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708화
차에서 내린 서준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상시에도 날씨가 좋은 LA라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좋은 것 같았다.
하늘까지 촬영을 돕는 느낌이랄까.
서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오늘은 야외촬영이 있는 날.
다른 것보다 날씨가 중요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크로마키 고정 제대로 해!”
“조명! 전선 정리 좀 해주세요!”
완벽한 야외가 아니라 스튜디오 구역 내이긴 하지만, 야외촬영이라서 그런지 다른 때보다 준비할 것이 많은 듯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준과 최태우는 그런 스태프들의 사이를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지나쳐 오늘 촬영할 장소에 도착했다.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들과 잔디밭, 그리고 벤치와 러닝 트랙이 있는 공원이었다.
물론 일부 구역만 만든 세트장이었다. 다른 부분은 전부 크로마키가 설치되어 있어 나중에 CG로 완전한 공원을 만들 예정인 것 같았다.
케이크 한 조각처럼, 공원 한 구역을 떼어놓은 듯한 촬영장을 신기하다는 듯 살펴보던 최태우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거기지? 매드해터 쿠키영상에 나왔던 공원.”
공원 세트장을 바라보며 미리 동선을 살펴보던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쪽에서 저쪽으로 달리기만 하면 되는 터라 동선이랄 것도 없지만 말이다.
“네. 맞아요.”
“쿠키영상에서 봐서 그런가. 한 번도 와본 적은 없지만 익숙한 느낌이네.”
“저도 그래요.”
서준이 웃으며 동의했다.
발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몇 번이고 돌려봤던 장면이니만큼 익숙한 느낌이었다.
“왔어, 준?”
“네. 조나단 감독님.”
세트장을 구경하고 있던 서준과 최태우에게 조나단 감독이 반갑게 맞자, 서준도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직도 준한테 듣는 감독님이라는 말은 어색하네.”
“하하. 촬영 끝날 때쯤이면 익숙해지겠죠.”
조나단 감독이 뒤통수를 긁적이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저도 좀 어색해요. 조나단.”
그에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조나단 감독과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코코아엔터에 보낼 보고서에 [오늘도 감독님과 사이좋음.]이라고 쓸 생각인 최태우도 미소를 지었다.
“에반은 도착했어요?”
“응. 대기실에 있어. 같이 갈…….”
“감독님!”
“혼자 가야겠다…….”
“하하. 힘내세요. 감독님.”
조감독이 부르는 소리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조나단 감독을 뒤로하고, 서준은 야외촬영장과 멀지 않은 곳의 스튜디오 안에 마련된 대기실로 향했다.
“스튜디오 구역 내의 야외촬영은 좋네. 대기실도 천막이 아니고.”
“그렇긴 하죠.”
CG를 적게 쓰는 대신 ‘진짜’ 야외촬영이 많았던 [오버 더 레인보우2]는 배우들이 대기하는 곳을 간이천막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스튜디오 구역 내의 야외촬영은 가까운 스튜디오의 대기실을 쓸 수 있어서 편하고 좋았다.
“한강 공원에서의 촬영과 집 앞마당에서의 촬영, 정도의 차이랄까요.”
“그렇게 말하니 확실히 이해가 되네.”
스태프들에게도 배우들에게도 후자가 편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새 대기실에 다다른 서준이 ‘에반 블록’이라고 적힌 문을 두드렸다. 음. 어제 촬영이 떠오르는 건 착각이 아닐 거다.
“준!”
하지만 에반 블록만 있었던 어제와는 달리, 또 다른 반가운 사람이 대기실 안에 있었다.
“리첼!”
리첼 힐이었다.
와아아아!
서로 만나 즐거워하는 두 배우를 보며 에반 블록과 최태우가 작게 웃고 말았다.
“어쩐 일이에요, 리첼?”
서준이 비어 있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이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그 작은 배려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침 쉬는 날이라서 왔지!”
“촬영은 잘 돼 가요?”
“응.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서 잘 돼 가고 있어.”
[쉐도우앤나이트] 말고, 다른 작품을 촬영하고 있는 리첼 힐이 씨익 웃으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그래도 아쉽긴 해. 촬영만 아니었으면 고사에도, 준의 첫 촬영에도 갔을 텐데 말이야. 고사 재미있었지? 윌리엄의 첫 등장이라니! 꼭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괜찮아요. 못 올 수도 있죠.”
미니 냉장고에서 서준에게 줄 음료수를 꺼내던 에반 블록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준. 나랑 리액션이 너무 다른 거 아니야?”
“응? 어쨌길래?”
“그게 말이지…….”
“아니, 에반이랑 리첼은 상황이 좀 다르잖아요!”
어느새 대기실이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이거 에반의 대기실이 아니라 배우 대기실로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러게요.”
스태프들이 웃으며 속닥거렸다.
* * *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것도 잠시.
곧 촬영을 위해 분장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서준이 의상을 갈아입는 동안 나가 있던 리첼 힐이 들어와 화장과 헤어 스타일링을 받고 있는 서준의 옆에 앉았다.
“에반은 혼자 있겠네요.”
자신의 대기실에서 홀로 쓸쓸히 분장을 받고 있을 에반이 떠올랐다. 리첼 힐이 어깨를 으쓱였다.
“걘 재미없어.”
그 말에 작게 웃던 서준이,
“웃으면 안 돼요. 준.”
“네.”
분장팀 스태프의 말에 얼른 표정을 바로 했다. 그에 분장할 게 하나도 없어 자유로운 배우, 리첼 힐이 키득키득 웃었다.
“리첼이 올 줄은 몰랐어요.”
“시간이 맞아서 올 수 있었지. 다음에는 못 올 수도 있어.”
“네. 무리하지는 마세요. 리첼.”
아무리 일정이 확실히 정해져 있는 할리우드라고 해도 촬영이 힘든 건 마찬가지니까. 이렇게 와준 게 정말 고맙고 반가웠다.
“그래도 오늘 보니까 정말 좋아요.”
“나도 그래.”
스타일링 중이니 움직이면 안 되는 서준과 스타일링은 하지 않아도 되는 리첼 힐이 거울을 통해 눈을 마주치며 훈훈하게 웃었다.
* * *
“레디, 액션!”
쉐도우맨, 맥은 주말 오전 시간이 나면 이 공원에 꼭 오고는 했다.
푸른 잎이 가득한 나무들과 파릇파릇한 잔디, 넓은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러닝트랙이 있는 공원. 이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운동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이 동네에는 ‘그 아이’가 살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자신의 일에만 전념하려고 해도 어느새 이 근방을 떠돌고 마는 맥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정말로 우연히.
그 아이가 가족과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친구들과 신나게 노는 모습을, 아주아주 가끔 친구와 싸우고 우는 평범한 모습을 볼 때면 머나먼 곳에 있는 ‘그 아이의 잊혀진 가족’에게 전하고는 했다.
그러다 그 아이가 주말 오전마다 이 공원에서 러닝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맥이었다.
“……나는 산책 나온 거야.”
읽지도 않을 책을 들고 벤치에 앉은 맥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때, 지직지직-
주파수가 맞지 않는 듯한 기계음이 들렸다. 카메라가 맥의 귀에 꽂힌 무선 이어폰을 클로즈업했다.
-아, 또 이러네!
벨 나트라의 목소리와 함께 쿵! 쿵! 기계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벤치에 앉아 있던 맥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러다 더 고장 나겠다. 벨.
-아, 됐다. 이제 잘 들리지? 거긴 어때?
“평소랑 같지, 뭐.”
사건만 터지지 않으면 평화로운 곳이었다.
곧 지지직거리던 소리가 안정을 되찾았다.
-그럼 다행이네.
벨 나트라가 발랄하게 말했다.
-얼마 전에 보낸 자료 있잖아.
“어, 운석 말이지?”
서준은 벤치에 앉아 연기하고 있는 에반 블록을 바라보았다.
쿠키영상에서는 다른 대사가 나올 차례지만 이건 [쉐도우앤나이트]의 본편이었다. 그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에반 블록 혼자서 연기를 해나갈 수도 있었지만, 대화하는 느낌을 좀 더 살리기 위해 리첼 힐이 함께 대사를 이어나갔다.
[쉐도우앤나이트]에서 벨 나트라는 목소리로만 등장할 예정이었다.
‘이것도 나중에 후시 녹음을 할 예정이고.’
그래서 리첼 힐은 분장도 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오늘 오지 않아도 됐는데…….’
쉬는 날임에도 일부러 와준 리첼 힐이 고마운 서준이었다.
영화의 주연으로 참여하는 에반 블록과 목소리만 나오는 리첼 힐.
당연히 서준의 리액션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자료만 보면 딱히 문제 될 건 없어 보여. 실제로 봐야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내가 지금 바빠서 말이야.
“괜찮아. 그 정도면 충분해.”
벨 나트라의 의견까지 더해져 평범한 운석으로 판명되자, 맥은 어깨의 힘을 빼고 벤치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조금 있다 테일러 워런에게 알려줘야겠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끝나고 사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아참, 아버지가 한번 들르라고 하시더라. 집에 온 지 꽤 됐잖아.
“지구 시간으로는 별로 안 지났어.”
타닥타닥.
묵직하면서도 일정한 속도의 발소리에, 말하고 있던 맥이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 눈을 빛내며 열심히 달리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그에 맥의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버지랑 나는 나트라에 있으니까 나트라 시간으로 계산해야지. 그러니까 자주 와. 올 거지, 맥? 매액?! 뭐야. 또 끊어진 거야?
“잠깐만.”
탁탁탁-
발소리는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맥은 미소를 지으며 무릎에 올려두었던 책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 아이의 잊혀진 가족’에게 말했다.
“그 애가 오고 있어.”
-……오…….
이어폰에서 조금 늦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물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
그 아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즐겁게 달리고 있었다.
어둠은 전혀 없고 햇살만이 아이를 비추고 있는 듯한 모습에 맥은 숨 쉬는 것도 잊고 바라보았다.
괴로워하던 진 나트라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윌리엄 리라는, 친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지구인 소년만이 거기에 있었다.
윌리엄이 멀어져갔다.
1시간 같았던 1분이 지나고 맥은 저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내뱉었다. 이어폰 건너, 벨 나트라도 함께 숨을 멈춘 것인지 하아,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
“…….”
잠시 가볍고도 무거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그 애는 어때?
십여 년이 흘렀지만(나트라 행성의 시간으로는 더 흘렀겠지만) 여전히 진이라고도, 윌리엄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벨 나트라가 입을 열었다. 벨 나트라에겐 ‘윌리엄’보다 ‘진 나트라’가 소중한 가족이었다.
“잘 지내고 있어.”
어느새 사라져 버린 윌리엄의 뒤를 바라보던 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야구 쪽으로 진로를 정한 모양이야. 다음 주에는 다른 학교랑 경기도 하는데 스카우트들도 많이 올 거라는 모양이더라. 나도 구경하러 가려고.”
야구장에서의 윌리엄은 얼마나 행복한 모습일지.
상상만 해도 미소가 지어졌다.
-맥…… 있잖아…….
벨 나트라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너 완전 스토커 같은데……?
“?! 아니야! 이건 꽤 유명한 이야기라고! 네가 지구, 아니, 미국인들이 야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재능 있는 선수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프로에서 노리고 팬들도 있을 정도야! 기사도 나고!”
-어…… 음…….
“네가 여기 하루만 있어도 알 수 있는 정보라니까!”
미국인들의 야구 사랑에 대해 전혀 이해 못 하는 외계인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지구인(사실은 외계인)이었다.
* * *
“컷! 오케이!”
오늘 촬영이 모두 끝났다.
물론, 리첼 힐은 오늘 했던 대사를 다시 녹음해야겠지만 말이다.
“시간 내서 와주셔서 감사해요. 리첼.”
“별말씀을!”
조나단 감독의 말에 리첼 힐이 빙그레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음 촬영도 구경하러 가고 싶은데 말이야. 준의 친구가 출연하는 거 맞지?”
“네. 맞아요.”
리첼 힐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잭 스미스가 카메오로 출연하는 장면을 찍을 날이 다가온 것이었다.
“그 친구는 연기 잘해?”
에반 블록의 물음에 리첼 힐과 조나단 감독도 귀를 쫑긋 세웠다. 메이저리거인 건 알지만 서준의 친구이니 어느 정도 하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었다.
그에 서준이 히죽 웃었다. 어쩐지 얼굴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걱정 마세요. 촬영할 장면만큼은 같이 열심히 연습했거든요.”
“오…….”
그 말에 고생했을 준의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두 배우와 감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