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707화
오늘은 촬영이 없는 날.
정확히 말하자면 ‘윌리엄 리’의 촬영이 없는 날이었고, 그 대신 [쉐도우앤나이트]의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쉐도우맨’이 나오는 장면을 촬영하는 날이었다.
“안 쉬어도 돼, 서준아?”
운전석에 앉아 있던 최태우가 물음에, 서준은 보고 있던 휴대폰을 잠시 일시정지하고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냈다.
“네. 오전 촬영만 보고 올 거니까 괜찮아요.”
에반 블록을 보러 가는 거니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학교 강의는 어때? 들을 만하고?”
최태우의 말에 서준은 손에 들린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잠시 일시정지를 해놓은 휴대폰 화면 속 교수님이 올려놓은 자료가 보였다.
캐릭터의 심리묘사로 탁월한 한 연극의 대본이었는데, 캐릭터들의 대사를 분석하면서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등장인물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가장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지, 수업하던 중이었다.
지금은 3월 중순.
[쉐도우앤나이트]의 촬영과 한예대 수업을 동시에 해내고 있는 서준이었다.
‘뭐, 며칠 안 됐지만.’
그래도 스케줄이 확실하게 정해진 할리우드라서 그런지 앞으로도 촬영과 수업을 병행하면서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과제 같은 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한국 드라마 촬영보다는 낫지.’
드라마 촬영을 했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역배우 때는 나름 배려라는 걸 했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촬영을 한다고 했다.
‘다진이 누나도 그랬지.’
뭐, 스케줄?
그거 먹는 거야?
농담 같지 않았던 다진이 누나의 말과 함께, 종호 삼촌이나 지석이 형, 도훈이 형과 소영이 누나 등 배우 지인들이 들려준 경험담이 떠올랐다.
반 사전제작으로 시작해도 어느새 쪽대본에 생방 촬영으로 바뀌어있다고 하니, 무시무시한 촬영환경이었다. 뭐, 몇몇 작품만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렇겠지?’
어쨌든.
“네. 괜찮아요. 같이 할 만해요.”
뻗어 나가는 생각을 접어두고, 최태우의 질문에 답하는 서준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운전대를 잡은 최태우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 곧 도착하니까 내릴 준비하자. 서준아.”
“네. 태우 형.”
서준이 무선이어폰을 케이스에 넣고 휴대폰 화면을 끄고 겉옷을 입는 사이, 경비요원들에게 관계자라는 것을 증명한 최태우는 입구를 지나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차에서 내린 서준은, 마치 거대한 창고처럼 생긴 스튜디오들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로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니까 꼭 촬영하러 온 것 같네요.”
“그러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마린사의 스튜디오 구역이었는데, ‘윌리엄 리의 집’ 세트장이 지어진 스튜디오가 있는 곳과 같은 곳이었다. 물론 오늘 에반 블록이 촬영할 세트장이 있는 스튜디오는 다른 곳이지만.
“가 볼까?”
“네!”
최태우를 따라 서준이 걸음을 옮겼다.
* * *
“어서 오세요!”
마중 나온 매튜 조감독이 두 사람을 보고 반갑게 맞았다.
“촬영하는 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다들 준이 온다는 소리에 엄청 좋아했습니다.”
매튜 조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저도요.”
“하하.”
매튜 조감독을 뒤따라 먼저 배우들의 대기실로 향했다.
“세트장은 마무리 작업 중이라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조감독의 말에 서준과 최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
조감독이 떠나고 서준이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문 건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에반!”
“준. 왔어?”
평상복을 입고 있던 에반 블록이 웃으며 서준을 맞이했다. 분장도 의상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지만 벌써 끝난 모습이었다.
‘저게 오늘 촬영할 장면의 의상이겠지.’
일하다가 불려 온 맥, 이라는 설정이니까 말이다.
최태우와도 인사를 나눈 후, 두 배우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촬영이라서 올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아니, 그게 스케줄이 있어서 말이야.”
즐겁게……인가.
첫 촬영 때 오지 않았던 에반 블록을 향한 서준의 놀림 반 진심 반의 구박이 이어졌다.
“전 이렇게 왔는데…….”
“그…… 다른 배우들이랑 인사하러 갈까? 준이 온다고 하니까 다들 좋아하더라고.”
“네!”
알고는 있었지만.
투덜대다가 순식간에 밝아지는 서준의 모습에 에반 블록이 허탈한 듯 웃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봐, 준. 나보다 다른 배우들 보러 온 거지?”
눈을 데굴 굴린 서준이 밉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겸사겸사요.”
“오-. 알았어. 나는 이제 뒷전이라는 거지?”
“에이. 에반 보러 왔다니까요.”
어느새 상황이 역전되어버린 모습에 최태우와 에반 블록의 스태프들이 웃고 말았다.
에반 블록의 대기실을 나온 두 배우는 옆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소피아. 접니다. 준도 있…….”
“오!”
에반 블록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붉은 머리칼을 짧게 자른 여배우가 상기된 얼굴로 그곳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켈리. 서준 리입니다.”
“오! 리! 정말 팬이에요!”
서준이 내민 손을 마주 잡고 열렬히 흔드는 소피아 켈리는 정말 서준의 팬인 듯, [굿 애프터눈]이 대기실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서준을 보며 소피아 켈리가 웃었다.
“리의 바이올린 연주, 촬영 전에 항상 듣고 있어요. 아, 소피아라고 불러줘요. 리.”
“저도 준이라고 불러주세요. 말도 편하게 하시고요.”
소피아 켈리.
[어셈블 시리즈]에서 죽은 ‘퍼스트’의 국장의 뒤를 이어 새롭게 퍼스트를 지휘하게 된 ‘테일러 워런’ 역을 맡은 배우였다.
‘퍼스트’의 국장이라서 그런지, 평상복을 입고 있는 에반 블록과 달리 소피아 켈리는 제대로된 멋진 의상을 차려입고 있었다.
“봐봐. 무기도 있어.”
“오!”
소피아 켈리가 허리춤에서 꺼내는 총에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정말이지. 준과 같은 작품에 출연하게 될 줄이야……!”
“저도 기뻐요. 그래도 같이 연기하는 장면은 없어서 아쉽네요.”
“맞아. 그건 나도 아쉬워.”
그에 에반 블록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소피아. 준. 시즌 2에서도 히어로들이 모일 거잖아요.”
시즌1에 [어셈블]이 있었다면 시즌2에도 새로운 단체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단체를 지휘하는 기관은 ‘퍼스트’일 거고.
에반 블록의 말에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히어로라서 [윌리엄 시리즈] 말고도 [어셈블]과 같은 단체 출연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다.
“오! 그러네요! 그때 잘 부탁드려요. 소피아.”
“나도 잘 부탁하고 싶지만…… 퍼스트의 전대 국장도 죽어버린 상황이니까. 그때까지 테일러가 살아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소피아 켈리의 농담에 서준과 에반 블록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다른 배우들과도 인사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촬영할 시간이 다가왔다.
에반 블록과 소피아 켈리, 그리고 다른 배우들과 함께 촬영장으로 이동하는데, 서준의 발걸음이 유난히 신나 보였다. 그걸 알아챈 에반 블록이 웃으며 말했다.
“신나 보이네, 준?”
그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 가보는 세트장이거든요. 엄청 기대돼요.”
“응? 처음 가 보는 거야? 쉐도우맨 시리즈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데도?”
소피아 켈리가 의아한 듯 묻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쉐도우맨 시리즈에서는 퍼스트가 안 나왔거든요.”
<퍼스트FIRST>
마린 세계관 내에서, 비현실적인 능력으로 테러를 일으키고 외계에서 지구를 침략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움직여 방어하고 지키는 지구 제1 방위 기관이었다.
‘퍼스트’는 슈퍼히어로들이 모인 조직인 ‘어셈블’이 소속된 기관이기도 했다.
“아, 어셈블 시리즈에서만 나왔었나?”
연구원 역의 배우가 영화 내용을 떠올렸다.
“레드본 시리즈에서도 잠깐 나왔어요. 쉐도우맨 시리즈에서는 안 나와서 구경도 못 가고 저도 영화로만 봤다니까요.”
서준이 아쉬운 듯 말했다.
[쉐도우맨 시리즈]도 좋아하지만 다른 히어로 영화들도 좋아했다. [어셈블]도.
그래서 빌런인 ‘진 나트라’로서는 출연하지 못해도 에반이나 리첼의 촬영이 있었으면 퍼스트 내부를 구경하러 가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쉐도우맨 시리즈]에서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지구 제1 방위 기관이라며.
왜 진 나트라가 침략할 때는 안 나온 건데.
“으음. 좀 더 지구를 파괴해야 했을까요?”
작게 투덜거리는 서준의 모습에 다들 빵 터지고 말았다.
* * *
촬영장에 들어서자, 영화 속에서만 봤던 ‘퍼스트’의 내부가 보였다.
오늘 촬영할 장면의 배경은 퍼스트의 중앙연구실이었는데, 조금 먼 미래에서나 사용할 법한 기계들로 둘러싸인 모습이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퍼스트의 제복을 입은 직원들과 새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 그리고 국장 소피아 켈리와 쉐도우맨 에반 블록의 모습까지.
‘저곳에 서 있는 윌리엄이라…….’
멍하니 세트장을 바라보는 서준에 조나단 감독이 물었다.
“무슨 생각해, 준?”
“아, 시즌 2의 슈퍼히어로들이 모인 영화를 만들게 되면 윌리엄도 퍼스트 소속 히어로가 될 수 있잖아요. 그게 생각나서요.”
서준의 설명에 조나단 감독도 오, 감탄하며 세트장을 바라보았다.
빌런이었다가 히어로가 된 캐릭터.
보통이라면 180도 변한 이미지에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참…… 잘 어울리겠네.”
“그렇죠?”
연기 천재 배우와 그 배우의 히어로 연기를 직접 본 감독은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 * *
“레디, 액션!”
퍼스트 본부, 중앙연구실.
다른 연구실보다 몇 배는 더 보안이 철저한 장소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원인은 몇 주 전 우주에서 네바다주로 떨어진 운석.
철저하게 봉인된 운석을 바라보던 퍼스트의 국장, 테일러 워런이 분석 자료를 살펴보았다.
“이상이 없다고?”
“네. 일반적인 운석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박사의 말에 테일러 워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운석이 추락할 때는 이상 반응이 감지됐던 것으로 아는데.”
“아마 대기권과의 충돌로 전부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고, 여러 실험을 해봤는데도 문제는 없었습니다.”
수십 장의 분석 자료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저 평범한 돌덩이.
그러나 많은 일을 겪어본 테일러 워런으로서는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평범한 운석이라면 나사NASA에 넘겨줘야겠지만, 정말로 이대로 넘겨줘도 될 것인가.
“쉐도우맨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말과 동시에 중앙연구실의 문이 열리고, 일하다 불려 온 맥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죠? 테일러?”
“며칠 전 운석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들으셨죠, 맥.”
“그렇습니다만.”
테일러 워런이 손으로 투명한 케이스에 봉인되어 있는 운석을 가리켰다.
그 앞으로 걸어간 맥이 운석을 살펴보았다. 운석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어디 공원에서 주워온 돌인 줄 알았을 정도로 평범하게 생긴 돌덩이였다.
“대기권으로 진입하기 전 아주 짧은 이상 반응이 있었는데, 대기권 통과 이후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지금까지도요.”
“으음. 근데 전 과학 쪽으로는 전혀 몰라서 말이죠. 레드본이나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게 낫지 않습니까?”
태생적으로는 외계인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평범한 지구인으로 살아서 이런 건 하나도 모르는 맥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테일러 워런도 맥에게 기대한 건 아니었다.
“벨 나트라에게 도움을 요청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주는 아무래도 그분이 자세히 알고 계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테일러 워런의 말에 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연락해 보죠.”
“그리고 하나 더. 당신의 파트너는 지금 별 반응이 없나요?”
테일러 워런의 말에 맥이 아래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자신의 그림자, 일명 파트너.
태생만 외계인이지 거의 지구 토박이인 쉐도우맨보다, 외계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파트너였지만, 오늘은 잠잠했다.
“네. 그렇네요. 특별한 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맥의 확인에, 그제서야 찜찜함을 덜어내는 테일러 워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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