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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721화 (721/1,055)

0살부터 슈퍼스타 721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폐선, 맨 아래.

벗겨진 페인트와 녹이 슨 철근들, 마구잡이로 버려진 쓰레기들과 오랫동완 방치된 듯 쌓여 있는 먼지로 가득한 곳.

사람은커녕 쥐새끼도 하나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누군가의 작은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숨소리를 따라 카메라가 움직였다.

따로 찾지 않아도 숨소리의 주인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불길하고 기분 나쁜 검녹색의 진득한 액체가 소년의 온몸을 휘감은 상태로 공중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었다.

“으음…….”

소년, 윌리엄 리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 친구, 제이도 번쩍 깨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현 상황을 파악했다.

위험에 빠진 주인. 빛이 들지 않는 장소.

탈출해야 하는데 윌리엄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빛이 들지 않아 아주 희미해진 그림자 때문에 자신의 힘도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윌리엄의 몸에 달라붙은 검녹색의 촉수를 떼어내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여보지만 역부족이었다.

제이는 일단 윌리엄을 깨우기로 결정했다.

쿡- 쿡-

제이는 다른 때보다 강하게 윌리엄의 볼을 찔러댔다.

그 몸짓에 조금 창백하던 윌리엄의 얼굴이 살짝살짝 찡그려졌다. 곧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위로 움직이며 초점이 흐릿한 검은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반짝이는 빛을 되찾았다.

“제, 크흠, 제이?”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어둠.

당황하는 것도 잠시. 윌리엄은 침착하게 가장 의지가 되는 친구를 불렀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먼지가 가득해서 그런지, 아니면 말을 하지 않은 시간이 길었던 모양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와 헛기침을 해야 했다.

툭-

제이가 볼을 두드리는 느낌이 느껴졌다. 윌리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천천히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다.

제법 시야가 트인 윌리엄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건 ‘사라진 누군가’와 닮아 있는 표정이었다.

위아래 양옆 사방이 꽉 막힌 장소였고, 여기저기 낡고 녹슨 물건들이 보였다. 페인트가 벗겨진 드럼통들과 날카로운 쇠파이프들, 크고 작은 철제 상자들과 원래의 모양을 알 수 없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자잘한 쓰레기들도 있는 것 같았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폐공장? 아니면 공사가 중단된 공사장?

조금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기분으로, 침착하게 장소를 추측하는데 어쩐지 시야각이 좀 이상했다. 마치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제이, 나 지금 공중에 있는 거야?”

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윌리엄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이 너무 안정적이라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윌리엄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몸을 휘감고 있는 것, 검녹색의 점액성 촉수가 보였다.

“이건…….”

천천히 기억이 되살아났다.

쉐도우맨을 만나고 야구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휴대폰을 보고 있을 때, 뒤에서 거친 목소리와 함께 이것과 똑같은 것이 폭발하듯 버스 안을 가득 채웠었다. 윌리엄에게로 향하는 촉수들은 제이가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제이, 다른 사람들도 있어?”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들 여기로 잡혀 온 건가?

그렇다면 구해줄 사람들 올 때까지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윌리엄이 제이에게 물었다. 제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윌리엄이 말했다.

“그럼 우리만 탈출하면 된다는 건데…… 제이, 이거 풀 수 있겠어?”

다시 한번 제이가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시무룩한 모습이었다. 그에 윌리엄은 아차 싶었다.

“빛이 없구나…….”

‘그림자’ 친구, 제이의 약점은 어둠.

사방이 꽉 막힌 이곳처럼,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곳에서는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윌리엄이 꼼지락대봤지만 검녹색 촉수의 기분 나쁜 촉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마치 거미줄에 꽁꽁 묶여 천장에 매달린 먹이가 된 느낌이었다.

“아, 휴대폰! 제이, 내 휴대폰 좀 찾아봐.”

휴대폰의 빛이라면 도움이 될 터였다.

그에 제이가 돌돌 말린 촉수의 틈 사이로 들어가 윌리엄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고는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윌리엄의 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만으로도 상황을 이해한 윌리엄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버스에 떨어뜨린 모양이네. 엄마아빠가 걱정하실 텐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아?”

윌리엄과 함께 정신을 잃은 제이가 고개를 저었다.

하아, 하고 윌리엄과 제이에게서 동시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물론 제이는 그런 흉내만 냈을 뿐이지만.

그때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윌리엄이 있는 구역 전체가 위에서 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에 놀란 윌리엄과 제이가 반사적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물론 녹슨 철판으로 막혀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콰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이번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방 전체가 기울었다. 그에 따라 촉수에 달랑달랑 매달린 윌리엄도 함께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서준이 쉬는 날 촬영한 ‘빌런과 쉐도우맨 배 위 전투장면’에 따라 세트장 양옆에 있던 기계가 움직였다. 빌런이 쉐도우맨을 공격하기 위해 배를 내려찍으면 그 충격의 여파가 윌리엄이 있는 곳까지 전해지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덜컹-

상하 좌우로 움직이는 세트장의 흔들림은 아주 사실적이라 현장감이 더욱더 살아났다.

감탄이 나올 만한 촬영이었지만, 그런 대단한 세트장보다도 스태프들의 시선은 다른 쪽으로 쏠려 있었다.

배우 서준 리였다.

“대단하네…….”

‘그림자 친구 제이’는 이후 CG로 넣을 예정이기 때문에, 서준은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시선을 주며 연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거기에 ‘제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 감탄하는 사이에도 촬영은 계속되었다.

쿵! 쿵! 콰아앙!!

큰 소리와 커다란 충격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그에 따라 윌리엄이 있는 장소의 흔들림도 격해졌다.

그에 윌리엄은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이, 누가 구하러 왔나 봐.”

첫번째는 자신을 구하러 온 누군가(아마도 히어로)가 위에서 빌런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여긴 배 안인가?”

이곳이 물 위라는 것이었다.

공사장이나 폐공장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느낌이 달랐다. 땅에 충격을 주면 그대로 멈춰야 하는데, 마치 물 위에서 충격을 받고 내려갔다 올라가는, 출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낡은 배라서 그런지, 충격을 받을 때마다 쇳가루와 먼지가 부슬부슬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 윌리엄이 침을 꼴깍 삼켰다.

“……구하러 온 거 맞겠지? 설마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엔 다른 사람은 없고 윌리엄 혼자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제이. 위쪽에 가서 히어로분한테 나 여기 있다고 좀 알려줄래?”

힘이 약해진 상태지만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동료 중에 쉐도우맨이 있으니, 이상한 그림자 취급은 하지 않을 거야.”

제이가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그림자를 늘려나갔다. 천장과 윌리엄을 이은 검녹색의 촉수를 따라, 연하고 얇은 그림자가 주욱 늘어났다.

그때였다.

빼꼼-

천장을 가득 채운 불길하고 기분 나쁜 검녹색의 슬라임 사이로, 검은색의 무언가가 나타났다. 익숙한 느낌이 든 윌리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회색의 제이도 놀란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 파트너!”

윌리엄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쉐도우맨의 그림자, 파트너였다.

자신을 알아본 윌리엄에 파트너가 반갑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하하!”

쉐도우맨이 구하러 왔다!

정말로 안심이 된 윌리엄이 그런 파트너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도 같은 마음인 듯 늘리던 몸을 다시 줄여, 윌리엄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쉐도우맨이라면 믿을 만하지.’라는 듯이.

“파트너! 쉐도우맨에게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 좀 알려……!”

윌리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콰아아앙!!

하고 큰 충격이 전해졌다.

지금까지 느꼈던 충격 중에서도 가장 강한 충격이었다. 동시에 먼지와 바람이 크게 일었다.

처음에는 먼지바람이, 그 뒤로는 시원하고 바다 비릿내가 섞인 바람이 윌리엄에게까지 밀려들었다. 불안함으로 가득하던 마음을 시원하게 날리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빛이 비쳤다.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커다란 구멍이 뚫린 천장에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 아래 한 남자가 있었다.

빛을 등지고 선 남자는 새까만 그림자로 인해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림자야말로 남자, 그 자체였으니까.

“괜찮니, 윌리엄?”

쉐도우맨.

윌리엄의 히어로였다.

* * *

“컷! 오케이!”

조나단 감독의 시원스러운 오케이 외침이 들려왔다.

그에 스태프들이 세트장 천장에서 내려온 에반 블록의 와이어를 풀었다. 서준도 제법 긴 시간 동안 매달려 있던 천장에서 내려와, 밧줄을 풀고 살짝 굳은 몸을 이리저리 스트레칭했다.

“어땠어요?”

“완전 최고였어!”

모니터링을 하러 온 서준의 물음에 조나단 감독이 신이 나 떠들었다.

“윌리엄의 침착함과 상황 파악력이 진 나트라의 희미한 흔적이라는 설정, 역시 넣길 잘했더라. 살짝 진 나트라의 얼굴이 보이는 표정 연기도 좋았고.”

“다행이네요.”

‘윌리엄’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남아있는 ‘진 나트라’의 흔적을 알아보고는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릴 팬들의 모습이 벌써부터 떠올라, 서준은 웃고 말았다.

“바로 다음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매튜 조감독의 외침에, 커크 로렌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라면 바스트샷과 클로즈업샷을 찍어야 하지만, 세 배우가 등장하는 만큼 각 배우들의 대기시간이 길어질 것을 예상해, 먼저 풀샷을 모두 찍은 다음 각자의 바스트샷과 클로즈업샷을 따로 찍을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재연도 준비해 주시고요.”

“예.”

커크 로렌스의 스턴트맨, 김재연이 분장을 끝내고 촬영을 준비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

“레디, 액션!”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쉐도우맨!”

윌리엄이 쉐도우맨을 보고 반가워하던 사이.

태양빛보다는 약하지만, 커다랗게 뚫린 구멍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윌리엄의 그림자도 짙어졌다. 그에 따라 강해진 제이가 지금까지의 답답함을 씻어내려는 듯, 단번에 검녹색의 촉수를 촤아악! 베어냈다.

“앗!”

그리고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윌리엄을 다치지 않게 그물을 만들어 받쳐주었다. 폭신하게 받쳐주는 제이에 잠깐 놀랐던 윌리엄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 이런 건 말 좀 해주고 해줘.”

“……자아 있는 그림자들은 다 이런가…….”

쉐도우맨은 자신의 파트너와 제이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쉐도우맨. 근데 버스에 저 말고 타고 있던 분들이 많았는데…….”

제이의 그물에서 일어난 윌리엄이 쉐도우맨에게 말했다. 그에 쉐도우맨이 웃으며 답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다니, 참 잘 자랐다.

“다른 사람들은 다치긴 했어도 괜찮아. 너만 납치됐거든.”

“저만요? 어째서요?”

“그건-”

의아해하는 윌리엄에, 쉐도우맨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파트너와 제이가 공격과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제 물어봐야지.”

쉐도우맨이 뚫은 구멍으로, 끈적하고 불쾌한 점액성 액체들이 한 방울, 두 방울 진득하게 떨어졌다. 천장에 가득하던 액체들과 윌리엄을 묶고 있던 촉수까지 꾸물꾸물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된 검녹색의 액체 위로, 누군가 내려왔다.

“……그림자……!”

마치 검녹색의 슬라임과 한 몸이 된 것 같은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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