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709화
내 이름은 잭 스미스.
수백억 대의 연봉을 받고 있는 메이저리그 LA다저스 소속의 잘나가는 타자……지만,
지금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친구 앞에서 침만 꼴깍 삼키고 있는 신세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 연기광에게 카메오를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가 이 고난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찔끔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 같았다.
“음.”
친구는 생각에 빠진 눈치다.
아니, 저건 지금 자신을 놀리기 위해 시간을 끄는 거였다.
슈퍼스타 이서준이 아니던가.
연기를 보면 합격, 불합격이 딱 나올 텐데, 괜스레 생각을 하는 듯 시간을 끌며 자신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게 꽤나 고심하는 듯한 모습이라 자신도 속아 넘어갈 것 같았지만.
‘저건 연기다. 연기.’
괜히 소꿉친구가 아니었다.
눈을 부릅뜨고 판정을 기다리는 잭 스미스와 친구를 놀릴까 말까 고민하는 서준.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거실이지만, 최태우는 그런 분위기를 전혀 신경 안 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금 그는 코코아엔터 이서준 배우 전담 1팀에서 보내준 영양식단표를 바탕으로 저녁을 준비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서준이가 촬영을 시작했으니 잘 먹여야지!’
게다가 친구인 잭 스미스까지 있으니, 맛도 맛이지만 양도 많아야 했다. 이제 곧 저녁 식사 시간이라서 그런지 최태우의 움직임이 더더욱 빨라졌다.
잭 스미스에게만 길게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연기광의 입이 열렸다.
“합격!”
“으아아아!!!”
메이저리거가 포효했다.
경기에서 홈런을 쳤을 때의 짜릿함보다 더 큰 환희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어퍼컷을 날리며 합격의 기쁨을 즐기던 잭 스미스가 긴장이 풀린 듯 소파 위에 널브러졌다. 운동선수다운 큼직하고 묵직한 몸까지 든든하게 지지해 주는 튼튼하고 푹신한 소파였다.
“불합격이면 시간 끌 것도 없이 불합격이라고 말한 다음에 바로 레슨 시작했는데, 이번엔 안 그랬으니까 합격일 줄 알았지!”
“하하하. 고생했어. 잭.”
“그래! 난 고생했어!!”
만세를 하듯 소파에 기대 길쭉한 두 팔을 쭉 뻗고 버둥거리며 다시 한번 합격의 즐거움을 느끼는 잭 스미스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촬영 때도 이렇게만 해줘.”
“알았어.”
합격의 기쁨을 충분히 느낀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의아한 듯 말을 이었다.
“근데…….”
“응?”
“각오했던 것보다는 쉽더라.”
……각오.
그런 단어까지 쓸 일인가.
싶지만 서준은 이내 이해했다.
‘내 이미지가 그렇지, 뭐.’
서준의 지인들이 이 생각을 알았다면 ‘이미지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외쳤을 터였다.
“초보자를 카메오로 쓰는 거니까 최대한 익숙하고 쉬운 장면으로 해야지. 연기도 잘 못 하는 사람을 중요한 장면에 카메오로 쓸 생각은 없어.”
연기를 배운 이들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서준인데, 본업이 야구선수인 카메오라면 더 볼 것도 없었다.
“그리고 잭 너는, 나랑 옛날부터 연극……놀이랄까, 그런 걸 자주 해서 연기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고 있었고. 소꿉놀이할 나이가 지났을 쯤부터는 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하긴 어렸을 때 많이 했었지.”
잭 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어려서 야구를 하기 어려웠을 때쯤이라 확실히 기억은 잘 안나지만, 어쩐지 아기 서준과 함께 있던 추억을 떠올리면 항상 역할놀이를 한 것 같았다.
‘아냐! 의사 선샌님은 이러케 하는 거야!’
‘……이러케?’
‘마자! 잘해써, 잭!’
으으음.
추억을 더듬던 잭 스미스가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아빠와 인형놀이를 하고 놀 때도 연기력을 요구했던 아기 서준은 친구인 잭 스미스와 놀 때도 연기력을 요구했다. 순한 잭은 잘 습득했고.
연기의 조기교육이랄까.
잭 스미스가 연기 쪽으로 관심이 있었다면 아마 연기력 좋은 배우가 됐을 터였다.
“음. 역시.”
잭 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저리거를 카메오로 쓸 때부터 다 계획이 있었던 거다.
“현장에 가면 배경이나 소품 때문에 더 몰입할 수 있을 거야. 이번 장면은 크로마키가 아니라 세트장을 쓴다고 했거든.”
“그건 다행이네.”
아무것도 없는 거실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게 조금 민망하긴 했다.
“근데 이 장면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야?”
잭 스미스가 테이블 위에 놓여진 몇 장의 종이를 보며 물었다.
[쉐도우앤나이트]의 전체 대본이 아니라 잭 스미스만 나오는 부분의 대본만 준 상태였기 때문에, 앞뒤의 상황은 전혀 모르고 있는 잭이었다.
[쉐도우맨 시리즈]의 팬이기도 한 잭 스미스의 물음에 서준이 히죽 웃었다.
“영화로 봐.”
“아니, 줄거리까진 아니더라도 앞뒤 장면은 가르쳐 줄 수 있잖아.”
“싫은데?”
아기 때부터 같이 지내서 그런가, 함께 있으면 어릴 적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장난기가 도는 서준과 잭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두 사람의 손이 슬그머니 옆에 있던 쿠션으로 향했다. 폭신한 솜과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오른쪽 손에 느껴졌다.
그게 시작 신호였다.
푹신한 쿠션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아 좀 가르쳐 달라고!”
“영화로 보라니까!”
“개봉까지 한참 남았잖아!”
우당탕탕!
시끌벅적한 소리에 다이닝룸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최태우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연습 다 끝났으면 저녁 먹을래?”
“네, 태우 형!”
“감사합니다!”
그에 각자 손에 들고 있던 쿠션(다행히 터지지 않았다)들을 얌전하게 내려놓은 서준과 잭 스미스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이닝룸으로 가자, 식탁에 요리가 가득했다.
맛있어 보이는 요리들에 눈을 번뜩이는 잭 스미스를 보며 웃던 서준이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태우 형 혼자 준비하신 거예요?”
그런 거라면 미안했다.
서준의 말에 최태우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관리해 주시는 분들이 준비해 놓은 거 데우기만 했어.”
몇몇 요리는 직접 만들긴 했지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리자격증까지 있는 서준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형.”
“별말씀을.”
빙그레 미소를 지은 최태우까지 자리에 앉고 세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이었다.
* * *
다음 날.
“여기가 영화 촬영장…….”
잭 스미스가 스태프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이 아니라 야구장이잖아?”
진짜 LA에 있는 야구장이었다.
잭 스미스도 가족과 함께 종종 왔고 경기도 해본 적이 있는 그런 야구경기장.
의아해하는 잭 스미스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야구장을 빌렸으니까.”
“그럼 파괴된 야구장에서 연기하는 장면은 어떻게 찍어?”
“그건 스튜디오 세트장에서 찍어야지. 여기서 찍긴 힘드니까.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CG로 처리할 거야.”
“……와. 되게 조각조각 촬영하는구나?”
“그렇지.”
잭 스미스의 감탄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촬영에 대해 잘 모르는 관객들이 보기엔 다 한 장소에서, 연속적으로 촬영하는 줄 알겠지만 원래 영화라는 건, 조각조각 촬영한 영상을 편집으로 이어붙이는 것이었다.
거기에 풀샷, 바스트샷, 클로즈업샷 등의 연출까지 합쳐지니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너도 오전, 오후 두 번 촬영하는 거고. 오전에는 여기 야구장에서 촬영하고 오후에는 스튜디오로 이동해서 촬영할 거야.”
“난 또. 내가 초보자라 NG 많이 낼까 싶어서 하루종일 촬영하는 줄 알았지.”
그말에 서준이 잭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주 환하게.
“……열심히 할게.”
“응.”
그래야지.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감독님한테 인사하러 가자.”
“아…… 나 여기 있어.”
응?
서준과 잭 스미스 그리고 조용히 있던 매니저 최태우가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조나단 감독과 에반 블록이 서 있었다.
“밖에 계셨어요?”
“응. 잭이 온다고 해서 마중 나왔지.”
서준의 친구인 잭은 워낙 어렸을 때부터 지낸 사이라서 그런지, 에반 블록과 조나단 감독과도 제법 친분이 있었다.
“경기 잘 보고 있어.”
“감사합니다. 에반.”
“카메오로 출연해 줘서 고마워, 잭.”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말에 에반 블록과 조나단 감독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전 봤던 서준의 미소를 떠올렸다. 분명히 웃고 있는데 무섭달까.
“무언의 미소가 그렇게 무서울 줄이야…….”
“준이 좀…….”
“시놉시스를 쓸 때도 그랬어요. 에반.”
“다 들려요.”
크흠.
서준의 말에 앞담화를 하던 에반 블록과 잭 스미스, 조나단 윌 감독이 동시에 헛기침을 했다. 최태우가 작게 웃었다.
“그럼 안에 들어가자. 각자 야구팀 배우분들하고도 인사해야 하고.”
“야구팀이라니까 정말 경기하는 거 같네요.”
야구장. 야구팀.
익숙한 단어들에 긴장하고 있던 잭 스미스는 바짝 굳어 있던 어깨가 풀리는 것 같았다.
두 배우와 감독이 그런 잭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 * *
“잭 스미스 선수?!”
“아니, 어떻게, 여긴, 왜……?”
“아, 리 배우랑 친구라고 했지!!”
“카메오이신가 봐요!”
벌써 유니폼을 입고 있던 엑스트라 배우들은 두 슈퍼스타의 등장에 자리에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서준과 잭 스미스는 그런 배우들과 인사를 나눈 후, 대기실로 향했다.
[배우 서준 리 / Mr.카메오]
서준이 ‘미스터 카메오ㅋㅋ’ 하고 웃자 잭이 서준의 옆구리를 쳤다.
대기실에는 조금 전 엑스트라들이 입고 있던 유니폼과 같은 유니폼이 걸려 있었다.
서준은 B가 새겨진 베이런 고등학교 야구팀의 유니폼으로, 잭 스미스는 E가 새겨진 다른 고등학교의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기분 좀 이상한데?”
의상을 갈아입은 잭과 자신을 번갈아 보던 서준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게.”
소꿉친구이지만 유치원을 빼고는 같은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는 서준과 잭이었다.
그런데 영화 촬영인 데다가 다른 학교이긴 하지만, 이렇게 유니폼을 입고 같이 경기를 한다는 사실에 어쩐지 삐죽 웃음이 나오는 것 같았다.
“너랑 같은 학교 다녔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건 그래.”
잭 스미스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한국의 학교 생활도 좋았지만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양한 인종과 성격의 친구들과 만나고 할리우드도 근처에 있으니 재미있는 작품들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1년 정도는 미국에서 지낼걸 그랬나?”
“그것도 좋았겠다. 그럼 맨날 야구하자고 했을 텐데.”
“아, 그건 좀.”
서준의 즉각적인 반응에 잭이 빵 터졌고, 서준도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배우 서준 리의 대기실 밖.
촬영 준비를 알리러 왔던 에반 블록과 조나단 감독이 대기실 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그렇게 준비 시간이 끝나고.
[쉐도우앤나이트]팀은 본격적으로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관객들은 이쪽으로!”
“베이런 학교 학생들은 저쪽입니다!”
“스카우트들! 가족들!”
스태프들의 외침에 엑스트라들이 각자의 역할별로 관객석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관객석 아래, 잔디와 흙이 깔린 경기장에서도 같은 팀 선수들과 코치, 감독의 역할을 맡은 엑스트라 배우들이 벤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 서준과 잭도 각자의 팀 벤치로 향할 시간이었다.
이렇게 잭과 함께 촬영하는 날이 올 줄이야.
계속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만큼 신이 난 서준이 입을 열었다.
“잭, 우리 열심히 하자.”
“그래. 준.”
잭도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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