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711화
“컷! 오케이!”
오전 촬영이 끝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전부터 시작한 촬영이 점심시간을 지나 오후쯤 끝난 거지만.’
무너진 건물을 탈출하려고 달리는 엑스트라들의 모습을 찍고, 탈출 후 야구장 밖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찾는 모습을 찍고, 안도하며 끌어안는 모습을 찍고, 야구장 건물의 오른쪽 부분과 충돌해 3분의 1쯤 무너진 비행물체와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을 찍고.
하여튼.
야구장에서 찍을 수 있는 장면은 모두 촬영했다.
“스튜디오로 이동하겠습니다!”
조감독 매튜의 외침에 촬영장을 북적이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대부분의 엑스트라들은 이제 퇴근하고 일부 엑스트라들과 서준, 잭 스미스, 에반 블록은 스튜디오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럼 잭 스미스 선수, 올해 경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촬영도, 야구도 힘내세요!”
촬영을 모두 끝낸 조성환과 멜리사 월튼도 이제 퇴근할 예정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잭 스미스가 웃으며 말했다.
서준과 에반 블록, 조나단 감독과도 인사한 두 배우가 퇴근하고, 두 배우와 야구 선수는 서준의 차에 올랐다.
“조나단은 같이 안 타?”
“다른 차에 탄대.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에 대해 회의한다고 하더라.”
잭의 물음에 서준이 답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잭 스미스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촬영장비와 촬영에 필요한 소품 등을 정리 중인 스태프들이 보였다.
“저분들은 같이 안 가고? 스튜디오에서도 스태프분들이 필요하잖아.”
“스튜디오에는 또 다른 스태프들이 있어. 촬영감독님이나 조명, 미술팀같이 중요한 일은 맡은 스태프들은 지금 같이 이동하고 있고.”
“저기 있는 스태프분들은 뒷정리만 맡아주시는 거야.”
에반 블록과 서준이 웃으며 잭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하.
잭 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이 빠르고 부드럽게 이어지게 하려는 조치인 것 같았다.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물어보던 잭 스미스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이렇게 찍는구나, 영화.”
중간의 탈출하는 장면을 홀라당 넘겨버리고(스튜디오에서 촬영한다.), 탈출한 후의 장면(?)부터 먼저 찍은 잭이 감탄하며 말했다.
“응. 이렇게 찍은 다음에 편집으로 이어붙이는 거야.”
서준의 뒤를 에반 블록이 이었다.
“그래도 조나단은 라이언 감독님에게 배워서 그런지 영화 순서랑 거의 비슷하게 촬영하는데, 뒷부분부터 찍고 앞부분을 촬영하는 감독님들도 있어. 복수물 같은 경우에는 복수를 다 끝낸 뒤에,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을 찍는 거지.”
“음. 그러면 몰입이나 감정 연기 부분에서 힘들겠네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잭의 모습에 서준과 에반 블록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랄까. 진짜 신인 배우 같네.”
“그러게요.”
장하다.
잭 스미스!
서준이 기특해하고 있는데 에반 블록이 입을 열었다.
“준이 얼마나 열심히 가르쳤길래…….”
“…….”
……음.
서준이 입을 다물자, 에반 블록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힘들었어요. 자기가 요약해 뒀다면서 연기에 대한 기초부터 가르쳐줬다니까요. 전 야구 선수인데! 오늘만 찍고 영화 찍을 일은 없을 텐데!”
물 만난 물고기처럼 힘들었던 서준과의 연습과정을 이야기하는 잭에, 서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번 촬영이라도 촬영은 촬영이야.”
“저렇게 말하면서요!”
“하하하.”
스튜디오로 가는 차 안이 시끌벅적했다.
* * *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잭은 처음 촬영하는 신인배우처럼 신기한 눈으로 세트장을 둘러보았다.
“오오! 야구장 건물이랑 완전 똑같은데?”
“그거 보고 만들었을 테니까.”
서준도 익숙한 듯 말했지만, 역시 할리우드 미술팀의 저력은 대단했다.
비행물체와의 충돌로 무너진 야구장 건물 내부 통로를 그대로 가져온 듯한 세트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이렇게 움직입니다.”
조감독 매튜가 두 베테랑 배우와 신인배우(현직 메이저리거)에게 동선을 알려주면서 세트장을 작동시켰다.
우우웅-
작은 기계음이 들렸다.
그러자 부서진 벽면의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긴 했지만 제법 이동이 가능할 만큼의 여유가 있던 통로의 천장과 양 벽이 무너져 내렸다. 통로가 완전히 막혀 버렸다.
“오!”
잭 스미스가 눈을 빛냈다.
“이러면 다시 돌아가죠.”
조감독 매튜가 기계를 작동시키자 무너졌던 천장과 양 벽이 다시금 작은 기계 소리를 내며, 마치 마법으로 시간을 돌린 듯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진짜 대단하다!”
할리우드의 기술에 감탄하는 잭과 달리, 서준은 볼을 긁적이고 있었다.
“음. 어쩐지 생존자들이 생각나는데요?”
“나도 그래.”
무너진 건물과 탈출.
이라고 하면 [생존자들]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거기에,
“안녕하세요…….”
“잭이다!!!”
부끄러워하는 남자아이와 야구팬인 듯 잭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여자아이의 모습에 어른들이 미소를 지었다.
“어린아이들까지 있으니 관객들도 분명 생존자들을 떠올리겠네.”
“그렇지 않도록 열심히 연기해야죠.”
다짐하는 배우의 얼굴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지.
에반 블록이 미소를 지었다.
“팬이에요…… 준. 에반.”
“사인해 주실 수 있나요, 잭? 준이랑 에반도요!”
지금부터 함께 촬영할 아역배우들인 만큼, 서준과 잭, 그리고 에반 블록도 친해지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히 해줄 수 있지!”
“어디다 해줄까?”
“여기요……!”
“야구공 가지고 올걸!!”
이번에만 출연하는 단역이라서 그런지, 대사가 많고 감정 연기가 있었던 [생존자들]을 찍을 때의 앤드류 워커보다 어린 아이들이라 귀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배우들(야구 선수가 껴 있지만)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배우분들!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촬영할 시간이 다가왔다.
* * *
의상을 갈아입고 분장까지 끝낸 배우들(한 명은 메이저리거다)이 촬영장에 나타났다.
쉐도우맨으로 분장한 에반 블록을 제외하면, 건물이 무너져 내린 이후 생긴 흙먼지나 시멘트 가루 등으로 더럽혀진 야구 유니폼(서준, 잭)과 일상복(두 아역배우)을 입고 있었다.
“바닥에 표시해 뒀으니까 여기에 서 있지 마. 특수소재로 만든 벽들이라서 가벼워서 다칠 일은 없겠지만.”
“네. 그럴게요.”
“예.”
서준과 잭에게 아까 전 봤던, 천장과 벽이 무너져 내리는 장치를 다시 한번 주의시킨 조나단 감독이 촬영을 시작하기 위해 세트장에서 물러났다.
넓은 세트장 위.
배우들이 서 있었다.
“레디,”
사방이 조용해지고,
“액션!”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조금 전까지 감독, 팀원들과 움직이고 있던 윌리엄은 어렴풋이 들리는 여린 울음소리에 ‘윌리엄 리!!’라고 외치는 감독의 목소리에도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까의 검은 기둥과 그물 덕분인지, 1차 충격 이후 다른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아마도 쉐도우맨이겠지.’
참 좋아하는 히어로지만.
이렇게 목격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엄마 아빠는 안전하게 탈출했을까.
당장에라도 밖으로 나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어린 울음소리가 윌리엄을 붙잡고 있었다.
작은 소리라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울음소리.
윌리엄은 더 빨리 무너진 건물의 복도를 달렸다.
2차 충격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금이 간 건물 천장과 벽, 그리고 이따금 스르륵 떨어지는 흙먼지들을 보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아…… 아빠아아…….”
우는 것도 힘겨워하는 듯한 어린 소리가 가까워졌다. 윌리엄은 코너를 돌았다. 거기에 홀로 울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탈출 중 가족과 떨어진 것 같았다.
“꼬마야. 잠시만 기다려!”
“흐어어엉……!”
어른의 등장에 안심이 됐는지 우는 소리가 커진 아이가 윌리엄에게로 두 팔을 뻗었다.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말고.”
윌리엄은 그런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안았다. 따뜻한 온기와 안심이 된 마음에 아이는 천천히 울음을 그쳐갔다.
스르륵-
그때,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졌다.
이제 정말로 나가야 할 때였다.
아이를 안은 윌리엄은 다시 건물 통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고 있으니 넘어지지 않게 주의하면서도 빠르게. 체력은 충분했다.
타다닥!
그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발소리였다. 아직 탈출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나 보다. 그리고 윌리엄은 코너에서 달려오던 그 사람과 마주쳤다.
“젠장! 여긴 어디야?”
상대팀 투수였다.
그 녀석은 훌쩍이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너?!”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상대팀 투수는 그제서야 윌리엄을 발견했다. 제 공을 담 너머로 보내버린 4번 타자. 하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탈출부터 하자.”
윌리엄의 말에 상대팀 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 이 경기장 처음이야. 길 좀 가르쳐 줘.”
“그래.”
LA에서 전학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윌리엄이 앞장서서 뛰어갔고 그 뒤를 상대팀 투수가 따라갔다. 운동선수들이라서 그런지 속도가 빨랐다.
┼ 모양의 길에 다다랐다. 위쪽 길로 가면 출구였다.
“이런! 막혔어!”
하지만 출구는 돌덩이들로 막혀버린 상태였다. 오른쪽 길도 왼쪽 길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막다른 길이었다.
“돌아가야 해!”
먼저 들어왔던 윌리엄이 뒤를 돌았다. 뒤쫓아왔던 상대팀 투수도 그대로 몸을 돌려 통로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쿠구구궁-
커다란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진동과 시멘트 가루들.
두 소년은 팔을 들어 아이들의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금방이라도 머리 위의 천장이 무너져 내려 그대로 깔려 버릴 것만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대팀 투수와 윌리엄 사이로 천장과 벽이 무너져 내렸다. 어른은커녕 어린아이도 통과할 수 없는 조금의 틈들만 남기고.
“이봐! 괜찮아?”
“괜찮아! 너부터 먼저 가!”
그 틈 사이로 상대팀 투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윌리엄이 외쳤다.
“너는 어쩌고? 이 돌들을 치우면……!”
“너 혼자서는 힘들어! 아이도 있잖아! 일단 너부터 나가! 아까 왼쪽으로 돌았던 곳 있지? 거기서 직진하다가 왼쪽으로 가면 좀 돌아가겠지만, 출구가 있을 거야!”
아이들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기다려! 사람들 불러올 테니까!”
타다닥!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 * *
“이거…… 생존자들이 생각나는 것 같은데, 나만 그래?”
“아니요. 저도 그래요.”
물론 슈퍼히어로 영화에 무너진 건물이나 탈출 장면 같은 건 빼놓을 수 없지만, 아무래도 [생존자들]이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데다가([감독판]이 아주 큰 몫을 했다.) 배우도 같다 보니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찮으려나?”
전작(몇 년 전 작품이지만)의 이미지가 지금 작품에 영향을 준다면 배우에게도 작품에도 큰일일 터였다.
속닥거리던 스태프들이 슬쩍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앞뒤로 막힌 통로에 갇혀 버린 서준 리의 모습을 찍고 있는 카메라였다.
서준 리의 얼굴이 보였다.
“……괜한 걱정을 했네.”
아니, 윌리엄 리의 얼굴이 보였다.
비슷한 상황, 같은 얼굴.
그러나 ‘이현우’와는 분위기도 느낌도 눈빛도 전혀 달랐다.
심약하지만 이안을 위해 각오를 다졌던 ‘이현우’와 달리, ‘윌리엄 리’는 내면과 외면 모두 강하고 든든한 인상이었다. 굳세고 강인하며 의지가 되는.
그야말로 히어로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 * *
“흐으응…… 무서워…….”
“괜찮아.”
무너져 내린 틈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만이 비치는 어둠 속.
무서움과 불안함에 자신의 유니폼 자락을 구명줄처럼 꽉 잡는 아이를, 윌리엄은 미소를 지으며 토닥였다.
“내가 꼭 엄마 아빠한테 데려다 줄게.”
윌리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단했다. 믿음직스러웠다. 정말로 그렇게 해줄 것만 같아, 훌쩍이던 아이는 진정해갔다.
“제…….”
툭-
말을 이으려던 윌리엄이 돌이 떨어져 내린 듯한 소리에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막혀 있던 오른쪽 길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쉐도우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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