 있을 정도로…….”
매튜 조감독이 신나게 설명하던 그때, 무전기가 울렸다.
-조감독님! 소품 하나가 부서졌습니다!
“어떤 건데? ……아, 그거 예비용이 있을 거야. 저도 가 봐야겠네요. 배우 대기실은 E-2 스튜디오로 가시면 됩니다. 저쪽에 보이는 건물이에요.”
그렇게 대기실을 알려준 매튜 조감독은 한시가 급한 듯 얼른 떠나버렸다.
“진짜 바쁜 모양이네요.”
“그러게.”
뛰어가는 조감독 주위로, 스태프들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오늘부터 슈퍼히어로 영화의 꽃이자 [쉐도우앤나이트]의 클라이맥스라고도 할 수 있는 전투 장면들을 찍을 예정이라서 그런지 다들 다른 때보다 기합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준! 언제 왔어?!”
매튜 조감독이 가니, 조나단 감독이 왔다.
반가워하는 조나단 감독의 얼굴에 매튜 조감독의 농담 같은 진담이 떠오른 서준과 최태우가 작게 웃었다.
* * *
서준은 조나단 감독과 함께 배우 대기실로 향했다. 최태우는 먼저 서준의 대기실을 살펴보기로 했다.
“안녕, 준.”
“안녕하세요. 소피아.”
오늘 함께 촬영할 ‘테일러 국장’ 역의 소피아 켈리와 인사하고 ‘퍼스트 요원’ 역을 맡은 배우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과격한 액션 연기를 안전하게 연기해줄 스턴트맨들도 있었다.
“안녕, 서준아.”
“안녕하세요! 서준이 형!”
김재연과 필립 윤이 웃으며 인사하자, 서준도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그러면서도 저절로 필립 윤의 머리 위로 시선이 갔다.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윌리엄 리’에 대해 공부하고 연습했는지, 필립 윤의 머리 위에는 멋진 봄 느티나무가 자라 있었다.
[목표: 윌리엄 리 / 동화율: 81%]
47%던 동화율이 81%까지 올라가 있었다.
“오늘 촬영보고 더 공부하러 왔어요. 어쩐지 좀 막히는 기분이 들어서요. 재연이 형한테 물어보니까 이럴 때는 서준이 형 연기를 직접 보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열심히 해야겠네.”
필립 윤의 말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동화율이 90%까지 간다면, 예전 김재연이 가짜 마기를 흉내 내 흘려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필립 윤도 가짜 선기를 흉내 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럼 더 멋진 장면이 나오겠지.’
어쩐지 마음이 들떴다.
그렇게 스튜디오 내의 배우, 스턴트맨들과 인사를 하고 나니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로렌스 씨.”
앞으로의 촬영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빌런’ 역의 커크 로렌스 배우였다.
“네. 반갑습니다.”
서준과 악수를 나눈 커크 로렌스는 여전히 딱딱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손에 대본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좋은 배우인 것 같은데 말이다.
좀 더 친해지기를 바라는 서준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서준의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서준아. 문제가 조금 생겼어. 대기실 다른 곳 써야 할 것 같아.”
“네? 왜요?”
“물이 새더라.”
“물이 새요?!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경악하던 조나단 감독이 얼른 스태프들과 함께 서준의 대기실로 향했다.
“으아아…….”
최태우의 말대로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니, 차박차박 물이 밟혔다. 천장에서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는 다른 대기실을 써야할 것 같아, 준…….”
촬영이 아닌 일로 문제가 생길 줄이야.
오늘부터 하이라이트 장면 촬영이라 기합이 잔뜩 들어가있던 조나단 감독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어, 그럼……”
서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꽉 찬 단역배우들의 대기실, 여자인 소피아 켈리의 대기실, 김재연과 필립 윤 등 스턴트맨들의 대기실.
남은 대기실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조나단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커크?”
“……네, 알겠습니다.”
잠시 서준을 바라보던 커크 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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