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712화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 쉐도우맨.
물론 그림자 같다고 생각한 검은 기둥들이 솟아오를 때부터 짐작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어쩐지 가면을 쓰고 있는 쉐도우맨도 매우 놀란 듯 보였다. 충격을 받은 듯 그대로 굳어버려 숨 쉬는 것까지 멈춰 버린 듯했다.
자신이야 히어로인 쉐도우맨을 봐서 그렇다지만, 쉐도우맨이 그저 일반인일 뿐인 자신을 보고 놀랄 이유가 있을까?
‘착각인가?’
윌리엄은 가면을 쓰고 있는 쉐도우맨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든 것 같았다.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분.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가 빠르게 뛰었다가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무언가의 기억이 수십 개의 자물쇠로 굳게 잠긴 듯한…… 아니, 아닌가? 자물쇠로 잠길 만한 기억이 나한테 있을 리가. 그럼…… 데자뷔?
정적과 함께, 윌리엄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 때였다.
“쉐도우맨!”
윌리엄이 안고 있던 아이가 외쳤다.
!
윌리엄과 쉐도우맨이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가면 된다.”
쉐도우맨이 왼팔을 들어 올려, 조금 전 막혔던 복도 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길이 막혀서…… 와아……!”
“와아아!”
윌리엄의 말과 동시에, 쉐도우맨의 발밑에서 뻗어 나온 검은색 그림자가 카펫처럼 바닥에 펼쳐졌다. 바닥뿐만이 아니라, 양쪽 벽과 천장까지 물들여 갔다.
그러고는 무너져 내린 돌벽들을 가볍게 뚫어, 그 잔재들을 천장으로 올리고 벽에 바짝 붙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림자로 터널을 뚫는 듯한, 그야말로 그림자로 만들어낸 통로였다.
마법처럼 펼쳐진 길에 윌리엄도 아이도 탄성을 흘렸다.
그 검은색 그림자 통로는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마 그 끝은 출구일 터.
“그림자를 쭉 따라가렴.”
“네! 감사합니다. 쉐도우맨!”
“고마워요!”
꾸벅 인사를 한 윌리엄이 아이를 안고 그림자 통로로 발을 디뎠다.
타다닥!
잠시 아이를 안고 달려가는 윌리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쉐도우맨은 몸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꼭 엄마 아빠한테 데려다줄게.
그 말이 쉐도우맨의 가슴에 깊게 남았다.
* * *
“컷! 오케이!”
스태프들이 다음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서준과 에반 블록은 멋지게 연기해 준 아역 배우들과 함께 모니터링을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나도?”
“당연하지.”
물론, 미스터 카메오인 잭 스미스도 함께.
“으…… 좀 기분이 이상한데?”
모니터 화면 속에서 열심히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에 잭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야구장에서도 봤잖아?”
“그건 야구 경기 보는 느낌이라서 괜찮았지. 이건 연기잖아.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야. 음. 잘한 건지도 모르겠고…….”
“엄청 잘했어요!”
“멋졌어요……!”
두 아역 배우가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에반 블록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잘했어. 진짜 배우 같던걸?”
그 정도로 잘했다.
그에 잭이 쑥스러운 듯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준이 그러더라고요. ‘우리’를 구할 때의 감정을 떠올리면 된다고요.”
“우리! 저 알아요!”
“고래…….”
아하.
에반 블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생명을 구해본 경험이 있으니, 저런 연기가 나올 수 있었나 보다.
‘어쩌면 그래서 이 장면에 잭을 출연시킨 건지도 모르지.’
에반 블록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그 생각을 알아챈 듯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연기에 관해서는 빈틈없이 철저한 배우였다.
“그래도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준이 연기하는 걸 보니까 감정 이입이 엄청 잘됐어요. 진짜 무너지는 건물에서 탈출하는 기분이었다니까요.”
잭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 촬영 장면을 떠올렸다. 촬영장에서의 서준의 연기는 연습 때보다 대단했다.
조나단이 ‘액션!’을 외치고 서준이 연기에 몰입하자, 주위가 변한 기분이 들었다.
신경 쓰이던 카메라나 조명, 스태프들이 사라지고 온전히 세트장만 보이는, 정말로 그곳에 있는 것 같은.
‘윌리엄’과 마주치고, 천장이 무너지고, 탈출하기 위해 달려갈 때까지, 잭 스미스는 정말로 영화 속 인물이 된 것 같았다.
“준이라서 가능한 일이지. 상대방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는 아주 드물거든.”
에반 블록의 말에 잭 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즈업샷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후.
매튜 조감독의 목소리에 잭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오늘 내내 촬영하고 있지만 영 익숙해지질 않는다.
“또 똑같은 장면을 찍는다니…….안 힘들어?”
“? 전혀?”
이게 힘드나? 하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꿉친구에 잭이 웃고 말았다. 힘들어 보이기는커녕 서준은 즐거워 보였다.
‘연기도 연기지만…….’
이런 마인드가 서준이 훌륭한 배우가 되는데 한몫했을 것 같다고 잭은 생각했다.
“넌 진짜 배우가 천직인가 보다.”
“하하. 고마워.”
최고의 칭찬에 서준이 기쁜 듯 활짝 웃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메이저리거 잭 스미스의 카메오 촬영이 모두 끝났다.
* * *
이번 촬영 장소는 공원.
주말 오전마다 윌리엄이 조깅을 하던 곳으로, 이전에 촬영한 적이 있는 곳이었다.
촬영 시간도 저번 촬영과 마찬가지로, ‘윌리엄’의 조깅 시간에 맞춰 오전에 진행되었다.
“이런 사소한 디테일이 중요한 거니까요.”
“마린사 영화 팬들은 무섭지.”
조나단 감독의 말에 제임스 촬영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준비를 끝내고 온 서준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쉐도우맨2에 나오는 추모관에 붙은 사연들도 다 읽어보신 것 같더라구요.”
화면으로 보면 작고 확대했다가는 화질이 안 좋아서 읽기 어려웠을 텐데, 그걸 또 이렇게 저렇게 작업해서 읽어낸, 무시무시한 마린사 팬들이었다.
“그러니까. 아무 말이나 썼다가는 큰일 날 뻔했어.”
서준과 두 감독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에반 블록이 준비를 끝내고 나왔다. 서준이 아쉬운 표정으로 촬영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리첼이 안 와서 아쉽네요.”
오늘 촬영 장면에 벨 나트라(목소리만)가 나오지만, 오늘은 오지 못한 리첼 힐이었다.
“저번 촬영에 왔던 게 놀라운 일이지.”
그건 그렇다.
에반 블록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매튜 조감독의 말에, 무선 이어폰을 귀에 낀 에반 블록이 소품을 들고 벤치에 앉았고, 조깅을 해야 하는 서준은 몸을 풀었다. 운동 전 스트레칭은 필수니까 말이다.
그렇게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모두 준비가 끝났다.
화면과 촬영장을 번갈아 살펴본 조나단 윌 감독이 목소리를 높였다.
“레디, 액션!”
* * *
일주일 후.
추락 사건이 일어난 것이 무색할 정도로 공원은 평화로웠다.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맥은 언제나의 주말처럼 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죽은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야.
우주까지 연결된 무선 이어폰으로 벨 나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 나트라는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상황이었다.
“그러게.”
그에 맥도 작은 미소를 지었다.
경상자는 많았고 중상자도 조금 있었지만, ‘퍼스트’의 정보로는 중상자들 중에서도 사망자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쉐도우맨을 연기하고 있는 에반 블록은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리첼 힐이 미리 녹음한 벨 나트라의 대사에 귀를 기울였다. 이어폰으로 연결된 휴대폰으로 스태프가 대본에 맞춰 들려주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방 없이 혼자 대화하는 연기도 할 수 있긴 하지만, 확실히 이렇게라도 대화하는 것이 연기하기 편하긴 했다.
스태프가 다음 녹음을 재생시켰다.
-진…… 아니, 윌리엄의 부모님도 괜찮지?
“앉아 있던 곳이 출구 쪽이랑 가까워서 다친 곳은 없다고 들었어.”
-다행이네……. 정말로.
안도의 한숨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세트장 밖에서 자신이 출연할 장면을 기다리고 있던 서준은 혼자 연기했을 리첼 힐의 벨 나트라 연기에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다.
역시 리첼이었다.
-그럼 오늘 못 나오는 거 아니야?
“음. 그럴지도.”
아이를 구하려고 했던 건 잘한 일이지만,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대피하던 무리에서 이탈했던 것은 혼날 만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근데 원인은 뭐였어?
벨 나트라가 물었다.
“비젯(퍼스트의 제트기)을 조종하고 있던 사람은 퍼스트 요원이었어. 나사의 워싱턴 지부로 운석을 옮기던 중이었대. 근데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쉐도우맨은 산소호흡기를 달고 치료 중인 퍼스트 요원을 떠올렸다.
-뭐?
“지금 심하게 다친 상태라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적긴 했지만, 아무래도 운석이 원인인 것 같아서 다시 퍼스트 본부로 옮겼어. 완전히 봉인해서.”
-……운석…….
으아아악!
이어폰 건너에서 벨 나트라의 고함이 들렸다.
-우주엔 쓸모없는 게 너무 많아!!
“동감이야.”
그게 또 왜 지구에 떨어지는 건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 * *
양쪽 발목을 돌리며 기다리고 있던 서준은 천천히 제자리를 뛰기 시작했다. 곧 윌리엄이 등장할 차례였다.
능력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고양이 남작의 우아한 발걸음(하급)이 발동됩니다.]
[[(선)고양이 남작의 우아한 발걸음(하급)]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낮아집니다.]
[(선)고양이 남작의 우아한 발걸음(최하급)이 발동합니다.]
‘윌리엄의 몸’에만 남은 기억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은 발걸음이라고 판단하고, 능력의 등급도 내렸다.
그렇게 제자리 뛰기를 하며 점점 속도를 붙이던 서준은, 촬영장으로 들어가라는 조나단 감독의 손짓에 두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윌리엄 리’가 되어 달리기 시작했다.
* * *
타닥타닥!
그때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맥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처럼 달리고 있는 윌리엄이 보였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몇 주 동안 외출 금지라도 받을 줄 알았더니…….”
용케도 부모님께 허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진이야!? 진이 왔어? 나도 진 목소리 듣고 싶어!
“목소리 듣는 건 힘들지. 대화할 일이 전혀 없는, 모르는 사이니까.”
-발소리만이라도 들을 수 있게 해줘, 맥!
벨 나트라의 애절한 목소리에 맥은 이어폰을 조작했다. 이쪽의 소리가 아주 잘 들릴 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점점 다가오는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내가 꼭 엄마 아빠한테 데려다줄게.
야구장에서 아이를 구하던 윌리엄의 모습이 떠올랐다.
“……넌 이렇게 자랐구나.”
동시에 자신마저 파괴하려던 아이가 떠올랐다.
“……이렇게 자랄 수 있었구나.”
어쩐지 가슴이 뻐근해지고,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나온 맥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이어폰 건너 벨 나트라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자신과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가까워지는 윌리엄에, 맥은 언제나처럼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뭐, 알아볼 일은 없겠지만 저도 모르게 숨어버리고 만다.
타닥타닥!
윌리엄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벤치에 앉아 있는 맥을 지나쳤다. 책을 내린 맥이 윌리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지나치는 윌리엄의 모습에 맥이 아쉬워하는데, 갑자기 윌리엄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렸다. 운동화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운동화 끈을 다시 매는 것처럼 보였다.
행운인가.
맥의 시선이 윌리엄에게로 향했다. 다친 곳은 없다고 보고받았지만 자신의 눈으로 이곳저곳 살피게 된다. 물론 의심하지 않게 생수 뚜껑을 따면서…… 자연스럽게…….
하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윌리엄이 맥이 앉아 있는 벤치 쪽으로 다가왔다.
……응?!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맥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맥?
벨 나트라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다가오는 윌리엄에 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듯했다. 아니, 이렇게 굳어버리면 이상하지! 맥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생수병을 입에 댔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물에 조금 정신이 들었다.
넓은 벤치에 맥 혼자 앉아 있었다. 아마 힘들어서 옆자리에 앉을 생각이겠지. 그러면 간단한 대화라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옆자리에 앉을 줄 알았던 윌리엄은, 예상과 달리 맥에게 말을 걸었다.
-헉! 진이야?! 이거 진의 목소리야!?
이어폰 너머로 들뜬 벨 나트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맥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눈앞에 있는 윌리엄에게만 시선을 주었다.
윌리엄이 왜 말을 걸었지? 아, 목이 마른데 마실 물이 없는 건가? 그럼 그만 마시고 윌리엄에게 줘야겠다, 하고 맥이 생수병에서 입을 떼려던 순간.
두 볼이 조금 상기된 윌리엄이 설레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쉐도우맨이세요?”
“푸웁!!”
-콰당!!
맥은 저도 모르게 입안의 물을 내뿜었고, 이어폰 건너에서는 벨 나트라가 의자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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